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도(聖都)의 어제와 오늘 이영헌 마리오 신부
필자는 예루살렘 땅에 첫발을 내딛던 감동과 감격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차례나 성지순례단을 인솔한 것도, 이 글의 청탁을 받아들인 것도 그 순간과 무관치 않다. 30년 전의 일이다. 예루살렘 성서대학에서 연학(硏學)을 계속하고자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삼엄하고 짜증날 정도로 힘든 입국 수속을 밟고서 지친 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유럽에서 연학하는 내내 이스라엘 성지를 향한 열정은 대단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 예루살렘 성서대학에서 연학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아직도 생생한 감동과 감격의 순간
늦은 오후 텔아비브 공항에서 합승택시를 타고 예루살렘에 이르자 설레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택시 기사에게 ‘자파 게이트’(일명 ‘헤브론 성문’ 또는 ‘아브라함 성문’) 앞에서 잠시 멈춰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당장 예루살렘 도성의 성문 안에 첫발을 내딛고 싶은 충동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성문에 들어서자 웬걸, 낯설음보다 정든 고향 땅을 밟는 듯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루카 15,20 참조) 온몸에 뜨거운 전율이 흘러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신비로움으로 몰아의 순간에 빠진 듯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왔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밟아가며 주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찬미와 영광이 영원히! 아멘.” 짤막하게 기도한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니, 그때 느낀 감동과 감격은 결코 잊을 수 없나 보다.
돌아보건대 예루살렘에서의 체류와 연수 기간은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을 기점으로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터키, 그리스 등 여러 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배워 익히며 고고학적 답사까지 하여 성서 연학에 많은 활력을 얻고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우리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유다교인과 이슬람교도에게도 매우 중요한 성지다. 기나긴 영욕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예루살렘 도성에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성 자체가 인류 역사의 박물관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 성도의 역사를 간략하게 독자들과 함께 일관(一觀)하면서 성도의 의미와 가치를 재음미해 보기로 한다.
하느님의 처소가 된 예루살렘 성도
다윗이 야훼 하느님의 옥좌를 가리키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의 성막 안에 모심으로써(2사무 6,17 참조) 예루살렘 도성은 ‘하느님의 처소’가 된다(시편 13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도성’(성도)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왕정도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1열왕 6장 참조) 예루살렘은 구세사의 중심지로 굳어지고, 유배지에서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도성’이 된다(시편 137 참조). 이사야와 미카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 뭇 백성이 ‘주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물밀듯 밀려오리라고 예언하기에 이른다(이사 2,2-5; 미카 4,1-5 참조).
그런데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처소가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언급한 표현이다. 하느님께서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인간과 함께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초토화되더라도 하느님의 이름(현존)이 인간 가운데 지속되는 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처소(성도)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수많은 순례자가 하느님의 이름(역사의 주님 야훼)을 찬양하며 온 세계 곳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끊임없이 옮기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라고 여긴다.
지상 예루살렘을 넘어 새 예루살렘으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의 시선은 지상 예루살렘을 넘어 새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예루살렘의 죄상을 폭로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여 새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시련을 겪은 후 “정의의 도읍”, “충실한 도성”(이사 1,26), “주님의 도성”,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사 60,14)이라 불릴 것이고, 웅장하게 재건되어 축제의 화려한 옷을 입고 ‘야훼의 신부’가 될 것이며(이사 51-54장 참조), 다시 부흥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해 ‘시온’(예루살렘 도성 전체나 일부를 가리키는 명칭)에 올라와 모일 것(예레 31,6.12 참조)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이를 대변한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성전을 중심으로 재건될 새 예루살렘을 상세히 묘사해 이야기한 것(에제 40-48장 참조)도 같은 맥락이다.
바빌론 유배 이후 예언자들에 따르면, 전 세계의 중심이 되도록 불린 새 예루살렘과 성전은 앞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입게 되고(하까 2,6-9; 이사 60장; 62장 참조), 낙원과 같은 모습이 된다(이사 65,19-25 참조). 그래서 흩어진 유다인들은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고(다니 6,11 참조),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시편 84 참조).
