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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탈출기 말씀 피정(1) -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6. 30.

탈출기 말씀 피정 (1)

(1) 탈출기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 말씀인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을 하나 꼽으라면 탈출기를 들 수 있습니다. 탈출기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 땅에서 힘겹게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건져 내신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 곧 ‘임마누엘 하느님’임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탈출기는 탈출 사건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 위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사실도 생생히 전해 줍니다. ‘탈출’과 ‘계약’, 이는 구약성경의 전체를 흐르는 큰 주제입니다. 탈출기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먼저 탈출기에 대한 기본 내용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이름들의 책

 

이스라엘 사람들은 탈출기를 ‘워엘렛 셔못(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 줄여서 ‘셔못(이름들)’, 또는 ‘세페르 셔못(이름들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책의 첫 단어나 문장을 제목으로 삼곤 했는데, 탈출기 히브리어 본문이 ‘워엘렛 셔못’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탈출기란 이름이 붙었을까요?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들이 이 책에 ‘엑소도스’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이 말이 바로 ‘탈출’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탈출’이란 말에 이집트를 뜻하는 ‘애굽’이란 말을 붙여 ‘출애굽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엑소도스’를 글자 그대로 번역해 ‘탈출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잠깐!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고속도로 곳곳마다 ‘엑소도스(ΕΞΟΔΟΣ)’라는 표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고속도로 출구를 의미합니다.

 

탈출기의 구조

 

탈출기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1,1-16,36)

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해방 계획을 드러내심(1,1-6,27)

② 파라오의 방해로 인해 그 해방이 즉시 오지 않게 됨(6,28-11,10)

   - 외적 방해: 파라오의 마음이 딱딱해짐

③ 약속의 실행: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당신 백성을 끌어내심(12,1-16,36)

 

2) 시나이 산에서의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심(17,1-24,11)

 

3) 백성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24,12-40,38)

① 성소 건립을 위한 지침(24,12-31,18)

② 이스라엘의 죄(32-34장)

   - 내적 방해: 이스라엘의 마음이 딱딱해짐

③ 야훼의 성소 건립(35,1-40,38)

 

이 구조는 로마 성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바르비에로 신부가 제시한 것입니다(아직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이 구조에서 볼 수 있듯 탈출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뒤,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며 당신만이 참으로 위대한 하느님임을 드러내시고, 또 만남의 장막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파라오가 하느님을 방해하기도 하고, 백성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방해 요소를 없애시고 모세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탈출기의 중심 주제

 

탈출기라는 제목 때문에 이집트 탈출 사건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탈출 사건 자체보다 ‘왜 탈출하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탈출기에서 이집트 탈출과 관련된 분량은 열다섯 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어떻게 계약을 맺으시는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결국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단순히 기억하는 책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온전한 계약을 기억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오경(창세기·탈출기·민수기·레위기·신명기) 전체를 놓고 본다면, 가장 길게 다루어지는 부분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입니다. 계약과 관련된 대목은 탈출기에서 시작해서 민수기까지 이어집니다.

 

약속의 성취

 

계약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합니다. 탈출 사건과 계약 사건은 모두 하느님께서 창세 15,13-21에서 아브라함에게 밝히신 당신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지만, 그의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탈출 2,23-25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바로 그 약속을 기억하시어 탈출 사건과 계약 사건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렇게 본다면 창세기에서 이루어진 하느님과 선조들의 약속 또한 탈출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탈출과 계약 사건은 하느님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약속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땅에 대한 약속과 그 땅을 차지할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뒤 그들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해 주십니다(창세 1,28 참조). 물론 인간의 죄 때문에 당신이 내려 주시는 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상황에 처해지기는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노아(창세 9,1-17 참조), 아브라함(창세 12,1-3 참조), 이사악,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을 이어 가십니다. 무작정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아니기에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계명을 지켜야 하지만, 잘못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매달리고 그분께 울부짖으며 돌아서기만 하면,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 줄 분이십니다. 탈출기는 하느님의 계획이 탈출 사건과 계약 사건으로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알려 줍니다.

 

모든 이야기는 말씀으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탈출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말씀드리면서 첫 번째 피정을 마칠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결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으로 읽지 못한다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이 이야기하듯, 그리스도교는 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곧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그 결과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탈출기에서 우리는 어떤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할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 저자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을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결합니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그렇고, 시나이 산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사도 2장 참조)도 그렇습니다. 모든 내용이 탈출기와 연결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모두 죄에서 벗어나(탈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고 전합니다(로마 6,1-14 참조).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야말로 참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로마 4,13-25 참조).

 

마지막으로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약속된 땅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땅과 자손과 관련된 하느님의 약속이 탈출 이야기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탈출기를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결국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학문으로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달라야 하겠지만, 피정이라는 제목으로 탈출기를 읽는 이상 우리 이야기의 끝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피정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탈출기를 통해 걷는 이 여정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탈출기 말씀 피정

(2) 창세기 ‘그리고’ 탈출기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탈출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탈출기 시작 부분(1,1-14)을 간략하게 알아본 다음, 탈출기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몇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고’로 시작되는 탈출기

 

히브리어로 탈출기는 ‘워엘렛 셔못’(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으로 시작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기서 ‘워’는 ‘그리고’라는 의미를 지닌 접속사입니다. 이 접속사는 탈출기가 창세기와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요셉은 창세기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 이제 탈출기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하나씩 알려 줄 것입니다.

 

강해진 이스라엘의 자손(1,1-7)

 

야곱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자손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 고센 지방에 머물렀는데(창세 47,27 참조), 창세 47,11에 따르면 그곳은 이집트 땅에서 가장 비옥한 라메세스 지방으로 오늘날 나일강 하류에 있는 삼각주 지역입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매우 번성하고 강해져, 고센 땅 전체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합니다. 탈출 12,37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을 떠날 때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한 장정만 육십만 명쯤 되었다고 전하니, 그 후손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70명의 후손이 사대에 걸쳐 9-10명의 자녀를 둔다면 육십만 명은 충분히 나올 만한 숫자입니다. 이쯤 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 가운데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는 약속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는 그 약속이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무수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로마 4,13-25; 묵시 7,9 참조). 하지만 탈출기의 관점만으로 볼 때 이집트 땅에서 그 약속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입니다. 어찌됐든 탈출기 이후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어떻게 내주시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파라오 치하에서의 종살이(1,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꼬여 버립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매우 많아지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1,9-10). 그러고 나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려고 자신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인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합니다. 역사상 피톰과 라메세스를 세운 임금은 기원전 13세기경의 라메세스 2세입니다. 실제 그는 국력을 키우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벌이면서 이 두 성읍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탈출 1,8-14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이 됩니다.

 

지금까지 탈출기 시작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별 생각 없이 읽다 보면 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읽으면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그중 두 가지만 다루겠습니다.

 

탈출기에서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의 충돌

 

창세 15,13-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남의 땅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사대 째가 되어서야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탈출 1,1-7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기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종살이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탈출 1,1-7은 창세 15,13-16과 내용상 충돌합니다. 게다가 탈출 12,40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430년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창세기 저자와 탈출기 저자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탈출기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두 저자가 다르다고 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은 대목을 만나곤 합니다. 이때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니 차이가 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성경의 여기저기를 뒤져 봅니다. 그러나 어떤 해답도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술 당시로 돌아가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충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려면 먼저 성경이 어느 한 시기 한 사람에 의해 단 한 번에 적힌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인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걸어온 삶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편집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엮은 책입니다. 어떤 대목은 편집에 참여한 이가 직접 보고 쓴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야기가 구전되거나 글로 전해졌습니다. 게다가 구전된 이야기의 경우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엮어 성경을 편집하다 보니,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경 편집자들이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가 가진 자료들을 교정하고 편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그때까지 전해져 오던 하느님과 선조들에 대한 내용이고, 후손들에게 오랫동안 그들의 신원을 알려 주며,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이야기였기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에 존재하는 내용상의 충돌은 단순한 짜깁기의 흔적이 아니라, 전승을 소중히 간직하려던 편집자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탈출기 말씀 피정을 하면서 이런 충돌들을 자주 만날 것입니다. 어느 때는 편집자가 일부러 그 충돌을 담아 두기도 하기 때문에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내용상 충돌되는 부분이 나오면 앞뒤를 뒤적이면서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만 집중하면 성경이라는 전체 그림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엉뚱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이건 사용한 전승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거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전체를 천천히 읽다보면 이해하지 못한 충돌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어법, 아이러니

