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탈출기 말씀 피정(2) -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

탈출기 말씀 피정 (2)

(13)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이번 호에서는 이집트에 내려진 열 번째 재앙과 파스카, 무교절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열 번째 재앙과 관련한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삼대 축제(파스카·오순절·초막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제입니다. 곧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 축제입니다.

 

열 번째 재앙에 대한 예고(11,1-8 참조)

 

아홉 번의 기적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나는 이제 파라오와 이집트에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겠다”(11,1). 여기서 재앙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네가(גע ַנ‘( ֶ입니다. 이 말은 창세 12,17에서 ‘파라오가 받은 하느님의 처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7,3에서 하느님께서는 표징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어 당신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임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파라오가 계속 완고함을 드러내자 재앙으로 파라오를 치고자 하십니다. 아홉 번의 기적이 참된 하느님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표징이었다면, 열 번째 기적은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파라오에 대한 심판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파라오에게 알립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모조리 죽음으로 내모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맏아들과 맏배는 아무도 죽음을 겪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집트인과 이스라엘인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11,7 참조). 하느님께 속한 것, 곧 거룩한 것을 속된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파라오와 신하들이 먼저 일어나 모세 앞에 엎드려 제발 떠나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을 떠날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말을 전한 뒤 파라오에게서 떠납니다.

 

은붙이와 금붙이

 

11,1-8의 열 번째 재앙에 대한 예고를 읽다 보면, 다소 어색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내쫓기듯 떠나게 될 터인데, 그때 은붙이와 금붙이를 요구하라고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대목입니다(11,2-3 참조).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미 창세기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재앙’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창세 12,10-20을 보면, 기근이 들어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에 내려간 아브라함의 아내를 파라오가 탐하다가 큰 재앙(‘네가’)을 입는 이야기를 만납니다. 아브라함은 재앙을 겪은 파라오에게서 양과 소와 수나귀 등 많은 재물을 얻어 이집트를 떠납니다. 아브라함이 네겝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탐하다가 큰 재앙을 입게 된 아비멜렉에게도 양과 소, 남종과 여종들을 얻습니다(창세 20,1-18 참조).

 

이 두 이야기에서 파라오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탐하다가, 곧 하느님의 계획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큰 재앙을 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내려 당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큰 재물을 얻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 덕에 타인의 재물을 바탕으로 자리 잡은 민족입니다. 탈출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은붙이와 금붙이, 옷가지 등을 얻습니다(12,35-36 참조).

 

이 재물은 약속의 땅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곧 주님의 성소를 짓고 그분을 섬기며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물이 이스라엘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마음이 굳어진 그들이 하느님을 위해 마련된 재물로 수송아지 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32,1-6 참조). 하느님을 위해 마련된 재물로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한 이스라엘도 결국 큰 재앙을 당합니다(32,15-24 참조).

 

또 다시 편집한 흔적이?

 

11,9에서 하느님께서는 파라오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런 뒤 뜬금없이 모세와 아론이 기적을 일으킨 과거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어떤 성경 번역(NIV)의 경우 11,9-10이 예전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회상 이야기’라고 여겨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었다. … 모세는 이 모든 기적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이는 히브리어 문법에 맞지 않으므로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결국 이 대목은 여러 자료를 편집하다가 생겨난 흔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1,9-10이 언급되고 나서 이야기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세부 지침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12,1-20 참조). 그래서 11,9-12,20을 모조리 빼버리면 이야기가 좀 더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계획을 알려 준 뒤,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불러 파스카 축제의 세부 준비 사항을 알려 주는 대목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무교절 규정을 어길 때의 처벌을 제시하는 구절에는 ‘본토인’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누룩 든 것을 먹는 자는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누구든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잘려 나갈 것이다”(12,19). 이에 따라 12,1-20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야 적용된 규정으로 보입니다. 성경 편집자가 자기 시대에 사용된 규정을 탈출 이야기 속에 넣었다는 말입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이 이미 탈출 사건 때부터 이어져 왔음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

 

파스카 축제는 니산 달 14일에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마련한 짐승을 잡은 뒤, 그 피를 받아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의식, 그리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서둘러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어로 ‘페샤’라고 불리는 파스카는 ‘건너뛰다’, ‘통과하다’는 의미를 지닌 ‘파샤’에서 나온 말로 여겨집니다. 이 축제와 더불어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내는데, 이 기간에는 급하게 이집트를 떠났던 선조를 생각하면서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파스카, 무교절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만찬이었다고 전하고(마르 14,12-16; 마태 26,17-19; 루카 22,7-13 참조),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때가 파스카 전날이었다고 전하여 이견을 보입니다(요한 19,14.31 참조). 그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파스카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탈출 사건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님 파스카 사건의 예형(例型)입니다.

 

파스카 축제의 준비와 열 번째 재앙(12,21-42 참조)

 

모세는 앞서 언급한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를 준비시킵니다.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지나가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을 거르고 지나가실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 파스카 축제를 준비합니다. 이집트인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의 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축제일이 됩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십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비로소 모세와 아론을 불러 제발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양과 소도 모두 가져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신을 위해 복을 빌어 달라고 청합니다. 이집트인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빵 반죽이 부풀기도 전에, 반죽 통째로 어깨에 둘러메고 이집트 땅을 서둘러 떠납니다.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하여 이집트인들을 죄다 털어 버립니다. 탈출기는 이렇게 라메세스를 떠난 이들이 장정만도 육십만 가량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살게 된 지 사백삼십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끔 만들어 주는 축제

 

열 번째 재앙과 파스카 축제, 무교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탈출기는 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규칙을 제공합니다(12,43-13,16 참조).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집트 땅에서 구해 내셨는지, 곧 주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드러내셨는지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이 축제를 거행하면서 자신의 기원과 신원을 확인합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은 이스라엘 후손이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 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미사를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원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탈출기를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셨는지 되돌아보며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도록 합시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탈출기 말씀 피정

(14)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면서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의 세칙을 마련해 주십니다(13,1-16 참조). 이번 호에서는 파스카 축제와 직결된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에 관해 살펴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광야로 이끌고 가셨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성경에서 하느님의 복은 맏아들을 통해 이어집니다. 야곱에게 하느님의 복을 팔아넘긴 에사우를 제외하고, 하느님의 복은 언제나 맏아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성경에 맏아들의 족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하느님의 복이 맏아들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복이 맏아들을 통해 이어지는 이유는 맏아들을 하느님의 소유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태를 처음 열고 나온 맏아들과 맏배를 하느님 것, 곧 거룩한 것으로 여깁니다. 곡식의 맏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처음 난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맏아들과 맏배, 맏물을 신성하고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가나안 땅에서도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의 흔적이 엿보입니다(2열왕 16,3; 21,6; 예레 19,4-5; 에제 20,31 등 참조).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를 거부하고, 맏아들 대신 대속 제물을 바쳤습니다. 13,1-2과 11-16은 이러한 관습을 탈출 사건과 연결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맏배와 맏아들을 치신 것을 기념하여 태를 처음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하지만, 문설주에 발린 피 덕분에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이 살아난 것처럼 맏아들을 대신해 양을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맏아들뿐 아니라 나귀도 대속 제물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와 양은 고기로 먹을 수 있지만, 나귀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울러 나귀는 짐을 지고 나르는 중요한 짐승이므로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속할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에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맏이와 맏배가 신성하다는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면, 창세 4장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면서 카인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지 않으셨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 여기서 카인은 그냥 땅의 소출을 바쳤지만,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인이 맏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내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정말 귀한 맏배인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누룩 없는 빵

 

13,3-10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을 전합니다. 누룩은 일반적으로 ‘썩는 것’을 의미하기에 부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마르 8,15 참조), 사두가이의 누룩(마태 16,6.11.12 참조)을 조심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13,3-10은 백성이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하는 바람에 누룩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파스카와 연결하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누룩 없는 빵을 떼어 주며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제병을 만들 때 누룩을 넣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집트 곧 과거의 누룩을 떨쳐버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메주자

 

탈출기는 누룩 없는 빵을 이레 동안 먹는 것과 맏아들과 맏배를 봉헌하는 것 모두 주님께서 하신 일, 곧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계속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손에 감은 표징과 이마에 붙인 기념의 표지로 여겨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뇌라고 말합니다(13,8-10.14-16 참조). 오늘날도 유다인들은 성구함(테필린)을 팔과 머리에 묶고 그 안에 담긴 성구를 꺼내 외우면서 하느님의 가르침이 마음과 머리를 다스리도록 합니다.

