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소예언서 읽기 (1) - 안소근 실비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28.

 

[소예언서 읽기 (2)] 그날은 분노의 날(스바 1,15)

안소근 실비아 수녀

 

 

1392년 조선 건국, 1592년 임진왜란. 거의 매달 새로운 소예언자를 만나면서 시대적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 벌어진 시대는 연도만 들어도 어떤 시대였는지 압니다. 그래서 저는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 책의 첫 구절에 표시된 기본 사항에서 출발합니다. 스바니야의 경우, 활동 연대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면 무슨 내용을 선포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답부터 말씀드리면, 스바니야가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630년경입니다.

 

“아몬의 아들”(1,1)

 

스바 1,1에 “아몬의 아들, 유다 임금 요시야 때에 스바니야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계 역사서(열왕기)에 따르면 요시야는 다윗 다음으로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덟 살에 임금이 되었기에 어린 시절에는 이렇다 할 업적이 없습니다. 그때에는 요시야의 업적보다 이전 임금들의 잘못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스바니야가 활동한 것도 그 시대입니다. 그래서 굳이 “아몬의 아들” 요시야 때라고 밝혀 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요시야가 임금이 되었을 때의 상황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원전 8세기,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떠오르는 신흥 강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이사 7장 참조). 약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강대국에 도움을 요청한 결과는 빤합니다. 강대국이 거저 도와주지 않지요. 유다는 멸망을 면하지만 아시리아에 종속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하즈 다음에 즉위한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했지만, 므나쎄 통치 때 유다 왕국의 상태가 최악에 이릅니다. 다윗 왕조에서 가장 나쁜 평가를 받는 므나쎄는 55년이나 왕좌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히즈키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 제단들을 세웠다”(2열왕 21,3). 이 시기에는 아시리아에서 들어온 각종 우상과 이교 관습이 만연했습니다. 므나쎄는 영매와 점쟁이들을 두었고, 자기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했으며, 자기가 새겨 만든 아세라 목상을 주님의 집 안에 세우기까지 했습니다(2열왕 21,3-9 참조). 다윗 왕조의 임금이라는 인간이 말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므나쎄 시대에 이미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므나쎄의 아들 아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재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므나쎄만큼 온 나라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 므나쎄가 다 해 놔서 할 일이 별로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아몬에 대해서는 그저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고만 말합니다. 그래서 “아몬의 신하들이 임금을 거슬러 모반하여 궁전 안에서 그를 죽였다”(2열왕 2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임금이 된 이가 요시야입니다(기원전 640년).

 

하느님께 충실한 요시야는 기원전 622년에 신명기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을 단행할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종교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히즈키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교 풍습을 없애고 야훼 신앙에만 충실하려는 노력은 정치적으로 외세(아시리아)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늘 병행합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않고서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고자 한다면 사회 개혁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개혁은 종교와 정치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스바니야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짐작할 수 있지만, 활동을 마친 시기는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바니야서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멸망 후의 희망까지 말하는 점을 보아 어떤 이들은 스바니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석 성경》 입문에서도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바니야가 니네베의 멸망을 앞으로 다가올 일로 예고하고, 열왕기에 기록된 요시야 임금의 개혁 때 스바니야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스바니야는 요시야 임금 초기에만 활동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석 성경》 입문에서는 스바니야가 예루살렘 함락까지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하지만, 저는 의심하는 편에 속합니다. 사실 스바니야서에서 어느 부분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작성되었고, 어느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지 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바니야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만 기원전 630년경으로 잡아 놓고 활동을 마친 시기는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달에 다시 제기할 것입니다.

 

“유다 임금 요시야 때에”(1,1)

 

어쨌든 스바니야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요시야가 개혁을 단행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사람들처럼 “지붕 위에서 하늘의 군대를 경배”하고, 암몬 사람들처럼 “밀콤을 두고 맹세”(1,5)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불의도 만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스바니야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미카 예언서에서,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미카 6,8)고 했지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가는 세상을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할 용기가 있느냐,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이것이 문제지요. 스바니야가 선포한 내용은 지금까지 길게 묘사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이 구체적 상황에 대해 말을 합니다.

 

이전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니야는 하느님을 거스른 죄와 이웃을 거스른 죄를 고발합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고발하고, 교만하게 “주님은 선을 베풀지도 않고 악을 내리지도 않으신다”(1,12)고 생각하면서 폭력과 속임수를 저지르는 이들을 비판하며, 심판이 다가왔다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압은 소돔처럼 되고 암몬 자손들은 고모라처럼”(2,9) 될 것이며, 니네베는 폐허가 되리라고 선포합니다(2,13 참조). 특히 비판을 받는 것은 교만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자기들의 국경에 서서 으스대었다”(2,8)고 하고, 니네베는 “나야, 나밖에 없어!”(2,15) 하며 희희낙락했다고 합니다. 니네베가 멸망한 것이 기원전 612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임박한 몰락을 알지 못하고 자기 세력을 자랑하는 이들!

 

아모스와 나훔이 선포한 ‘주님의 날’이 스바니야서에서도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날에 대한 스바니야의 묘사는 다른 예언자의 묘사보다 무섭습니다. 득달같이 달려오는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1,15)이 될 것이라 예고합니다. 그날은 다른 민족들과 유다를 모두 덮칠 분노의 날입니다. 아모스가 선포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만 구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그날이 어둠의 날이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도 그분을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는 수치를 모르는구나”(3,5)

 

스바니야서가 심판 선고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심판 선고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렸을 때 미술 시간에 하던 ‘데칼코마니’가 떠오릅니다. 종이를 반으로 접고 펼친 뒤 한 쪽에 여러 색깔의 물감을 짜고 다시 접은 다음 종이를 문지릅니다. 종이를 열면 양쪽에 똑같은 모양이 찍혀 있습니다. 이처럼 스바니야의 심판 선고는 당대의 죄악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시대를 알면 스바니야가 무슨 말을 했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스바니야와 같이 용기 있게 말을 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 그 시대의 죄악을 알고 있으면서 많은 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스바니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요시야의 개혁을 위한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소예언서 읽기]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스바 3,1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스바니야 예언자가 무서운 주님의 날을 선포하여 예루살렘이 다 끝장났을까요? 아닙니다. 스바니야서는 불의와 억압을 저지르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고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리라고 알립니다(3,12-13 참조). 이 구절이 스바니야서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남은 자들,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학 때문입니다.

 

이 본문의 새로운 점은 가난의 긍정적 의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배 후에 자주 보게 될 주제이고 특히 시편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부(富)를 하느님 복의 표지로 여겨 온 전통에서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학은 스바니야서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그 신학을 이야기할 때 항상 인용되는 것이 이 단락입니다.

 

이 단락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다음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모스와 호세아 등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 보았듯, 예언서에 덧붙여진 부분은 심판 선고를 더 긴 역사의 전망에서 바라보며 그 의미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3,1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선고된 다음,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3,11). 이것은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곧 심판 후에 예루살렘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부끄러운 죄악을 저지른 이들을 하느님께서 멸하시어 예루살렘에는 이미 그런 이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받을 이들은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3,11)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바로 지금 권세를 누리는 이들, 하느님의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들, 히브리어 단어의 뜻으로 풀면 잘났다고 날뛰고 있는 자들, 루카 복음에서 불행하다고 일컬어지는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루카 6,24-25)을 하느님께서 “치워 버리리라”는 것입니다. 사라져야 할 것은 “교만”(3,11)입니다.