 

탈출 1,10을 보면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지혜롭게 다룬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다룬다’는 말입니다. 물론 파라오가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1,10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 15,13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이라고 알려 주신 바 있는데, 새 파라오는 하느님의 이 계획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파라오는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파라오는 자신과 이집트 백성을 위해 이스라엘을 억압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참으로 지혜로운 행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특별한 생각 없이 아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대로 아이의 운명이 진행되기도 하고(모세: 탈출 2,10 참조),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세운 계획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에스 7,10 참조). 성서학자들은 이런 것을 ‘반어법(irony)’이라 부릅니다. 반어법은 본래 ‘참, 잘했다’ 같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실제 의도하는 의미(‘일을 뭐 이따위로 했어?’)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탈출기를 읽을 때 등장인물이 던지는 대사에서 반어법이 쓰인 대목을 찾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이나 성경 언어에 대한 지식,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반어법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피정을 진행하는 중간 중간에 반어법이 발견되면 여러분에게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만날 때까지 탈출 1장과 2장에 나오는 반어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탈출기 말씀 피정

(3) 탈출기는 선조들의 신앙이 담긴 이야기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1,1-14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뒤, 탈출기를 읽는 데 중요한 몇 가지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도 탈출 1,15-22의 내용을 잠시 묵상한 다음, ‘탈출기의 역사성’, ‘역사와 이야기’라는 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프라와 푸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혹독하게 부립니다. 그리고 히브리 산파들을 시켜, 해산을 도울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모두 죽여 버리고 딸만 살려두라고 명령합니다.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모조리 죽인 마태오 복음서의 헤로데 임금처럼 ‘잔혹한 임금’이라는 불명예를 쓰기 싫었는지, 힘없는 두 산파를 시켜 몰래 살인을 저지르려는 파렴치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두 사람의 이름이 시프라와 푸아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집트 임금이 명령한 대로 행동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두었다고 전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 곧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회 1,14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두려워하던 시프라와 푸아 앞에 떨어진 파라오의 명령은 분명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히 뒤엎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수없이 많은 자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프라와 푸아는 참으로 지혜롭게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여 히브리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려줍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파라오가 산파들을 불러들입니다. 파라오는 그들에게 왜 아이들을 살려 두었는지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기지를 발휘해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는 달리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1,19) 하고 답합니다. 두 여인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하여 강해집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몰래 처리하려던 계획을 바꿔 본색을 드러냅니다. 헤로데처럼 잔혹한 피바람을 직접 몰고 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게 하고, 딸만 살려두게 만듭니다.

 

잠깐! 오늘날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하여 아직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교육비가 많이 든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세상의 시선이 두렵다 등 여러 이유로, 곧 돈과 자유와 시선이라는 파라오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시프라와 푸아 같은 지혜로운 산파가 많이 필요합니다. 국가와 교회, 여러 사회단체 모두 지혜로운 산파가 되어 낙태가 일어나지 않는, 아니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탈출기의 역사성

 

이번 호에서도 탈출기 전체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탈출기 이야기가 가진 역사성을 잠시 다루겠습니다.

 

두 산파 이야기만 놓고 봐도 탈출기 이야기의 역사성에 대해 약간 의구심이 듭니다.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 장정만도 육십만 명가량 되었다고 하는데(12,37 참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산파가 두 명밖에 없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라면 파라오는 왜 다른 산파들을 남겨 두고 굳이 두 산파만 불러 이야기했을까요? 그렇게 해서 언제 이스라엘 백성이 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성경 저자는 파라오가 은밀히 마음먹은 생각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탈출기 이야기가 실제 벌어진 사건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호에서도 이미 다루었지만, 탈출기는 여러 신앙 선조의 체험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장되거나 포장된 이야기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탈출기의 여러 이야기에는 역사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원전 13세기경 라메세스 2세가 피톰과 라메세스를 고센 땅에 건설했는데, 탈출기는 이 역사적 사건을 전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출기는 역사상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건들을 경험한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기 민족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깨달아 알아 왔고, 당신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백성이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점을 배워 왔습니다. 탈출기의 이야기는 단순히 전설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신원을 일깨워 주는, 또 그들을 믿음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역사와 이야기

 

‘설화 분석’, 또는 ‘이야기 분석’이라는 읽기 도구가 있습니다(장 루이 스카, 염철호 · 권연진 옮김,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 - 구약성경의 설화 분석 입문》 참조). 탈출기 말씀 피정에서 이 읽기 도구를 자주 사용하게 될 텐데, 여기서 ‘역사’는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일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역사와 다릅니다. 이야기는 경험한 바를 자기 나름대로 엮어서 전합니다.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하지도 않거니와 어떤 부분은 줄여서 이야기하고, 어떤 부분은 늘여서 이야기합니다. 대개 중요한 부분이 나오면 매우 길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으면 완전히 건너뛰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 들면 흥미가 떨어져 아무도 읽지 않는 글처럼 지루해집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설화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전지전능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기도 하고, 앞뒤에 일어난 일의 원인과 결과와 관계를 모두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있던 그대로의 역사와 달리 이야기에는 해석이 첨가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과장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이야기 자체를 통해 메시지가 잘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호에서 함께 읽은 1,15-22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역행하는 파라오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는 두 산파를 대조시켜, 두 산파도 이기지 못한 파라오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부각합니다. 성경 저자는 파라오가 생각한 의도와 계획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듯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설화자는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을 나중에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중에 일어난 일을 먼저 알려 주기도 합니다. 곧 시간 순서를 뒤바꿔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셨다는 1,21의 내용은 시간상 1,22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1,22은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모두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대목인데, 그 전에 하느님께서 산파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시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산파들의 집안을 탈출 이후에도 계속 번성하게 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시간 순서를 바꿔 이야기하는 것이 모든 이야기의 특징입니다. 역사에서는 시간 순서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탈출기에 담긴 이야기를 읽을 때 이 모든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곧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계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성경 글자 하나하나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탈출기는 선조들의 신앙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됩니다.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글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거룩한 이야기책입니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탈출기 전체를 읽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점들을 소개하면서 1장을 읽어 보았습니다. 다음 호부터는 본격적인 성경 이야기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1장과 2장을 꼼꼼히,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읽어 보세요.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탈출기 말씀 피정

(4) 물에서 건져진 아이 모세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까지 탈출기를 함께 읽고 묵상하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1장을 읽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탈출기 내용에 좀 더 충실하게 다가가고자 합니다. 곧 모세가 세상에 태어나 파라오의 딸에 의해 물에서 건져지고, 마침내 그의 아들이 되기까지의 이야기(2,1-10 참조)입니다.

 

모세의 탄생(2,1 참조)

 

2,1은 레위 집안 출신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지만, 6,20-21에 가면 그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들은 바로 레위의 손자 아므람과 레위의 딸, 그러니까 아므람의 고모 요케벳입니다. 사실 레위 18,12은 고모와의 혼인 관계를 엄격하게 금지하므로, 모세의 율법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모세 부모의 혼인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율법을 받지 않았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전한 모세에게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세가 속한 레위 지파는 창세 34,25-29; 49,5-7에서 볼 수 있듯 폭력 때문에 저주를 받은 가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 내기 위해 선택하신 모세의 출신 성분이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부족한 이들을 뽑으십니다. 너무 완벽한 인간을 뽑아 놓으면,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당신 일을 뒷전에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분은 당신이 쓰실 재목이 부족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만드십니다.