 

‘셔마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기도 성구(메주자)는 신명 6,4-9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셔마 이스라엘’을 외우면서, 하느님의 뜻(율법)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들은 메주자를 문설주와 대문에도 붙여 놓는데, 이는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메주자를 탈출하던 날 밤, 낮에 잡은 파스카 제물의 피를 발라둔 장소에 붙여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파괴자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린 피를 보고 지나친 것처럼, 파멸을 피하려면 언제나 메주자에 담긴 율법 곧 하느님의 뜻을 지켜야 하고, 그렇게 이스라엘이 그분의 율법에 충실하면 어떤 파괴자도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리라는 것을 함축하여 알려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는 이러한 관습이 이집트 탈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은연중에 알립니다.

 

우회로를 선택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으로,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 아모리족과 히위족, 여부스족이 차지한 땅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해안 길인데, 이 길이 통과하는 해안 쪽은 이미 필리스티아인들이 점령한 땅이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바다 너머에서 건너 온 민족으로 덩치가 대단히 크고 난폭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가나안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과 다윗 임금 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과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필리스티아인으로 다윗과 대적한 골리앗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막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열도 가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만나면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시어, 그들을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십니다(13,17-18 참조). 그리고 광야에 있는 시나이 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그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광야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지속되는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작은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다가 결국 40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을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가로질러 가는 빠른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 길에는 아주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워가더라도 가장 안전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 길에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길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알려 주십니다. 지금 만나는 어려움은 더 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당신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배려를 잊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한 채 하느님을 원망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계속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연되는 것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우리네 탓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우리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가 지연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시기 위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모습으로 함께하십니다. 또 다른 40년 광야 생활을 하고 계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탈출기 말씀 피정

(15) 이스라엘인들이 바다를 건너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드디어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넙니다. 탈출기는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을 매우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뒤늦게야 깨닫는 파라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끌어내시어 시나이 산에서 당신을 예배하게 만드신 뒤(3,12 참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십니다(3,17; 6,6-9; 12,25 참조). 하지만 파라오에게는 광야를 사흘 길 걸어가 하느님께 제사만 드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모세를 통해 명하십니다(3,18; 5,1-5.17; 7,16-17.26-27; 8,4 등 참조). 당신의 계획을 파라오에게는 명확히 알려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을 섬기러 광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새로운 땅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흘이 지난 뒤에야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내보낸 일을 후회합니다. “우리를 섬기던 이스라엘을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14,5) 그들은 곧바로 병거를 갖추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뒤쫓습니다.

 

전략가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탈출 과정에서 여러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파라오에게 당신 계획 중 일부만 알려 사흘의 시간을 버시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예배만 드리고 돌아올 줄 알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데,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파라오를 속일 전략을 세우십니다. 진군을 멈추고 돌연 이집트 땅쪽으로 되돌아가서 믹돌과 바알 츠폰 앞 바다 사이에 있는 피 하히롯 앞에 진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14,2 참조).

 

이집트를 떠난 이들의 수가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 육십 만 가량이었다고 하니 그들을 모두 데리고 이집트 병사들을 피해 재빨리 탈출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러 가나안 땅까지 올라올 것이니 그 싹부터 아예 없애 버리려고 작정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모조리 괴멸하시고자 미끼 하나를 마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행군 방향을 이집트 쪽으로 돌려놓아 이스라엘이 광야에 갇혀 헤매는 듯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파라오가 그 미끼를 덥석 뭅니다. 하느님께 잔뜩 겁먹었던 그가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을 뒤쫓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참된 주님임을 모든 이집트인이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4,4 참조). 마침내 파라오와 이집트의 모든 군대가 갈대 바다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하느님과 파라오 사이에 갈등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출발할 때 이집트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들고 당당하게 행진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을 뒤쫓아 바알 츠폰 앞 피하히롯 근처 바닷가에 진을 치자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님께 부르짖습니다(14,10 참조).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자 전략인데도 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끌고 나왔느냐고 모세에게 따집니다. 그러면서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놔두라고 아우성칩니다(14,11-12 참조). 하느님께서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를 상대로 놓으신 덫에 이스라엘 백성이 걸려 넘어진 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갈등합니다. 다시 한 번 역경을 이겨 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섬기느냐, 역경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를 섬기느냐.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느님과 이집트를 두고 누구에게 의지할지 계속 갈등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쳐들어와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뒤 남유다를 침공했을 때도 그랬고(2열왕 18,19-25 참조), 바빌론이 쳐들어왔을 때도 그랬습니다(예레미야서 참조).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한결같이 권하지만, 이스라엘은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에 손을 벌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었습니다. 이집트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친(親)이집트 정책을 펼칩니다. 이렇게 고집스러운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나라를 모조리 빼앗겨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관계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모세와 하느님의 구원 실행

 

모세는 이런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똑바로 서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 내시는지 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싸워 주실 것이니 잠자코 서 있기만 하면, 이집트인들을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4,13-14 참조). 그러고는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14,15-16). 하느님께서 나서서 모든 것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더러 직접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하느님의 명을 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 내시고,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십니다(14,21 참조). 바다를 가른 것은 모세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물을 갈라 백성이 바다를 건너가게끔 하시면서, 당신의 천사를 이스라엘 군대 뒤로 보내 구름 기둥으로 하여금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를 가르게 하십니다. 이집트 군대 쪽은 어둡게 하고 이스라엘 쪽은 밝게 하시어, 밤새 아무도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14,19-20 참조).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민족은 마른 땅을 걸어서 갈대 바다를 건너가는데, 이집트 병사들을 파괴할 그 물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보호벽이 됩니다.

 

이집트 군대는 이런 상황도 모른 채 계속 이스라엘의 뒤를 쫓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주님께서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트려 병거의 바퀴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자, 이집트 군대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14,24-25 참조).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집트인들은 죽기 직전에야 참된 주님이 누구인지 깨닫지만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상황을 이튿날 아침에 알게 됩니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됩니다(14,30-31 참조).

 

모세와 미르얌의 노래, 새로운 노래

 

모든 것이 마무리된 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 모세의 누이 미르얌은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 업적을 노래로 만들어 부릅니다(15,1-21 참조). 이 노래는 전쟁의 용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힘으로 원수들을 부수어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시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당신 이름을 알리게 되었음을 찬양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을 넘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분만이 참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만 갈대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죄가 다스리는 이집트 땅(묵시 11,8 참조)에서 세례를 받아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미르얌처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5,9-10).

 

이 대목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성도들의 기도요 새 노래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르게 될 노래입니다. 탈출 사건을 묵상하면서, 나는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새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아니면 왜 이집트 땅에 편안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냐고 따지며 투정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탈출기 말씀 피정

(16)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갈대 바다에서 떠나 광야로 나아간 이스라엘은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합니다. 마라에 다다라 겨우 물을 발견하지만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

 

오늘날 이집트의 성지를 순례할 때 시나이 산을 향하는 길목에서 ‘마라’라는 곳을 들릅니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마실 수 없게 된 물이 여러 웅덩이에 고인 모습을 그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곳이 탈출기의 마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뙤약볕을 버티며 사흘을 걸은 뒤 겨우 물을 발견한 이스라엘에게 그런 물웅덩이가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 주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15,24)

 

