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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 변종찬 마태오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2.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나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나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변종찬 마태오 신부

 

 

사람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추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 본성 안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누구도 불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경제 형편이나 정신 상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나는 불행해지고 싶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이가 “정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행복에 대한 보편된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다툼, 폭력, 억압, 아픔, 질병,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점과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는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랑해야 할 의무와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행복일까요?

 

우리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저마다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풍요와 여유로움이 행복이라고 여겨 세상의 명예와 부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삶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한 분 한 분께 “행복이 무엇일까요?”라고 묻는다면, 모두 다른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취업을 앞둔 대학생은 “제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행복이겠죠”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청소년은 “원하는 대학의 학과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몇 뼘밖에 안 되는 인생에서 현세의 삶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의 이면에는 현세의 삶이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해도, 이 세상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삶의 무상함에 대해 성경은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이사 40,6-7)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시간의 소용돌이는 인간을 잡아당기고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유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인생에 대해 시편은 이렇게 외칩니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제가 살 날들을 몇 뼘 길이로 정하시었습니다”(시편 39,6). 다른 시편에서도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요새는 ‘100세 시대’라고 이야기하며 예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이 늘었다고 하지만, 시편이 ‘몇 뼘밖에 안 되는 삶’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간의 삶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짧은 삶을 이 세상에서 지내는데도 우리는 현세의 삶을 사랑합니다. 짧은 생애 동안 고통 가운데 행복한 날들을 찾으며 끝모르는 장수를 바라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행복 선언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케 하는 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행복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마태 5-7장에 나오는 산상 설교, 특별히 5장에 등장하는 ‘행복 선언’에 주목하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상 설교를 신약성경의 핵심 메시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핵심적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도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완전한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하게 형성하는 모든 계명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 설교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여덟 가지 단계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를 ‘행복 선언’이라 부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행복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맞게 형성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 선언을 통해 하느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그분을 소유할 수 있는지 제시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전에 이레네오 성인(140-202년경)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곧 하느님을 느끼고 사랑하고 그분을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살면서 그분을 느끼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아가야 하겠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하기를 바란다’와 ‘나는 행복하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지금 덜 행복하거나 불행하기에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십니다

변종찬 마태오 신부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바라실까?’ 이 질문은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고통받기를 바라실까?’ 인간이 고통받기를 바라신다면, 그분은 인간을 만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존중하고 아끼십니다.

 

창세 1-2장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모습이 진정 행복한 인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하느님과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창조와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말입니다.

 

행복의 첫 번째 필요조건은 ‘선에 대한 지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행복이 무엇인가,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부터 시작합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한 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갔다, 바라던 경제적 풍요로움이 생겼다’ 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긴다면 그것들의 공통점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고 소유해야 할까요?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응합니다.

 

참된 행복이 되기 위한 ‘매개물’에서 악은 분명 제외됩니다. 행복의 첫 번째 필요조건은 ‘선(善)에 대한 지향’입니다. 누군가 내게 고통을 주었다면, ‘그가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죽는다면 내가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 통쾌할 수는 있겠지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지향 자체가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이는, 물론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이가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나 옳지 않은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따라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며 동시에 어떠한 악도 원하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행복한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바라는 그 선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 풍요로움이 이루어졌다 칩시다. 순간 행복하겠지요.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슬슬 불안해집니다. 따라서 선을 지향하되 그 선이 행운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화에 종속되지도 않고 영원해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 사라지는 것,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 등 세속의 것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안심하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더 높은 소득을 얻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 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궁핍하게 만든 면도 있습니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기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할 때 질투합니다.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영웅담을 들을 때 더욱 그러하며, 그런 이야기는 인간에게 큰 환상과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펜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펜이 없느냐? 제 책상에 가면 펜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쓰는 펜을 한참 쳐다봅니다. 제 방에 있는 펜만 갖고도 10여 년을 쓸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문구점에 안 가려고 합니다. 보면 또 사게 되거든요.