 

어쨌든 아므람과 요케벳 사이에서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가 ‘잘생긴 것’을 봅니다. 여기서 ‘잘생기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는 ‘토브’입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창조물을 보며 내리신 결론입니다(창세 1장 참조). “보시니 좋았다”, 곧 모든 것이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어가 모세에 대한 첫 평가입니다. 이는 모세가 새로운 하느님의 창조 사업, 곧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사업의 첫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모세를 ‘토브’하게 생각한 이가 바로 모세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인물이라고 알아본 것일까요?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의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는 모세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를 통해 모세야말로 하느님 뜻대로 살아갈 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계획(2,3-10 참조)

 

모세의 어머니는 아기를 석 달간 숨겨 기르다가 더 기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아기를 왕골 상자 안에 넣고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둡니다. 왕골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바’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두 대목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곧 탈출 2장과 창세 7-10장입니다. 특별히 창세 7-10장은 홍수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노아가 만든 방주가 바로 ‘테바’입니다. 흥미롭게도 노아가 테바를 만든 뒤 안팎을 역청으로 칠하고, 모세의 어머니 역시 테바를 만든 뒤 역청과 송진을 바릅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안에 탄 사람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왕골 상자나 배가 물에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강에 띄워져 있는 모습과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오버랩(overlap)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노아를 살려 주시어 당신과 계약을 맺으신 것처럼, 모세도 테바에 태워 당신의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모세의 어머니가 테바를 강가에 있는 갈대 사이에 놓았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을 정확히 번역하면, “강가에 있는 갈대에”인데, 갈대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수프(סּוּף‘)입니다. 이 말이 14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며 건넌 바로 그 ‘갈대 바다’입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살아나는 이 대목은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를 지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기를 담은 왕골 상자를 갈대 사이에 놓아둔 뒤, 아기의 누이를 시켜 멀찍이 서서 지켜보게 했습니다. 아마 어떤 계획이 있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옵니다. 파라오의 딸쯤 되면, 목욕하는 장소가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았다고 하고, 소녀의 누이가 아기를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파라오의 딸이 어디서 목욕하는지 알았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파라오의 딸이 아기를 발견하기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인 아기이지만 거두어 키워 줄 정도로 파라오의 딸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여인임을 알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파라오의 딸은 아기가 히브리인인 것을 금방 알아보면서도 그 아기를 불쌍히 여깁니다. 아버지 파라오와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여인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어머니가 세운 또 다른 놀라운 계책이 드러납니다. 파라오의 딸이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2,6) 하고 말하자마자 누이가 등장합니다. 그 누이는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2,7)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파라오의 딸이 그것을 허락하여, 모세의 어머니가 유모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시간이 지나 모세가 자기 형제들 곧 아론과 미르얌을 아는 것으로 봐서, 모세는 이미 유모가 자기 어머니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어머니의 지혜 덕분에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아들로 삼다(2,10 참조)

 

모세의 어머니는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여 키운 뒤, 아이가 다 자라자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갑니다. 파라오의 딸은 아이를 아들로 삼은 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2,10)는 의미로 모세라고 이름 짓습니다.

 

2월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이름은 ‘아이러니(반어법)’합니다. 반어법은 본래의 의미와 실제 의도한 의미가 다른 것을 말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은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불과한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알려 주는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세’라는 말은 ‘건져 올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이름을 좀 더 정확히 지어 붙인다면, 모세보다 ‘건져진 자’라는 의미의 ‘마수이’가 더 어울릴 법합니다. 하지만 파라오의 딸은 자신이 아이를 물에서 건져 올렸다는 의미로 ‘모세’라고 이름 짓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갈대 바다에서 ‘모세’하리라고, 곧 건져 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모세라는 이름에서도 우리는 모세가 어떠한 인물이 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모세의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상관없이 그는 자기 아버지의 계획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는 참으로 지혜로운 인물이 됩니다.

 

잠깐! 파라오의 딸은 히브리인 유모가 모세의 어머니인 사실을 알았을까요?

 

성경 저자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만 서술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 정보가 필요하면 언급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모세 부모의 친족 관계에 관한 정보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인 유모가 모세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파라오의 딸이 알았을까 몰랐을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파라오의 딸이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리라고 간접적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파라오의 딸이 히브리인 유모에게 건네는 대사를 통해 말입니다.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2,9). 파라오의 딸이 유모가 모세의 어머니인 줄 알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탈출기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힐 것입니다. 물론 그가 몰랐다 해도 그는 탈출기 전체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파라오에게 속한 인물인데도 모세를 물에서 건져 내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탈출기 말씀 피정

(5) 모세가 본 것, 모세가 실패한 것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2,1-10 참조) 살펴보았습니다. 모세는 레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어머니 요케벳의 지혜로운 대처로 그 위험에서 벗어나 파라오의 딸 손에 자라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이 생각 없이 붙여 준 ‘모세’라는 이름이 결국 모세의 사명을 미리 알려주는 아이러니가 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모세가 처신을 잘못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어느 날

 

성경은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한 정보만 제공합니다. 2,11은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성경은 이때 모세가 대략 몇 살이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동족이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때려죽였을 정도니, 요즘 말하는 ‘중2병’에 걸린 사춘기였을까요? 아니면 자기 동족을 염려할 만큼 철이 든 나이였을까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치포라와 혼인한 점을 봐서 이미 혼인 적령기가 지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도 7,23에서 스테파노는 최고 의회에서 모세가 “마흔 살이 다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볼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곧 모세는 4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뒤, 역사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말입니다.

 

40년간의 준비

 

성경 저자는 모세가 40년 동안 무엇을 하며 성장하였는지에 대해 일절 말해주지 않습니다. 왕궁에서 자랐으니 이집트 왕족이나 고위층 자녀를 대상으로 한 정규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7,22에서도 스테파노는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배운 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지혜문학 연구가들은 잠언 22,17-23,14이 이집트에서 가르치던 <아멘엠오페(Amenemope)의 잠언>을 번역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잠언이란 인간 삶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외우기 쉽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임금은 백성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등을 알려 주는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대개 궁중 학교에서 잠언을 가르쳤다고 전하는데, 모세가 궁중 학교에서 공부했다면 이런 지혜를 배웠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그 기간에 이집트식 교육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자기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도 알면서 지낸 것이 분명합니다(4,14; 15,20 참조). 아마도 유모인 친어머니가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브리인을 없애려는 파라오 곁에,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둘의 대립은 탈출 15장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40년간 모세가 겪었을 신원에 대한 갈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왕궁에서 파라오 딸의 아들로, 왕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했던 모세.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모세는 보았다

 

2,11은 모세가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고 전합니다. 사도 7,23은 이에 대해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볼 생각이 떠올랐”다고 전합니다. 동포들의 처지가 궁금해서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40년 동안 히브리인이라는 신원 의식을 갖고 자기 민족에 대해 궁금해하며 살았겠구나 하고 추측해 봅니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구중궁궐 같은 파라오의 왕궁 밖으로 나옵니다. 드디어 자신을 둘러싼 장막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밖으로 빠져나온 모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성경은 두 번에 걸쳐 모세가 “보았다(와야르)”(2,11)고 전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이 강제노동을 하는 모습과 동포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인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보다’는 ‘알다’, ‘깨닫다’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는 동포들의 처지를 모르고 있다가 파라오의 궁전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 안에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동포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깐! 모세의 인생에서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모세는 40세가 되어 동포들을 도와주려다가 도리어 큰 실패를 맛봅니다. 결국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거기서 40년을 지냅니다(사도 7,30 참조). 모세는 80세가 된 뒤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탈출시킵니다. 하지만 다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뒤 120세 되는 해에 죽음을 맞습니다(신명 34,7 참조). 모세의 인생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40년을 어둠에서 살다 밖으로 나왔는데, 곧바로 실패만 경험하고 다시 40년 동안 미디안인들 사이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모세. 이렇게 40년을 준비한 뒤 드디어 백성 앞에 나서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빼내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되지만,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다시 40년을 지내야 했던 모세. 하느님에게 선택된 사람의 삶은 이처럼 연속된 고난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하느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세의 실패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기에 공명심이 컸나 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세주가 되어 백성을 구해보겠다고 덤벼들었는지도 모릅니다. 2,12에 따르면, 모세는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 하나가 이집트인에게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때려죽여 버립니다. 이튿날에는 자기 동포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모세가 두 당사자 가운데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족을 때리느냐 따졌다고 전합니다. 모세가 너무 순진했던 탓일까요? 그 히브리인은 모세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2,14) 하고 대꾸합니다.