 

스바니야는 위로부터 구원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고 재판관들은 배를 채울 먹이를 찾는 “저녁 이리 떼”여서 가난한 백성을 더 억압하고 착취할 뿐이고, 예언자들은 믿을 수 없는 “허풍쟁이”이며, 사제들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자들이어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3,3-4 참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기득권자들은 이스라엘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계획의 도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희망을 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3,12)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거만한 자들을 치워버리셔도 예루살렘에는 남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3,12)입니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됩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영적 가난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은 글자 그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아니’를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지만, ‘가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달’은 그대로 ‘빈곤’을 뜻합니다. 물론 2,3에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 주님을 찾고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그렇게 해야 주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 순전히 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12-13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것은 부유함이 아닙니다. 힘 있고 부유한 이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때까지 억눌리던 이들이 그 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유함은 그들을 다시 교만하게 하고 이전의 교만한 자들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을 저버리는 불의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역사가 반복될 것입니다. 스바니야는 남은 자들이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가난한 이들을 묘사합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태도는 “주님의 이름에 피신”(3,12)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다’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타나지만, 시편에는 자주 ‘하느님께 피신한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피신은 위협받는 이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남은 자들’에게도 위험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위험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위험 앞에서 우상을 찾아가거나(1,4-5 참조) 재산에 의지하지 않고(1,18 참조) 하느님의 이름에 피신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이나 재산에 쉽게 의지하는 데 비해 실제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단어가 “교만”(3,11)이라면 가난한 이들의 태도는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까닭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이 영적으로 가난하기가 더 쉽고,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마태 19,27 참조).

 

다음 절에서는 그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묘사됩니다. 그 공동체에는 불의와 거짓과 사기가 없습니다(3,13 참조). 이것은 3,1-4에서 단죄를 받은 예루살렘의 모습에 대비됩니다. ‘불의’는 무엇보다 재판에 연관됩니다. 재판관들이 사리사욕을 앞세웠다면(3,3 참조) 그들의 판결이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또 예언자와 사제들이 거짓된 말을 하고 율법을 짓밟는다면(3,4 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거짓과 사기도 재판과 연관 지어 거짓 증언으로 정의를 왜곡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3,13)에게는 그러한 불의와 거짓이 없습니다. 그 가난한 이들이 이전의 지배층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들에게서 미래가 열립니다. 아무 위협 없이 살아가는 예루살렘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3,14)

 

지금까지 심판을 선고해 온 스바니야서가 마지막에 와서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치라고,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초대합니다(3,14 참조). 하느님께서도 예루살렘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고 말합니다(3,17 참조). 하느님과 예루살렘에 대해서 같은 단어들이 사용된 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스바니야서의 마지막 장면은 “축제의 날인 양”(3,18) 기쁘게 끝납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듯 스바니야는 심판을, 주님의 분노의 날을 선고했지요. 그런데도 스바니야서는 미래를 말합니다. 심판을 겪으면서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배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이 깨닫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은 끝이 아니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으며, 멸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화의 과정이었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는 그 과정을 견뎌 내야 합니다.

 

그 멸망과 혼란 가운데에서 스바니야서는 온통 어지럽게 보이는 세상의 어디에서 새로운 시작의 실마리를 찾을지 가리켜 보여 줍니다. 누가 “남은 자들”(3,13)이 되어 새 이스라엘을 시작할 것인가? 그 대답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입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의 질서에 따라 살며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하는 세상이라면 하느님께 충실한 이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배된 후 구약성경이 가난의 긍정적 의미를 보게 된 것은, 이 세상의 부와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바니야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들에게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성취되리라고 말합니다.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이 이런 말씀을 껄끄러워할지라도 새 역사는 불의와 거짓과 사기를 저지르는 그들에게서 시작될 수 없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소예언서 읽기] 에돔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오바 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바드야서는 총 21절로 되어 있어 구약성경에서 가장 짧습니다. 그나마 내용도 에돔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고 죄악에 대해 꾸짖는 것이 전부라서 흔히 가까이하지 않는 예언서입니다. 어쩌다 마음을 잡고 읽어 보려해도 예언서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건너뛸 수는 없지요. 무엇이 들어 있나 한 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오바드야?

 

1절에 “오바드야의 환시”라고 되어 있을 뿐, 이 책에서는 저자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유다교 전승에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오바드야’라는 이름을 찾아, 1열왕 18장에 나오는 주님을 깊이 경외한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드야가 이 책의 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매우 약합니다. 오바드야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오바드야서의 내용이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공격으로 무너질 때에 에돔인들이 저지른 일을 비난하고 있으므로 예언자 오바드야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활동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 문제는 다른 면에서도 제기됩니다. 한 사람이 전체를 다 쓴 것으로 보지 않고, 끝 부분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1절의 머리글이 나온 다음 2-15절에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는 데에 비하여 16-21절에서는 에돔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15절까지만 본래 저자가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좀 더 너그럽게(?) 18절까지를 본래 저자의 것으로 보고 19-21절을 첨가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먼저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있었고, 그 후에 에돔이 모든 민족들의 본보기로 간주되어 본문 내용이 확대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2-9절은 예레 49,7-16과 거의 일치하기에 또 문제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오바드야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해서 오바드야서의 작성 연대를 고대로 더 올려 잡는 이들도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와 오바드야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오바드야 모두 또 다른 어떤 자료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요? 21절짜리 짧은 글이라고 해서 저자 한 명이 단번에 썼으려니 생각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모든 예언서는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되었고, 오바드야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돔?

 

다음 질문은 에돔에 대한 것입니다. 예언서 가운데 다른 여러 민족을 거슬러 심판을 선고하는 책은 여럿 있지요. 그 선고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결국 이스라엘에 대해 선포할 말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바드야서는 에돔에 대한 심판 선고가 거의 온전히 책 전체 내용을 이룹니다. 아시리아나 바빌론 같은 강대국도 아닌 에돔에 대해 왜 그렇게 심판을 선고할까요?

 

구약성경 여러 곳에는 유다와 에돔의 적대 관계를 표현하는 본문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2-9절과 거의 일치하는 예레 49,7-16을 제외하면 오바드야서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시편 137일 것입니다. 유다와 에돔은 형제이면서 계속 갈등을 겪어 온 관계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에돔의 조상 에사우의 관계를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합니다. 야곱과 에사우는 쌍둥이면서 모태에서부터 서로 다투었다고 하지요(창세 25,22 참조). 야곱이 형 에사우에게서 맏아들 권리를 빼앗은 이야기,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마지막 축복까지 가로챈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과 에돔은 계속 다투었습니다. 유다는 남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에돔과 싸웠지만, 특히 에돔의 광산을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다윗은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2사무 8,13-14 참조). 오랜 기간이 흘러서야 에돔은 다시 독립하여 자신의 임금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2열왕 8,20-22 참조). 이 이야기를 다 들려드리는 것은 에돔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돔에게도 원한이 사무쳤을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에돔이 “옛날부터 적개심을 품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이 마지막 벌을 받을 때, 그들을 칼날에 넘겨 버렸다”(에제 35,5)고 말합니다.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12절)

 

이렇게 고대부터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배 후에 에돔을 비난하는 여러 본문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에돔이 바빌론 군대와 연합하여 유다를 황폐화하는 데 한몫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자 에돔은 기뻐하면서 그 틈을 타 헤브론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오바드야는 “너는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12절)고 말합니다. 시편 137에서는 바빌론과 함께 에돔을 저주하며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시편 137,7)라고 부르짖습니다.

