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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5.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하느님 나라 이야기 -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며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하느님 나라 이야기 -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며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마르 4,2).

 

‘왜 비유인가?’ 예수님의 공생활을 상상하면, 수많은 기적과 치유 사화, 용서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고 전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솝 우화처럼 동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아닐뿐더러, 동기나 목적이 대부분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시지 않자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따로 여쭈었을 정도입니다(마태 13,10-17 참조).

 

예수님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2사무 12장을 보면, 나탄 예언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 다윗을 꾸짖습니다(2사무 12,1-4 참조). 나탄의 비유는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라며 부도덕한 ‘행위’를 꼭 집어 꾸짖고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이미 웰본(Amy Welborn)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와 그 후의 라삐들도 비유로 이야기한 흔적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비유의 고유한 특징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아주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응답하는 형태를 띤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100자 내외의 단어로 이뤄졌을 정도로 대단히 짧습니다. 도덕적 교훈이 목적이 아니라면, 비유로 말씀하고 싶은 목표 지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지각할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세상의 익숙한 방식과 비교합니다.

 

이것은 윌리엄 스폰(William Spohn)이 저서 《Go and Do Likewise(가서 그렇게 하여라)》에서 설명하는 유비적 상상력과 비슷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이야기의 형태로 더 쉽게 퍼져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현대의 독자가 똑같이 복사할 수 없지만, 시공간을 넘어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유비적 상상을 통해 알아채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같으나 다른 공간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실천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리차드 굴라(Richard Gula)는 영성과 윤리가 교차하는 지점을 설명하면서, 하느님 체험의 여섯 가지 통로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 감성, 영혼, 마음, 심지어 몸을 매개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중 하나가 ‘유비적 상상력(analogical imagination)’입니다. 사회적·문화적 상황은 다르지만, 상상력을 통해 예수님 시대의 가르침을 현장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성삼위 하느님을 닮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익숙한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십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누게 될 여섯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까?(마르 4,1-20) (2) 자비로우신 하느님(마태 20,1-16; 루카 15,1-10) (3)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루카 11,5-10; 18,1-14) (4)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마태 21,28-32; 루카 10,25-37) (5) 하느님의 부르심(마태 25,14-30; 루카 14,15-24) (6) 주님을 향해 깨어 있으십시오(마태 25,1-13; 루카 12,35-48). 공교롭게도 요한 복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약성경 곳곳에서 주제별로 비유를 뽑되 일상의 질문과 연결할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연재한 ‘일상에서 맺는 야고보서의 열매’를 읽어 보신 분은 익숙할 수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Kevin Perrotta)가 편집한 성경 6주간 시리즈는 세 가지 종류의 질문으로 구성됩니다. ‘시작 질문’, ‘주의 깊은 독서를 위한 질문’, ‘적용 질문’입니다.

 

시작 질문은 일상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으셨듯이, 일상의 질문이 아니면 성경 나눔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음 달부터 시작할 ‘비유’ 1주차 시작 질문은 대략 이렇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나무는? 작은 화초 중에 좋아하는 식물은 무엇입니까?” 한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나무를 좋아하는데 숯불갈비가 떠오르네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답일지라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비유 1주차 성경 본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하다 보면 일상의 이야기가 놀랍게도 그분의 이야기와 닮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이야기는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같이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 주기 위한 ‘뒤틀림’이 숨어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의 성경 6주간도 일상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뒤틀림’을 시도할 것입니다. 교재에는 성경 본문이 나온 후 간단한 질문이 뒤따릅니다. 성경 본문 자체를 이해하기 쉽도록 돕는 질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독서 안내’와 ‘적용 질문’이 뒤따릅니다. 적용 질문을 풀어 가다 보면 윤리적 실천 방법뿐 아니라 영성 훈련을 위한 한 주간의 이정표를 갖게 되고 성경 나눔은 완성됩니다.

 

일상에서 열매 맺는 비유를 시작하려니, 신학생 시절 읽은 책이 떠오릅니다. 대만 신학자 송천성 박사의 저서 《아시아 이야기 신학》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혀 모르던 동양의 옛이야기 속에도 삼위일체 교리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일상 이야기에 하느님 사랑의 흔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만날 열한 꼭지의 예수님 이야기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지난해에 함께 기도한 모라토리움 신학생들의 생활 나눔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여름 피정 때 만난 청년들의 사연도 포함됨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대화 구조와 관계성이 중요한 시대에,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함께 엮어 묵상해 나가는 일은 참 소중한 열매일 듯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리스도교 신앙 함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함께 작용하시는 성령께서 다른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통해 만남을 주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텃밭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 들을 준비 (1)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마르 4,13)

 

아버지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저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서 골목길 화단에 심긴 꽃나무가 뭔지 설명해 주시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배움의 순간인데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시골에서 텃밭과 정원을 가꾸십니다. 정원에 핀 꽃과 나무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대상이 손자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흙을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열매에 감사하는 연습을 흙은 끊임없이 되새기게 합니다. 내가 정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첫 번째 비유로 소개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공관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비유는 청중에게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같이 일상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뒤틀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청중이 기대하는 대답과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일상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뒤틀림의 지점을 지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뿌려진 비유의 말씀에 어떤 배움이 숨어 있을까요?

 