탈출기를 읽는 독자들 또한 마실 수 없는 물을 두고 불평하는 백성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탈출기는 백성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계속 ‘불평’했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언급합니다. 어려움에 빠졌다는 사실보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보인 반응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들이 초조하고 두려워하여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그분의 일에 계속 불평을 터트린다는 점을 강조합니다(15,24; 16,3.7-9 등 참조). 결국 마라의 쓴 물 이야기와 이어지는 이야기의 초점은 이스라엘이 겪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탈출기는 어려움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일에 반대하여 이집트로 되돌아가고자 했다고 전합니다. 성경은 하느님 외의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15,26에서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규정을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과 일, 계명과 규정이 당장 불편과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힘듦을 토로하고 도움을 청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그분의 계획을 틀어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15,25은 목마름의 상황을 하느님의 시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백성이 진정 당신의 뜻에 따라 사는지 하느님께서 확인하고자 하셨다는 말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좋은 것만 베푸셨다면 백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성이 진정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만을 하느님으로 섬겼을까요? 편안해지면 더 편안해지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하느님께서 아무리 편안한 길을 마련해주셨다 해도 백성은 불평불만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이는 태평성대를 누렸던 다윗과 솔로몬 임금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만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목마르고 배고픈 처지든 그렇지 않은 처지든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상황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를 결단해야 할 시험 상황이 됩니다. 하느님께 왜 이런 상황을 마련하셨는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의 순간에 백성은 모세를 찾아가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모세는 백성의 불만을 듣고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주시고,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져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백성이 시험에 걸려 넘어져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처음의 편안한 상태로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이를 통해 당신과 계약을 맺게 될 민족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탈출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준비시키시는지 잘 알려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밋더바르(광야)’가 ‘다바르(말씀)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또 다른 시험이 주어지는데, 배고픔과 관련된 시련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련 앞에서 다시 하느님께 불평을 터트립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16,3)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그 불평이 주님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합니다(16,8 참조). 자신들을 구해 새로운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백성에게 진노하지 않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십니다. 모든 이가 충분히 먹을 음식을 마련해 주십니다. 물론 더 가지려 하는 사람의 욕심을 알고 계시기에 매일 일용할 양식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부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결국 모세가 화를 냅니다(16,20 참조). 하느님을 대신해서 그들을 질책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언제까지 내 계명과 내 지시를 지키지 않으려느냐?”(16,28)

 

잠깐!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를 가든 계약의 궤를 매고 갔습니다. 계약의 궤는 솔로몬 임금이 성전을 지은 뒤에 지성소에 보관되었습니다. 궤 안에 아론의 지팡이, 십계명 돌판, 만나가 담긴 항아리를 보관했다고 전해집니다. 16,33은 이러한 점을 가리킵니다.

 

마싸와 므리바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를 떠나 시나이 산 쪽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또 물을 찾지 못합니다. 백성은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17,2) 하면서 모세와 시비합니다. 불평불만이 점점 커져 시비까지 붙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백성은 하느님이 아니라 모세에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17,3) 하고 따집니다. 그러자 모세는 백성의 불평이 자신뿐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어째서 나와 시비하려 하느냐? 어째서 주님을 시험하느냐?”(17,2)라고 말합니다.

 

성경 저자는 백성이 왜 불평했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목마름 때문에 불평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마름 자체보다 목마름 때문에 하느님께 불평을 터트리며 모세와 시비까지 붙은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불평불만이 얼마나 컸던지 모세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17,4).

 

급박한 상황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부르짖자 하느님께서 또 해결책을 내놓으십니다. 나일 강을 친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 물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모세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17,7) 하면서 주님을 시험했다 하여 그곳을 ‘마싸’와 ‘므리바’라고 이름 짓습니다. 마싸는 시험, 므리바는 둘 간의 논쟁이나 시비를 뜻합니다. 마싸와 므리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주님께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당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따져 물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님은 어디 계신가?

 

이번 달도 ‘주님은 과연 계신가?’라는 주제로 귀결됩니다. 이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창조 때부터 언제나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하고 묻곤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표징으로 당신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터트리기보다 그런 어려움에 담긴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묻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아갑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부활에 이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영원한 생명의 물을 가져다 주는 바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1코린 10,4 참조)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먹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히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탈출기 말씀 피정

(17) 나의 하느님은 도움이시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이스라엘 민족이 르피딤 골짜기에서 목이 말라 주님을 시험하던 때(17,1 참조)에 아말렉족이 몰려와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입니다. 17장과 18장은 르피딤에서 벌어진 이야기인데, 이번 호에서는 아말렉족과 싸운 이야기와 모세를 찾아온 이트로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말렉족과의 전투

 

아말렉족은 에돔이라 불리는 에사우의 손자이며, 엘리파즈가 팀나라는 소실에게서 낳은 아말렉(창세 36,12 참조)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오다 마침 피곤해 지쳐 있을 때, 하느님이 두려운 줄도 모르고 이스라엘을 공격한 야비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말렉족을 하늘 아래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없애 버리라고 명합니다(신명 25,19 참조). 17,14-16도 이 점을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 처음 전투를 치른 상대가 바로 아말렉족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장정을 뽑아 아말렉족과 싸우러 나가라고 명합니다. 그런 뒤 자신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아론과 후르(미르얌의 남편)와 함께 언덕 꼭대기에 오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족이 우세했습니다. 아론과 후르는 모세의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받쳐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둡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대신해 언덕 꼭대기에 서서 백성을 축복하는 모습을,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전투가 끝난 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일을 책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말렉족에 대한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셨음을 여호수아에게 똑똑히 일러 주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제단을 쌓고 ‘야훼 니씨(주님은 나의 깃발)’라고 이름 붙인 뒤, 주님과 아말렉족 사이에서 전쟁이 대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르피딤 골짜기에서 벌어진 전쟁은 아말렉족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아말렉족과 하느님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 길을 방해하던 아말렉족과 싸우셨다는 말입니다.

 

탈출기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대적한 이들을 다양하게 언급해 왔습니다. 가장 먼저 하느님께 대적한 이들은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그의 신하, 그리고 군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갈대 바다에서 그들을 모조리 치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을 대적한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주님의 길을 방해하고, 뒤로 돌아서 이집트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도 참아 주시지만, 나중에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만드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 아말렉족이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당신의 일을 이루어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잔인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아말렉족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그들과 대대로 전쟁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3,20-33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당신의 원수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모두 멸종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판관기와 사무엘 상·하권에 따르면 아말렉족은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뒤 이스라엘 백성과 가장 많은 전쟁을 벌인 민족으로 기록됩니다. 그들은 사울과 다윗 임금에 의해 매번 유린당하는 민족으로 기록됩니다.

 

한 민족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고,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섬뜩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이 참 두려운 분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하느님을 잔인한 하느님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해석한 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주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우상 숭배를 끌어들이는 이방 민족은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큰 위험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신과 관련된 이방 민족을 제거하고자 노력했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무섭게 그려진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자 한 이스라엘의 노력이 담긴 산물입니다.

 

바빌론 유배를 경험하면서 이방 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그림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이방 민족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방 민족을 창조하신 분도 하느님이라는 사실과 하느님의 복은 자신뿐 아니라 당신을 섬기는 이방인에게도 전해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분으로,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당신을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로 알려 주십니다. 이방인이나 원수를 쫓아내거나 죽이려 들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폭력적인 분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구약의 백성처럼 이방 민족을 죽이는 인종 청소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역시 이슬람 극단주의자처럼 자신이나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맙니다.

 

장인 이트로

 

미디안의 사제로 모세의 장인인 이트로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나서 모세의 아내 치포라와 치포라의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옵니다. 두 아이의 이름은 게르솜과 엘리에제르였습니다. 4,18-26에 따르면 모세는 이트로에게서 떠나면서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트로가 그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옵니다. 서로 다른 두 전승 자료에서 나왔거나 이집트 탈출이 너무 위험한 사건이기에 모세가 가족을 먼저 이트로에게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게르솜이란 이름은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40년간 이방인으로 살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으로, ‘낯선 땅에서 내가 이방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에제르는 이집트 손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하게 되었음을 기억하는 의미로 ‘나의 하느님은 도움이시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트로는 모세를 찾아와 주님이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그런 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 식사에서 이트로는 이스라엘을 위해 온갖 고마운 일을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진심으로 기쁨을 나눕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진 순간을 틈타 이스라엘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방인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을 위해 제사를 바치고 진심으로 구원의 기쁨을 나눈 이방인 이트로도 있습니다. 이트로가 속한 미디안족은 카인의 후손이었기에(판관 4,11 참조) 결국 이스라엘 백성과 원수지간이 됩니다. 그러나 이트로는 이집트 탈출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제사를 봉헌합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이 잘 조직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이라고 무조건 싫어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일을 해 나가는 이방인이라면 누구라도 스승으로 모셔 그의 조언을 기꺼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납니다.