 

또 권력은 사람의 가치를 지위에 따라 평가하게끔 만듭니다. 내가 낮은 지위에 있으면 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덜 훌륭한 존재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그들과 연을 맺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권력에 대한 지향은 인간을 속물로 만듭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우호적 시선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훌륭해. 뛰어난 사람이야’ 하고 칭송을 받고 싶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죠. 그러니 명예를 지키기 위해 늘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결국 참된 행복은 먼저 그 대상이 영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도록 나와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재물, 권력, 명예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빼앗길 수 있고, 그래서 참된 행복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진리를 향유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향유한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진리가 하느님임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을 향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행복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시는 샘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변종찬 마태오 신부

 

 

인간의 행복 추구는 창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또는 친교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향유하도록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 곧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창조되었기에,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기 전까지 충만한 완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은 저를 ‘변종찬’이라는 이름 대신 ‘누구네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를 보며 제 부모님을 연상한 것이지요. 또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어떤 그림은 화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아, 이건 누가 그렸겠다’ 하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화가의 화풍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아가는 가능성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요, 그분과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상성은 그것을 새겨 주신 분께 나아가지 않으면 보존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의 모상은 한 곳에 정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참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하나이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결국 행복해지려면 하느님을 소유해야 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영혼을 충족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안식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불안함을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물체는 제 무게 따라 제자리로 기울고, 무게란 밑으로 미는 것만이 아니요, 제자리로 기우는 것. 불은 위로 당기고, 돌은 아래로,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 물속에 버린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던진 물은 기름 아래로 잠기니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질서 없는 곳에 불안이 있고, 질서가 있으면 곧 평온이 있습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옵니다”(《고백록》 13권 9장).

 

모든 사물은 다 자기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그 무게에 따라 어떤 것은 아래로 어떤 것은 위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만약 연기가 아래로 내려간다면? 돌을 떨어뜨렸는데 하늘로 올라간다면? 황당한 일이지요. 이렇게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질서가 깨진 상태, 곧 불안한 상태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라고 말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또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 사이에 있는 사랑을 일치시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됩니다. 나의 사랑이 그것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아우구스티노는 “당신 안에 쉬기까지 불안하나이다”고 말합니다.

 

‘존재론적 무게’이며 인간의 구성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은 결코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긍정의 요소이며, 인간이 본성상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표징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이 육신의 생명인 것과 같이,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의 존재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인식은 오류를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행복으로 가는 영적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 이후에야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며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선취先取된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은 희망에 기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행복을 지향하며 살아갈 길을 알려 줍니다. 희망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며, 어느 정도 미리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합니다. 사랑은 목적지로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결국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영적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길을 우리에게 먼저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으려는 인간의 노력이요 협력입니다. 이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장 핵심 표현이라고 할 ‘행복 선언’에 따라 사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자신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해 주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그분 스스로 이 행복을 누림으로써 참된 행복을 구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은 자신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여정 자체가 마음의 정화와 치유의 여정입니다. 마음에 자리한 이기적 사랑을 줄이고, 일치의 사슬인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 선언이 이루어진 ‘산’

변종찬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마태 5,1). 대부분의 종교는 산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았고 그 주위가 신비로운 대기에 둘러싸여 있어 산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산의 높이와 힘을 인식했고, 그리스인은 올림포스 산을 신들의 집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산

 

성경에서 산은 계시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시나이에 있는 하느님의 산 호렙은 모세가 소명을 받은 곳이며(탈출 3,7-12 참조), 하느님께서 율법을 선포하고 영광을 드러내신 곳입니다(탈출 24,12-18 참조). 또 이스라엘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벌일 때 모세는 언덕 위에서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탈출 17,8-16 참조).

 

나아가 산은 예배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높이 솟은 산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되어 주님을 만나는 곳이자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창세 22,2 참조). 사무엘기 상권에는 주님의 궤가 언덕으로 모셔지는 장면이 나옵니다(1사무 7,1 참조). 기드온, 사무엘, 솔로몬, 엘리야 등은 높은 장소(1열왕 3,4 참조)에서 백성과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자주 올라가신 점을 전하면서(마태 14,23; 마르 6,46; 루카 6,12 참조), 산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곳도 산이었고(마르 3,13 참조),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며 거룩하게 변모하신 곳도 높은 산봉우리였습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신 곳도 골고타 언덕이었고(마태 27,33; 마르 15,22; 루카 23,33; 요한 19,17 참조), 승천한 곳 역시 올리브 산이었습니다(사도 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셨을까?

 

산은 우리가 순례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은혜를 헤아릴 거룩한 곳이고, 일생 동안 주님과 더불어 사는 희망으로 끊임없이 올라야 하는 곳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시오 성인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비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곧 속된 것을 떠나 이미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숭고함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계명을 가르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도록 자신을 들어 높여 세상일에 초월하자고 권고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산이 지닌 등반(登攀)이라는 이미지에 ‘안전한 곳’과 ‘그리스도의 상징성’을 첨가합니다. “산에 접근하십시오.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여러분이 올라갔으면, 내려오지 마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안전하게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보호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신하는 산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암브로시오도 산은 인간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곳이며 안식과 평화의 곳이고, 육신과 헛된 쾌락을 멀리하는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이며, 그분은 당신의 가르침을 세상 어느 한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당신의 인격과 결합시키신다고 밝힙니다.