 

오바드야가 편파적이라고 느껴집니까? 에돔이 옛 원한을 품고 형제의 멸망을 기뻐하는 것이 나쁘다면, 그런 에돔에게 “네가 한 그대로 너도 당하고 너의 행실이 네 머리 위로 돌아가리라”(15절)고 말하는 잔인함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였다는 것은 어떻습니까?(1열왕 11,15 참조) 형제가 원수가 되면 어떤 원수보다 더 무서워지는 것인가요?

 

오바드야서를 읽으며 느끼는 이러한 불편함에 대해 어떤 이는, 그렇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오바드야에게는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오바드야는 다윗 시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에 살았고, 우리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우리의 관점에서 오해하여 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바드야는 뭔가를 고발합니다. 단지 에돔이 나쁘다는 것뿐 아니라 에돔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뒤에 있는 어떤 악을 고발합니다. 폭력의 순환, 끝없는 보복.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새로운 미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편에서 먼저 보복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에돔에게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바드야서의 한계일 것입니다. 에돔에게 그 악이 그대로 돌아가기를 기원하지 않고 이스라엘 편에서 멈추었다면 더는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았겠지요.

 

“주님의 날”(15절)

 

오바드야가 선포하는 주님의 날은 악의 순환을 끝내는 날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이 복수를 계속하고 있다면, 주님의 날이 올 때 심판은 에돔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스라엘이 에돔에게 다시 복수를 하고 있다면 주님의 날은 이스라엘의 복수를 중단시키는 날이 될 것입니다. 오바드야서를 두고 이스라엘은 항상 옳고 에돔은 항상 그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복수하는 쪽입니다.

 

그 복수가 멈추는 날, “구원받은 이들은 시온 산으로 올라와 에사우 산을 다스리리니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가 되리라”(21절). 이것이 오바드야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렇게 오바드야서의 예언은 에돔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고, 시온에 주님의 나라가 서는 것으로 끝납니다. 에돔에 대한 저주라는 주제가 구약의 다른 부분에도 나온다면, 시온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모여들게 되는 것 역시 여러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대표적 예로 이사 2장; 즈카 14장 등). 이러한 본문의 문맥에서 시온 산에 세워질 주님의 나라는 불의와 폭력, 악에 대한 심판이 있은 다음에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분쟁이 그치지 않는 그 땅을 기억하며 평화를 기원합니다. 오바드야를 탓하기보다 우리 시대의 모습이 어떤지 짚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소예언서 읽기]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요엘 1,4)

안소근 실비아 수녀

 

 

‘요엘’ 하면 ‘메뚜기’,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너무 심하게 들리나요? 하지만 메뚜기 재앙이 어쨌다는 것인지 알면 요엘 예언서를 아는 것입니다. 사실 열두 소예언서를 구별하고, 각각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연재가 끝날 때 쪽지 시험이라도 보면 금방 드러나겠지요! 그러니까 열쇠 하나를 붙잡고 거기부터 풀어 가야 합니다.

 

요엘 예언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열쇠가 메뚜기입니다. 그 메뚜기는 우리에게, 앞서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주님의 날이 꼭 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메뚜기 재앙은 어느 시대에?

 

메뚜기 재앙은 어느 시대에 있었을까요? 요즘은 보통 요엘 예언서가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작성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결론이 그리 쉽게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엘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프투엘의 아들 요엘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1,1)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고, 메뚜기 재앙이라는 사건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 재앙 외의 역사적 사건은 요엘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엘서에서 말하는 메뚜기 재앙이 언젠가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이 언제 있었는지 밝혀 내지 못할 것입니다. 태풍이 그렇듯 메뚜기 재앙은 수시로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요엘서의 작성 연대가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라는 등 아주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요엘서가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두 번째 위치인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자리하는 것도 요엘이 호세아나 아모스 같은 옛 예언자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요엘서 전체가 같은 시대에 작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요엘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둘은 무슨 관계일까요?

 

둘의 연관을 좀 약하게 본다면, 먼저 메뚜기 재앙에 대해 말하는 본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거기에 다른 저자가 종말을 이야기하는 본문을 덧붙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보는 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요엘서의 단일성을 더 강조하여, 우리의 열쇠인 메뚜기 재앙을 기술한 저자가 메뚜기 재앙을 통해 주님의 날의 위력을 표현하고 점차 보편적이며 종말론적인 전망을 열어 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책 전체의 작성 연대를 유배 이후로 잡게 됩니다. 요엘은 이전의 다른 예언자들을 인용하고, 4,1-3은 예루살렘 함락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또 임금이나 궁정의 관료가 아니라 사제의 역할을 주로 언급하고 있어, 왕정이 이미 무너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스인을 언급하는 4,6은 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지만 그것은 예외적 경우입니다. 그래서 책 전체가 기원전 4세기 초쯤에 작성되었으리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참 설명한 이유는,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책 전체를 해석하기 위해서입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1,4)

 

요엘서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3-4장뿐 아니라 1,15과 2,1-2.10-11에도 언급되어 있는 ‘주님의 날’입니다. 1장에서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이전의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엄청난 메뚜기 재앙과 가뭄이지만, 이는 사실 주님의 날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전조의 역할을 합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어 버렸다”(1,4). 풀무치, 메뚜기, 누리, 황충이라고 번역한 단어들의 의미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곤충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메뚜기의 성장 단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반복되는 메뚜기 떼의 공격에 농작물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포도, 무화과, 석류, 야자, 사과, 밀, 보리, 기름 중에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없습니다. 들은 황폐해지고, 땅은 통곡합니다(1,10-12 참조).

 

한편 2장에서는 “수가 많고 힘센 민족”의 침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장에 묘사된 적군의 모습은 메뚜기 떼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라 쿠카라차’라는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여기서 묘사하는 병정들은 쿠카라차, 곧 바퀴벌레이지요. 바퀴벌레를 두고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2장에서 말과 같이 달리며 병거와 같은 소리를 내고 용사처럼 달려오고 전사처럼 성벽에 오르는 것이 메뚜기일 수도 있습니다. 메뚜기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수가 몰려오면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에서는 메뚜기 떼에 대해 “셀 수 없이 많고 힘센 족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요? 메뚜기가 몰려드는데 예언자가 할 말은 무엇일까요? 메뚜기 떼, 가뭄, 외적의 침입과 같은 상황에서 요엘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주님의 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2,1 참조).

 

아모스, 나훔, 스바니야, 오바드야 등 이미 여러 예언자가 주님의 날을 선포했기에 주님의 날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요엘도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2,11) 하고 말합니다. 무서운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날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요엘은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선포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2,12)

 

그렇다면 주님의 날에 대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이 유배를 체험한 후에 중시했던 주제들이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2,12-17 참조).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2,13)는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며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전부는 아닙니다. 회개가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베푸는 분이 아니시라면, 아무리 울며불며 땅을 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로로 자신 있게 하느님의 사랑, 선택, 특별한 관계를 요구할 수 없음을 압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탈출 34,6-7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두 번째 이름입니다.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2,13). 요엘 예언서뿐 아니라 다른 예언서나 시편에서, 특히 유배 시기 후의 본문 여러 곳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멸망을 겪은 시점에서 하느님의 자비만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탈출기에서 첫 번째 돌 판이 깨어진 후, 곧 계약이 파기되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된 후 하느님께서 온전히 당신의 주도권으로 다시 그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며 알려 주신 당신의 그 이름은,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예언자도,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에게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찢으며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다시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해 주십니다(2,18-27 참조).