주의해서 지켜볼 점은 ‘봄’과 ‘들음’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비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 많아 별도의 특별 수업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 실패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전합니다. 실패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요한 17,12 참조)이라고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악을 행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도 당신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거부할 테지만(이사 6,9-10 참조) 하느님의 계획은 묵묵히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용감하게 응답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당신의 열매를 맺어 나가십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하느님의 계획은 결국 완성된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제는 ‘듣는 사람의 자세, 마음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비유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을 과감하게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농사 이야기로 흘려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심의 차이입니다. 양심은 기초윤리 과목에서 자주 논의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오늘날 윤리신학자들은 양심 자체보다 양심 교육의 문제를 다룹니다. 마음의 혼탁함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을 다루는 것입니다. 양심 훈련이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인 양심에 인간이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훈련입니다(<사목 헌장> 16항 참조). 그분은 말씀하셨지만, 들을 줄 모르는 인간이 닫힌 마음을 어떻게 열어 갈 것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강조하듯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루카 8,10)에 대한 반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비유는 감추어진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영적 눈먼 상태를 점검하게 할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배워 익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적용되고 열매 맺는 지점은 일상의 영적 감수성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마음의 감수성을 어떻게 키워 나가는지를 기억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케빈 페로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 참조)의 제목을 이렇게 달아 놓았나 봅니다.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난해 큰 반향을 일으킨 교황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이혼과 동성애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이미 서적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일상에 적용해 나가며 영적 감수성을 ‘마음’으로 익히고 실천할까가 중요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나에게 어떤 도전으로 다가오는지를 알아채고 ‘듣는’ 연습에서 시작됩니다. 규범과 논리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마음’의 텃밭을 잘 가꾸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자신을 돌아보도록 초대하는 단순한 권고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는 믿음의 근원적 선포입니다.” 곧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들었지만 그분이 활동하시도록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응답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번 달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마르 4,2-9과 10-20절에 등장하는 청자(聽者)가 다르다는 것(군중과 제자)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 주제가 없는 농사 이야기인 것 같은 내용에 군중과 제자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케빈 페로타가 언급하듯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청중이 응답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뒤틀림이 숨겨 있습니다. 질문을 발생시켜 스스로 반응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비유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군중과 제자를 갈라놓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나에게 와서 나를 따르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의 ‘비유 6주간’ 중 첫 번째 주간의 일상에 ‘적용할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1) 한 사람이라도 복음과 소통하도록 도울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입니까? (2) 어떤 주석에 따르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세상 구석구석에 말씀을 뿌리신다는 점을 제안합니다. 복음화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유치원생인 저에게 꽃말을 설명해 주시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제가 길을 걸을 때마다 꽃나무를 알아볼 수 있던 것은 단순히 정보를 기억 세포에 저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감수성이 훈련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 따라 꽃나무의 상태를 알아보듯 하느님의 뜻을 느끼는 감수성의 정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데는 예민하면서 정작 제 마음의 텃밭을 갈고 닦아 주신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누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실까요?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텃밭지기 제자들은 누구인가? - 들을 준비 (2)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마르 4,8).

 

제 방에는 난초 화분이 많습니다. 선배 신부님들이 다른 소임지로 가실 때 주신 것입니다. 한번은 여름휴가를 떠나며 화분들을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꽃과 나무를 즐겨 키우고 전문 지식도 많이 알고 계시기에 꽃을 피워 주시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태풍이 불던 날, 온실 창문을 닫지 않아 고스란히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신기하게도 뿌리 사이로 꽃대가 하나 올라오더니 예쁜 꽃을 선물로 피워 주고 떠났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생명을 전하려는 자연의 신비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이번 호 케빈 페로타의 성경 나눔은 이런 질문으로 출발합니다. “좋아하는 꽃, 나무, 화초는 무엇입니까?” 꽃에 관한 사연은 언제나 반응이 좋습니다. 향기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아까시나무를 좋아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벚나무가 가득한 가로수 길을 즐기는 청년도 있습니다. 간 해독에 좋은 민들레를 아는 신부와 함께 따러 다닌다고 이야기하는 청년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식물 재배 동호회인가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종교적 배경 없이 비유만 들으면 농사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세 단계로 나누어 묵상해 보자고 초대합니다. 초기 단계와 중간 단계의 실패 이야기를 들은 청자(듣는 이)는 최종 단계에도 실패하거나 겨우 열매 맺은 이야기를 기대했을 법합니다.

 

우선 뿌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망쳐 버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중간 단계까지 성공한 경우도 있습니다. 뿌리는 내렸지만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수확을 망쳐 버린 씨앗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마지막에 뒤틀림이 있습니다. 그 뒤틀림 안에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는 키워드가 숨어 있습니다. 기대와 달리 예수님의 비유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가 맺히는 대성공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씨 뿌리는 사람 이야기의 결말은 갈릴래아 농부들이 기대하지 않은 기적과 같은 추수입니다(마르 4,8 참조).

 

숨 쉬는 생명체는 어떤 형태로든 개체를 확장시킵니다.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도 강한 생명력으로 성장합니다. 문제는 누군가 씨앗이 확장하지 못하도록 숨을 막는 것(마르 4,7 참조)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데 일조한 상황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살면서 내 인생이 ‘자갈밭’ 같다고 느꼈던 때를 나누어 봅시다.” “주변 사람들의 알력, 경제적 이유, 업무나 여가 생활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한했던 때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자갈밭 같던 시절, 숨 막히던 순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물론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어 풍성해졌던 시절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받아들였을 때 체험한 그분의 영향력은 어떠했습니까?”라고 물어 봅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편협함’입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으면서 성경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려 합니다. 내 마음의 텃밭이 자갈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좋은 땅인지에 관심을 둘 뿐, 텃밭의 주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묵상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인생 전반을 통해 텃밭의 변화 과정을 성찰하도록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자갈밭에서 가시덤불로, 가시덤불에서 좋은 땅으로 바뀌는 마음을 점검해 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 4학년을 마치고 사회 현장 체험을 시작한 신학생들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몇 달 간 복지관에서 일하며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일주일 내내 일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성당에 앉아 기도에 집중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좋은 순간이 어느새 숨 막히는 순간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갈밭 같은 시간과 숨 막히는 환경은 치유하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케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영향력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심을 체험하는 순간으로 탈바꿈합니다.

 

일상에서 체험하는 우리 마음의 텃밭은 돌밭과 가시덤불과 좋은 땅이 한데 섞인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텃밭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반응하는 자가 제자입니다. 청중은 비유를 듣고 나서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과 “열두 제자”만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열매 맺음에는 듣는 자의 관심과 의향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 이 비유가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배우는 귀한 순간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농사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제자의 정체성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내게 와서 나를 따르겠습니까?”라는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제자 된 자의 반응을 다룹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르 4,14). 그러나 그 응답은 많은 난관을 겪을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성서학자 모나 후커(Morna Hooker)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해설합니다. “사무엘기 하권 12장에 있는 나탄의 비유 이야기에서와 같이, 우리는 ‘이 말씀의 내용은 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경고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자유롭게 뿌려졌지만, 받아들이고 듣는 준비에 따라 열매 맺음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비유 1주차를 시작하며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일상의 사연이 담긴 벚나무 터널과 간에 좋은 민들레 이야기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풍에 시들어 버린 난초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얼마큼 말씀의 씨앗을 확장시키며 살지 묻습니다. 수많은 난관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생명 안에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람 좀 맞았다고 누렇게 시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생명력을 내가 막아 숨 막히게 하지는 않았는지 물어 볼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곳에 말씀을 뿌리십니다. 말씀의 씨앗을 함께 확장시키자고 초대하십니다. 죽어 가는 난초의 꽃도 틔우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생명력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일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텃밭지기 제자로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사용하기 위해 던져진 말씀에 다가서서 기꺼이 응답하는 일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길 잃은 사람들 - 자비로우신 하느님 (1)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루카 15,3-6).