 

더욱이 아우구스티노는 산이 큰 계명, 곧 복음의 높은 의로움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유다인에게는 작은 계명, 곧 낮은 수준의 의로움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싸인 백성에게 예언자와 직무자들을 통해 작은 계명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세상 복락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풀려나기에 마땅한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높은 수준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행복 선언을 따르면 사람의 생활이 완전해진다고 봅니다. 암브로시오 역시 “우리 영혼이 믿음으로 예수께서 강생 구속하신 분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산에 오른다”고 말하면서, 산이 믿음의 성숙과 상승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그분의 은혜를 청하고 선한 생활을 갈구하며 선행의 발걸음으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름 모를 저자가 저술한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가 두 가지라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이사 40,9)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하느님의 의로움을 가르치고 듣는 이는 누구든지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드높은 산’(시편 68,17 참조)인 교회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이가 초대된다고 아퀼레이아의 크로마시오는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백성이 산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시어 계명의 엄격함과 공포 분위기를 드러냈다면, 모든 백성이 초대되어 행복 선언이 이루어진 산에는 복음의 은혜로움과 자비로움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간 것처럼,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면서 영신으로 더욱 가까이 결속된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초대됩니다. 암브로시오는 이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도 산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오시도록 또 그리스도의 그늘이 너를 덮어 보호해 주시도록 너도 산이 되어라.”

 

하느님의 아드님이 병든 인류를 치유하기 위해 당신을 낮춰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그분께 들어 올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새들의 제왕으로서 태양에서 뿜어 나오는 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드높은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처럼, 우리 영혼 역시 지상에서 들어 올림을 받으신 분인 그리스도를 향해 날아가도록 합시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변종찬 마태오 신부

 

 

코헬 1,14는 세상의 재화에 대한 바람을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교만한 이는 바람에 의해 팽창된 것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로마 11,20)하라고 권고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권위에 순명하므로 잘난 체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곧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마음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령칠은(聖靈七恩)이 참행복의 일곱 단계와 상응한다고 봅니다. 겸손한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timor Domini)’ 은사를 지닌 사람입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집회 1,14 참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다른 존재라는 사실, 곧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지만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여,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피할지 압니다. 더욱이 이 두려움은 장차 올 죽음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하여 교만의 모든 요동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결국 마음의 가난은 회심의 단계입니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노는 행복 선언을 주님의 기도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청원과 연결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에 상응합니다. 이는 누구도 하느님보다 더 거룩한 이가 없음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혹여 그 이름을 모독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부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두려움을, 종이 갖는 두려움과 자녀가 갖는 두려움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곧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순결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이 나옵니다. 겸손을 뜻하는 라틴어 humilitas는 ‘땅’이라는 뜻의 humus에서 나왔습니다. 어원상으로 겸손은 땅에 가깝기에 비천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라틴어 어원으로 볼 때, ‘흙’이라는 단어와 ‘사람’이라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어 만든 존재이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자신이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합니다.

 

반대로 교만은 동등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게 하면서 노예로 만듭니다. 또 창조주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선물이거나 빌린 것, 그것도 잠시 빌린 것인데도 교만은 이러한 것에 집착하고 소유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교만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하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마음의 가난은 이 세상의 재화와 추이(推移)에 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평온한 이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현재에서 벗어나 영원을 추구하는 이에게서 발견됩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원의(願意)가 가난한 사람이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는 하늘 나라는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어떻게 높아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꽉 찬 것은 하느님께서 채우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공허함과 깊은 가난만을 채우실 수 있으며, 그대의 ‘예’는 비어 있음 또는 비움의 시작입니다 …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아무것도 아님을,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뻐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이를 고백하도록 이끕니다. 죄의 고백은 회심의 여정에서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우들을 방문할 때 약속을 정해서 가면 집이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들르면 한 분도 곧장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집 안에서는 왠지 모를 부산함이 흘러나오는데, 어떤 분은 자녀들을 밖으로 내보내 저와 대화하게 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끈 후 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요. 이렇게 누군가를 초대할 때는 청소부터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1코린 3,16 참조) 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시기 위해 정리 정돈을 시작하는 것이 회심의 단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인정한다, 그러니 청소할게!’ 하는 겸손의 단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얻습니다.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 선에 항구하기 위해 늘 하느님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면서 성령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아울러 재화를 소유하였다 해도 그것이 참된 부유함이 아님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것, 즉 마지막 날에 더는 부족함이 없으며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참된 재화를 받기를 희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변종찬 마태오 신부