 

성경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는 늘 중요합니다. 거기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종종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히브리인은 모세가 스스로 백성의 지도자와 판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성 밖으로 나와 뭔가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지도자이며 판관인 양 행세합니다. 이 대목에서 앞선 대목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2,12에서 이집트인을 살해할 때에도 모세는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행동을 합니다. 자기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모세의 태도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태도 때문이었을까요? 모세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결국 미디안 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파라오가 이번에는 정말 모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삶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

 

신학생 시절 현장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며칠, 몇 달 정도의 체험이었는데, 현장에서 삶의 고통을 모두 아는 듯 행동했습니다. 알량한 체험으로 사람들을 구해야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때 탈출기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그 뒤 소록도에서 1년가량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46년이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아오신 두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로 오신 그분들을 보면서, ‘삶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완전히 변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40년은 광야에서 백성과 동고동락합니다. 이런 모세였기에 하느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세를 사랑해 주셨고, 백성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세를 존경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삶을 단순히 체험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체험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뭔가를 체험으로 알고자 하는 이들이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점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탈출기 말씀 피정

(6)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왕궁을 떠나 동족의 처지를 알고 난 뒤, 동족의 판관이요 지도자 노릇을 하다 크게 실패한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건너가 미디안 사제 이트로, 곧 르우엘의 딸과 혼인한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미디안에 자리 잡다

 

2,15의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고 일부러 우물가에 앉아 있던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기다리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느낌이 조금 달라집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미디안 땅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이 번역에 따르면 모세가 미디안 땅에 자리 잡았다는 표현은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게 된 이야기의 결말이면서 새 이야기를 여는 일종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종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내려가서 한 우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가 일곱 여인을 도운 것이 우연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이 밝히듯 모세가 우물가에 간 행위는 분명히 의도된 것입니다. 이 점은 모세와 르우엘이 만나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미디안족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난 뒤 크투라에게서 열두 아들을 보는데, 미디안은 그중 네 번째 아들입니다(창세 25,2 참조). 미디안은 이사악과 배다른 형제입니다. 이 미디안에게서 나온 미디안족이 탈출기 시작 부분에서 모세를 도와주는 부족으로 그려집니다. 미디안족이 매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미디안족은 대개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트리는 민족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창세 37,28에서는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넘김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민수기 이후에는 이스라엘과 매우 적대적 관계를 형성합니다(민수 22-23장; 31장 등 참조). 기드온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으로 등장합니다(판관 6-8장 참조). 모세의 장인과 부인이 미디안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아이러니한 모양새입니다.

 

특히 모세가 미디안 여인과 혼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신명기 관점에서 평가하면 상황은 더 아이러니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준 이방 여인과의 혼인 금지 규정 때문입니다(신명 7,1-26 참조). 이 규정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정착할 때 우상 숭배라는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 혼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합니다. 물론 미디안족이 가나안의 일곱 부족에 속하지는 않지만,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다는 사실은 모세에게 다소 부정적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탈출기는 이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어쩔 수 없이 이방 여인과 혼인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르우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전합니다. ‘르우엘’은 ‘하느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탈출기는 이 이름을 통해 독자들이 모세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듯합니다. 탈출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세의 장인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르우엘이 ‘하느님의 친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주인공 모세를 도와주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하느님을 처음 만납니다. 르우엘, 곧 이트로는 모세에게 우상 숭배를 가져다 준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 이방인입니다.

 

우물가에서

 

성경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우물가에서 장래의 아내를 만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창세 24장; 29,1-14; 탈출 2,15-22 참조). 이사악의 아내를 동족 가운데서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났습니다. 에사우를 피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친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는 모세가 우물가에서 치포라를 만납니다. 이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여자나 남자 한 쪽이 상대방을 위해 또는 양 떼를 위해 물을 길어 줍니다. 그러고 나서 여인은 자기 가족에게 이방인의 도착을 알리고, 가족은 그 이방인을 받아들여 혼인 서약을 맺습니다. 자칫 식상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각각의 이야기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2,16-17은 미디안의 사제 르우엘의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목자들이 방해를 했다고 전합니다. 근동 지방에는 우물이 흔하지 않고 수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목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여 함께 우물 덮개를 열고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우물가가 좁다 보니 모든 목자가 한꺼번에 물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 떼를 치던 힘없는 여인은 다른 목자들이 물을 먹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딸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 르우엘이 한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왔느냐?”(2,18) 모세가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여인들은 그날도 평소처럼 다른 목자들이 모두 물을 먹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여인들을 도와 양 떼가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일종의 호의를 보인 것입니다.

 

모세의 신원

 

모세가 우물가에서 미디안 땅에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를 기다린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여인들을 기다려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모세가 여인들을 도와준 뒤에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모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 이집트에서 보인 모습(2,11-12 참조)과 같습니다.

 

만약 모세가 다른 목자들을 도와주었다면, 그들이 모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목자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이를 도와줍니다. 이런 모세에 대해 르우엘의 딸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고, 우리 대신 물까지 길어서 양 떼에게 먹여 주었습니다”(2,19). 여인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고 물까지 길어 양떼를 먹이는 이미지는,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면서까지 보호하신 하느님의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어렴풋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르우엘의 딸들은 모세를 ‘이집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미 이집트를 떠났지만, 여전히 이집트 사람으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40년 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3,6).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이집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원을 되찾게 됩니다.

 

모세의 혼인

 

르우엘은 왜 모세를 내버려두고 왔느냐고 딸들에게 핀잔을 줍니다. 그러고는 모세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모세가 그 사람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로”(2,21) 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뭔가 비는 부분이 생깁니다. 르우엘이 모세에게 함께 살기로 청한 뒤 모세가 그 청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성경에는 르우엘이 모세에게 그런 청을 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들여다보면, 우리말 성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그 사람과 함께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 딸 치포라를 모세에게 주었다.” 르우엘이 모세에게 청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르우엘과 함께 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모든 이야기가 명확해집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세는 어쩔 수 없이 우물가에 간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줄 이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여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고자 우물가에 앉아 기다립니다. 르우엘은 이런 모세를 초대해 음식을 나눕니다. 고마움의 표시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르우엘에게 함께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르우엘이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딸 치포라를 아내로 내줍니다. 모세는 아내에게서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낳고, 그 땅에서 40여년을 머무릅니다.

 

삶은 한 판의 바둑

 

모세를 보면 ‘삶은 한 수 한 수 두어 가는 바둑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라는 한 판의 바둑에서 모세는 잘못된 수를 둡니다. 이집트에서 자신이 메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나섰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판 전체를 포기하지 않고, 잘못 둔 그 수를 바탕으로 미디안 땅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40년 동안의 수읽기 때문이었을까요? 40년 뒤 모세는 결국 그 땅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완전히 변화하여 살게 됩니다. 잘못된 수에 빠져 바둑판 전체를 실패로 마무리하지 않고, 판세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반집만 이겨도 판 전체를 이기는 바둑과 같습니다. 모세처럼 잘못된 수를 두었다 해도 거기서 새로운 수와 변화를 모색해 간다면, 바둑판 전체를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2,15-22을 읽으며 깨닫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탈출기 말씀 피정

(7) 덤불 속에 사시는 하느님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자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번 호에서는 탈출기에서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인 ‘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2,23)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 많은 날들이 있은 뒤’입니다. ‘그 많은 날들’이라는 표현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모세는 치포라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은 뒤, ‘게르솜’이라고 부릅니다(2,22 참조). 이는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많은 날들’은 모세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많은 날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압축한 표현입니다.