 

전염병이 퍼지고 쓰나미가 몰려오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이 천벌이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죄인처럼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염병과 쓰나미와 전쟁, 메뚜기 떼는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언젠가 무너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사라져 갈 것과 영원히 남을 것을 구별하게 해 주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아무것도 없이 하느님과 마주할 날이 있음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주님의 날’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메뚜기 떼의 재앙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을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소예언서 읽기]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 줄 그날(요엘 4,1)

안소근 실비아 수녀

 

 

메뚜기 떼 재앙을 보며 주님의 날을 예고한 요엘은, 그러면서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 주시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도 될까요?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예레미야와 달리

 

요엘에게 메뚜기 떼 재앙이 있었다면 예레미야에게는 가뭄이 있었습니다(예레 14-15장 참조). 그 가뭄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예고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단식하고 제물을 바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도 않겠다 하셨고, 예레미야에게마저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당신의 결정을 결코 돌이키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가뭄은 더 큰 재앙, 전쟁과 질병과 다윗 왕조의 몰락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는 데 의지하여,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4)라고 했습니다. 물론 요엘 역시 주님의 날이 무서운 날이라는 것을 알았고, 메뚜기 떼 재앙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날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시크레(Sicre)는, 만일 예레미야와 요엘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예레미야는 구원의 희망을 품은 요엘을 거짓 예언자라고 비판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예레미야는 성전이 무너지지 않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백성을 현혹시킨다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2,12)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각종 예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 말과 대비됩니다.

 

두 예언자는 왜 이리 차이가 날까요? 그 대답은 아마도 예레미야와 요엘이 같은 시대의 예언자가 아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의 예언자입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심판 선고이지요. 그런데 요엘이 유배 후 예언자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특히 요엘이 다른 예언자들의 말을 계속 인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요엘과 예레미야의 관계는 대립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엘의 시대, 예루살렘은 이미 예레미야가 예고한 바와 같이 멸망했고 왕정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구원을 기다릴 때입니다. 요엘보다 앞서 에제키엘, 하까이, 즈카르야 등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이때 요엘은 이제 곧 약속이 성취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보면, 이스라엘 예언의 역사에서 요엘의 메시지는 위협이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었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요엘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 같은 재앙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분명 닥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엘은 심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다음에”(3,1)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합니다.

 

심판이,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무효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스라엘 예언의 역사를 볼 때에 잊지 않아야 할 사실입니다. 그 멸망은 구원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가 선포한 미래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3,1)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다음(2,12-17 참조), 마음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려 주실 복을 이야기하십니다. 곡식, 햇포도주, 햇기름, 무화과, 포도 등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2,18-27 참조). 가을비와 봄비가 내리고, 메뚜기가 갉아먹은 것도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2,18)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보통 ‘질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을 일컬어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할 때에 사용되는 그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땅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것이고 당신께 속해 있어야 하는 땅이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땅을 누가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되찾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을 되찾으시어 “주 너희 하느님이 바로 나요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음을”(2,27) 알게 하십니다.

 

이어서 나오는 “그런 다음에”(3,1)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심판이 모두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 심판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을 묘사하는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는 것입니다. 보통 주님의 영은 판관, 임금, 예언자 등 특정한 이에게 내립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누구에게나 당신의 영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은 결국 특정한 성별과 나이와 신분이 한정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시를 본다는 것(3,1 참조)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말씀을 전달받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되는 것이지요.

 

세 장면을 연결 지을 수 있겠습니다. 먼저 민수 11,29입니다. 70명의 원로가 주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게 되었을 때, 진영에 남아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주님의 영이 내려 그들도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막으려 하는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한다는 것,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긴밀한 소통을 이룬다는 말이겠지요.

 

이렇게 모세가 바라고 요엘이 예언한 것이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여러 언어로 말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 사도는 바로 요엘 3장을 인용하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사도 2,16-21). 성령께서 오신 때가 예언자들의 기다림이 성취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3,5)

 

그날을 예고하는 것이 하늘과 땅의 징조입니다.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3,4) 변하는 우주적 변화는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훗날 묵시문학에서 자주 사용될, 종말이 다가옴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초점은 주님의 날과 그 심판이 아니라, 그 후의 일들입니다. 스바니야서에서 우리는 “남은 자들”(스바 2,7)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지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시온 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엘은 이를 크게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내려 주실 때에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3,5).

 

스바니야서에서는 주님의 날에 대비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고 정의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스바 2,1-3 참조). 이제 요엘서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다른 어떤 신이 아니라 그분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남은 자의 수가 얼마나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이미 많은 이가 심판받을 것이 전제되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라는 표현은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남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전에 다른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시온 산에는 남은 자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내릴 것입니다. 요엘은 그 믿음을 품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세상이 무사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심판이 선고될 이유를 보고,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소예언서 읽기] 집을 지어라(하까 1,8)

안소근 실비아 수녀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1,8). 이 말씀을 들으면,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달려가 성당 수리를 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릅니다.

 

“집을 지어라”라는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은 예언이 선포된 그 시대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하고, 그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1,1)

 

하까이서에는 예언자 하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하까이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1,1)고 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자신에 대해 전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말씀이 내린 날짜는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말씀은 하까이가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부터 그 해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2,10)까지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날짜는 그의 활동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됩니다. 허구로 만들어진 날짜가 아닌 듯하고, 그의 예언 내용이 당시의 상황과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520년이라고 했지요. 유배가 끝난 때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정복된 다른 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펴서, 유배되어 있던 유다인들에게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내용의 소위 ‘키루스 칙령’을 내립니다(에즈 1,1-4 참조).

 

하지만 바빌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모두 귀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고, 유배된 이들 중 일부는 바빌론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팔레스티나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스바차르의 인도 하에 귀향한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고, 예루살렘의 재건을 크게 진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도성은 많이 파괴되었고, 유다의 주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사마리아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윗 집안의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의 지도로 또 한 집단이 귀환합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들은 처음에 열성을 내어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을 복구하려 하지만, 빈곤과 흉작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장의 생활을 헤쳐 나가는 것이 급선무가 되고,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점점 미루는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까이 예언자는 우선 성전을 재건할 것을 주장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한다면 구원의 시기가 도래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집을 짓는 일”(1,14)

 

하까이서의 내용을 보면, 먼저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 내린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하까이를 통하여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성전을 재건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추수를 해도 얼마 거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은 꾸며 놓고 살면서 성전 재건은 미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1-11 참조).

 

제가 학생 때,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끼리 “이거 판잣집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판벽은 맨 흙벽돌이 아니라 그 위에 장식으로 덧씌운 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단칸방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집은 멋지게 꾸며 놓고 사는 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1,15) 즈루빠벨과 예수아, 그리고 백성은 성전을 짓는 일에 착수합니다(1,12-15 참조). 예언서를 읽으면서 백성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1,12)는 구절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2,1), 곧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났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시 성전 재건을 독려하십니다. 당신께서 그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평화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2,1-9 참조).