 

재판관들을 세우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문의할 일이 생기면 모세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온종일 백성을 위해 재판하고, 하느님의 규정과 지시를 알려 줍니다. 이런 모세를 보면서 이트로는 일하는 방식이 좋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모세뿐만 아니라 백성까지 지쳐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트로는 사제였기에 경험과 경륜이 많았고, 그것을 토대로 모세에게 대리자의 역할 곧 예언자의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백성을 대리해서 백성의 일을 하느님께 고하고, 백성 앞에서는 하느님을 대신해 하느님의 규정과 지시를 밝혀 주며,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역할만 하라고 알려 줍니다. 그 외의 일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진실하며 부정한 소득을 싫어하는 유능한 이들을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으로 뽑아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라고 권합니다. 작은 일은 그들 선에서 해결하고, 큰 일만 모세가 관리하라고 권합니다. 모세는 이트로의 권고에 따라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이트로를 떠나보냅니다.

 

19장부터 모세는 오로지 하느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탈출기는 중재자로서 모세의 모습을 부각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트로 이야기는 시나이 산의 계약 이야기로 넘어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이제 다음 호부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탈출기 말씀 피정

(18)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드디어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 도착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준비합니다. 탈출기는 19장부터 계약 체결이라는 절정으로 달려갑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탈출시켜 갈대 바다를 건너게 하신 것도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나이 산이야말로 탈출의 궁극적 목적지입니다. ‘시나이 산 계약’이 없다면 탈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계약의 의미

 

시나이 산 계약 이야기는 탈출 19장부터 레위기를 거쳐 민수 10,10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집니다. 신명기는 앞서 다룬 계약을 요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나이 산 계약 이야기는 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계약 이야기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모든 규정이 담겨 있습니다.

 

시나이 산 계약은 하느님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에게 무조건 복을 약속하시는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조건부 계약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그들 가운데 머무르시면서 약속된 땅을 영원히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지만,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당신께서 내려 주시는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약 체결 약속

 

독수리는 새끼를 교육할 때 날지 못하는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날개짓을 하지만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새끼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낚아채 날개에 태운 뒤 다시 절벽 위의 둥지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이를 여러 번 반복하여 새끼를 새들의 제왕으로 키워 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에 태워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19,4 참조). 이집트 땅에서, 갈대 바다를 건너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역경을 겪은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들을 교육하시는 과정이었고,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당신 날개에 태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소유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시나이 산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한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소유라고 할 때, ‘소유’는 ‘세굴라’, 곧 임금이 왕궁 깊숙한 창고에 숨겨 놓은 보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할 때, ‘거룩하다’는 ‘카다쉬’, 곧 ‘하느님의 소유로 떼어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시나이 산 계약을 통해 하느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고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됩니다(19,5-6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백성의 원로들을 불러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자 온 백성은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19,7-8 참조). 온 백성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이 계약이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계약이 시작되었지만, 백성이 모두 동의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의 계약을 중재합니다.

 

모세가 백성의 동의를 하느님께 알려드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본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준비해야 할 점을 알려 주십니다(19,10-13 참조). 이 대목을 읽다 보면, 탈출기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뭔가를 상세히 전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는 이 계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또 이것이 단순한 구두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준비와 고민 끝에 서로 동의하여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임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백성이나 하느님 그 어느 편도 이 계약을 없던 일로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경은 이스라엘과 하느님 간의 계약 문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약 체결 준비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다가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9 참조). 구름은 당신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징으로 백성은 이를 보고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계약 체결을 위해 백성으로 하여금 정결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명하십니다(19,10-13 참조).

 

이스라엘 민족에게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러운 곳에 머무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끗함’은 언제나 ‘거룩함’과 연결되는데,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은 거룩한 곳이기에 언제나 깨끗한 곳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의로움과도 연결합니다(1코린 6,11 참조). ‘의로운 이’는 ‘깨끗한 이’이고, ‘거룩한 이’입니다. 이처럼 깨끗함은 윤리적인 면과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깨끗함을 유지하며 정해진 경계선 밖에 머무르면서 시나이 산에 내려오는 당신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산에 오르지도 말고, 산자락을 건드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실 장소, 율법이 주어질 장소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숫양 뿔 나팔 소리가 날 때, 곧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백성은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나이 산의 하느님

 

드디어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울립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 위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두려움에 떠는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와 산기슭에 서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줍니다. 모세가 백성을 데리고 나오자 시나이 산에 연기가 자욱해졌는데, 주님께서 불 속에서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십니다. 모세를 통해 잘 준비된 백성 앞에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학자들은 탈출기의 시나이 산 계약 장면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시나이 산이 화산이었으리라 추정합니다. 연기가 가마에서 뿜어 나오는 것처럼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리는 모습이 화산 폭발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곳 주변에 화산이 있을 법한 지역을 찾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시나이 산 계약 이야기는 시나이 산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게 되었음을 증언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 시나이라고 불리던 산으로 내려오셨다는 점입니다.

 

산봉우리로 내려오신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부르시고, 다른 사제들과 백성은 당신과 거리를 두게 하십니다. 밀려들다 서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십니다. 사제들과 백성은 봉우리 경계선 밖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준비시키신 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십니다(20,1-17 참조).

 

잠깐! 가톨릭 공용 《성경》은 19,1을 ‘셋째 달 바로 그날’이라고 번역하지만, ‘셋째 달 첫날’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리 되면 이스라엘은 첫째 달 십사일 밤 이집트 탈출, 곧 파스카 사건이 일어난 지 사십팔일 째 되는 날 시나이 산 아래에 도착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 곧 오십일 째 되는 날 아침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19,16 참조). 이스라엘이 파스카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며, 시나이 산 위에서 하느님과 자신들이 맺은 계약을 기념합니다. 이날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흥미롭게도 초대 교회 때 성령이 강림한 날도 오순절이었습니다(사도 2,1-13 참조). 우리 교회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시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새 오순절, 곧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생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독특한 이야기 기법

 

19장부터 이야기를 계속 읽어 보면 하느님께서 도대체 언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계약을 맺는 장면이 시작되는가 하면, 이내 지켜야 할 계약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말하다가 다시 계약 장면이 언급됩니다. 또 19,8에서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아뢰었다고 이야기하는데, 19,9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 말씀해 드렸다고 다시 언급합니다. 19,15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내려가 말하였다고 전하는데, 20,1에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20,22에 다시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계약 내용을 알려 주십니다. 다소 정신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규칙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탈출기 저자는 ‘재연 기법’을 사용합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다양한 면에서 다루기 위해, 앞서 이야기하던 흐름을 잠시 끊고 다른 면에서 해당 사건을 이야기한 뒤 다시 앞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때 앞서 언급한 마지막 대목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언급하는 것을 재연 기법이라고 말합니다(19,8-9 참조). 한 가지 이야기를 다양하게 전하는 것은 전승 자료가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부분에 관해 좀 더 살펴본 뒤, 십계명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탈출기 말씀 피정

(19)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19장의 계약 준비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계약 이야기의 구조와 십계명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계약 이야기의 구조

 

19장부터 시나이 계약 장면이 길게 서술됩니다. 처음 읽으면 계약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다음과 같이 구조화하면 계약 이야기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계약 이야기(19장: 계약 준비) - 율법(십계명: 20,1-17)

계약 이야기(20,18-21: 계약 준비) - 율법(계약의 책: 20,22-23,33)

계약 이야기(24장: 계약 체결) - 율법(성소 관련 율법: 25-31장)

계약 이야기(32-34장: 계약 파기와 재계약) - 율법(성소 관련 율법: 35-40장)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약 이야기(19장; 20,18-21)는 계약을 준비하는 대목이고, 세 번째 계약 이야기(24장)는 계약을 체결하는 대목입니다. 이 계약은 네 번째 계약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파기되었다가 다시 맺어집니다(32-34장). 이 계약 관련 이야기 사이에 계약 내용이 언급됩니다.

 

먼저 계약의 핵심 내용이 담긴 십계명이 주어지고(20,1-17), 십계명을 사회적 환경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관련 규정이 주어집니다(20,22-23,33).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소를 어떻게 건립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정이 주어집니다(25-31장; 35-40장).

 

계약 내용, 곧 계약 규정 가운데 성소 건립에 관한 규정은 다소 길게 다루어집니다. 이는 성소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거처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탈출하게 된 이유와 그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된 이유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성소 건립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계약 규정 가운데 가장 핵심 대목이라 할 십계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십계명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20,1)라고 시작되는 십계명은 계약 전체를 요약하는 하나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사람들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 곧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규정입니다.