 

스테파노는 ‘사십 년이 다 찼을 때’ 천사가 떨기나무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전합니다(사도 7,30 참조). 여기서 볼 수 있듯 ‘그 많은 날들이 있은 뒤’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나그네살이도 어느 정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는 표현은 희망이 가득 찬 느낌을 줍니다.

 

모세만 타향살이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 땅에서 억압받으며 나그네살이를 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나그네살이를 접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고자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신약성경의 표현대로,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

 

탈출기 시작 부분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등장하면서, 편안히 살던 이스라엘이 힘든 처지에 놓입니다. 이집트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임금은 기원전 13세기경의 라메세스 2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라메세스 2세는 무려 6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대단히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통치자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크나큰 기회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십사고 말입니다.

 

백성이 탄식하고 부르짖다

 

모세 오경에서 백성이 탄식하고 부르짖었다는 말은 탈출 2,23에만 나옵니다. 이 표현은 예언서에 자주 나옵니다. 곧 유다인이 전기 예언서로 분류하는 판관기와 사무엘기, 후기 예언서로 분류하는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이민족에게 고통을 겪다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하느님께 보인 반응입니다. 그런 까닭에 2,23에서도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드디어 하느님을 기억해 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 들어오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본래 당신이 계획하고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잠깐! 탈출기 이야기의 역사적 근거는?

 

라메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네프타는 주변 나라들을 평정한 다음 전승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언급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아직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판관기 시대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이미 밝힌 바 있듯, 탈출기에서는 역사적 근거를 가진 자료가 제법 많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탈출기는 역사상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려는 역사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고 이끌어 오셨는지를 전해 주는 이야기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공동으로 체험한 사건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가 글로 엮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글자 그대로를 역사적 진실로 여기다 보면, 성경을 잘못 이해할 수 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거기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겠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 참조).

 

불모의 산, 하느님의 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셨을 때,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야곱이 하느님의 집인 줄도 모르고 베텔에 누워 잠을 잤듯이(창세 28,10-22 참조), 모세 역시 그 산이 하느님의 산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천사가 모세에게 알려 줍니다(3,6 참조). 성경에서 ‘시나이 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앞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게 될 산입니다. 여기서 ‘호렙’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황량한 곳, 불모지’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산 이름이 불모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는 이처럼 역설의 뜻을 지닌 단어가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하다(갈라)’와 ‘유배(힉걸라)’라는 단어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계시’란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열어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나아갈 바를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계시하다’는 말은 ‘열어젖히다’는 의미의 ‘갈라’에서 나온 말인데, ‘갈라’라는 말에서 ‘유배되다(힉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거치면서 비로소 하느님을 온전히 찾고 갈망했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글로 옮겨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틀을 갖춥니다.

 

이런 역설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로 광야를 뜻하는 ‘믿더바르’도 있습니다. 광야는 어려움과 고통이 가득 찬 곳인데, 이 단어가 ‘다바르’ 곧 ‘말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사막)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일까요? ‘호렙(불모지)’, ‘힉걸라(유배되다)’, ‘믿더바르(광야)’ 모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탈출-광야-유배 생활에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의 등장

 

아무것도 모른 채 주님의 산으로 오른 모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올라오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존재이지만, 대개 하느님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되곤 합니다. 3,2에서도 주님의 천사가 등장하는데, 3,4에서 모세에게 말을 건네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천사와 주님이 번갈아 등장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판관 6장 참조). 성경 저자에게 이 점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말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이한 현상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불꽃은 하느님의 등장 장면에서 자주 사용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쪼개어 놓은 제물 사이를 타오르는 횃불 모습으로 지나가셨고(창세 15,17 참조), 불기둥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탈출 13,21-22; 민수 14,14 등 참조). 천사가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것도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불꽃이 떨기나무를 태워 버리지 않습니다. 떨기나무란 무엇일까요? 떨기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서네’입니다. 이 단어는 신명 33,16에 다시 나오는데, 여기서는 ‘주님’을 ‘서네’, 곧 ‘덤불’ 속에 사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덤불이 바로 떨기나무입니다. ‘서네’는 오늘날 시나이 광야에 가면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시나이 산 위에 자리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정원 한 쪽에는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라기보다 덤불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작은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매우 얇아 불꽃만 닿아도 다 타버릴 것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많은 나무 중에 덤불 속에 사시는 걸까? 어떤 분들은 ‘서네’와 ‘시나이’가 유사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시나이’에서 온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떨기나무가 불에 약한 사막의 식물이라고 한다면, 덤불(떨기나무) 속에 사시는 하느님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광야와 불모지에 사시면서 유배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타 버릴 것 같은 떨기나무, 어찌 보면 그 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타 버릴 것 같으면서도 타지 않는 덤불인 떨기나무, 그 안에 사시는 하느님. 광야 여정을 통해 지칠대로 지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속에 사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탈출기 말씀 피정

(8)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나타나 모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소명 앞에서 주저합니다.

 

나는 보았고, 들었고,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직접 보았고,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3,7 참조). 숨어 계시지 않고 백성과 항상 함께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다만, 백성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귀에 다다를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3,8 참조). 이제 그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의 처지에 들어오십니다.

 

인간은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신가?” 하고 묻습니다. 시편 10은 그런 인간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백성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듣고 알고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알려 주는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3,12)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하십니다(3,7-10 참조). 그분은 언제나 중재자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해 가시는데, 성경에서 중재자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내세워 선뜻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중재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3,11)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3,1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표징일까 궁금해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만큼 중요한 표징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이마크 에흐예)”는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셨음을 드러냅니다(여호 1,5; 마태 28,20; 루카 1,28 참조).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지닌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점을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모세는 하느님께 이름을 묻습니다(3,13 참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역할과 사명, 특징을 알려 줍니다. 특히 신의 이름은 신의 역할과 특성을 드러내는데,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신의 능력과 역할을 아는 것이며, 그 신과 함께할 방법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은 것도 이런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모세의 질문에 당신을 ‘있는 나‘라고 밝히십니다. 당신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인 ‘야훼‘라고 밝히십니다(3,14-15 참조).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이 두 가지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표현은 동일한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야훼’라는 말뜻을 올바로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있는 나’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면,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를 어렴풋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성경은 ‘있는 나’를 ‘존재하는 자(ὁ ὤν)’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름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항상 존재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백성이 어려울 때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항상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 ‘야훼’라는 이름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학자들은 ‘있는 나’라는 표현이 ‘나다(ἐγώ εἰμι)’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부모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녀들은 금방 ‘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딱히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분명 ‘나다’라고 표현하십니다. ‘나다’라고 말씀하시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신명 32,39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내가 그다.”

 

하느님께서는 ‘나다’가 영원히 불릴 당신의 이름이라고 밝히십니다. 어찌 보면 과거부터 계속 계셔 온 그 하느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할 하느님임을 직접 밝히신 것입니다.

 

잠깐! 복음서에서도 ‘나다’라는 말이?

 

예수님께서도 종종 ‘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요한 18장에서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나다(ἐγώ εἰμι)”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뒷걸음치면서 넘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주저하는 모세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먼저 이스라엘 원로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계획을 알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런 뒤 원로들을 데리고 파라오에게 나아가 당신의 계획을 밝히라고 명하십니다. 이어서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집트를 탈출하게 될지도 미리 알려 주십니다(3,16-22 참조). 하느님의 계획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습니다(4,1 참조). 탈출기 시작 부분에서 이집트인을 쳐 죽일 때와 너무나 달라진 나약한 모습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듣고도 불안해합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두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는 표징과 나병이 들고 낫게 하는 표징입니다.

 

모세는 표징을 받았지만 다시 주저합니다. 자신은 입도, 혀도 무디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서 모세는 제발 자기 말고 다른 이를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모세가 여든 살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저하는 모세를 보고 화를 내며 말씀하십니다. “아론을 협조자로 주어 너를 대신하여 말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진 임무, 곧 내가 계획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일어나 가라”고 말입니다(4,14 참조). 그러면서 모세에게 다시금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고 명하십니다. 제발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부족한 이들을 부르시는 하느님

 

모세가 하느님에게서 소명을 받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하느님께서는 뛰어난 인물보다 약한 이를 선택하십니다. 힘 있는 이를 뽑아 놓으면, 자신이 잘나서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뽐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이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해 가십니다. 그러면 당신의 영광이 더욱 크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소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을 만큼 합당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대부분은 고민 끝에 합당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습니다. 80세 늦은 나이에 사명을 받은 모세,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모세.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파라오 앞으로 나아갑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의 일을 수행한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잠깐! 야훼? 여호와?