 

2,10-19을 같은 날짜에 주어진 말씀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둘을 분리하거나 2,15-19을 다른 위치로 옮길 것인지 등에 대하여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본문을 현재 상태에 두고 2,10의 날짜 표시가 2,19까지 적용된다고 보면, 그 단락은 모두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꼭 석 달 후인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2,10) 내린 말씀이 됩니다. 하까이는 사제들에게 질문을 하고, 백성 모두와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 이전에는 모두 부정했지만 성전 재건을 시작함으로써 그 모든 부정을 씻고 축복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그들을 새롭게 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2,23)

 

마지막으로 2,20-23에서는, 같은 날 하까이가 주님에게서 즈루빠벨에게 전할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의 왕조와 권세를 없애시고 즈루빠벨을 받아들여 선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짧은 예언서에 담긴 짧은 구절이지만, 이 단락은 여호야킨의 손자 즈루빠벨을 통해 다윗의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룩할 이상적 임금에 대한 희망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하까이는, 즈루빠벨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그 희망의 실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희망은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보게 될 것처럼, 즈루빠벨은 어느 시점에서 사라지고 이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처음에는 예수아 대사제에게 집중되고, 그다음에는 장차 올 메시아에게로 옮겨 갑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살아있으며, 그 약속은 처음에 사람들이 이해했던 방식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재건의 의미

 

같은 시기의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를 비교하면, 두 예언자 모두 성전 재건과 메시아 희망을 포함한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귀향 후 예언자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두 가지 주제 가운데 하까이는 성전 재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것이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부터 주님의 성전에 기초를 놓은 날부터 생각해 보아라. …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리라”(2,18-19). 그는 제3이사야와 같이 정의의 실천을 중시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이는 대대로 헛된 경신례를 비판해 온 예언자들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성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에 대해 태도를 취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1,2)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보다 앞세운다는 것, 경제 문제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한 가지”(루카 10,42 참조)는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실을 잊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하까이 예언서를 잘못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성전 건물을 짓는 데 착수하면 복과 풍년이 따르며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기복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포기하고 하느님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건물을 고쳐 지으라는 뜻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우라는 뜻까지 포함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집을 지어라”(1,8) 하고 이르신 말씀도 만사 제쳐놓고 성전 건물을 짓는 데 매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의 가난을 통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소예언서 읽기] 나리, 저것들은 무엇입니까?(즈카 1,9)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열두 소예언자 가운데 이제 즈카르야, 요나, 말라키가 남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예언 역사의 끝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예언이 점점 더 ‘끝’을 향해 갑니다. 예언서로서는 워낙 특이한 책인 요나서를 별도로 하면,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에서는 종말에 대한 관심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끝’, 다른 말로 하면 ‘완성’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베레크야의 아들인 즈카르야 예언자”(1,1)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이 아주 명확해서, 《성경》에도 ‘이사야서 제1부’, ‘이사야서 제2부’ 식으로 제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예언서는 후대에 편집 과정과 손질을 계속 거쳤기 때문에 첫 저자가 쓴 부분과 편집된 부분이 섞여 있습니다. 이사야서 다음으로 그 구분이 뚜렷한 것이 즈카르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8장과 9-14장이 여러 가지 점에서 현저히 구분되므로 처음부터 두 명의 저자가 있던 것으로 봅니다.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든다면, 먼저 내용상으로 볼 때 1-8장에서는 성전 재건이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고 즈루빠벨과 예수아의 역할이 강조되어 하까이와 동시대에 살면서 활동한 예언자 즈카르야와 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에즈 5,1; 6,14 참조). 이와 달리 9-14장에서는 그러한 주제가 부각되지 않고 인간의 노력보다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과 계획이 강조되고 종말론적 관심이 더욱 커집니다. 문체상으로 1-8장은 신탁이 주류를 이루고 예언자 자신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는데, 그에 비해 9-14장에서는 묵시문학적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러한 관찰을 종합하여, 일반적으로 1-8장은 즈카르야 예언자의 것으로 보고(제1즈카르야) 9-14장은 더 늦은 시기의 것으로 봅니다(제2즈카르야). 전문적으로는 9-11장과 12-14장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제2즈카르야’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그 여섯 장을 함께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을 것은 제1즈카르야서입니다.

 

제1즈카르야서에도 하까이서와 비슷하게 날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1,1.7; 7,1 참조). 이에 따르면 즈카르야는 기원전 520년,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기원전 518년 정도까지, 즉 성전이 재건되기 직전 시기에 예언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용을 보면 하까이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과 종말론을 말하지만, 하까이에 비할 때 즈카르야는 임박한 종말을 알리는 데 더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밤에 보니”(1,8)

 

즈카르야서에서 보이는 특징은 1-6장의 환시입니다. 이전의 예언서, 예를 들어 아모스서와 예레미야서 등에도 환시가 나타나지만, 즈카르야서의 환시는 좀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환시를 보는 예언자가 직접 하느님과 대화하거나 자신이 보는 것을 바로 이해했지만, 즈카르야서에서는 예언자가 자신이 본 환시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나리, 저것들은 무엇입니까?”(1,9)라고 질문하고, 천사가 매번 그 환시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후에 이러한 양식이 묵시문학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환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 제이년 열한째 달”, 곧 기원전 519년 2월에 즈카르야가 여러 환시를 봅니다. 현재의 본문에는 여덟 환시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넷째 환시는 문체상으로 다른 환시와 많이 다릅니다. 다섯째 환시에서는 즈루빠벨과 예수아가 함께 나오는 반면, 넷째 환시에서는 즈루빠벨이 언급되지 않고 예수아만 나옵니다. 본래 즈카르야서에 일곱 환시가 들어 있었는데 즈루빠벨이 사라진 뒤 현재의 네 번째 환시가 삽입되어 예수아 대사제에게 희망이 집중되었다고 봅니다. 환시가 일곱 개라면 그 중심에는 즈루빠벨과 예수아, 두 인물이 있게 되는데 여덟 개가 되면 예수아만 남게 됩니다. 여덟 개의 환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도 천사의 설명을 들어야겠지요. 옆에 꼭 성경 본문을 놓고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환시, 말 탄 기사(1,7-17): 말 탄 기사들은 세상을 돌아보고, 온 세상이 평온하다고 주님께 보고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세상이 평온하다는 것은 새 시대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초조함에 대해 주님께서 “다정하고도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다”(1,13)는 것은, 하느님께서 곧 개입하시어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리라는 응답을 뜻합니다.

 

두 번째 환시, 뿔과 대장장이(2,1-4): 예언자는 먼저 뿔 네 개를 보고, 이어서 대장장이 네 명을 봅니다. 그 뿔들은 이스라엘을 흩어 놓은 이방 민족들이고 대장장이들은 그 민족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오는 것으로,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세 번째 환시, 측량줄(2,5-17): 환시에서는 한 사람이 측량줄을 들고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돌아온 이들과 짐승의 수가 너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이 없이 넓게 자리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시대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환시, 예수아 대사제(3,1-10): 예언자는 천상의 법정에서 사탄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예수아 대사제를 고발하려고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천사가 예수아에게 예복을 입히고 깨끗한 터번을 씌워 줍니다. 이 환시는 유배 이후의 공동체에서 사제직이 중심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실상 유배에서 돌아온 후 유다 공동체에는 임금이 없었고, 사제들이 정치적 ·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환시,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4,1-14): 이 환시에서 두 그루의 올리브 나무는 즈루빠벨과 예수아를 가리킵니다. 유배 이후의 공동체에서 초기에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후 어떻게 해서 즈루빠벨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여섯 번째 환시, 두루마리(5,1-4):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에는 악인들에 대한 저주가 적혀 있어 이 세상에서 악이 제거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일곱 번째 환시, 뒤주(5,5-11): 뒤주 안에 앉아 있는 여자는 이 세상의 악을 나타내며, 환시는 그 악이 신아르, 즉 바빌론 땅으로 옮겨질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정화되고 악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여덟 번째 환시, 병거(6,1-8): 병거 넉 대가 사방으로 갑니다. 그 가운데 북쪽으로 가는 병거가 주님의 영을 북쪽 땅에 자리하게 한다는 것은, 바빌론에 유배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 재건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어라!”(8,13)

 

즈카르야는 첫 번째 환시를 보면서 “만군의 주님, 당신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가엾이 여기지 않으시고 언제까지 내버려 두시렵니까?”(1,12) 하고 묻습니다. 악에 대한 심판도, 하느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시는 하느님께서 곧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리라는 것을 말하고, 유다 총독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가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그의 예언은 한마디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1-6장의 환시가 예루살렘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것이라면 8장에서는 그 약속이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즈카르야가 환시를 본 짧은 기간 사이에 천지가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전 재건이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심판과 구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시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를 보여 주는 예언자의 환시는 아직 보이지 않는 희망을 보게 해 줍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잡고 걸어가게 하는 것, 그것이 즈카르야서와 이후의 묵시문학이 하는 역할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소예언서 읽기]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제2즈카르야서는 온통 희미한데, 그 속에서 메시아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주요 대목에서 인용됩니다.