 

예비 신학생 한 명이 피정을 다녀왔다며 기념 티셔츠를 보여 주었습니다. 앞면에는 LOST, 뒷면에는 FOUND가 쓰인 아주 단순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티셔츠는 ‘길 잃음’과 ‘되찾음’에 대해 묵상케 했습니다. 그때의 예비 신학생이 지금은 LA교구 소속 신부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는 길을 잃어버린 순간을 떠올려 보자고 합니다. 비유 1주차에 ‘들을 준비’를 주제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 참조)를 묵상했다면, 비유 2주차의 주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다음 달에 예정되어 있는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부르러 나선 비유(마태 20,1-16 참조)와 잃어버린 양과 동전을 찾는 비유(루카 15,1-10 참조)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체험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길을 잃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부산교구의 휴학 신학생들과 일주일 동안 비유 6주간 과정으로 매일 한 꼭지씩 묵상 나누기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시작 질문에 대한 신학생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친척집에 갔을 때 길을 잃어 20분간 혼자 울면서 돌아다녔다. 형과 어머니와 친척이 나를 찾으러 다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머니와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다. 평소처럼 손을 잡고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아주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길을 건너고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건너편에서 내게 손짓하고 계셨다. 다행이었다.” “울지는 않았다. 속으로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한참을 헤매다 평소 눈에 익은 슈퍼마켓을 발견했다. 아버지와 형이 태연하게 TV를 보는 모습이 조금 얄미웠지만,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작 나눔에 숨겨진 특징을 정리해 보면, 만남의 ‘기쁨’과 ‘공동체와의 기쁨 나눔’ 그리고 ‘이정표’의 소중함입니다. ‘기쁨’은 그것이 겉으로 표현되든 속으로 느끼는 안도감이든 평소에 알아채기 힘든 경험입니다.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함을 체험합니다. 더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잡고 따라간 곳이 엉뚱한 곳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나눔은 길 찾음에서 이정표가 소중하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슈퍼마켓 표지가 길을 찾는 데 귀중한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에도 회복의 ‘기쁨’이 있고, 공동체와의 ‘기쁨 나눔’이 있으며, 회복의 방향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의 묵상은 이렇습니다. “목자와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인이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 일에 대한 태도는 동일합니다. 얻은 기쁨은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의 친구와 이웃을 모두 부릅니다. 그리고 여인은 친구들을 부릅니다(여기서 ‘친구’로 사용된 그리스어는 ‘여인’입니다). 루카 복음의 비유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의 기쁨을 나누는 것을 끝으로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기쁨을 나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서로가 하느님께 다가서는 이정표가 되어 주는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잃어버린 체험이나 죄 자체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순간과 죄 지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과 태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은 몇몇 사람이 길을 잃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교를 통해 죄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에 대한 용서의 가능성을 부정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자비로우신 분일까요? 케빈 페로타는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 속했던 체험’을 나누라고 요청합니다. 심지어 내가 죄의 상태에 떨어졌던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이웃의 시선이 나를 힘겹게 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도 던집니다. “그러나 그 힘겨운 시간에, 여러분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셨습니까?”

 

이번 나눔의 주제는 죄나 길 잃음 자체가 아닙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먼저 개입하셨고, 길 잃은 순간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셨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찾아 보자는 초대입니다. 인생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의 내면은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했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을 겪었을 때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체험하였듯,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길을 찾는 순간이 됩니다.

 

신학교 생활과 별도로 저의 소임은 부산교구의 휴학 신학생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적합한 모습에 휴식 시간을 갖는 학생도 있고, 현장 체험을 위해 직장에서 근무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신학교를 떠나 있던 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순간이었음을 느낍니다. 신학교 안에서만 생활할 때 느낄 수 없던 소중함을 이구동성으로 고백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과의 만남은 성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집안 사정마저 녹록지 않을 때 찾아오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방향을 몰라 헤맬 때, 하느님의 손길이 먼저 자신을 찾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LOST)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FOUND). LA 교구 예비 신학생 성소자 피정 때, 왜 티셔츠 앞뒤 면에 그런 로고를 써 놓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잃음과 되찾음이 쓰인 옷의 앞뒤 면처럼, 가장 멀리 계신 듯 느껴지는 그 순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한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고 계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혹시 힘겨운 일을 겪게 된다면 그 일을 견디고 이겨 낸 시간은 하느님의 성품과 위로를 체험하는 소중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송구하게도 그 시간을 축복해 드리고 싶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직업 - 자비로우신 하느님 (2)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마태 20,1-5).

 

“4박 5일 동안 삼촌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 본 적이 있다. 좁은 공간에서 16시간씩 일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알바를 했다. 모 자동차 회사에서 밤샘 노동을 했을 때가 기억난다.” “택배 물건 분류 작업을 했다. 월급이 많지 않았다.”

 

이 나눔은 케빈 페로타의 성경 6주간 교재 ‘비유’ 편 제2주차 시작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시작 질문은 돈 받고 일한 ‘직업’에 관한 것입니다. 직업을 일컫는 우리말 가운데 천직은 vocation으로, 전문직은 profession으로 구분된 영어가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넘어오면 vocation은 부르심 특히 영미권에서 ‘개별 성소자’를 뜻하고, profession은 수도자가 봉헌 생활을 약속하는 ‘서원식’을 뜻합니다.