 

오늘날 히브리어는 자음만 표기합니다. 읽을 때는 모음을 붙여 읽지요. 모음 규칙은 정해져 있기에 자음만 있어도 글을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성경이 쓰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은 본래 자음만으로 쓰였습니다. 이런 흔적은 쿰란에서 발굴된 성경 사본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자음으로만 표기하면 YHWH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경 사본에는 모음이 붙어 있습니다. 이 모음은 6-10세기 마소라 학자들이 성경 읽기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고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히브리어 성경은 예부터 내려오던 자음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붙이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이름과 관련된 모음은 조금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유다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님의 이름 YHWH가 나오면, ‘주님(아도나이)’, 또는 ‘그 이름(하셈)’이라고 읽곤 했습니다. 마소라 학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에 모음을 붙일 때에도 해당 모음을 붙이지 않고, ‘주님(아도나이)’이라는 어휘의 모음을 붙였다고 합니다. 곧 YHWH라는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소라 학자들은 히브리어 고유의 모음 규칙을 따라 ‘아도나이’의 첫 모음인 ‘아’ 대신 ‘여’를 붙이고, 마지막 이중모음인 ‘아이’에서 ‘이’를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וה ָיהְ라는 표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וה ָיהְ를 그냥 읽으면, ‘여호와’가 됩니다. 하지만 개신교든 천주교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원래 발음이 ‘야훼’였다고 봅니다. 하느님 이름이 ‘여’가 아니라 ‘야’로 시작된다는 점은, 곧 ‘이사-야’, ‘즈카르-야’, ‘엘리-야’라는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는 하느님 이름 YHWH의 축약형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탈출기 말씀 피정

(9)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노력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주저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소명을 받아들여 이집트로 돌아가는 장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소명을 수락함

 

모세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팁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다양한 징표를 주십니다. 곧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고, 기적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게다가 함께 일할 조력자도 내주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받은 가장 큰 징표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3,12 참조). 그분은 아론을 조력자로 주시면서 다시 한 번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가르쳐 주겠다”(4,15) 하시며 모든 것을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 뒤 모세는 즉각 반응합니다(4,18 참조). 그는 하느님 말씀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장인 이트로에게 가서 이집트로 돌아가 자기 친척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앞서 주저하던 모습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모세의 멘토 이트로

 

모세가 이트로에게 귀향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자, 이트로는 평안히 가라고 하며 그의 길을 축복해 줍니다. 모세를 거두고 딸까지 내주며 보살핀 은인 이트로의 처지에서 보면, 40년이나 의지하며 함께 지낸 모세가 떠나는 것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트로는 더 큰 일, 곧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세를 기꺼이 보내 줍니다. 야곱이 떠날 때 라반이 보여 준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창세 31장 참조).

 

훗날 이트로는 모세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 앞에서 음식도 나누어 먹습니다. 이방인인 미디안족의 사제였는데도 모세와 함께 여정을 계속 합니다. 이트로가 없었다면 모세도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트로는 모세의 삶의 중요한 시기마다 모세를 도와주고 그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18장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일? 모세의 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면서 모세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디서나 그를 보살펴 주고, 그와 함께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나 아론이 말할 때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들의 입에 담아 주겠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따라오기만 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신다 해도 모세 편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을 떠나야 하고 파라오와 이스라엘 앞에서 이적을 보여야 하며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것은 모세가 헤쳐가야 할 일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주저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결정? 모세의 결정?

 

4,18-4,19을 살펴보면, 모세가 미디안에서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바람인지(4,18 참조),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4,19 참조) 의아합니다. 그 이유를 오경이 여러 저자의 손을 거친 자료를 엮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 섭리의 관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종종 경험하시겠지만, 아무리 하느님의 일을 한다 해도 그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면 많은 이의 노력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일이니 그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손 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 안에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때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노력)와 하느님의 섭리(은총)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뜻을 거스르는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개념은 전혀 모순되지 않고, 실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올바른 신앙이 시작됩니다.

 

두 가지 층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지상적 층위에서 생각하면 모든 일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천상적 층위 곧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뭔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들만이 천상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4,18과 4,19도 두 가지 층위의 시각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상적 층위에서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실행으로 옮깁니다(4,18 참조).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4,19 참조). 결국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것은 100% 모세의 결정이면서 동시에 100%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다소 이상한 하느님의 계획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옵니다. 40년 만의 귀환입니다. 모세를 알던 이들은 대부분 죽고 없습니다. 다만 그의 형제들이 모세를 알아봅니다. 이런 여정을 떠나는 모세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파라오 앞에 가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데, 파라오는 그 기적을 보더라도 마음이 완고해져 백성을 풀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계획이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기적을 행하면 파라오가 즉시 두려움을 느껴 이스라엘을 풀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파라오가 백성을 풀어 주지 않도록 하시겠다니 말입니다. 당신의 계획이 방해받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다소 아이러니합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4,21-23).

 

저로서도 이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뭔가를 지시할 때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일일이 설득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냥 내버려둡니다. 사사건건 학생들의 마음까지 통제하려 들지 않습니다. 학생들보다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선생의 입장에서 그러는 것이 나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파라오의 완고함 때문에 방해받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면서도,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 기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파라오의 방해 자체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파라오에게 실재를 제대로 보는 계기가 되기에, 파라오의 방해를 그대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파라오는 지상적 차원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천상적 차원,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그의 방해마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하신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어 종종 사람들이 당신 계획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방해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점을 3,19-20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하느님의 책임? 인간의 책임?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50%를 하면, 나머지 50%는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이나 하느님의 책임을 경감하려는 노력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100%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100%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도 인간도 역사의 어느 한 부분도 그냥 내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100%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100%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짐을 고백하고 허투루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모든 여정이 100% 당신 책임이라 생각하시고, 무엇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납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탈출기 말씀 피정

(10) 믿음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4,24 참조).

 

주님의 공격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을 공격하는 대목이 종종 나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야뽁 강 어귀에서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장면(창세 32,23-33 참조), 주님의 허락을 받고 발락에게 가던 발라암을 주님께서 도리어 죽이시려는 장면(민수 22,22-35 참조) 등입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는 참 의아합니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의 역자들은 그런 모습을 피하고자 ‘주님’이라는 단어를 ‘주님의 천사’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하는 일 역시 주님의 일이라면, 결국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공격하셨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세일까? 모세의 아들일까?

 

우리말 성경은 모세가 길을 떠나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장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보면, 하느님께서 누구를 공격하셨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3인칭 대명사 ‘그’라는 표현이 계속 나와 그가 모세인지 모세의 아들인지 불분명합니다. 공격 대상이 모세의 아들이라면,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그를 공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창세 17,9-14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한 뒤,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아들이 공격받았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치포라가 할례를 베푸는 동안 모세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할례로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 모세는 결코 멀뚱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하느님의 공격으로 모세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치포라가 움직였으리라 추측합니다.

 

우리말 성경도 이런 견해를 반영하였습니다. 곧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큰 병을 앓게 되어 움직일 수 없자, 치포라가 즉시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치포라는 아들의 포피를 움직이지 못하는 모세 발 앞에 놓고, “나에게 당신은 피의 신랑입니다”(4,25)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풀어 주십니다. 모세는 이번에도 아내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론, 그리고 백성과의 만남(4,27-31)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은 뒤 하느님께서는 아론에게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올 테니 이집트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마중하러 나가라고 하십니다. 광야를 거쳐 오며 죽을 고비를 넘긴 모세를 위한 배려였을까요? 아론은 길을 떠나 하느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춥니다. 하느님의 산은 미디안과 이집트 사이에 있던 산으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을 아론에게 알립니다. 그러고는 즉시 이스라엘 자손의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표징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모세의 걱정과 달리 모든 백성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주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모세와 아론이 만나는 장면부터 백성이 그들의 말을 듣게 되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보입니다. 백성도 의심 없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의 믿음은 금방 깨집니다. 파라오가 자신들을 더욱 못살게 굴자, 즉시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가 따지기 때문입니다(5,20-21 참조). 어찌 보면 구약성경 전체는 이러한 백성의 확고하지 못한 믿음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그것이 바로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입니다.