 

“신탁”(9,1; 12,1)

 

지난달에 제1즈카르야서(1-8장)와 제2즈카르야서(9-14장)가 구분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9-14장을 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9장을 시작하는 말은 그저 “신탁”이라는 단언입니다. 그 “신탁”이라는 제목이 12,1에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서 다음에 나오는 말라키서를 시작하는 첫마디가 또 “신탁”입니다. 그래서 근래의 연구에서는, 열두 소예언서가 하나의 모음집으로 편집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신탁”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9-11장과 12-14장, 그리고 역시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말라키서가 마지막에 덧붙여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말라키서로 예언서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저술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9,1-8에서 티로, 시돈, 필리스티아의 파괴를 말하는 점과 특히 9,13에 “그리스”가 언급되는 점 등을 들어 기원전 332-300년경에 작성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주변의 여러 민족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9,9)

 

제2즈카르야서에서 특별한 부분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그렇다고 메시아의 모습이 체계 있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메시아의 표상이 단편적으로 제시됩니다.

 

그중 첫 본문이 9,9-10입니다. 잘 아시는 본문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9,9). 여기까지 보면 오시는 분은 임금으로, 군왕 메시아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문은 겸손한 메시아,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선포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9,9).

 

그런데 이 구절에는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승리하시는”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구원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칠십인역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능동태로 번역된 “구원하는”이고,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들도 대개 칠십인역을 따라 본문을 수정하여 “구원하는, 승리하는”입니다.

 

근래에 이 구절을 다시 히브리어 본문의 “구원된”으로 둘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아니지만, 그들에 따르면 메시아는 스스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일으켜지는’ 사건이었다는 면입니다(물론 능동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하는 본문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가 되기 전에 ‘구원받음’의 원형이 되어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가 구원의 실현을 믿고 기다리게 합니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9,1-8에서 묘사하는 티로, 시돈, 필리스티아의 멸망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가리킨다면, 9,9-10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모습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J. 블렌킨솝). 정복자 임금은 말을 타고 옵니다. 쉽게 표현하면, 임금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은 탱크를 타고 오는 것이고,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은 평범한 교통수단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에서 병거와 군마를 없애시고 여러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실 것입니다(9,10 참조). 그분의 평화로운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도, 지금 예루살렘에 오시는 분은 무장을 하고 오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고 구원되신 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할 분이셨습니다.

 

“이 땅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11,16)

 

다른 두 본문은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11,4-17에서 목자의 모습이 제시됩니다. 이 본문은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를 담고 있으며 본문 자체의 내용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도대체 여기 나오는 목자가 누구인지 오락가락합니다. 처음에 예언자가 주님의 명으로 목자가 되지만, 나중에 주님이 목자의 위치에 서기도 하는 등 인물을 규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하느님께서 목자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에제 34장과 연결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에제 34장에서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당신께서 보내 주실 목자를 말씀하시고, 때로는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참조)고 다짐하십니다.

 

어쨌든 11장의 본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언자 또는 하느님은 양들을 돌보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양 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시며, 양들이 서로 잡아먹게 내버려 두십니다. ‘호의’와 ‘일치’라는 이름이 붙은 지팡이들은 부러지고,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맺으신 계약도 깨지며,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양 떼를 저버리는 목자들에게는 불행이 선언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제 내가 이 땅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11,16)고 약속하십니다.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12,10)

 

마지막으로 12,7-13,9에서 칼에 찔린 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앞의 두 본문보다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12,10을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이라고 말씀하시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찔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를 위하여 곡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찔려 죽은 이’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이 내려지며(12,10 참조), 그들은 정화됩니다.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경우(이사 52,13-53,12 참조)와 비슷하게, 그의 고통과 죽음이 결국 온 민족의 구원을 가져옵니다. 이 세 번째 본문은 마태 26,31과 요한 19,37 등 예수님의 수난사화에서 인용됩니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 26,31; 참조 즈카 13,7).

 

이와 같이 제2즈카르야가 제시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모호하며 본문 사이에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 보여 주는 메시아 상像의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거부와 박해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평화로운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이는 분명 신약성경의 메시아에 매우 근접해 있습니다.

 

이전의 목자들은 양 떼를 끝까지 돌보지 못했고 양 떼는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이룩할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서 전체는 새 시대의 희망을 말하는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이미 황폐해진 다음에야 구원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찔려 죽은 이’를 보고 애통해하며 은총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새 목자를 세우실 때에, 그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가는 양 떼가 되어야 합니다. 제2즈카르야는 양들이 그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야말로 구원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소예언서 읽기]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요나 1,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요나서를 이해하고 싶다면 요나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잠시 잊어야 합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예언서가 쓰일 당시 실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요나서를 이해할 때 요나를 언급한 신약 성경의 구절에서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요나서의 줄거리만 아는 채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1,1)

 

요나서는 저자를 묻기 전에 요나서의 역사성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서에서는 요나를 그 책의 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은 특정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인 반면, 요나서는 다른 사람이 요나에 대해 말하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요나라는 예언자를 다룬 책일까요?

 

요나서에서는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1,1)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2열왕 14,25에 따르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예로보암 2세 때에 활동한 예언자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 요나는 갓 헤페르 출신으로 이스라엘이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나옵니다. 아마도 요나서의 저자는 열왕기에 언급된 그 예언자의 이름을 빌려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요나서가 기원전 8세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나서는 허구적 이야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사용된 언어를 보면, 요나서에 쓰인 히브리어는 문법이나 어휘가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책인 코헬렛이나 다니엘서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하고 아람어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니네베에 대해 구체적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모습만 서술하고 있어서 동시대의 역사 기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아시리아라면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엄청난 세력이었는데, 요나서의 니네베에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로보암 2세 시대에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도 아니었고, 니네베 주민 전체가 회개했다는 것은 어떤 역사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연성도 매우 적습니다.

 

또한 신학적인 면에서 회개라는 주제는 유배 이후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고, 이방인들의 구원이라는 주제 역시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나가 정말 고래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고도 살아 올 수 있었을까요?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다른 문학 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 가르침을 주기 위한 허구적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교훈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요나서는 지혜문학과 공통점을 가집니다.