 

잠깐!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그리스도인에게 맞게 조금 변형한 것입니다.

 

제1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한 분이신 하느님을 공경합니다. 따라서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한 분이신 하느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이 계명은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는 이미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이방신들은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버리게 한 크나큰 유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신들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강력히 다가온 신은 ‘바알’입니다.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 신은 비와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농경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가나안 땅에 자리 잡고 있던 바알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하느님보다 바알을 더 숭배하였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기도 했습니다. 제1계명은 이런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는 주님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만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신이 참 많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신으로 다가옵니다. 또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여전히 첫 번째 계명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2계명: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가나안 민족은 바알 신 이외에도 다곤, 아세라 같은 다양한 신을 형상화해서 섬기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하느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려는 욕구가 생겨 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욕구가 분출된 것이 바로 32장의 사건입니다.

 

자신들에게 하느님 같은 역할을 하던 모세가 40일 동안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은 당황합니다. 그러자 아론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 그래서 자신들을 안심시킬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백성의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으로 섬깁니다. 이러한 죄가 북이스라엘을 세운 예로보암에게도 발견되는데, 그 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주님을 섬기러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 주님으로 공경하도록 합니다(1열왕 12,20-33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 우상을 만드는 위험을 경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므로 어떤 형상으로도 얽매이셔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분이시며, 결코 하나의 형상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물론 계약의 궤나 커룹, 성막, 구름과 불기둥 같이 주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러한 상징물은 용인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상징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여기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잠깐! 가톨릭교회의 성상은 예수님과 성인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우상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상을 만드는 관습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처럼 사진기나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예수님과 성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부 신자들이 미신에 빠져 성상이 실제로 신비로운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기고 숭배하다 보니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행위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10세기경 동방 교회는 성화만 인정하고 성상을 거부하여 성상을 파괴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 역시 성상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상이 가져다주는 상징성과 교육 효과 때문에 성상을 만드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3계명: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 이름이 너무나도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면 하느님의 이름 대신 ‘주님(아도나이)’, 또는 ‘그 이름(하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사제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서 온 백성을 위해 그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3계명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부당하게’라고 번역된 말은 ‘샤브’입니다. 이 단어는 ‘거짓된’, ‘공허한’, ‘헛된’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을 두고 부당하다고 하실까요?

 

레위 19,12은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이스라엘은 “주님, 주님” 하며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죄를 짓고 그분의 계명을 어기다가 다른 민족 입에 하느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여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기도 했습니다(에제 36,16-38 참조). 이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가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탈출기 말씀 피정

(20) 시나이 산에서 주신 십계명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네 번째 계명부터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은 탈출기에 나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하나로 보지만, 여기서는 탈출기의 순서대로 십계명을 다룹니다. 그래서 계명 순서는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은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몸에 새겨진 계약의 표징 할례와 함께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창세 2,3)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신 뒤 이렛날에 쉬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렛날’에 하시던 일을 다 이루셨다고 전합니다(창세 2,2 참조). 이렛날에 쉬셨는데도 그동안 하시던 일을 그날 다 이루셨다는 말은 안식이야말로 창조의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입니다. 곧 안식으로 모든 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네 번째 계명은 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안식일을 하느님의 날로 떼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만큼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쉬어야 합니다. 이 휴식은 자신뿐 아니라 집안의 모든 사람, 나아가 종과 가축,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생산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함께 거룩한 날을 보내지 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쉼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결코 거룩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제4계명과 관련된 안식일을 주님의 날, 곧 안식일 다음 날이며 주간의 첫날인 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주일은 단순히 성당에 가는 날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쉬는 날입니다. 쉬면서 한 주간의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안식일, 곧 주일을 제대로 지키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계 때문에 쉬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쉼에서 소외되어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온전히 지킬 수 없게 하는 사회를 바라보면 참으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참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5계명: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와 관련한 두 번째 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을 잘 지켜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 섬기는 이들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이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이들은 그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에서 오래 살 것입니다.

 

제5계명에서 ‘공경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레’를 번역한 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 단어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마찬가지로 부모에 대한 공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게 생명을 부여받지만, 부모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부모의 형태가 다양해져 단순한 혈육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부모이든 인간은 부모 세대에게서 전해지는 다양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면, 결코 현재의 공동체 안에 녹아들 수 없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모든 이)를 공경하여 그들에게서 올바른 유산, 곧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5계명은 단순히 자녀를 위한 계명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부모를 위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부모가 공경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모가 여러 이유로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여 고통을 겪는 자녀가 많습니다. 다양한 가정 문제로 교육을 올바르게 받지 못하는 자녀도 많습니다. 이런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제5계명은 부모로서 올바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올바른 부모 상(像)은 올바른 하느님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모 공경의 연장선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우리 문화에서 제사가 일종의 미신 행위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신으로 여겨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 조상에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연장선에 있다고 여긴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제6계명: 살인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 계명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올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국한하여 지켜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대목에서 원수나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가 나옵니다. 그러나 탈출기의 제6계명에는 아무런 조건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어떤 경우라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의 생명이 그만큼 존엄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생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갖습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사형 제도나 인간 생명을 이용한 연구와 실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모든 일에 부정적 견해를 밝힙니다.

 

이 계명과 관련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좀 더 엄격한 가르침을 내놓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도 살인 행위라고 봅니다(마태 5,22 참조). 사람의 생명이란 육신의 목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한 사람의 모든 인격을 포괄하여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 역시 살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마태오 복음서는 이 계명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합니다. 곧 이 계명을 ‘화해하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합니다(마태 5,21-26 참조). 남을 살인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남이 자기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화해를 청하는 것 또한 제6계명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태오 복음서는 이 계명의 의미를 넓힙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죽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남에게 잘못해서 죽을죄를 지은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보고 적극적으로 뉘우치며 화해를 청하라고 가르칩니다.

 

제7계명: 간음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정은 모든 사회의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초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혼인 계약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간음은 올바른 혼인 관계를 거슬러 가정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중대한 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일부다처제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기 때문에(신명 21,15-17 참조) 구약성경은 남자의 경우 다른 이와 혼인한 여인과의 관계만을 간음으로 규정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 이혼을 허락하기도 합니다(신명 24,1-4 참조). 하지만 혼인 관계를 깨트리는 간음에 관해서는 사형이라는 극한 처분을 내릴 정도로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합니다(레위 20,10; 신명 22,22 참조).

 

신약성경은 간음과 관련한 계명을 더욱 엄격히 적용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경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합니다(마태 5,28 참조).

 

성 문화가 개방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 계명은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정 공동체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어떤 사회도 건전하게 서 있을 수 없으며, 간음은 가정 공동체를 깨트리는 가장 큰 죄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정결을 지킬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히브 13,4).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탈출기 말씀 피정

(21) 정의의 실현과 십계명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지난 호에서는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의 십계명은 탈출기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한 계명으로 엮고, 열 번째 계명을 두 가지 계명으로 나누고 있기에 탈출기의 십계명 순서와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혀 둡니다.

 

제8계명: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재물을 탐내어 도둑질하는 짓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허용되지 않습니다. 탈출기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도둑질한 이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잡아먹거나 팔았을 때에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를 배상하게 합니다(21,37 참조). 또 집에 들어갔다가 들킨 도둑의 경우 주인이 그를 때려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합니다(22,1 참조). 물론 해가 뜬 뒤에는 도둑이더라도 때려 죽일 수 없도록 규정합니다(22,2 참조). 도둑질한 사람은 자신이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되 그것이 아직 살아 있을 경우에는 갑절로 배상하게끔 규정합니다(22,2-3 참조). 이처럼 탈출기는 도둑질을 아주 엄중하게 처벌합니다.

 

성경에서 재물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재물을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써야 합니다. 재물을 소유한 이도 따지고 보면 하느님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는 땅도 해당합니다. 모두가 이 점만 인정하면 도둑질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욕심을 부려 남의 것을 더 차지하려 하고, 또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도둑질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욕심을 부려 다른 사람의 몫을 착취하고 빼앗는 것 역시 도둑질에 해당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탈출기는 백성 가운데 이방인, 고아와 과부, 가난하여 남에게 돈을 꾼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22,20-26 참조). 안식년에는 땅을 놀려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그 소출을 먹을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23,10-11 참조). 이는 그 땅의 본래 주인인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몫입니다. 성경이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부유함을 하느님의 강복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나 욥기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만 여기며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계속 축적하려고 하는 자세는 가난한 이를 배려해야 한다는 율법 규정을 어기는 큰 잘못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제8계명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줍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눌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제9계명: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재판에서 사람들의 증언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사형에 해당하는 재판의 경우, 반드시 둘이나 세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규정하였습니다(신명 17,6 참조). 그만큼 재판에 신중을 기하기 위함입니다.