 

이번 달은 직업을 묵상해 볼 차례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부르려고’ 먼저 집을 나섰다는 사실과 “정당한 삯”(마태 20,4)을 ‘약속’했다는 점이 하위 주제가 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먼저 찾아 나선 이는 주인입니다. 이어서 아홉 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다섯 시쯤에도 포도원 주인이 찾아 나섭니다. 주인은 일꾼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케빈 페로타는 첫 번째 일꾼 무리와 나머지와의 약속을 비교해 보자고 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첫 번째 일꾼 무리와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습니다. 나머지 일꾼들은 다만 ‘정당한 삯’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삯을 받을 때가 되자 첫 번째 일꾼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그 근거는 받기로 약속한 금액보다 더 받지 않았고, 늦게 온 일꾼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주석서는 하나같이 하느님의 후덕한 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정의의 덕이란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1807항)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좀 더 예리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이다.” 정의는 단순히 재화의 분배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마땅히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즉 애덕 실천이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받지 못한 이들에게 그들의 마땅한 몫을 되돌려 주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서 시작하기에 아무도 자기 것이라 자랑할 수 없습니다(1코린 4,7 참조).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한 무리의 일꾼을 고용하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 무리와 품삯을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의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밖으로 나가 일꾼을 고용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나 일품을 약속하는 대목은 달랐습니다. “그는 다른 무리들과 품삯을 흥정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겠소’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마태 20,4 참조). 비유에서 품삯을 지불하는 순서가 반대인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청중은 처음 고용되어서 온 종일 일한 사람들이 더 많은 삯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더 많은 돈을 받으리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이 그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정당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하느님의 시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젯밤 기상청의 날씨 예보는 충청도 지역에 43년만의 가뭄을 해갈할 단비가 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사 제목은 “내일 중부지방 ‘금비’ 내린다 … 2500억 원 가치”였습니다. 봄비 소식마저 경제 가치로 환산된 것입니다. 정당한 삯을 주겠다는 말씀도 우리의 시각에서 경제 가치로 환산될 듯합니다. ‘공평함’을 합당하게 받아야 할 권리 문제로 접근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의 공정을 이루시고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신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라는 주제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번 달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처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 체험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면, 정의로운 품삯은 자신의 노력에 맞는 평가나 보상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흥정은 말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고, 내 죄악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못 받은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성취나 노력의 결실이 아닌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 몫이 아님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을 언제 어떻게 부르시든, 자애를 얼마나 베푸시든 우리는 나를 불러 주신 그 순간에 응답하도록 부르심(vocation)을 받습니다. 자비로우신 분이 당신의 자비를 언제 어떻게 쓰시든 우리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케빈 페로타의 적용 질문에 귀 기울여 봅시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억울하게 느껴진 적이 있습니까?” 성경 나눔을 여러 차례 진행해 본 결과, 대부분은 억울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대답이 도리어 저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늦게 일터에 도착해서 똑같은 급여를 받아 간 동료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하느님 나라, 즉 구원의 주제와 신앙의 입문 시기에 대해서는 너그러울까요?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기 때문이거나, 신앙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다시 느끼는 점은 사제직이라는 ‘직무’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하느님 체험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각자의 몫대로 불러 주셨고,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알리기 위해 부름 받았으며, 그분께 이미 받은 바를 정당하게 각자의 몫으로 되돌려 주는 데 항구한 의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겠다고 엎드려 ‘서약(profession)’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며, ‘천직(vocation)’이 하느님의 자비를 위해 부름 받은 것임을 고백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너의 목소리가 들려 -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1)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1-5.8)

 

예수님의 ‘비유’를 시작한 지도 넉 달이 지났습니다. 전체의 흐름을 잊지 않기 위해 잠시 복습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1주차의 제목은 ‘들을 준비’였습니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합니까?’, ‘좋아하는 꽃 이름을 적어 봅시다’라는 두 가지 일상 질문이 있었습니다. 일상에서 열매 맺은 시작 질문이 도달하고자 한 소주제는 ‘텃밭의 주인은 누구이신가?(2월호)와 ‘텃밭지기 제자들은 누구인가?’(3월호)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 참조)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도달하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것은, ‘누가 진정한 주인이신지’와 ‘제자 된 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2주차의 제목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었습니다. 일상의 삶에 연결고리로 삼은 시작 질문은 ‘길을 잃어버렸던 체험을 나누어 봅시다’, ‘돈을 받고 일했던 체험을 떠올려 봅시다’였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알고 일상에서 열매 맺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착한 목자이십니다(루카 15,1-10 참조). 품삯을 너그럽게 베푸는 포도원 주인이십니다(마태 20,1-16 참조). 우리는 길을 잃고, 심지어 다른 아주머니 손이 어머니 손인 줄 알고 횡단보도를 건너가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도 ‘길 잃은 사람들’(4월호)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찾아오시며 ‘직업’과 ‘소명’(5월호)의 길로 부르고 인도하십니다. 오늘은 어떤 일상의 질문이 예수님의 비유에 숨어 있을까요?

 

모 방송사가 방영했던 법정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 소년 박수하와 속물근성의 변호사 장혜성이 등장하는 꽤 흥미로운 드라마였습니다. 정의가 사라져 부정부패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드라마였는지 모릅니다.

 

‘실제로든 TV에서든, 개정 중에 있는 법정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이번 호 케빈 페로타의 시작 질문은 이미 예상했겠지만 법정 분위기를 풍깁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은 증거제일주의이고 서면 질의 조사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드라마와 같이 다이나믹하고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의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다르고 드라마와도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청중과 오늘날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재판관과 과부에 대한 선입견을 가차 없이 깨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한 권위를 지닌 인물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루카 18,2) 여기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과부가 있습니다. 대개 과부는 힘없는 사람이 주로 보이는 태도(어려워하고 두려워함)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틀어 버립니다.

 

케빈 페로타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약자인 과부는 오히려 과감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 관행이던 사례금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중재자나 변호인 없이 직접 재판관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보입니다. 빌려 준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같이 행동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재판관입니다. 그가 과부의 청에 따라 마음을 바꾼 것은 합리적 논쟁의 결과가 아닙니다. 과부가 더는 귀찮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도덕적 양심이 작동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루카 18,5)라고 번역된 부분은 ‘나를 눈멀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힘없는 과부가 힘 있는 재판관을 자기 방식대로 ‘눈멀게’ 한 힘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기도’의 특징 하나가 숨어 있다고 케빈 페로타는 생각합니다.

 

지난 1월호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인간의 통로를 여섯 가지(이성, 감성, 영혼, 마음, 몸, 유비적 상상력)로 제시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비유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해석되고 적용되는 과정을 알아듣기 위해 유비적 상상력을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통해 그분의 이야기에서 일상의 체험을 연상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는 어떤 하느님 이미지를 그려 줄까요? 어떤 ‘기도’의 특징을 알려 주는 것일까요?