 

요나서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적 기록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요나가 어떻게 사흘 동안 살 수 있었을까를 밝히기 위하여 고래를 해부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여러 가지 매우 우연적 요소들과 더불어 요나가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지냈다는 이야기는, 저자가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독자에게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관찰은 이 책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이에 덧붙여 집회서 저자가 요나서를 다른 소예언서들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집회 49,10 참조), 이 책의 작성 연대는 대략 기원전 5-4세기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요나 – 니네베

 

이제부터 요나서에 대한 해석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호에 한 가지, 다음 호에 두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요나서의 줄거리를 잠시 돌아보면, 요나는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거부하고 타르시스로 가려고 하지만, 배가 풍랑을 만나고 선원들은 요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알아 그를 바다에 던집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사흘 후 뭍에 뱉어 놓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진다고 선포합니다. 온 니네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자, 하느님은 마음을 돌이켜 내리겠다고 하셨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입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하느님은 더운 낮에 그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게 하셨다가 다시 말라 버리게 하십니다. 그런 아주까리 때문에 화를 내는 그에게 하느님은, 그가 아주까리를 심고 기르지도 않았는데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그렇게 화를 낸다면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첫 번째 해석은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적으로 해 온 것으로, 요나가 니네베에 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였고,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그런 니네베가 회개하여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고, 차라리 그 죄 때문에 멸망해 버리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요나를 통해서 니네베를 구하셨습니다. 요나의 뜻을 거슬러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해석에서는 주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요나서의 주제로 강조합니다. 특히 4장에서 시들어 버린 아주까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당신이 니네베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 주민들과 동물들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4장을 자세히 보면 하느님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그곳을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도성 안에 있는 무수한 생명 곧 짐승과 어린이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나서가 작성된 시대의 배경을 고려할 때 특히 의미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언어적 또는 신학적 이유를 근거로 요나서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아마도 기원전 5-4세기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요나서의 내용은 에즈라-느헤미야의 노선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갇힌 동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요나서의 저자는, 당시 이스라엘이 지녔던 폐쇄적 태도를 넌지시 비판합니다. 니네베에 가지 않으려 하고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요나라는 인물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 때문에 다른 민족들의 구원에는 눈길을 돌릴 수 없었던 에즈라 시대의 유다 공동체. 유다 왕국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이고, 이제는 오직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워야 했던 유다인들은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1,9)라고 말하던 요나처럼 자신들의 믿음을 강하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몰두한 결과 그들은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도 그런 모습이 없지 않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여 살고 있던 이들에게, 느헤미야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내보내게 합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지나친 일이지요.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은 그만큼 철저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서의 저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주인공 요나를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통하여 동시대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마구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등을 토닥이며, 하느님께서는 너처럼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그의 귀에 속삭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삶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소예언서 읽기] 회개할 사람은 누구인가?

안소근 실비아 수녀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요나서, 참 재미있는 책입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여러 갈래로 해석됩니다. 도서관에 가 보면 예언서들 가운데 요나서에 대한 책이 다양하게 있다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학생들이 요나서 줄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수업하기에 편하지만,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정답으로 제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나서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지난달에는 ‘이방인들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의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에 맞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취되지 않은 예언의 문제

 

요나서에 대해, 주로 유다교 주석가들은 요나서가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라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요나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으며(1,1-2 참조),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니네베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점 등을 제시합니다(4,2 참조).

 

이제까지, 예언자를 통해 선포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시면서 “나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예레 1,12)고 말씀하셨고, 제2 이사야서에서도 하느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명으로 요나는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거짓 예언자처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니네베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4,2 참조).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요나서가 제시하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이미 선포된 예언자의 말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니네베의 이야기에서, 그 설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당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언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원칙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요나가 아닌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은 그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니네베가 멸망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요나는 성공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러나 요나는 그 ‘성공’을, 니네베의 구원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회개

 

세 번째 해석은, 요나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완고한 이들에게 니네베인들의 회개를 본보기로 제시하십니다(루카 11,32 참조). 그러나 요나서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회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의 회개입니다. 나훔 예언자가 “피의 성읍”(나훔 3,1)이라고 불렀던 니네베의 주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요나에게 요구되는 회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 요나에게 마음을 돌이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요나서에서 니네베 사람들은 잠시 등장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초점은 요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독자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니네베 사람들이라기보다 요나입니다.

 

요나는, 이방인들 앞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하지만(1,9 참조), 정작 삶에서는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멀리 달아납니다. 동쪽에 있는 니네베로 가라고 하시니 서쪽 끝에 있는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배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하느님에게서 되도록 멀리 피해 숨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은 자기 신들에게 빌지만, 요나는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잡니다.

 

요나가 하느님을 몰랐을까요?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요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 정확한 신학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니네베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거두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니네베로 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장에서는 그가 하느님의 명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딱히 나오지 않지만, 4장에서는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4,2)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명에 순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멀리 달아납니다. 배를 타고 그분을 피해 멀리 도망갈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머리로는 정확히 알고 있는 그 하느님을 요나는 하느님으로 모시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인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억압을 받아 온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요나서는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요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대답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그 질문은 우리 각자를 향합니다.

 

아주까리

 

여기서 저는 요나서의 작은 부분 하나에 좀 더 초점을 맞춰 보고 싶습니다. 요나가 회개하는 과정입니다. 그 열쇠는 아주까리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주까리를 자라게 하시고, 다시 그 아주까리가 말라 죽게 하시지요.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을 아까워하지도, 그들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 것을 보시고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4,10)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주까리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게 니네베 사람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지요.

 

아주까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요나는 교훈을 얻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보면서, 니네베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배웁니다. 지혜서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께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지혜 12,16.19).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은 강력한 지배나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까리 하나까지 모든 것을 아끼시는 그 자애로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것이기에 무엇 하나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런 하느님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동쪽에 있는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을 피하여”(1,3) 배를 타고 서쪽의 타르시스로 가는 청개구리 요나의 태도는 남의 모습 같지가 않아서 언제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하느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요나서에 대한 여러 갈래 해석은 모두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로 귀결되는데, 인간 편에서 하느님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마 하느님을 나의 틀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소예언서 읽기]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인가?

안소근 실비아 수녀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말라 3,1).

 

말라키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실제로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는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사자

 

‘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말라 3,1에서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라고 할 때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흔히 1,1에서 “말라키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내리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도 말라키는 어떤 한 예언자의 이름이 아니라 가명으로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라키서에서는 말라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타난 사회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다는 언급 등을 근거로, 이 책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전 그 사이의 시기, 아마도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작성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보았던 즈카르야서의 끝 부분과 마찬가지로, 예언서들을 마무리하려 했던 어떤 편집자에 의해 엮였을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이 작은 책에서는 경신례와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 등 불안정했던 시대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구조입니다. 머리글(1,1)과 후기(3,22-24)를 제외하고 보면 말라키서에는 여섯 개의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1,2; 3,21).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여섯 가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각각의 논쟁은 거의 일정한 형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먼저 예언자 또는 하느님께서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면 듣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런 다음 예언자가 처음의 진술을 확인하며 그에 따른 귀결을 이끌어 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우리를 사랑하기는 뭘 사랑하셨느냐고 따집니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사랑을 입증해 보이시는 것이지요. 이 논쟁들을 보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할 말이 참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책 전체의 내용이 일관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데다 낱낱의 논쟁들이다 보니, 여기에서 논쟁 여섯 개를 하나씩 다루다 보면 읽기가 지루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말라키서 저자와 달리 나름대로 엮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논쟁(3,13-21)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3,13)라고 대꾸합니다. 나는 안 그랬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느님 편에서 증거를 대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3,14) 이것은 악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3,16)이 하는 말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잘 지내고 있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고 있으니(3,15 참조), 착하게 살고 하느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질문이 네 번째 논쟁(2,17-3,5)에서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오히려 악한 일을 하는 자를 좋게 보시고 그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2,17 참조). 그들이 잘 지내고 있으니, 공정하신 하느님이란 분은 계시지도 않는 듯합니다.