 

 

‘온유한’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프라우스(praus)’는 야생동물이 길들어 온순해지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였습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이 단어는 자신을 훈련해 부드럽고 비폭력적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을 비폭력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비폭력이 외적 흥분과 대립하는 반면, 온유함은 육정의 내적 폭발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나태, 무기력, 우유부단, 두려움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견고한 인격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온유함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땅의 소금으로 남도록 하는 내면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음이 진정되고 유순해지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침착함과 균형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암브로시오 성인은 온유한 이들이란 시기의 가시가 아무리 찔러도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 누가 화를 내며 대들어도 어지럽힐 수 없는 사람, 거친 행동에도 흥분하지 않는 사람, 격분으로 불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동안 주님의 평화를 더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에 영혼이 당하는 온갖 싸움을 평정합니다. 온유한 이들은 온화하고 겸손하며 잘난 체하지 않고 믿음에 충실하며 모욕을 당할 때 참습니다. 또 자신이 행하는 선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온유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그분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마치 모세가 빛나는 구름을 앞서 가지 않고, 여기저기로 가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던 것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께 저항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이들은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서 온유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들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안아 줄 만큼 연민을 지닙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간통한 여인을 심판하시기를 바랄 때에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3,17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과도 화합하기를 바라십니다(마태 18,15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유다인이 온유함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자질로 여긴 것은 옳습니다. 하느님의 지도를 구하며 거룩한 법에 순종하는 것을 회한하거나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역시 온유를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로 선포했습니다(에페 4,2; 콜로 3,12; 갈라 6,1 참조). 성령의 선물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온유한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나타나기를 청원합니다

 

온유한 이들에게는 성령칠은 가운데 효경이 주어집니다. 이 은총을 통해 그들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며 존경하고, 읽고 경청하며,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그 편지 내용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지?’ 하며 몇 번이고 읽어 봅니다. 비록 지금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까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주님의 기도 중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때의 광채처럼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기를, 곧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의 다스림이라고 한다면, 우리 마음이 그분의 통치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온다는 것은, 영혼이 육신을 이끌고, 여러 가지 내적 충동에 대항해 싸워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온유한 이들이 차지할 ‘땅’은 시편 142,6에서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땅입니다. 이는 자녀로서 누릴 영원한 유산의 영속성과 견고함을 상징하며, 오직 내적으로 변화된 힘으로 얻게 되는 자기 마음의 땅입니다. 이 땅은 성도(聖徒)가 살게 될 일종의 하늘이며, 그래서 산 이들의 땅이라 불리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영혼이 그 땅에서, 육신이 지상에서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감정을 통해 안식을 누리고 고유한 음식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땅’은 평화이며 성인들의 안식이요 삶입니다. 그렇기에 땅을 소유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과 내적으로 친밀하게 결합하는 것이고, 온유하신 하느님께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온유한 이들은 위의 것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집을 이 세상에서 찾지 않고 하늘에서 찾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거처로 마련해 드리기 위해 항상 마음을 주님께 드높이 올립니다. 그의 마음은 살아 있는 보석들로 꾸며진 방과 같아 하느님께서 기꺼이 머무르십니다. 그렇기에 온유한 이들은 악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악의 부추김에 넘어가지도 않으며, 악행에 동의하지 않고 악을 선으로 극복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땅을 지금 소유하고자 한다면, 유의하십시오. 당신이 온유하다면 땅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정하다면 땅이 당신을 소유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변종찬 마태오 신부

 

 