 

케빈 페로타는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응답받기 위해 예수님께서 위협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분은 단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적당한 방법, 합리적 방법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몇몇 신심 깊은 사람들은 기도가 어떠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잊고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영역에서도 문제를 분석하고 정리하고 중재하며 인식하기 위한 전략과 계획의 틀을 세웁니다. 과부가 보여 준 모습과 너무도 다릅니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초능력 소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천길 물길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은 겉과 너무나 다릅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것 같아도 비합리적으로 사물을 식별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을 읽는 초능력 소년 박수하가 속물근성을 지닌 장혜성을 바꾸게 한 것은 논리적 증거도 자신의 초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통했을 때 장혜성은 변했습니다.

 

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 줬을까요? 이 질문에 한 재치 있는 청년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과부가 예뻤나?” 이 대답이 비유에 감춰진 하느님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그 과부를 무척 예쁘게 보셨을 테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사랑스러운 당신 자녀들이 기도의 사연을 들고 당신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나에겐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나의 목소리를 마음속 깊이 듣고 계실 그분께 말씀드리는 시간을 자주 가져 보면 어떨까요?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남의 죄와 나의 죄 -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5년 전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던 주교좌 성당에는 직장인과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위한 주일 밤(9시)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요? 교우들은 뒷자리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저는 넓은 성전에 다 흩어져 앉으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앞쪽에 앉아 주십시오” 하고 독려하곤 했습니다. 그런 막내 보좌신부의 마음을 아는 듯 하루는 본당 총무님이 나섰습니다. 강론대가 있는 왼쪽 앞줄부터 좌석을 채워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넓은 주교좌성당 왼편은 앞줄부터 끝줄까지 다 찼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은 예물 봉헌을 해야 하는 본당 총무님 부부만 앉게 되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신자들이 총무님 부부만 앉은 오른편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일상의 시작 질문을 이렇게 던집니다. “여러분은 성당에서 매주 같은 자리에 앉는 경향이 있나요? 매주 자리를 바꾸나요? 미사를 드릴 때 어디에 앉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성전 앞쪽으로 나아가기란 두렵습니다. 어떤 경외심이 있기 때문일까요? 신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외진 곳에 앉고 싶은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번 호 성경 본문에는 기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호의 비유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현하면, 바리사이는 성전 앞자리에 당당하게 앉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왼쪽 저 구석진 자리에 차마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제단 가까이 가기에 자신의 죄가 너무 큰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마지막 비유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를 처음 들은 군중은 바리사이를 거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는 신심 깊은 이들이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군중은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성전에 나타날 것 같지 않던 세리가 등장한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 세리가 뒤에 등장하는 자캐오처럼 회개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속으로 재산의 반을 내어 놓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저 세리는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고 떠났을 뿐입니다. 조용히 말입니다. 보속으로 어떤 것을 하겠다고 자백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롭게 되어 돌아간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고,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입니다.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만스럽게도 자신을 이렇게 높이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0항)입니다. 그런데 이번 호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루카 18,11).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오늘날 대죄와 소죄의 구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별한 행위만으로 대죄가 되는지 여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그 결과로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지속되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봉사하려고 노력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지금 ‘혼잣말’로 남의 죄를 재단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리사이의 몸은 성전 앞에 있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오히려 성전 뒤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대죄인 세리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답합니다.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은, 세리는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으나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눈멀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군중도 바리사이처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군중을 동일시하시어 바리사이가 보지 못한 것을 군중도 알아채지 못한다며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 알려 주십니다. 케빈 페로타의 표현을 빌리면,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님의 계획에 말려든 이들, 세리에 더 가까운 이들”입니다.

 

15년 전의 주교좌 성당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제대 가까이 앉아 열심히 기도하는 교우들이 저는 그저 좋았습니다. 일관되게 뒤쪽 구석에 앉던 청년들이 미워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 마음에 숨겨진 사연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그 자리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저는 저의 죄가 아닌 그들의 죄를 판단했지만, 멀찌감치 뒤에 앉은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자리에 초대하여 데리고 오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저는 제 죄를 보지 않고 그들의 부족함부터 보려 했습니다. 제 모습이 정확히 바리사이를 닮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기 죄를 봐야겠습니까, 아니면 남의 죄를 봐야겠습니까? 기도는 남의 죄를 보고 싶어 하는 교만한 시선의 방향을 바꾸어 자기를 향하게 하고, 그 양심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동방의 오래된 기도 전통은 우리의 기도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반성의 방향은 어느 쪽이어야 하는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착한 이웃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1)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4-37).

 

“착하다. 썰렁하다. 농담은 잘 못 하면서 끊임없이 시도한다. 은근히 순진하다.” 저에 대한 동기 신부들의 묘사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묘사할 것 같습니까?” 케빈 페로타는 6주간 성경 나눔의 4주차를 시작하면서, 이웃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이웃은 나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웃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생각보다 객관적일 때가 많습니다. 편협한 시각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겠지만, 특히 함께 사는 신학생들의 상호 평가가 냉혹하리만큼 정확하다는 사실에 저는 한 번씩 놀랍니다. 내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이웃의 날카로운 시선은 우리에게 도덕적 자기 성찰을 제공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착한 이웃 되기(도덕성, morality)와 무관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영성, spirituality)은 한낱 내적 개인 수양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단순히 옳고 그름(right/ wrong)이나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人’의 비유는 전인적 인간(human person)으로서 선한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 물으십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영성), 하느님께서 돌보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자 하시는 방법으로 착한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도덕).

 