 

악인들이 잘되어 가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선과 악에 대해 갚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아니 어쩌면, 누가 선을 행하고 누가 악을 저지르는지 보지도 않고 계시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눈속임도 해 봅니다. 다섯 번째 논쟁(3,6-12)에서는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이 하느님을 약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두 명도 아닌 “온 백성이”(3,9)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지요.

 

백성이 예물을 잘 바치지 않았다면 사제들은 잘하고 있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두 번째 논쟁(1,6-2,9)에서는 사제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눈먼 짐승이나 절름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 “주님의 제사상이야 아무러면 어떠냐?”(1,7) 하고 말합니다. 훔친 짐승을 바치기까지 합니다(1,13). 아버지이시며 주인이신(1,6)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예언자들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경신례를 거부했던 것과 달리 말라키는 경신례 자체에 대하여 정성이 부족한 것을 비판하는데, 언제나 그 핵심은 주님의 이름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1,10 참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말라키서에는 사제들에 대한 고발이 상당히 깁니다. 그들은 경신례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율법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제들이 진리의 법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그들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합니다(2,6-9). 이스라엘은 마치 하느님께서 보지도 듣지도 않으시고 자기들이 속임수를 쓰는 그대로 넘어가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인들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이제 하느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다 보고 계시며 반드시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답의 핵심은 종말론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예언자들에게는 종말론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지요. 말라키서는 그 마지막 단계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이들이나 아무 차이 없이 그냥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3,18) 날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이름은 “비망록”(3,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망록은 다니엘서나 묵시록에서 말하는 생명의 책과 같은 것으로, 거기에 기록된 사람들의 행실에 따라 장차 심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보내실 사자(3,1)는 먼저 레위의 자손들 곧 사제들을 정화하실 것이고, 그들이 올바로 사제직을 행함으로써 유다와 예루살렘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경신례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화덕처럼 붙붙는”(3,19) 심판의 때에 악인들은 그날을 견디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술, 간음, 거짓 맹세, 가난한 이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하느님께서 분명 아껴 주실 것이며(3,17 참조), 그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3,20 참조).

 

말라키서에 나오는 여러 논쟁에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종말론적 전망입니다. 유배에서 귀향한 후에 활동한 다른 예언자들에 뒤이어 말라키는 “그날”에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며, 그러한 시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도록 촉구합니다. 특히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3,15)한다는 사실은 현세적인 인과응보의 원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고, 지혜문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였는데(시편 37; 73 등), 이에 대하여 말라키서가 제시하는 응답은 종말론적 심판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는 의인들에게 말라키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거짓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가 행하는 작은 일들의 무게를 잘 아십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소예언서 읽기]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말라 3,22)

안소근 실비아 수녀

 

 

기차역에서 어떤 분이 전화하는 말 한마디를 들었습니다. “연막탄을 쏴야 하는데 조명탄을 쐈어. 조명탄이 온통 다 터진 걸 생각해 봐.” 그 말을 들으며 혼자 웃었습니다. 전투에서 연막탄을 쏘아 어둡게 덮으려고 했는데 조명탄이 터져 모든 걸 훤히 드러내고 말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라 3,22-24은 우리에게 예언서 전체, 또는 구약성경 전체를 뒤에서 비추어 주는 조명탄과 같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구약성경은, 오실 분을 기다리는 책이 됩니다. 말라 3,22-24은 한마디씩 새겨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좀 딱딱하겠지만 잘 곱씹어 보기 바랍니다.

 

“나의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3,22 참조)

 

3장 22절의 첫 구절은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세 장짜리 말라키서를 끝맺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서 전체를 끝맺는 말씀으로, 예언서와 율법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히브리 성경의 차례나 책을 구분하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다릅니다. 책 전체가 토라, 예언서, 성문서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신명 34장에서 모세의 죽음으로 토라가 끝난 다음, 바로 이어지는 여호수아기부터 예언서가 시작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역사서라는 구분이 없고 그리스도교가 역사서로 분류하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전기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예언서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뒤를 이어 통수권을 받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즉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맹세하신 땅을 정복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시며,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여호 1,7)고 이르십니다. 그 율법을 밤낮으로 되뇌어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여호 1,8 참조). 이 구절이 토라와 예언서를 연결해 줍니다.

 

여호수아기가 왜 예언서로 분류될까요? 히브리 성경의 분류법에 따르면, 모세의 전통을 이어 가는 이들이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모세가 못다 이룬 일, 곧 영토를 정복하여 분배하는 일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일에 성공하기 위해(여호 1,8 참조) 필요한 것은 율법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역사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깨우치는 것, 이것이 여호수아 이후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권고로 시작된 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과 후기 예언서 4권(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을 모두 끝마치면서, 말라 3,22에서 다시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언서의 시작과 끝에서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예언서 전체가 할 일은 다름 아닌 그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 모세에게 내린”(3,22)

 

그런데 그 “모세의 율법”은 모세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공포한 법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3,22) 모세에게 내리신 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흔히 모세의 율법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각별히 여기서 “규정과 법규”라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서(신명 5,1; 11,32; 12,1; 26,16) 눈길을 끕니다. 이 표현 때문에 말라키서에서 말하는 율법이 특히 신명기 법전의 내용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성경의 큰 틀을 짜는 데 신명기계가 미친 영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3,23)

 

이 구절도 특별합니다. 지난 호의 내용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라키서에서 이 구절이 종말론의 큰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예언서들이 처음부터 종말론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전기 예언서의 경우 그러한 차원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언서들이 묶여 하나로 완성되던 시기에 말라키서의 저자는, 특히 이 끝 부분을 쓴 사람은,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키는 예언자들의 말이 주님께서 오실 날과 관련하여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이 끝까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오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본 것입니다.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그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리라고 일컬어집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루카 9,30)는 각각 율법과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탁월한 의미에서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한 다음,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1열왕 19,8-18 참조).

 

호렙 산은 모세가 하느님을 처음 만났던 시나이 산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약을 저버리고 있었을 때 하느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올랐던 엘리야는(1열왕 19,14 참조) 그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모세의 율법을 떠나 하느님께 등을 돌렸던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지요(2열왕 2,11 참조).

 

엘리야는 죽지 않았기에,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말라키서는 그가 와서 주님의 날이 파멸의 날이 되지 않도록 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의 날은 멸망의 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마태 17,12)

 

그리스도교의 성경이 히브리 성경과 책의 배열 순서를 달리하면서 예언서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예언서들이 모세의 전통을 이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교 성경에서 예언서들은 신약을 준비하는 책이 됩니다.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책인 예언서들이, 신약성경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바뀌니 말라 3,22-24은 구약성경 전체를 끝맺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문턱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마태 17,10-13; 마르 9,11-12; 루카 1,17), 이것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면 예수님에 앞서 엘리야가 왔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 물었고, 예수님께서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말라 3,23에 언급된 엘리야라고 봄으로써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연결됩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이 길을 준비하며 오실 분이라고 했던, 구약에서 기다리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던 것은 구약성경뿐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의 책들이 비로소 생겨나던 시기에 복음서들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고 예고했던 구약성경의 권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확증해줍니다.

 

이제 예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가 되어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말라 3장의 이 세 구절이 구약성경의 마지막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예언서들은 지금도 기다림을 준비하는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대림 시기를 맞이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예언서들은 우리에게 그날을 맞을 수 있게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일깨웁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호세 6,3).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