우리는 슬플 때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보통 눈물은 슬픔을 드러냅니다. 왜 슬퍼할까요? 회심의 첫 단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았는데도, 곧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나를 보기에 슬퍼합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주님, 제게 정결을 주소서. 그러나 지금 당장은 주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야 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일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세의 사물에 대한 사랑에 매여 있으면서 천상 고향을 잊은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기에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합니다. 이렇게 현재 자기 모습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인정하며, 천상 고향을 잊은 것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지식(scientia)’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은사는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게 하여 성경의 권위를 믿고 승복하면서 자신을 통탄케 합니다. 일반적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교만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는커녕 자신에 대해 탄식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간곡한 기도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여 위로를 받고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그 위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향유해야 할 하느님과 사용해야 할 세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가 이 세상 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하며, ‘향유’와 ‘사용’의 개념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향유는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용은 대상을 어떤 용도로 쓰는 것입니다. 때문에 향유의 대상은 하느님뿐이며, 다른 것은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나그네여서 고향이 아니고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면, 또 나그네살이 때문에 가련한 신세요 그 비참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절원(切願)한다면, 우리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지상이나 바다의 탈 것은 우리가 향유하기로 되어 있는 고향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할 필요가 있다. 만일이라도 행로의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탈것의 움직임이 우리를 유쾌하게 한다 하여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을 향유하기로 변심한다면, 여행을 빨리 끝내기도 싫어지고 그릇된 감미에 빠져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 그러므로 이 사멸할 인생에서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우리가 행복한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하면, 이 세상을 사용해야지 향유하면 안 된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곳은 내가 돌아가야 할 집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좌석이 편안하다고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집에 가까워지면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좌석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더 사랑한다면 끝까지 내릴 수가 없지요.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 향유해야 할 목적이고, 버스는 목적지인 집에 가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인데, 버스를 향유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천상 고향을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만이 자신의 고향이요 안식처이기에 세상의 것에 매여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세상의 행복을 모두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 하느님을 소유하는 참된 행복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유한한 재화에 굴복하여 참된 행복, 최고의 선(善)을 잃어버린다면 ‘지식’은 그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곧 자신이 어떠한 악행에 휘말려 있는지 깨달아 그 불행에 대해 슬퍼하게 합니다. 지금껏 그러한 악행을 선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원한 것에 대해, 그리고 다시 우리가 사멸할 조건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 흘리는 눈물입니다. 뉘우쳐서 눈물을 흘리지만 용서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 죄를 더욱 슬퍼하게 하고, 세상의 죄에 대해 자비를 가지게 하면서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막 교부들은 눈물을 은총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은총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탄식의 기도가 자리합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기도는 영적 상승의 한 단계에만 유보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영혼입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청원합니다. 이는 땅에 속하는 육신과 하늘에 속하는 영이 조화를 이루어 더는 울지 않게 되는, 종국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3-24)

 

그러므로 이 청원은 하늘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일치되고,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천사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땅 위에 있는 성인들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의로운 이들과 거룩한 이들뿐 아니라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그들이 회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6)

변종찬 마태오 신부

 

 

암브로시오 주교는 《루카 복음 주해서》 5,56에서 네 번째 행복의 순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된 행복의 순서를 따라갑시다! 먼저 우리는 죄를 끊어버리고 절제 있는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잘못한 것에 대해 울은 후에 의로움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아픈 동안 음식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고통이 입맛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을 흡족하게 하는 양식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건강한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내적 건강 상태가 양호해진 사람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달을수록 하느님을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 참된 선을 사랑합니다. 곧 그리스도와 비슷해지기를 열망하고, 그분의 정의와 지혜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단순히 생각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의로움을 추구합니다. 육적 쾌락을 삼가며, 모든 행동과 인식에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성경의 언어로 ‘의롭다’는 말은 하느님께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뜻과 법에 사랑으로 일치하고 순명하며, 그분 손안에 온순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과 함께 진정한 우정을 실천하며 사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레오 대(大)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굶주림, 이 갈증이 추구하는 것은 육체에 관한 것도, 지상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의로움이라는 좋은 음식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갈망이며, 가장 깊은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주님만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의 바람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매일 묵상하고 준수해야 할 주님의 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의인의 배고픔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해소됩니다. 더욱이 의로움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성체성사는 힘 있고 구미에 맞는 음식이 되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음식 중에 가장 완전한 음식이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에 의하면, 성경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처음 주선하고, 성체는 이 만남을 완성시킵니다. 성경 말씀이 먼저 사람을 사로잡고 그릇된 정신을 물리쳐 주면, 성체는 그에게 천상의 지혜와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서 성체성사를 갈구하게 하는 배고픔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먹는 사람은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지나가는 사물들을 찾는 죽음의 쾌락에서 벗어나 영원한 사물들을 사랑하는 데로, 곧 불변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회심하게 됩니다.

 

영적 전투를 위한 굳셈의 은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은 사실 고통을 겪습니다. 참된 선의 기쁨을 원하며, 세상과 육신의 선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적 전투가 자리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수록 그에 따르는 저항이 커집니다. 흔히 ‘세상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기도 좀 하려면 전화 오고, 성경 좀 읽고 필사하려면 다른 일이 막 생기고…. 정말 세상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반대급부로 이 세상에 머무르라는 유혹이 생기지요.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굳셈(라틴어 fortitudo)’이 주어집니다.