이 비유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Go and Do Likewise(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윌리엄 스폰(William C. Spohn)의 책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오늘날 윤리신학이 어떤 이유로 성경을 중요시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일상에서 유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 줍니다. 그분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같은 형태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일상에 적용하기 위해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 비유는) 신심의 외형적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계명에 관해 토론하지만, 도움을 줘야 할 사람들과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경건한 이에게 선을 행하고 죄인에게 선을 행하지 말라는 집회 12,1-7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자신의 목록에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을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취급하시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당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신분을 대변하는 옷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지나간 사람은 사제였습니다. 케빈 페로타가 묻습니다. “왜 멈추지 않았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청중도 물었을 법한 질문입니다. 몇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신분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죄인 무리에 속한 자라면 도와서는 안 됩니다(집회 12,7 참조). 더구나 죽은 사람이라면, 부정한 시체에 손을 댄 탓에 자신도 부정해집니다(민수 19,11 참조). 길을 멈추면 자신도 강도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의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는 중이라면, 더구나 시체에 손이 닿아 부정해진다면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의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는 당분간 성전에서 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푼 사람은 죄인 무리에 속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설명하실 때 사용한 단어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지니신 마음을 표현하실 때 사용한 단어와 같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동정심이 있습니다. 호세 6,1의 말씀과 동일하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섰으며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요즘 미국은 동성애자들의 결합(또는 혼인)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시끄럽습니다. 교회는 동성애 행위를 무질서라고 가르치고 자연법에도 어긋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57항 참조). 동성애 문화에 동조하는 것도 그리스도인 복음 생활에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밝힙니다. “동성애는 생명을 전달하는 보완적 결합이 아니다. 그러기에 동성애는 또한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이라고 일컫는 자기 증여의 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훼파하는 것이다”(〈동성애자 사목에 관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7항).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를 읽으며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작은 형제회 소속 미카엘 저지 수사 신부는 뉴욕주 소방서의 채플린(chaplain: 교도소 · 병원 · 군대 등에 소속된 사제)이었습니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알려진 미카엘 신부는 2001년 뉴욕에서 9·11 테러로 무너진 빌딩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다 선종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섰으며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묘사할 것 같습니까?” 당시 동료 소방관들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미카엘 신부를 부정한 사마리아인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이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근히 순진한’ 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실지 궁금합니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Go and Do Likewise)” 하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서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아픈 데를 싸매 주어라” 하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호세 6,1 참조).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약속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2)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미래의 자아상(自我像)을 쓰고 발표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정확히 10년 후, 5월 5일 10시에 교정의 등나무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순진한 초등학생이어서 그랬는지 서로 못 알아볼까 걱정해서 그랬는지, 우리는 또 다른 약속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매일 칠판에 적어 놓던 세 가지 덕목(정직, 용기, 겸손)을 흰 종이에 써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10년 후에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어떤 약속이 지키기 힘드나요?” 일상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성경 나눔에서 나온 청년들의 대답은 다채로웠습니다.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했던 약속이 지키기 어려웠다.” “혼자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어렵다. 예로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약속.” “자신과의 약속이 제일 어렵다.” 그리고 “물리적 시간과 능력에 부치는 일은 손해가 작은 순으로 약속을 어긴다”라는 솔직한 대답도 눈길을 끕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지키기가 가장 어려웠습니까?

 

오늘의 주제어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지킨 맏아들과 호언장담을 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둘째 아들의 비유는,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등을 빚습니다. 분명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성경의 말씀들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재해석됩니다. 오늘의 비유는 표면상 가족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주제가 신앙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신의’를 다한 자인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성품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질문이 그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맏아들은 처음에 반항했지만 일하러 갔던 반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는 듯 보였지만 반대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유심히 살펴볼 만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아버지’라고 번역된 말은 본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관계성을 드러내는 표현은 결국 그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 줍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은 반항한 아들이고, 이를 무시한 사람은 순종하는 척한 아들입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청자들이 깨닫기를 바라고 하신 질문입니다. …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았으니, 두 번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약속은 하였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과 죄는 지었지만 ‘뉘우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변화’ 속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삶 전체가 움직이는 이야기라고 했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삶을 해석하는 귀중한 요소로 두 가지, 곧 ‘성품’과 ‘약속’을 꼽습니다. 내 신체가 변하고 내가 도덕적으로 변할지 모르지만, 약속을 담은 삶의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을 연결해 준다고 설명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와 지금의 저는 분명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키가 커졌고, 얼굴에 주름이 생겼으며, 신체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나’입니다. 도토리가 상수리나무로 커도 그 동일성이 유지되듯이, 내 안에 불어넣으신 하느님의 숨결은 동일하고, 내적 정체성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알아보도록 해 줍니다. 변화 속에서도 동일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덕목이고 약속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약속과 인격의 지속성입니다. 약속은 결국 ‘신의(信義)’, 신앙의 용어로 ‘믿음’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예/아니요’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도록 했던 요소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적용 질문으로 넘어가니 청년들은 일상에서 새로운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양심’ 또는 ‘마음의 소리’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대답이 많았습니다. 어떤 청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입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해야 할 의무도 아닌데 ‘왜 굳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측은지심이나 양심이 움직이면 좋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양심’에 관한 나눔은 정확히 교회의 가르침을 닮았습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사목헌장〉 16항). 사람이 끝내 마음을 바꾸게 된 바탕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자꾸 마음에 맴돌았던 맏아들은 마음을 바꾸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들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행동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큰 주제는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입니다. 지난 호의 ‘착한 이웃’, 곧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살펴본 주제들은 모두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지난 호에서 죄인 무리에 속했던 한 사마리아인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아픈 데를 돌보고’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이번 호에서 맏아들은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회심하는 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누가 …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라는 질문과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는 질문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약속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약속의 날은 신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가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시험을 준비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직, 용기, 겸손’이라는 덕목을 써 놓고 기다렸을 4학년 때 담임 선생님, 친구들과의 ‘만남’보다 당장의 시험 점수가 급했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제 양심은 스스로에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묻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어 살겠다고 서품식 때 “예!”라고 약속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수없이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마다 주님은 저에게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복권 당첨 - 하느님의 초대 (1)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한 선배 신부가 농담 어린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우선 절반을 교구에 기증한 후에 ‘당분간만 저를 찾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주교님께 말씀드리겠다.” 요즘같이 경기가 어렵고 불안할 때면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는 상상을 할 것 같습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당첨된다면 어떻게 사용할지 한번쯤 상상해 보았을 법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한 첫 질문은 ‘복권 당첨’입니다. 뜻하지 않게 큰돈이 생겼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에 청년들의 대답은 다채로웠습니다. “먼저 사직서를 내고, 고급 승용차를 사고, 나머지는 은행에 넣어 두겠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더 구체적인 대답을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5억 원은 비영리단체에 기부하고, 5억 원은 가족에게 주겠다.” “건물을 사서 1층에는 커피점과 꽃가게, 2층에는 와인바를 열겠다.” 여러분은 복권이 당첨된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고 떠납니다. 각각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 떠납니다. 이 비유에서 탈렌트라는 단어는 개인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탈렌트는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 금전적 가치를 나타냅니다.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의 값어치를 지니고, 한 데나리온은 최소한 하루 품삯이라는 점을 계산해 보면, 주인은 실제로 엄청난 금액을 맡기고 떠난 것입니다. 종들에게 매우 큰 책임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세간의 표현대로 종들은 로또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이 달랐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매우 바빴습니다. 맡겨진 탈렌트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장사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돈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즉 나중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한 탈렌트마저 땅 속에 묻어 둡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보물을 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주인은 돌아와서 처음 두 종에게는 칭찬을 했지만, 마지막 종에게는 화를 냈습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위험’을 감수하고 거래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마지막 종이 보인 삶의 선택은 게으름입니다. 그의 잘못은 책무를 다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화를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선택한 이면에는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마지막 종은 앞선 동료들과 다른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은 단순한 결심의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와 마음 상태를 보여 줍니다. 선택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케빈 페로타에 의하면, 오늘의 비유에서 중요한 요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매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분이 베푸시는 기쁨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하며 기다리다가 다른 이들의 기쁨을 쳐다보기만 할 것인가, 그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도 게으른 종으로 전락하여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님의 일을 바라보기만 하는 구경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인생을 조심스럽게 사는 자세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렇게 태만하게 살 때, 신앙에서도 마지막에 잃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이 비유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볼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손해를 감수했던 선택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위험을 감수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된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고 여러분의 전 생애를 걸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잃을까 두려웠습니까? 비유의 말씀은 여러분의 두려움에 대해서 어떤 조언을 줍니까?