 

파라오와의 첫 만남(5,1-5)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가서 ‘야훼’라는 주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분이 명하신 바를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축제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진한 고딕체로 ‘주’라고 표기된 대목은 모두 주님의 이름인 ‘야훼’가 나오는 대목이라고 앞서 밝혔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다인 관습에 따라 가톨릭교회도 ‘야훼’를 ‘주님’으로 표기합니다. 어쨌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분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을 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고 거절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즉시 주님의 이름을 듣고 그분을 알아본 것과 대조됩니다. 파라오가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모세와 아론은 그분이 바로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다시 말해 줍니다. 그 신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신지 설명하면서, 그분께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흑사병이나 칼이 자기들을 덮칠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5,2-3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 말을 지어 낸 것일까요? 아니면 모세와 아론의 현재 마음 상태를 드러낸 것일까요? 아쉽게도 그 말은 파라오에게 아무런 협박도 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신 또는 신의 아들임을 자처한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곧 ‘노예들의 하느님’이 전하는 말을 들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던진 말은 파라오를 겁주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모세의 마음 상태를 알려 주는 말로 여기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직도 모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달리 파라오는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도대체 그 주님이 누구인가?”(5,2 참조)

 

믿음의 목적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돌려보낸 뒤 작업 감독과 조장들에게 명합니다. 벽돌 만들 때 쓰는 짚을 히브리인들이 직접 모아 쓰게 하되, 그 생산량은 줄이지 말라고 이릅니다. 히브리인들이 배가 불러 하느님이나 섬기겠다고 하니, 그런 생각을 할 틈을 아예 없애겠다는 뜻입니다(5,6-9 참조). 파라오의 명령을 들은 작업 감독들은 이스라엘 작업 조장들을 불러 다그치고 때립니다(5,10-14 참조). 그러자 이스라엘 작업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쫓아가 자신들을 왜 이렇게 박대하는지 따져 묻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이스라엘 조장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받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5,15-19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 기대했지만, 상황이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모세와 아론이 하느님의 계획을 백성에게 분명히 알려 주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그가 이스라엘을 쉽게 내보내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따지고 듭니다. 주님께서 등장하시면 모든 고난이 다 없어질 줄 알았는데 파라오가 자신들을 도리어 더 힘들게 만드니(5,20-23 참조), 하느님 계획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지금 닥친 문제부터 당장 해결하라는 요청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반긴 것은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 때문이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 어려움 없이 살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 주는 모세와 아론은 불필요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말을 들은 모세도 주님께 달려가서 아룁니다. 파라오에게 주님의 이름을 말하자 그가 도리어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도와주고 구해주시기로 해 놓고, 왜 이렇게 가만히 계시느냐고 따집니다.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이 당신의 계획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는데도 모세와 백성이 이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살다 보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있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된다는데 도대체 나는 왜 이런가’ 하고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립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탈출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믿음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탈출기 말씀 피정

(11) 부족한 이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탈출 6장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언급된 뒤, 모세가 소명을 받는 이야기가 다시 반복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여러 번 부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이 다양한 자료로 편집되었다는 흔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점을 이야기하면서 피정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여러 편집자의 손을 거친 탈출기

 

벨하우젠(J. Welhausen, 1844-1918년)의 문헌가설에 따르면, 오경에는 다양한 편집층이 존재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신 분들은 들어 보셨겠지만, 야훼계(J), 엘로힘계(E), 신명기계(D), 사제계(P) 저자들이 오경 편집에 관여한 것으로 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야훼계 저자들은 기원전 9세기 곧 다윗과 솔로몬 임금 시대 직후에 남쪽 유다에서, 엘로힘계 저자들은 기원전 8세기경 북쪽 이스라엘 땅에서 각각 문헌을 만든 것으로 봅니다. 그러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남쪽 유다에서 야훼계 문헌과 엘로힘계 문헌이 융합되어 가장 이른 형태의 이야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탈출기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직후 다양한 사제계 자료가 첨가되어 전체 골격이 만들어졌고, 그 후 신명기계와 결합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명기계 내용이 첨가되었으리라 봅니다. 이런 편집 과정을 거치다 보니 중복되는 대목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6장에 다시 언급되는 것도 이런 까닭으로 여겨집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다시 소명을 주시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의 청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심한 부역을 시키다 보니, 백성이 모세와 아론 나아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모세와 아론마저 하느님께 불평을 털어놓기 때문입니다. 6장은 이런 모세와 아론에게 하느님께서 다시금 사명을 주시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주님에게서 소명을 받는 장면이 6,26-30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 또한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일종의 ‘재현’ 기법으로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족보에 관해 언급한 뒤 기존의 소명 이야기로 되돌아가기 위해 앞서 이야기하다가 멈춘 내용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성경 외에 다른 고대 이야기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족보가 소명 이야기 가운데 끼인 것을 보면 사제들이 마지막 편집 작업에 관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탈출기는 다양한 편집 과정을 거쳤지만, 이야기 흐름이 나름대로 깨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편집 과정에 함께하시어 오늘 우리가 탈출기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6,2-7,7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계획은 파라오와 백성, 나아가 모세와 아론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은 계약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어 당신이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6,2-9 참조).

 

어찌 보면 6,2-9은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과 앞으로 펼쳐질 모든 사건을 요약해 주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다시 요약 정리해 주시고, 그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 뒤 모세에게 다시 명령하십니다.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내보내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어찌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겠느냐며 하느님께 따져 묻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끌어내 오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파라오에게 다시 파견하십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레위 지파

 

6,14부터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다뤄집니다. 여기서는 레아의 첫째 아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르우벤의 아들들과 씨족들, 그리고 시메온과 레위 지파의 아들들과 씨족들만 소개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레아에게서 태어난 첫 세 아들입니다. 나머지 아들들의 족보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것 역시 편집의 흔적이 아닐까요?

 

르우벤이 야곱의 첫째 아들이므로 언급되고, 시메온과 레위는 매우 독특한 이력 때문에 언급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 49,5-7에서 야곱은 시메온과 레위에게 축복을 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메온과 레위는 형제 그들의 칼은 폭행의 도구. 나는 그들의 모의에 끼지 않고 그들의 모임에 들지 않으리라. 그들은 격분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멋대로 소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 포악한 그들의 격분, 잔악한 그들의 분노는 저주를 받으라. 나 그들을 야곱에 갈라놓으리라. 그들을 이스라엘에 흩어 버리리라.”

 

창세 34,25-29에서 보듯 레위는 시메온과 함께 하모르와 그의 아들 스켐을 칼로 죽여 아버지 야곱을 곤경에 빠뜨린 인물입니다. 스켐이 레위와 시메온의 누이인 디나에게 반해 그를 겁탈한 뒤 혼인하고자 했고, 스켐의 아버지와 야곱은 그 혼인을 승낙했는데, 그 사건 때문에 레위와 시메온이 크게 분노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폭력을 사용해 복수를 합니다. 《성경》은 이 대목에 ‘시메온과 레위의 음흉한 복수’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시메온과 레위의 복수를 전해 들은 야곱은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족과 프리즈족에게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창세 34,30). 하지만 레위와 시메온은 도리어 야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누이가 창녀처럼 다루어져도 좋다는 말씀입니까?”(창세 34,31)

 

이처럼 시메온과 레위는 폭력 사건을 일으킨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의 중요한 두 주인공 모세와 아론이 이 레위 지파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시메온과 레위에게 그들의 잔악한 폭력성 때문에 각 지파 사이에 흩어질 것이라고 말했는데, 탈출기에 와서 레위의 경우 사제 지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문제 있는 이들에게서 사제가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지닌 저돌성과 폭력성을 당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이끄신 듯합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복이 되도록 바꾸신 것입니다. 32,25-29을 보면 레위인들이 완전히 변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모세 편에 서서 하느님을 저버린 이들을 단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열성을 보시고 그들을 이스라엘의 사제가 되게 하십니다. 이제 그들이 온 백성 사이에 퍼져 살게 된 것은 폭력성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다.

