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 이용결 루카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7.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

이용결 루카

 

 

* 창세 22장을 읽을 때 문득 ‘단장(斷腸)’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났습니다. 어미 원숭이가 사람들에게 잡혀 가는 제 새끼를 보고 슬퍼하다 죽었는데, 그의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하지요. 부모에게 자식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있을까요? 제가 아브라함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20대 윤 라파엘라 님)

 

시험처럼 우리를 긴장시키는 단어가 있을까요? 학교에서 치른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외에 각종 자격 시험과 승진 시험 등 온갖 시험이 인생 여정과 함께합니다. 사회에서 그만큼 시달리면 됐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자 시작한 신앙생활에도 시험이 있다니, 놀랍고 당황스러운 자매님의 심정 백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시험이 스트레스만 주던가요?

 

창세 1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구원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말씀에 아브라함이 응답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부부가 이집트와 가나안 땅 여기저기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약속을 거듭 갱신하십니다. 이에 그 둘의 신뢰 관계는 꽤 굳건해집니다. 그 표시가 창세 15장과 17장에 나오는 계약입니다. 마침내 사라가 아들 이사악을 낳자 하느님의 약속이 이뤄집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접어들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의 말씀이 쓰나미처럼 몰아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우리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말씀이지만, 맏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신에 대한 최고의 흠숭으로 여긴 고대의 종교 문화에서는 그만큼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통째로 살라 신에게 바치는 번제물은 온전한 봉헌, 신에 대한 온전한 승복을 의미했으니까요. 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의 맥락에서 이 말씀은 당신의 약속과 계약을 스스로 무너트리게 하시는 것 같아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창세 22,1) 이 말씀을 하셨다니, 그분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시험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서 처음으로 ‘시험’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 진행된 아브라함의 삶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된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창세 12,1)을 떠날지,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어찌할지, 아들이 태어나기를 마냥 기다려야 할지,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야 할지 등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때로는 믿음으로 이런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이사악 봉헌은 마지막 종합 시험, 시험인 줄 모르는 진짜 시험입니다.

 

사회에서 시험을 보는 이유는 대상자의 실력과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일을 할 만한 상태인지, 일을 맡을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전체에게 복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지, 그 기초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 상태와 충실성은 어떤지 분명히 알고자 하십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경외하는지’(창세 22,12 참조), 하느님을 가장 우선하고 두려워하며 그분께 순종하는지 확인하려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성취시킬지, 당신을 어떻게 더 계시해 줘야 할지, 아브라함의 어느 면을 더 정화하고 굳건하게 해야 할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아는 하느님의 모습을 넘어섭니다. 벼랑 끝까지 내모는,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요구하는 신앙의 깊은 신비로 들어가는 문턱입니다.

 

긴장하며 치른 시험이 끝날 때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고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다 아시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건과 역사의 방향을 알고 이끌어 가시지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에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그의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험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해당합니다. 둘의 관계를 가늠하는 이 시험이 아브라함에게도 모험이지만 그를 믿으시는 하느님에게도 모험입니다. 그런데도 시험을 내시는 까닭은 그의 믿음을 성숙시키고 구원사를 진전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시험은 계속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들을 시험하십니다(탈출 15,25: 16,4; 20,20; 신명 8,2.16; 13,4 참조). 그들을 해방시키고 인도하시는 주님(야훼)을 그들의 하느님으로 신뢰하며 당신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지 시험하십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시험합니다(탈출 17,2.7; 민수 14,22 참조). 이스라엘 역사 곳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판관 2,22; 3,1.4; 2역대 32,31; 시편 26,2 참조). 특히 욥기에서 이를 깊이 다룹니다(욥 1-2장 참조).

 

흥미롭게도 히브리 말 ‘나사(nasah)’와 그리스말 ‘페이라조(peirazo–)’는 ‘시험, 시도’와 함께 ‘유혹, 검증’이란 뜻을 지닙니다. 어떤 사건을 시험으로 볼지 유혹으로 볼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신앙인을 유혹하시지는 않지만 당신께 충실한지 여부는 시험하신다고 일러 줍니다(1코린 10,13; 히브 2,18; 11,17; 묵시 3,10 참조). 그 시험은 우리를 위협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기 위해 부여되는 게 아니라, 우리 상태를 파악하여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창세 22장에서 이사악이 아브라함을 믿고 따랐듯, 아브라함도 이제까지 살면서 하느님을 참으로 믿을 만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아버지로 체험했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심연으로 나아갔습니다. 말없이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시험은 나를 알고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는 야훼 이레의 믿음은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일상에서 그분의 정의와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자매님이 겪으실 수 있는 신앙의 시험에서 그 은총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이용결 루카