 

낙태에 대한 갈등을 토로한 자매가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셋째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을 뜻했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기로 한 것은 어느 때보다 두려운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 귀한 선택이었다는 심정을 고백합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청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공부와 직장 생활을 해 보고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서야 낯선 신학교 생활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청년은 조금 늦었지만, 지난 1년간 성경 나눔을 마치고 지금 다시 신학교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제 삶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면서. 두려움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누구를 더 의지하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위험을 감수하게 될까요? 사랑의 체험과 마음 상태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아프거나 힘들 때 위험을 감수합니다. 자녀는 그런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유를 느낍니다. 노예는 두려워하지만 자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에서 엄청난 선물을 받고 기쁨으로 살았던 종과 두려움으로 살았던 종의 차이는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는지의 여부에 있습니다. 자녀 됨의 정체성과 우리를 초대한 분이 누구신지를 알았던 종은 자유로웠고, 주인이 감당하지 못할 책무를 줬다며 두려워한 종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각(영성 생활)이 우리에게 다른 행위(도덕적 삶)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비유의 질문은 결국 내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지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만이 손해를 감수합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어떤 일을 하겠느냐는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채로웠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나누겠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란했던 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두 질문은 결코 다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고, 누가 주신 선물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 엄청난 사랑의 초대를 받았지만(영적 체험) 그것을 두려워하며 일상에서 그에 응답하지 않는다면(도덕적 삶), 우리는 아직 제자 되어 살아가는 길에서 충분한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인지 모릅니다.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 여러분은 오늘 어떤 응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회식 자리 - 하느님의 초대 (2)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루카 14,16-20).

 

추수 감사절과 같은 명절날 갈 곳 없던 유학생 시절, 가족 식사 자리에 초대해 주던 연세 지긋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 초대가 소중했던 까닭은 단순히 잘 차려진 서양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먼 타향에서 홀로 있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 주는 그리스도인의 환대(歡待)를 체험하고, 그 만남 가운데 ‘신의(fidelity)’로 맺는 믿음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고 초대하는 가족 됨의 식사 자리,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지난 호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자신의 큰 재산(탈렌트)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인을 ‘신뢰’했던 충실한 종은 믿음으로 그 위험을 감수했지만, 그렇지 못한 종은 자신의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번 호 초대와 거절의 비유에서도 그 핵심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우선순위’라는 주제도 만납니다.

 

오늘은 회식 자리에 대한 일상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진정 참석하기 싫은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꾹 참고 참석한다, 가긴 하지만 즐겁지 않다는 티를 확실히 낸다, 못 가는 사유를 생략한 채 정중하게 사양한다,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핑계를 댄다.”

 

청년들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격대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마 자세히 설명은 못하고 정중하게 사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식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기쁘게 참석하고 싶은 모임이 있는가 하면, 가자니 그렇고 빠지기에는 서운한 자리가 있고, 억지로라도 가야만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을 선택하는 행위에서 ‘신뢰’와 ‘우선순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자유가 표현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 만만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이 시작 질문은 단순히 회식 자리에 대한 참석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초대했는가?’ 곧, 초대한 주인을 어떻게 여기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주인과 나의 관계성도 묻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초대와 응답에는 ‘정체성’과 그와 나의 ‘관계성’이라는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손님을 초대하는 이 비유를 접할 때, 성경 공부에 익숙한 사람들은 우선 고대 근동 지방의 초대 관습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많은 경우, 초대장을 두 차례 발송합니다. 첫 초대장은 잔치에 참석할 사람의 숫자를 가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음식량의 조절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초대장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초대장이 발송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첫 번째 초대장에서 가겠다고 응답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초대장을 받고는 하나같이 참석할 수 없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늘어놓는 이유가 모두 납득할 수 없는 핑계라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초대한 주인과 잔치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서(22,1-10)에 의하면 그것은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입니다. 가령 그렇다면 이를 거절하는 것은 모욕에 가까운, 불쾌한 일입니다. 성서학자들이 설명하듯이, 혼인 잔치 참석을 거절한 사람들의 변명은 터무니없는 내용입니다. 밭을 사거나 소를 사는 일이라면, 이미 그들은 신중하게 날짜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또 본인 혼인식 날짜가 잡혔을 정도면 이미 양해를 구했거나 오히려 먼저 그를 초대했어야 합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신뢰가 깨졌고,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또 다른 초대장을 발송합니다(루카 14,22-23). 이번엔 마음이 병들고 약한 자들을 모아 오라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앞에 초대한 사람들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이들은 가난하기에 가서 살펴볼 밭이나 소가 없습니다. 또 혼인 잔치를 열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밖의 사람들도 불러들입니다(루카 14,23 참조). 그런데 강압적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설득합니다. 그들이 갑작스럽고 의심스럽기까지 한 초대에 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거룩한 잔치의 초대는 가난함과 부유함, 교회 안팎의 경계마저 무너트립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가르침에서 놀라운 점 중 한 가지는 〈교회 헌장〉에 ‘하느님 백성’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를 ‘보편적 성화 소명’(〈교회 헌장〉 39-42항)이라고 부릅니다. 특정한 직분이나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들만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다”(39항). 거룩한 삶으로 모든 이가 초대받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에 맡겨졌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초대된 사람들의 핑계를 현대의 상황으로 표현한다면, “방금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살펴보러 가야겠네.” 내지는 “방금 새로 산 자동차를 시운전하러 가 봐야겠네”라든가, “오늘 오전에 갑자기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네” 등이 될 것입니다. 성당에 한 번 나가 보기를 권유할 때 우리가 듣게 되는 대답, 반대로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성경 공부에 한 번쯤 빠지고 싶을 때 내놓는 우리의 핑계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종종 회식 자리가 생기곤 하는데 참석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자리에 빠질 수 있는 적당한 이유를 찾곤 합니다. 그런 경우 제가 유학생 시절 고맙게도 가족 식사 자리에 늘 불러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이 초대와 거절의 비유는 우리 삶에서 ‘신의’와 ‘우선순위’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를 초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평소 그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먼저 살펴보라는 말씀으로도 다가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준비 - 주님을 향해 깨어 있으십시오!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2.13).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는 지난 2014년 대전에서 열렸던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Asian Youth Day)의 주제였습니다. “일어나라!(Wake Up!)”,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론 때 청년들에게 외쳤던 이 말은 “깨어나라!”를 뜻하기도 합니다. 강론 마지막 무렵에 “준비되었나요?(Are you ready?)” 하며 해맑은 웃음으로 화답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어도 ‘준비’입니다. 이번 호에서 다룰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시작 질문은 이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준비할 때 체계적으로 준비합니까? 아니면 대충 준비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쪽이 마음에 듭니까?”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를 마무리할 때가 왔습니다. ‘야고보서’(2014년 연재)처럼 케빈 페로타가 저술한 성경 6주간 시리즈 교재들이 성경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었다면, ‘비유’ 편은 예수님의 여섯 가지 비유만 따로 모아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껏 다룬 주제들을 되짚어 봅시다.