 

잘못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론과 모세

 

족보에서 한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6,20 참조). 구약성경의 율법을 잘 아는 이들에게는 무척 어색한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위 18,12은 고모와 조카의 혼인 관계를 엄격하게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폭력성 때문에 저주를 받은 레위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 부모까지 잘못된 혼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모세 이후에야 율법이 등장했으니, 그 전의 부모들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주어진 율법이라 해도 그것이 신법(神法)이라면, 그 전의 사람들도 마땅히 지켜야 할 내용인 점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보니 하느님의 판단 기준과 사람의 판단 기준이 참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6장의 족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듯합니다. 6장 외에도 성경은 하느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면서까지 빼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 임금이 태어나고, 라합이라는 창녀, 룻이라는 이방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 그렇습니다. 밧세바, 라합, 룻은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된 여인입니다(마태 1,1-17 참조).

 

메시아도 되도록 좋은 출신 성분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우리네 생각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흠이 많은 곳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였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다시금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모세가 자신의 부족함을 반복하여 고백하지만, 주님께서 용기를 북돋우시며 당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결국 모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명을 따릅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여든 살, 아론의 나이는 여든 세 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별로 잘난 것 없는 우리를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니다. 가장 부족한 이들을 뽑으시어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너무 잘난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키면 자신이 잘나서 일이 잘 되는 줄 알고 교만을 떨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제나 부족한 이들을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해 큰일을 해 가시는 하느님. 바로 탈출기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탈출기 말씀 피정

(12)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탈출기는 모세의 소명 장면을 계속 재현합니다. 그만큼 그 소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각 소명 장면은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6,28-7,7에 언급된 소명 이야기 역시 그러합니다.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모세

 

이 단락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소는 미디안 땅이 아니라 이집트 땅입니다(6,28 참조). 따라서 이 단락은 파라오와의 협상이 결렬되어 좌절하는 모세가 다시 소명을 받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담판 짓지 못한 것을 자기 탓, 곧 파라오가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한 자기 탓으로 여겼나 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 합니다”(6,12)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섰을 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한 이는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었습니다(4,16.30 참조). 또 뚜렷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파라오와 담판을 지을 때 말을 한 이는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었을 것입니다(5,1 참조). 그러나 모세는 모든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다시 한 번 하느님처럼 되게 하고 아론을 모세의 예언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며 힘을 북돋워 주십니다.

 

하느님을 알게 하는 표징과 기적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소명을 맡기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집트 땅에 많은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앞선 소명 이야기에서도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기는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사람’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4,30 참조). 그런데 이 소명 이야기에서는 당신이 직접 표징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주님으로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6,28-7,7의 소명 이야기가 앞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표징과 기적을 통해 온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이야말로 참된 주님임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에제 36,16-38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숭배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땅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벌하시어 그들을 이방 민족들 사이로 내쫓으십니다. 쫓겨나게 된 이스라엘을 본 모든 이방 민족들은 “이자들은 주님의 백성인데 그분 땅에서 나와야만 했지”(에제 36,20)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서 당신의 이름이 더렵혀진 것을 걱정하시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약속된 땅으로 데려가시고,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어 온 민족이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것, 다시 말해 온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첫 청원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기도입니다. 주님 편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어 우리의 죄로 더렵혀진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청하는, 당신이야말로 참 하느님임을 드러내시기를 청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 내시고자 하는 의도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큰 뱀이 되다(7,8-13 참조)

 

4,1-5에서 하느님께서는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도록 하는 능력을 모세에게 주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면 뱀이 되고, 그 꼬리를 잡으면 도로 지팡이가 되는 능력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 능력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능력을 보고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그 능력을 주시는데, 모세가 아니라 아론의 지팡이가 도구가 됩니다. 그 지팡이는 그냥 뱀(나하쉬)이 아니라 큰 뱀(탄닌)으로 변합니다. 여기서 ‘탄닌’이라는 히브리어는 ‘큰 용’을 뜻합니다(창세 1,21; 욥 7,12; 시편 74,13 등 참조). 흥미로운 사실은 파라오 역시 요술사들을 시켜 지팡이로 큰 뱀을 만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립니다. 이는 큰 뱀으로 상징되는, 하느님과 파라오라는 두 세력의 싸움에서 결국 하느님께서 이기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입니다. 파라오는 이런 표징을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이 완고해져서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런 파라오의 완고함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에 열 번에 걸쳐 재앙을 내리십니다(7,14-12,36 참조). 그리하여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임을 드러내십니다.

 

열 번에 걸친 재앙 이야기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모든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 재앙은 모두 나일 강 유역에서 종종 일어나는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호르트(G. Hort)라는 학자는 나일 강이 원래 푸른색을 띄는데, 어느 해 큰 폭우가 쏟아져 아트바라 강 유역에 있던 붉은 흙이 나일 강으로 휩쓸려 들어가 강물이 붉어졌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이렇게 붉어진 물 때문에 물고기들이 죽어 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재앙, 곧 물이 피로 변하게 된 재앙입니다.

 

이 첫째 재앙으로 인해 강 주변에 살던 개구리들이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고(둘째 재앙), 죽은 물고기로 인해 개구리들의 서식처가 오염되어 모두 병에 걸려 몰살당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모기가 급증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셋째 재앙). 그 밖에도 등에가 급격하게 생겨나게 된 넷째 재앙의 경우는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서 갑자기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종의 마구간 파리 떼 재난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고센 땅만이 이 재앙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도(8,18 참조), 고센 땅이 열대 기후가 아니라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고센 땅은 나일 강 하구의 삼각주 지대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인 가축병과 여섯 번째 재앙인 종기 역시 나일 강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병으로, 기후 조건이 비교적 좋은 고센 땅,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병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역시 나일 강 주변에서 계절과 관계없이 수시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떼도 이집트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 재앙인 어둠 역시 3월 말부터 생기는 일종의 계절 현상으로, 사하라 사막 쪽에서 부는 바람이 먼지와 모래를 동반함으로써 태양을 가리게 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두통와 불쾌감, 공포를 느낍니다.

 

이런 호르트의 견해는 대단히 흥미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탈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확히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열 번째 재앙의 경우는 자연 재해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자료는 탈출기 저자가 전해 주는 증언뿐입니다. 이 증언 이야기가 전해 주는 바는 자연 재해로 이집트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파라오에게 여러 가지 표징과 기적을 통해 당신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임을 드러내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징과 기적 앞에서도 파라오는 완고함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완고함

 

파라오는 재앙이 닥칠 때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하느님을 섬기러 나가라고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재앙을 거두어 주기를 하느님께 청해 달라고 말합니다. 파라오의 청을 듣고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어 주시면 파라오는 다시금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반복하자 하느님께서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십니다. 바로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모조리 죽음으로 내몰아 버리십니다. 결국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다시 완고해져서 갈대 바다까지 그들을 쫓아갑니다. 도대체 파라오는 왜 이렇게 마음이 완고한 것일까요?

 

파라오는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된 것처럼 자만에 빠졌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임금으로서 무수하게 많은 이를 거느리다 보니, 자신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만도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파라오들은 신을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완고함으로 눈이 가려져 참된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파라오 자신뿐 아니라 그의 백성마저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의 완고함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파라오가 완고함을 보일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완고한 이들 앞에서도 반드시 당신이 하느님임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당신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임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모르고 스스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자만심에 가득 찬 이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임을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파라오의 완고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완고함을 보이지 않는지 되돌아봅시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2월호(통권 4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