 

의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이고 이방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악한 욕망에 맞서 싸우고, 탐욕을 멈추게 하고, 교만을 제거하며, 열망을 잠재우고, 욕정의 불을 끌 때입니다.” 이 영적 전투에서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수덕 생활 그리고 인내라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필요성은 하느님의 은총을 청원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단식이나 절식 혹은 절주와 같은 수덕 생활은 기도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움이 됩니다. 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 인내는 이 세상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이 순례 여정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참된 행복을 누릴 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온갖 유혹에 시달리면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음식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선물이므로 꼭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양식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좋은 이웃이 되며, 사람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평생 의로움을 어떻게 실천했느냐에 따라 우리는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참된 부를 낳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의롭게 행동하는 한, 여러분은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배고픔에 불안해 떨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는 이는 강제로 빼앗는 자들이고, 반면 의로움을 사랑하는 이는 다른 모든 재산을 안전하게 소유합니다. … 시샘하지 않는 이들이 그런 엄청난 풍요를 누린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내주는 사람은 얼마나 더 큰 풍요를 누리겠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

변종찬 마태오 신부

 

 

기도와 영적 투쟁으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 영적 정화가, 매일 저지르게 되는 죄까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닙니다. 곧 미사 도입부에서 우리가 고백하듯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짓는 죄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죄가 크지는 않지만, 작은 죄가 쌓이면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기도와 희생이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만, 가장 효과 있는 치료약은 이웃에 대한 자비입니다.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

 

자비는 외적 상황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선한 의지의 보편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이들은 이웃의 불행 앞에서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불행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줍니다. 바로 여기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의 연대성이 자리합니다. 이웃의 고통이 마치 내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동일화가 일어납니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을 선善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큰 악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치료제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용서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을 때 도움을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타인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비가 마음의 정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 당신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루어지도록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하십시오. 사실 당신은 풍요롭고 동시에 부족합니다. 곧 당신은 현세적 재화로 부유하지만 영원한 재화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한 걸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당신 자신도 하느님의 걸인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청한다면, 당신 역시 청하십시오. 당신이 청하는 이에게 행동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자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행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텅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는 이를 당신의 충만함으로 채우십시오. 당신의 비어 있음이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도록 말입니다”(<강론> 53,5,5). 결국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청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것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위로의 말이나 위안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용서하는 것

 

자비로운 이들은 성령칠은 중 ‘의견(라틴어 consilium)’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위의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고통의 사슬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상위의 존재에게 도움 받기를 희망하는 이는, 자신이 남보다 강할 때 연약한 이들을 더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자비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잘못한 이가 더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규칙서>에서 용서는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따라 빨리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노가 증오로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노는 단순히 어떤 사람에 대해 화가 난 것을 표현하지만, 증오는 다른 차원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기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할 때, 진실한 마음과 언행일치로 이 기도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쟁이요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군가 용서하지 않으면서 이 기도를 바친다면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나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되겠지요.

 

사막 교부의 금언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스승님, 기도하는 데 너무 분심이 들어서 힘듭니다.”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나가서 “네 겉옷을 벗어서 바람을 막아 보아라”고 합니다. 못 막는다고 하자 스승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찬가지다. 기도 중에 오는 분심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심을 따라가느냐 따라가지 않느냐는 네가 결정할 수 있다.” 결국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내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상처가 나면 그 경중에 따라 약을 바르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합니다. 그리고 상처가 다 낫고 흉터가 없어질 때까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에 있는 상처는 외면할까요? 용서라는 단어에는 ‘떠나보내다’, ‘사슬을 끊고 놓아 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준 상처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원한과 쓰라림의 독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현재의 행동을 조종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단순히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선을 기대하는 사랑의 행위이며, 나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며, 내가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타인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며,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비를 입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

변종찬 마태오 신부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이가 많지만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죽는 만큼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한 그분을 뵙지 못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먼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마치 새로운 사람처럼 정신이 맑아질 것입니다. 더러워진 생각을 마음속에서 모두 뽑아 버리십시오! … 당신의 영혼은 순수하고 당신의 뜻은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다 마치고 육신의 껍질을 벗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갈림 없는 깨끗한 마음

 

인간의 마음은 칼 구스타프 융이 지적하듯 마구간처럼 지저분하여 온갖 생각이 들끓고,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교차합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 않으시는(1사무 16,7 참조)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없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 층입니다. 인간은 마음에서 선하거나 악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18-20ㄱ).