 

재판에서 올바른 증언을 하는 것은 억울한 이를 풀어 주고, 죄인을 심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증언은 여러 목숨을 구한다(잠언 14,25 참조)고까지 말합니다. 반면에 거짓 증언으로 이웃을 해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니엘서의 수산나 이야기(다니 13,1-64)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산나 이야기에서 원로 두 명은 수산나를 탐하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거짓 증언으로 수산나를 모함하여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기지로 그들의 거짓 증언이 밝혀져, 수산나에게 가하려던 벌을 그들이 대신받게 됩니다.

 

거짓 증언은 단순히 재판과 관련된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탈출기는 거짓 증언의 예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 악인과 손잡고 거짓 증인이 되는 것, 다수를 따라 정의를 왜곡하는 증언을 하는 것, 뇌물을 받아 눈이 멀어 잘못된 송사를 하는 것 등이 모두 거짓 증언에 해당합니다(23,1-9 참조).

 

또한 마태오 복음서는 거짓 맹세하는 것 자체가 거짓 증언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는 그것이 이웃에게 불리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아예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말하라고 권합니다(마태 5,33-37 참조).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는 요즘입니다. 속여야 살 수 있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 증언, 거짓 맹세와 관련된 제9계명을 상대화시키려는 시도도 많습니다. 하지만 제9계명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거짓 위에 서 있는 공동체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거짓 맹세와 거짓 증언이 판을 치는 공동체는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제10계명: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과 잘 연결됩니다. 하느님께 받은 소유물을 잘 관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쓰며, 공동선에 부합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의 집과 아내,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등을 탐내는 것, 그것은 결국 공동체를 깨트리는 죄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제10계명을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두 계명으로 나눕니다. 이는 신명 5,21이 집 대신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말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남의 것을 탐내게 되는데, 그런 마음 자체를 갖지 말라는 것이 바로 제10계명입니다.

 

제10계명이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데 머물지 않고, 내적으로 그것을 탐내지도 말라고 강조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인데, 욕심이 큰 화를 불러온다는 점을 지적하는 듯합니다.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 남이 차지한 자리, 남이 가진 재산 등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도태되고 좌절하며 실패를 거듭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참으로 지켜 내기 어려운 가르침인 듯합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탐내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그런 세상은 결코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참으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려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개자 모세

 

모세가 십계명 말씀을 받고 있을 때 백성은 우렛소리와 불길,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을 멀찍이 서서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였기에 스스로 하느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모세에게 하느님을 대신해서 말해 주기를 청합니다. 직접 하느님을 대면하여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면 죽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말을 꼭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역할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 곧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신명기는 모세를 가장 이상적인 예언자로 소개합니다(신명 34,10 참조).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전달해 준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모세보다 위대한 분으로 그립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고, 또 그렇게 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던 예언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모세만큼 하느님의 뜻을 잘 전달한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예언자 모세가 하느님의 뜻으로 전한 율법을 담은 책이 곧 오경입니다.

 

모세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백성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려고, 그리고 너희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 죄짓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20,20).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에 속한 책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 곧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람이니, 탈출기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모세가 전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계약의 책

 

중개자 모세는 백성에게 십계명에 이어 여러 규정을 전해 줍니다. 계약 법전이라고도 부르는 이 “계약의 책”(20,22-23,33)은 십계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장한 규정들을 담고 있습니다. 계약 법전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명기 법전(신명 12,1-26,16 특히 20,22-23,33)과 성결 법전(레위 17-26장)과 분명한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 차이점은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고, 이번 호에서는 세 법전의 공통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법전은 모두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 이방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더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과 큰 차이점을 보여 줍니다. 당시 함무라비 법전은 주로 사회의 지배 계층인 지주나 노예의 주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재산권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재산과 관련된 범죄를 저지르는 이를 중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율법은 달랐습니다. 계약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율법은 사람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재물에 대한 소유권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우리는 채무자의 인간다움을 보호하도록 규정하는 계약의 책(22,24-26 참조)에서 이 점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탈출기 말씀 피정

(22) 약자를 위한 하느님의 법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오경에는 계약 법전(20,22-23,33), 신명기 법전(신명 12,1-26,16), 성결 법전(레위 17-26장)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세 법전을 간략히 살펴보고 그중 ‘계약의 책’이라고 불리는 계약 법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 법전의 차이점과 그 의미

 

오경이 한 시대, 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은 세 가지 다른 법전이 오경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 법전이 어떤 면에서 다른지 그 예를 하나만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21,2-11에는 히브리인이면서 종이 된 이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이 법에 따르면 남종과 여종의 경우 처우가 다른데, 남종의 경우는 일곱째 해에 자유로운 몸으로 풀려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종은 남종이 풀려 나가듯 나가지는 못합니다. 또 남종의 경우 결혼을 하였다면, 아내와 자식은 데리고 나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아내와 자식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종신토록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명 15,12-18에도 히브리인이면서 종이 된 이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이 율법 규정을 대충 살펴보면 탈출기의 내용과 동일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탈출기와 달리 남종과 여종에 관한 규정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명기의 규정에 따르면 여종 역시 남종과 동일하게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하고 나면 풀려 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는 종이 되는 이들을 두고 ‘너희 동족’, 곧 ‘너희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종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주인의 형제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명기의 시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나 형제자매이며, 남자든 여자든 구분 없이 동등하게 율법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규정은 탈출기의 율법 규정보다 더 진일보한 규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위 25,39-55을 보면 종에 관한 율법이 또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규정을 읽어 보면 히브리 출신 동족의 경우는 아예 종으로 부릴 수 없도록 규정하는 듯합니다. 레위기는 가난하여 자신을 판다 하더라도 그를 종부리듯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레위 25,39 참조). 레위기는 마치 이스라엘에서 노예 제도 자체를 없애 버리는 듯합니다.

 

이처럼 종에 관한 법률만 살펴보더라도 오경에는 세 가지 다른 규정이 존재합니다. 학자들은 세 대목의 법전을 구분하여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율법 모음은 계약 체결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여 ‘계약 법전’이라 부르고,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모음은 신명기 정신에 입각하여 만들어졌다 하여 ‘신명기 법전’이라고 부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 모음은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 거룩해져야 한다’(레위 11,44 참조)는 레위기의 정신을 드러낸다 하여 ‘성결聖潔 법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법전은 각기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 다릅니다. 계약 법전이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의 율법 규정이라고 한다면, 신명기 법전은 요시야 임금 시대를 전후로 새로운 시대에 맞게끔 율법 규정을 발전시킨 것이고, 성결 법전은 유배 이후 사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 적합한 규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역사에서 새롭게 드러나게 된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느 것도 제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종에 대한 법률에 관해 다른 시각을 가진 법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것들을 모두 품어 다 담아 둘 뿐만 아니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물론 전체의 일관성은 흐트러질 수 있겠지만, 성경 저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규정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 규정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이야기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하느님의 뜻, 곧 새로운 계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태복수법

 

계약 법전(20,22-23,33)에는 예배와 축제 관련 규범과 일상생활에 관한 규정이 다양하게 언급됩니다. 이 규정들을 일일이 다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지면 관계상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동태복수법과 약자 보호법에 관해서만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동태복수법 규정은 이러합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21,23-25). 얼핏 보면 잔인한 원시의 법처럼 보입니다. 손을 다치게 한 이의 손을 해하거나 눈을 다치게 한 이의 눈을 해하는 것. 생각만 해도 끔찍한 복수 행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의 보상 제도, 곧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금전으로 보상하는 것이 더 문명화된 제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계약 법전에도 다양한 벌금형 제도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곧 동태복수법은 잔인한 고대 사회의 법이 아니라, 벌금형 제도를 보완하는 제도였습니다(21,22 참조). 그렇다면 왜 굳이 동태복수법을 만들었을까요?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태복수법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다툼이 대부분 피를 부르는 복수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폭력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기원전 18세기 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임금은 개인의 복수를 형법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생겨난 것이 동태복수법입니다. 함무라비 임금은 특히 상류 계급이 피해자일 때 이 법을 적용했는데, 상류 계급이 조금만 해를 입어도 과도한 복수를 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손을 다쳤는데도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다거나 하는 짓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동태복수법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당한 복수의 범위를 정하기 위한 법이었지, 잔인한 복수를 허용하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계약 법전은 이런 동태복수법을 받아들여, 복수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그런데 계약 법전의 경우는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과 다소 다릅니다. 상류 계급이든 하류 계급이든 똑같이 이 법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신명기는 이 법을 거짓 증언자에게도 적용하도록 확장합니다. 곧, 거짓 증언한 “그가 자기 동족에게 하려고 작정하였던 것과 똑같이 그에게 해야 한다”(신명 19,19)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동태복수법은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 안에서 잘못된 악을 제거하기 위한 규율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복수 자체를 하지 말라고 권하십니다(마태 5,38-42 참조). 그러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마태 5,43-48 참조). 진정한 정의로움은 용서에 있음을 특별히 강조하신 것입니다.