특히 시편은 모든 백성의 어머니가 되도록 소명을 받은(시편 87 참조) 예루살렘을 찬양한다(시편 46; 48 참조). 예루살렘을 위해 평화를 기원하고(시편 122,6-9 참조), 예루살렘을 향해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외친다(시편 147,12-13 참조). 반면 유다교 묵시문학은 미래의 새 예루살렘을 환상적 모습으로 묘사하여 이야기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미 현존하는데, 지상 예루살렘은 불완전한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땅 위로 내려올 것이라고 한다. 지상 예루살렘이 새 예루살렘의 초월적 미래상을 결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예루살렘과 구원을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예루살렘까지 이른다(마르 1,5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이고, 처음에는 그곳에만 국한된다(마르 1,28.39 참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시게 된 것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신을 접한 후이고, 당신의 수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신 후이다. 이는 예수님 당신의 희생 제사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예루살렘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예수님 운명의 드라마를 예시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을 정화하며 예언자로 활동하시지만, 유다 지도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고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예견하며 예루살렘이 받을 징벌과 성전이 받을 모욕을 예고하신다. 이는 구약에 따른 하느님 계획의 단계적 종국이고 종말론적 완성의 서곡임을 말해 준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배척당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아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신다(마르 15,20-22 참조).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장막이 찢어지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하느님의 처소라는 신성한 특성을 상실했음을 상징한다(마르 15,33-38 참조). 예루살렘이 예수 그리스도를 결정적으로 배척한 장소로 부각된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장차 있을 예루살렘의 드라마를 예수님의 유년 시절부터 반영한다.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예배하러 오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율법 학자들이 아기 예수를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헤로데 임금은 아기 예수를 죽일 궁리만 한다. 반면 메시아 탄생 소식으로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라지만(마태 2,3 참조) 믿고 받아들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다윗의 자손(메시아)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말대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자렛’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마태 2,23 참조). 이는 예루살렘의 영광이 베들레헴과 나자렛으로 옮겨졌음을 시사한다. 사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가장 지독한 적대자들을 낸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해 탄식하시고(마태 23,37-39 참조), 죽고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는 일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에서 행하신다(마태 28,7.16-20 참조).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고 보도한다. 공관 복음서보다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의 배척을 더 강조한다. 예루살렘은 단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 아들의 영광이 빛나는 새로운 시나이 산과 같은 장소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유일한 장소로 예루살렘 성전을 옹호하시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시대가 이미 끝났다고 선포하신다.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참된 예배자들은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느 특정 지역을 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요한 4,21-24 참조). 이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서 이미 예시되었는데, 예수님의 몸이 옛 성전을 대치하는 새로운 성전이요 예수님 자신이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현존과 발현 장소라는 것이다(요한 2,19-21 참조).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갈증을 풀어 주는 ‘생수의 원천’이요(요한 7,37-39 참조), “생명의 빛”을 얻도록 이끌어 주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며 초대하신다(요한 8,12 참조). 그리하여 이제 예루살렘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면 빛을 잃어 가는 별과 같다는 점을 시사한다.
루카 복음서는 예루살렘을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귀착점으로 보도한다. 아기 예수가 성전에서 봉헌되며 메시아로 인정받고, 소년 예수가 부모와 함께 성전을 방문하며 율법 학자들 가운데 지혜를 드러내는 일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드러내며 희생 제물이 되실 것에 대한 감춰진 선언이다. 죽음에 직면한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을 수는 없다’(루카 13,33 참조)고 단언하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예수님 생애의 목적지이기 때문이다(루카 9,51 참조). 그래서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고를 다른 공관 복음서보다 더욱 명백히 보도한다(루카 19,41-44; 21,20-24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다(루카 24,36-53 참조).
루카 복음서의 속편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증거 역사가 시작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예루살렘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세워져 교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에 유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적의를 품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여 공동체의 일부가 분산되기에 이른다(사도 8,1 참조).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복음은 더욱 널리 전파되어 사마리아에서 카이사리아와 안티오키아까지 확산된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박해자 사울(바오로)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다. 이때부터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선교사 역할을 시작하고, 베드로도 출옥한 후에 예루살렘을 떠난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복음 선포 중심지의 위상을 상실하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운명의 길을 밟게 된다. 복음이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선포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하늘에 기반을 둔 새 예루살렘
바오로는 하늘에 기반을 둔 새 예루살렘(새 계약)을 하느님 약속의 상속자로 소개하면서 지상 예루살렘(옛 계약)이 새 예루살렘 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고 강조한다(갈라 4,24-31 참조). 새 예루살렘은 “하늘의 시민”인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본향이라는 것이다(필리 3,20 참조).
히브리서 저자도 이와 비슷하게 언급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처소이며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히브 12,22-23)이고, 그리스도의 파견이 완성되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히브 9,11) 성전이 자리하고 있으니, “앞으로 올 도성”을 고대하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히브 13,14)도 없는 지상 예루살렘에 연연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초월적 실재는 요한 묵시록이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이야기한다. 묵시록 저자는 새 예루살렘의 최종 완성에서 ‘어린양(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교회의 참모습을 보았다(묵시 21,1-22,5 참조). 그는 특히 에제키엘과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지상 예루살렘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로 재해석하고, 하늘에 기반을 둔 새 예루살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신비적 생명에 참여하므로, 이미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을 지니고 현존하는 실재인 동시에 종말론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 교회도 이제 “하느님의 도성”(묵시 3,12), “거룩한 도성”(묵시 11,2; 21,2)이라 불리게 된다.
오늘날의 예루살렘 성도는
야훼 하느님의 처소라 불리던 지상 예루살렘에는 이제 상징적 의미와 가치밖에 없다. 지성소가 자리한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어 흔적만 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예루살렘의 비극적 운명이 실현되는 순간에 예루살렘이 한때 간직했던 하느님의 약속은 이미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졌고, 새 예루살렘은 최후의 완성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가톨릭 교회)에게 교회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최후 만찬과 성령 강림의 장소 ‘다락방’(마르 14,15; 사도 1,13 참조)이 있는 곳(그리스도인이 ‘시온 산’이라 부르는 곳)은 ‘하느님의 도성’, ‘거룩한 도성’을 상징한다. 이사야가 말하듯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3)라는 말도 새롭게 외친다.
‘평화의 도시(근원)’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과열한 분쟁으로 화약고가 즐비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시내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시편 122,6 참조)라는 안내판은 총기로 무장한 군경의 활보와 큰 대조를 이루고 순례자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예루살렘은 과연 ‘평화의 도시’라는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예루살렘 도성 안에 있는 ‘예수의 무덤 성전’마저 그리스도교 여섯 교파가 각기 소유권을 주장하며 차지하고 있으니, 온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바람보다 인간의 알량한 사심이 앞서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예수님의 외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이라는 예수님의 눈물 섞인 한탄이 오늘따라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 이영헌 신부는 광주대교구 소속으로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신약성경 전공)를 받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직을 역임하였다. 현재 목포 옥암동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그동안 수십 편의 학술 논문과 십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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