 

더욱 하느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끝없는 투쟁이자 영혼의 정화를 의미하는 깨끗한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요 분열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갈라진 마음은 산란함의 징후이며, 영혼의 분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단순함은 필요한 단 하나, 최고선에 대한 관상에만 집중합니다. 모든 행동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사랑으로 이루어질 때 티 없는 것이 됩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사하고 이웃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시편 15,1-5은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곧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 위한 조건으로 깨끗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24,3-5도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만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두 마음의 표현인 유혹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연결됩니다. 두 마음으로 세상의 선과 영원의 선을 동시에 추구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하고 찬사를 바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에 마지막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남들 앞에서 주의를 끌기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명예욕에 대해 에바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명예욕이야말로 생각하자면 난처한 녀석이다. 덕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안에 즐겨 나타난다. 그들 안에 자신의 투쟁이 얼마나 힘든지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원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 신클레티카 암마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드러난 보화가 얼른 쓰여 없어지듯이, 덕행도 유명해지거나 잘 알려지면 쉽사리 사라져 버린다. 밀초가 불에 빨리 녹아 버리듯이, 영혼도 칭찬을 들으면 텅 비게 되고 견고한 덕을 잃게 된다.”

 

결국 명예욕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이상형과 현재의 모습을 동일시해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지 않도록 하여 자신을 우상화하고 교만으로 눈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의 권고대로 거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마태 6,1.33 참조).

 

통달의 은혜를 통한 찬미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통달(intellectus)의 은혜를 받기에, 그들은 정화된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1코린 2,9 참조)을 보게 됩니다. 마음을 정화하려는 노력은 하느님을 보려는 희망에 기반을 둡니다. 지금은 인간적 연약함으로 인해 신앙으로 빛을 받아 보지만, 부활 후에는 하느님을 직접 뵐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마음을 정화하고(사도 15,9 참조), 정화된 마음은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보고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느님을 보게 할 뿐 아니라 사랑하고 찬미하게 합니다. 7세기의 위대한 성인 시리아의 이사악은 마음이 순수할수록 창조 안에서 창조주를 더 알아본다고 가르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한 마귀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이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눈으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며, 그것에 굶주리고 목말라하게 합니다. 믿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동한다 해도 자녀가 아닌 종으로 움직입니다. 벌이 무서워 움직이는 것이지 정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랑 행위의 목적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을 뵙게 되면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눈앞에 계시기에 찾을 것이 더 없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뵙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시편 17,15). 하느님을 완전히 뵙는 부활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노가 천명하듯 믿음과 희망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 남을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변종찬 마태오 신부

 

 

‘평화’는 일반적으로 화해를 뜻합니다. 구약성경과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평화는 구원의 완성을 뜻했습니다. 평화의 결핍은 악이나 불의입니다(이사 48,22: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평화와 의로움이 상응(相應)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

 

일치와 평화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최고 존재에게 복종해야 하위의 것들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영혼에게, 영혼과 육신은 하느님께 복종하는 자연법이 심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원적 의로움이 자리합니다. ‘각자에게 자기 것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정의의 의미가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죄로 이 질서를 파괴하여 평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여러 욕구와 충동이 무질서하게 싸움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눈앞에 죄가 왔다 갔다 하고 항상 생각 중에 괴롭히는데, 어찌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죄는 고요하던 사람을 흥분시키고 건강하던 사람을 슬픔에 잠기게 만들고, 기쁘게 살던 사람을 근심에 차게 만들고 온순하던 사람을 거칠게 변화시키고, 잠 잘 자던 사람을 온통 깨우게 만듭니다.” “죄인들은 고요한 것같이 보이고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 양심의 가책의 가시가 마음을 늘 찔러 대는데 어떻게 영혼이 평화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욕정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고 갈등과 흥분 등의 흔들림이 있는 판에 어떻게 평안하다 하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 안에 완덕이 있다고 봅니다. 평화 안에 적대적인 것이 없고, 암브로시우스의 지적처럼 평화의 회복은 인간 내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모든 활동을 이성에 복종시키고 육의 충동을 지배하는 이들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또 평화는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 받는 것이고, 완덕의 절정에 있는 현인의 삶입니다. 평화를 이루는(세우는) 사람들은 분쟁이 무서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머물고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도록 일하는 사람입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드러나지 않게 일치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본받으면서 자기 안에 그분의 모상을 새겨 넣습니다.