 

약자 보호법

 

대표적인 약자 보호법은 22,20-26에 언급됩니다. 돈을 꾸어 주면 돌려받는 것이 정의이지만, 계약 법전은 “가난한 이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에는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22,24)고 권합니다. 또한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22,25 참조).

 

이 율법은 돈을 꾸어 준 사람에게 불공평한 규정인 듯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계약 법전은 다음과 같이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본래 우리 모두가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고 약자였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분노하시면 우리 아내와 아들들도 과부나 고아가 되어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곧, 그분은 약자의 목소리에 항상 귀 기울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올바로 대하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을 치시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 약한 이들에게 나눠 줄 수도 있는 자비하신 분입니다(22,26 참조).

 

굳이 이런 이유들을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제 동일한 규정을 적용할 때 항상 피해를 보는 편은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사회 교리는 약자들을 먼저 선택할 것을 권합니다.

 

계약 체결 과정

 

하느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오직 한 분인 당신을 섬기고, 이방신들과 계약을 맺지 말라고 경고하신 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시나이 산 위에서 계약을 맺으십니다(24,1-11 참조).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주님의 말씀과 법규를 일러 줍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24,7)라고 약속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 뒤, 산기슭에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워 본격적인 계약 체결 예식을 준비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예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송두리째 태워 바치는 번제를 올립니다. 이 번제는 그들이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된 민족임을 드러냅니다. 번제를 올린 뒤, 젊은이들은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로 바칩니다. 이때 그들은 주님께 속하는 기름기만 태워 바치고 나머지 고기를 주님 앞에서 나눠 먹는 친교 예식을 행하여, 하느님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도 친교를 도모합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소의 피 절반을 제단에 뿌려 하느님께서 계약을 수락하셨음을 드러내고, 백성에게 다시금 다짐을 받은 뒤 그들에게 남은 피를 뿌려 계약이 맺어졌음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백성 편에서 전적으로 동의했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피를 뿌린 뒤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24,8). 고대의 계약 관습에 따르면, 수송아지를 잡아 피를 반씩 나누어 뿌리는 예식은 계약을 어길 경우 수송아지와 동일한 처벌을 받겠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므로, 생명으로 되갚겠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처럼 피로써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이 계약 역시 우리의 전적인 동의로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과연 목숨을 걸고 그 계약을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탈출기 말씀 피정

(23) 우리 가운데 머물고자 하시는 하느님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이제 탈출기 피정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소를 통하여 백성 가운데 머물고자 하시는 하느님(24,12-40,38)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신 산으로 모세를 불러, 그에게 성소 건립과 사제직에 관한 지침을 내려 주십니다(24,12-31,18). 광야에서 백성 사이에 마련하시려는 당신의 거처와 당신을 위해 봉직할 사제에 관해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 함께 묵상해 보려 합니다.

 

산으로 올라간 모세

 

주님께서는 계약을 체결한 뒤 모세에게 산으로 올라와 머물라고 지시하십니다. 하느님의 명에 따라 모세는 시종 여호수아만 데리고 하느님의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백성에게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계약을 맺었던 산기슭(24,4 참조)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합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과 주님의 영광이 온 산을 뒤덮었습니다. 그 영광이 산봉우리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24,17 참조)고 전합니다. 구름이 덮여 있고 불이 치솟는 이미지는 화산을 연상케 하기에, 어떤 학자들은 시나이 산이 화산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실제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찌 되었건, 모세는 산에 올라가 엿새를 기다립니다. 이렛날이 되자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구름을 뚫고 산으로 들어가 밤낮으로 사십 일을 하느님과 함께 지냅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 건립과 사제직 및 제사, 안식일 등에 관한 규정을 내려 주십니다. 그분은 그것을 돌 판에 기록하여 모세에게 건네는데(24,12; 31,18 참조), 이 모든 장면이 마치 하나의 예식같이 느껴집니다.

 

산 아래 백성의 지도자들

 

모세는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동안 문제가 생기면, 아론과 후르에게 상의하라고 백성에게 일러 줍니다. 아론은 모세가 일러 준 방식에 따라 백성을 이끌도록 선택된 인물로 소개되고(4,14-17 참조), 성소가 지어진 뒤에는 그곳에서 하느님 제단에 봉사하는 사제가 된(28,1 참조) 인물입니다. 후르는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산 위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주었던 인물입니다(17,12 참조). 그는 유다 지파 출신으로 칼렙의 아들이었는데, 칼렙은 가나안을 정찰했던 열두 명 가운데 여호수아와 함께 유일하게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가나안을 치러 올라가자고 외친 이였습니다(민수 13,1-33 참조).

 

광야 생활을 했던 장정 가운데 오직 여호수아와 칼렙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후르에게는 브찰엘이라는 손자도 있었습니다. 탈출기 원문은 브찰엘의 이름을 다섯 번이나 언급하는데, 성소 건립의 주역이었기 때문입니다(31,2; 35,30; 36,1; 37,1; 38,22 참조).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모세에 이어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던 여호수아는 에프라임 지파였고, 아론을 도왔던 후르는 유다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파는 솔로몬 사후 나라가 갈라졌을 때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남북 분열의 주역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지파 사람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수도 스켐 또한 에프라임 지역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었던 르하브암은 유다 지파 임금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남과 북이라는 묘한 대조가 여호수아와 후르 사이에도 놓여 있는 듯합니다.

 

여기에서 사제직을 대표하는 아론 옆에 후르가 함께 있는 것 또한 무척 흥미롭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임금은 솔로몬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모세가 시종 여호수아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아론과 후르에게 산 아래 문제를 맡기는 모습이 마치 땅에서 임금이 사제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듯한 형국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분열 왕국 시대의 역사를 투영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남쪽 유다 임금들이 칼렙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후르가 아니라 람의 후손들이라는 점,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여호수아로 대표된다면,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운 이들로 그려진다는 점이 다소 이상합니다. 오경은 북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 땅에서 최종 편집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론의 황금 송아지 이야기와 북이스라엘의 예로보암이 단과 베텔에 세운 황금 송아지상 사건이 묘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성경 이야기에 저술되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이 어느 정도 투영된 듯 보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어떤 이야기가 어떤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는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성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로 쓰일 성막과 그 안에 들어갈 각종 기물 만드는 방법을 직접 지시해 주십니다.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로 들어가 머무실 거처(25,8-9 참조)가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소는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성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성막 제일 안에 위치한 지성소의 계약의 궤에 좌정하시고, 그 궤를 발판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25,22; 민수 7,89; 1사무 4,4; 2사무 6,2 참조).

 

성소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이 이루어졌던 시나이 산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머물면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실 때에도, 백성이 머물던 장소와 원로들이 올라가 머물던 곳,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던 곳이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백성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성막 앞의 뜰, 사제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막 내부의 성소, 그리고 대사제만이 다가갈 수 있는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막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또 이 지성소에 위치한 계약의 궤 안에 십계명 돌 판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는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십계명 돌 판을 받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소에서는 분향이 끊이질 않았고(30,1-10 참조) 등도 늘 켜져 있었는데(27,20-21 참조), 이는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 위에서 드러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불과 구름 기둥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는데,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성소의 등과 분향입니다. 이처럼 시나이 산과 성소, 불과 구름 기둥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거처하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이 표지는 솔로몬 시대에 시온 산(성전 산) 위에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지어진 뒤, 성전으로 완전히 대치됩니다.