 

1. ‘들을 준비(1)’(마르 4,1-20)를 묵상하기 위해 ‘텃밭의 주인은 누구이신가?’(2월호)와 ‘텃밭지기 제자들은 누구인가?’(3월호)라는 주제를 통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다뤘습니다. 이어서 2. ‘자비로우신 하느님’(마태 20,1-16; 루카 15,1-10)을 묵상하기 위해 ‘길 잃은 사람들’(4월호)과 ‘직업’(5월호)이라는 주제를 다뤘습니다. 횡단보도에서 다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건넜던 신학생의 나눔이 떠오릅니다. 그다음으로 묵상하기 위한 제목은 3.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5-10; 18,1-14)였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6월호)와 ‘남의 죄와 나의 죄’(7월호)에는 기도의 주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4.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를 묵상하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루카 10,25-37)를 바탕으로 한 ‘착한 이웃’(8월호)과,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이야기(마태 21,28-31)에서 뽑아낸 ‘약속’(9월호)이라는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리고 이어 5. ‘하느님의 초대’(마태 25,14-30; 루카 14,15-24)는 ‘복권 당첨’(10월호)과 참석하기 싫은 ‘회식 자리’(11월호)에 관한 일상의 주제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풀어 봤습니다.

 

되돌아보니, 이 글의 토대가 된 케빈 페로타의 성경 나눔은 하나같이 일상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그 질문과 말씀의 연결 지점을 찾아가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예수님의 각 비유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을 살피고, 그 비유에 나타나는 ‘동일성’과 ‘상이성’을 고려하면서 말씀이 오늘 우리의 자리에 옮겨 오도록 노력했습니다. 유비적 상상력(또는 표상력)을 많이 연구했던 윌리엄 스폰은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와 윤리(Go and Do Likewise: Jesus and Ethics)》라는 저서에서, 성경 이야기들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비적 사유는 다양성 속에서 동일한 패턴을 인식하여 다름 안에서 유사함을 찾는 것이다.” 핵심 원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행동’과 ‘인간 됨’이라는 본보기와 예증이 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해야 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하며, 실천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다른 맥락에서 같은 패턴이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창조성을 필요로 합니다. 윤리신학자들의 이러한 논의 덕분에 성경과 도덕적 삶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길이 많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이달에 살필 성경 말씀도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된 질문과 성경 말씀의 연결 지점을 찾아봅시다. 인용한 말씀 중에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마태 25,3)는 구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준비하지 않았다’입니다. ‘어떤 일을 준비할 때 체계적으로 준비합니까? 아니면 대충 준비합니까?’라는 일상적인 질문은 ‘믿음’의 준비에 관한 질문으로 바뀔 예정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새벽녘에야 옷을 대충 급하게 챙긴다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반면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As Good As It Gets]에 등장하는 주인공 멜빈은 이틀간의 여행을 위해서 물건 수십 가지를 나열하고 하나하나 체크 리스트까지 작성합니다. 분위기를 띄울 때 쓸 음악과 부드러운 분위기 때 틀 음악, 그날 그날 입을 옷과 세면도구 등 모든 준비물을 침대 위에 나란히 배열해 놓은 장면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행을 준비합니까?

 

그런데 신앙 문제에서 하느님 나라의 여행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케빈 페로타는 열 처녀의 비유가 당대 신부들의 행렬과 축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가씨’ 또는 ‘처녀들’은 이 행렬에서 신랑과 동행할 예정입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로 신랑이 늦어졌고 처녀들이 기다리는 동안 등불은 계속 탔습니다. 마침내 몇몇 등불이 차츰 꺼져 갔고, 절반은 등불 기름을 더 ‘준비’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신랑은 돌아왔고 혼인 잔치는 시작되었습니다. 기름이 충분하지 못했던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러 간 사이 문은 굳게 잠겼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마지막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식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나타내는 보편적 상징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처녀들’이 뜻하는 바는 주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상징합니다. 그분이 오실 때, 손에 들린 등불의 불빛 아래서 다른 관심사들은 모든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푹 잠들었다는 데 있지 않고, 준비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그분이 오셨을 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라!(Wake Up!)”와 “준비되었나요?(Are you ready?)”라고 한 교황의 말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옵니다. ‘세상의 여행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만날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열 처녀의 비유는 그 준비를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위령의 날 미사에서 들었던 강론이 계속 마음 한 곁에 머뭅니다. “수의(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주님을 만나러 갈 때에는 세상의 어떤 물건도 소용없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은 오직 믿음뿐일 텐데, 우리는 자주 잃어버린 시간을 나중에 채울 수 있겠거니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권고하십니다. ‘준비는 되었니? 이제 일어나라!’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