 

슬기의 은혜가 동반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슬기(sapientia)의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슬기를 통해 이성에 반역하는 충동이 없어지며, 모든 것이 인간의 영에 순종하고, 영혼은 하느님께 순명하여 질서정연해지기 때문입니다. 참된 최고의 지혜는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첫째 계명에 있으므로, 지혜는 하느님 사랑 자체이고 성령을 통해 부어 주신 선물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사랑이고 소유이며 향유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분적이고 평화와 행복도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욕정이 지혜를 정복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싸움이 날마다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이 악을 다스리기 위한 전투이며, 평화를 간직하기 위한 충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화의 삶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보존하고 간직한 채 눈으로 보게 될 것에 시선을 고정하는 삶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뵙고자 그분을 찾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충만한 만족감으로 먹고 마시게 될 것을 미리 맛보도록 초대됩니다.

 

자유를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악에서 구하소서”와 연결됩니다. 이런 해방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사랑을 믿고 그 약속에 희망을 두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도록 합니다.

 

이에 대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어떤 적절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 넘치는 은총을 찬양하기 위하여 어떤 언어, 어떤 생각, 어떤 심사숙고가 있을까요?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서 탈출합니다. 죽음에서 죽지 않음으로 되고, 사라짐에서 사라지지 않음으로, 하루살이에서 영원으로 됩니다. 요컨대 인간에서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적합하다고 심판 받은 인간은 확실하게 자신 안에 아버지의 품위를 가질 것이며,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임금이, 미래에 오실 메시아가 그렇게 불렸습니다.(시편 2,7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은 선택되고 부름 받은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미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평화이지만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온전하고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선사하신 것으로, 험난한 항해를 마치고 항구로 무사히 돌아와 쉬는 배와 같이 세상 여정이 끝난 후 성인들의 안식처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암브로시우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곳으로 피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모든 괴로움과 고생이 없는 참 평화와 안식이 있고, 그곳에 가면 안식의 큰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평화라는 예복을 입고 천상 잔치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로마 8,17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아름다움의 증거자

변종찬 마태오 신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늘 나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 온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땅,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흡족함,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자비,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을 보는 능력,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의 유사함.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이루어지는 삶

 

행복을 원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의 삶의 의미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때, 그분은 그런 인간을 만나 주십니다. 결국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올라가는 여정에는 넓이, 길이, 높이, 깊이의 네 개념이 동반합니다. 넓이는 선한 행동, 길이는 너그러움과 인내, 높이는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상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깊이는 마음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분 의지의 비밀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초대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 중에 사악한 말을 듣거나 모욕과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사악한 말을 듣기만 하면 복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말이 거짓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악한 일 때문에 욕을 먹는데 그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복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역시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벌 자체가 아니라 벌을 당하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하며, “우리는 먼저 올바른 이유를 선택합시다. 그런 다음 불안에 떨지 말고 그 벌을 견딥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초대에 응답하며 어려움을 겪는 중에 예수님의 여덟 번째 행복이 선포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에 맞설 때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200년경의 순교자 펠리치타스(Felicitas) 성녀는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간수가 출산의 고통을 겪는 그를 멸시하며 “며칠 후에 짐승과 대전할 텐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지금은 내가 겪는 고통을 내가 견디지만 저곳에서는 내 안에 다른 이가 있어 그가 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성녀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사시고 자기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시련의 불가마 속에 놓인 데 대해 놀라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받는 것이 그분의 구원 수난에 참여하는 길이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1베드 4,12-14 참조).

 

영적 아름다움으로의 초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통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그분이 사람이 되신 자비로움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그분이 아름답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 왜 십자가 위에 그분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인간들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느님의 연약함이 인간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때, 곧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갈 때 사랑으로 걸어가는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인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답게 되는가? 항상 아름다우신 그분을 사랑하면서이다.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만큼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고 그분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분을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내적 현존이 밖으로까지 빛나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세상에 현존케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행복 선언의 여정에는 ‘복되다’라는 표현 외에 ‘기뻐하다’란 단어가 항상 동반합니다.

 

행복을 얻는 것은 일생에 걸친 노력입니다. 많은 난관과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처음에는 갈등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 나중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건 마치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만, 나중에는 바라던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 안에 거룩한 불을 지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교회에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준비할 때 자주 권고하는 행복 선언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마음의 가난을 포옹하는가? 아니면 재빨리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슬퍼하는가? 나는 얼마나 온유하게 복음에 응답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의로움에 굶주리고 있는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가? 내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며, 무엇이 내 마음을 불손하게 유지시키는가? 나는 어떤 방법으로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하는가? 내 삶을 엇갈리게 만드는 분할점은 무엇이며, 평화 조성가로서 나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는가? 나는 어떠한 원수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어떠한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위협받고 있는 누구의 삶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가? 나는 박해를 복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에게 고통을 줄 것 같은 문제들을 피하는가?”

 

[성서와 함께, 2014년 12월호(통권 4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