 

사제 직분

 

성소가 건립되어 하느님께서 그곳에 머무시게 되자, 하느님을 위해 봉사할 사제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들을 영광스럽고 장엄한 모습으로 만든 뒤, 슬기의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재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28,1-3).

 

하느님은 사제들이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 정해 주시는데, 그 규정은 매우 까다로워 보입니다. 특히 사제들 가운데 대사제의 역할을 수행할 아론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열두 개의 보석이 달린 에폿을 걸쳐야 했습니다. 또한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긴 보석들이 달려 있는 가슴받이를 걸쳐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그들의 이름이 기념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슴에는 판결 가슴받이를 만들어 달았는데, 거기에는 우림과 툼밈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림과 툼밈은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한 것으로, 아론은 항상 그것을 가슴에 지니고 다니면서 백성에게 판결을 내려 주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하느님을 위하여, 또 백성을 위하여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게 된 아론도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흠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했습니다. 아론의 이런 비참함은 겉옷에 달린 방울이 잘 보여 줍니다. 아론 역시 하느님께서 계신 성소에 들어가거나 물러설 때에는 방울 소리를 울려야 했습니다. 울리지 않으면 비참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28,35 참조). 하지만 아론은 분명 “주님께 성별된 이”(28,36)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예물을 봉헌할 때 ‘주님께 성별된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순금 패를 이마에 달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봉헌물을 받칠 때 피를 쏟으면서 생기게 되는 부정을 아론이 대신 짊어짐으로써 모두의 부정을 피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28,38 참조). 이런 점에서 아론은 하느님을 위한 사제이기도 했지만,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이기도 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외에도 하느님이 정해 주시는 복장을 갖추고 제단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소가 더럽혀지게 되어, 하느님께서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라 하더라도 성소를 더럽히는 죄를 지으면 죽음이라는 처벌을 면치 못하였는데(28,43 참조), 이것이 바로 아론과 그의 후대 자손들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규칙이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임직되는 예식과 관련된 규정, 제단 축성, 제단에서 바쳐야 할 일일 번제물과 분향 제단과 제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꼼꼼하게 알려 주십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외에도 많은 규정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모든 명령을 내리신 뒤, 돌로 된 두 증언판에 그 말씀들을 당신 손가락으로 손수 기록해 모세에게 주십니다. 이러는 가운데 산 아래에서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모세가 산에서 40일간이나 내려오지 않자, 백성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32,1).

 

다음 호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머물고자 하시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이스라엘 민족의 뻣뻣한 태도와 아론의 황금 송아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탈출기 말씀 피정

(24) 참지도자 모세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탈출기 말씀 피정의 마무리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황금 수송아지로 인한 계약 파기와 모세의 중개를 통한 재계약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황금 수송아지 상 이야기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머무는 동안(24,12-18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에 떱니다. 자신들을 이끌던 모세가 보이지 않자, 아론에게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아론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가져 올라가게 하시어 당신의 일을 위해 쓰고자 하셨던 금 고리들을 모아 수송아지 상을 만든 뒤,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32,8)라고 선포합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느님(33,20 참조)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사람들이 안심하도록 만든 뒤, 그 앞에서 야훼, 곧 “주님을 위한 축제”(32,5)를 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론과 백성의 이러한 우상숭배를 보시고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32,7)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데려온 “모세의”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데려오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금 그들을 모세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이 대목 시작에서 자신들을 데리고 올라온 이가 모세라고 고백합니다(32,1 참조). 그들은 여러 가지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모세가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빼내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섭섭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개

 

파라오는 처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마음이 딱딱해져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성이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의 계획을 틀어놓습니다. 굳은 마음을 지닌 백성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결국, 이런 백성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진노를 터트리십니다. 모세는 진노하시어 백성을 버리려 하시는 하느님께 애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바로잡아 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시며, 이 백성은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32,11). 그러면서 당신 자신을 걸고 후손을 별처럼 많게 해 주고 땅을 차지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32,13 참조).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제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세 15,13-21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이 약속은 오직 당신에게만 매인다는 의미로, 당신 자신이 쪼개진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신 바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 역시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켜야 하지만, 이 계약은 하느님 편에서 하신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기시면, 당신의 이름이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지게 되는 그런 약속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바로 이 점을 들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보시고 진노하시어 그들을 처벌해 버리신다면, 이집트인들까지 하느님을 두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재앙을 거두십니다.

 

아론의 변명과 모세의 단죄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거두시자, 하느님을 대신하여 모세가 백성에게 분노를 터트립니다. 모세는 우상 숭배 장면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어올라 하느님이 직접 만드신 두 증언판을 내던져 깨 버립니다. 하느님은 재앙을 거두셨지만, 모세 편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이 깨어졌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수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그런 다음 모세는 아론에게 백성을 도대체 어떻게 방치하였기에 그들이 이렇게 큰 죄악을 저지르도록 두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지 않았느냐며, 모든 것을 백성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고는 금을 그들 손에서 받아 거푸집에 부어 직접 자신이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음(32,4 참조)을 부인하면서, 자신이 금붙이를 불에 던졌더니 수송아지가 나왔다고 변명합니다(32,24). 백성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감싸려던 모세와 아론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아론을 추궁한 뒤 모세는 백성을 바라봅니다. 그들을 올바로 이끌지 못한 아론 때문에 화가 났지만, 제멋대로 구는 백성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적들에게 이미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편에 서든지, 계속 주님의 적이 되든지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이때, 모세의 편에 선 인물들은 레위의 자손들뿐이었습니다. 비록 창세기에서는 폭력적인 집단으로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창세 34,25-29; 49,5-7), 레위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이 속해 있던 지파로서 하느님의 것으로 성별될 그런 지파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죄를 저지른 이들을 만나는 대로 죽이라고 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날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이 쓰러지게 됩니다. 사실 이집트를 떠나올 때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던 장정만 육십만가량 되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12,37 참조), 삼천 명은 0.5%밖에 안 되는 수였습니다. 아마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죄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편에서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단죄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죄에 대한 모든 처벌이 마무리됩니다.

 

모세의 두 번째 중개

 

증언판을 깨뜨려 계약을 원점으로 돌려 버린 모세는 다시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백성을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당신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도 지워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 모습에서 또다시 아론과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32,31-33). 백성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면서도 그들의 죄를 물어 하느님을 대신해 먼저 벌을 내린 모세. 하지만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더 이상 틀어지지 않도록 자기 목숨을 걸고 백성의 용서를 간청하는 모세. 정말 이상적인 지도자요 중개자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청을 듣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 줄 테니 그 천사와 함께 시나이 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33,3)고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같이 가다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께 다시 간청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면 누구를 함께 보낼지 알려 달라고, “당신의 길”(33,13)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이 백성이 하느님 “당신 백성”(33,13)이라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면 누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겠느냐는 외침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바꾸시어 그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당신이 직접 백성과 함께 가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33,17).

 

하느님의 현현과 계약 갱신

 

모세는 하느님께 확실한 징표를 받아 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 청합니다. 그의 앞에 나타나시어, 다시 계약을 맺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금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야훼라는 당신의 이름을 다시금 선포하시고,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자비와 동정이 가득한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34,6-7) 계십니다. 만약 하느님이 자비와 동정이 가득한 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진작부터 파멸되었을 것이 뻔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매번 자애롭게만 돌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계약을 어겼을 때에는 징벌을 내리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벌하지 않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34,7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뒤,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돌 판에 당신의 계명을 적어 주지 않으시고, 모세가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직접 판에 기록하게 하십니다(34,28). 이렇게 계약이 이루어진 뒤 모세는 빛나는 얼굴로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계약 말씀에 따라 성막을 만들고, 이스라엘 가운데 머무시는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과 함께 머무시게 됩니다.

 

이 만남의 장막은 항상 구름으로 덮여 있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불 기둥이 구름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남의 천막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서 항상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모세는 이 성막 안에서 하느님께 말씀을 전해 들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됩니다.

 

이제 탈출기 묵상을 마무리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탈출을 경험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당신 약속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