 

 

* 창세기에서 야곱 이야기가 가장 많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밑에서 고생한 끝에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니 ‘참 많이 변했구나, 성숙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찜찜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야곱 이야기에서 오늘의 신자들은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나요?(20대 진 효임 골룸바 님)

 

맞습니다. 야곱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지요. 요셉 이야기는 매끈하긴 하지만, 울퉁불퉁한 삶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 인물은 단연 야곱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대할 때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야곱의 행실이 모범적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런 그를 약속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인생 전체가 자세히 소개되는 첫 번째 사람입니다. 태아 때부터(창세 25,22-23 참조) 죽어(창세 49,33 참조) 묻힐 때까지(창세 50,13 참조)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이만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라는 점에 있겠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선택된 자의 삶과 그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공정한가?

 

우리는 야곱을 잉태한 어머니 레베카가 받은 신탁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 25,23). 야곱과 에사우의 인생이 신탁에 따라 이렇게 판가름되었다면 실제 인생의 흐름도 그럴 것이고, 그렇다면 성경도 사주팔자처럼 운명론을 따르는가 하고 의혹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탁은 두 형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겨레)의 운명을 밝힌 말씀입니다. 그것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포괄하여 선언한 것이지 구체적 삶의 여정을 밝힌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행위 하나하나에 관여하지 않으십니다(창세 22,12 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분명히 이루어지지만 그 때와 방식은 미래에 열려 있습니다. 또 그분의 뜻이 관련자들의 행실에서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것으로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우리네 일생처럼 갈등과 투쟁에 휩싸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났기에 신탁에 따라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옹호하고 그의 행실을 변호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 이야기에서 레베카 외에는 아무도 이 신탁에 구애받지 않는 듯, 모두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기 뜻을 이루려고 애씁니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시종일관 에사우에게만 눈길을 줍니다. 에사우는 가훈과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혼인하며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맏이의 권리가 탄탄하게 보장된 가부장 사회에서 둘째 야곱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속임수라도 써서 장자권을 얻고 축복을 받으려 발버둥 칩니다. 윤리 면에서 에사우와 야곱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 면에서 둘 다 약하고 불완전한 보통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란으로 도망가는 야곱을 찾아가 그를 약속의 후계자로 삼으십니다(창세 28,13-15 참조: 야곱의 인생 147년을 거꾸로 계산하면 이때 나이가 대략 77세로 삶의 후반전이 지난 뒤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그를 택하셨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의 행실이 훌륭하거나 그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그분의 자유로운 은총의 행위입니다(신명 9,5-6 참조). 그분은 사회의 기득권이나 전통과 무관하게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시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이 언제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 선택에는 하느님께서 배반당하고 상처 입으실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늘 따릅니다.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며 천천히 일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 하여 그가 금방 의롭게 되고 그의 행실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삶의 환난과 고통과 갈등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꼭 있어야 합니다. 야곱에게도 20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 하란에 가서 외삼촌 라반에게 거듭 속으면서 심한 차별과 억압을 받습니다. 또 라헬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새 가정을 이룹니다. 그 힘든 삶에서 자신과 동행하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20년 동안 비틀렸던 야곱과 라반의 관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일방적으로 불의하게 당하던 야곱이 당당하게 서고, 정당한 몫을 거두며, 화해의 잔치를 벌인 뒤 헤어지게 이끄십니다. 그 뜻은 야곱의 삶과 생각을 바로잡아 선택된 자로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받은 주님의 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평화의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을 야뽁 강가에서 공격하신 뜻도 그러합니다.

 

그분은 강한 힘으로 야곱을 내리누르지 않고 밤새워 상대하시면서 복을 청하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속이는 예전의 야곱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요구입니다. 형과 이웃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라는, 누구든 그와 씨름한 “어떤 사람”(창세 32,25)처럼 대하라는 명령입니다. 진짜 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변화입니다. 야곱은 더없이 낮은 자세로 형을 대하고 형에게 훔친 복을 돌려줍니다. 진정한 화해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풍요롭습니다. 비틀거리며 바른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삶의 역사와 모습을, 그리스도인은 선택된 이의 고단한 삶과 주님의 자비를 바라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인간관계는 힘의 향방에 따라 쉽게 뒤틀립니다. 라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야곱이 레아에게는 냉혹한 지배자가 되지 않습니까? 삶의 참된 변화, 관계의 변화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기만 한 죄인을 천천히 변화시켜 화해와 일치로 이끄시는 하느님, 지금도 그렇게 일하시는 그분의 손길이 혹시 자매님의 삶에도 함께하고 있지 않나요?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