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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2) - 박승찬 엘리야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7.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2)

불같은 열정을 지니고 성경을 번역하다

박승찬 엘리야

 

 

예로니모의 《대중 라틴 말 성경》

 

우리는 성인들을 묘사한 조각이나 그림에서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이는 베드로 사도이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사자를 배경으로 그려진 성인이 있다.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지만, 많이 늙었고 글쓰기 같은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그림 속의 인물은 바로 고대 최고의 성경 번역가인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374?-420년) 성인이다.

 

달마티아(Dalmatia)의 스트리도니아 출신으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예로니모는 수사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중병에 걸린 후 신이 내린 징벌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신기하게도 병이 진짜로 치유되었다. 놀라운 체험을 한 후 예로니모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믿으며, 주일마다 카타콤바를 방문했다.

 

예로니모가 로마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트리어(Trier)의 정부 관리로 있을 때 그곳으로 귀양 온 아타나시오(Athanasius,  296/298?-373년, 주교)라는 스승을 만났다. 아타나시오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로니모를 열심히 가르쳤고, 예로니모는 그리스어와 성경 공부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를 해 보고 싶어진 예로니모는 동방 지역을 여행하다   콘스탄티노플에 들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중에 하나였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Gregorius Nazianzenus, 326/330?-390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어 373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안티오키아로 건너가서 성경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더욱 철저히 배웠다.

 

그러던 도중에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라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카르치스 광야로 가서 4년 동안 기도와 고행, 공부에만 힘쓰며 은수 생활에 매진했다. 그런데 조용한 곳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자 오히려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던 기억이 예로니모를 괴롭혔다. 과거에 보았던 무희들이 꿈에 나타나 춤을 추며 그를 유혹했던 것이다. 예로니모는 이런 욕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면 옆에 둔 돌을 들어 자기 가슴을 치곤 했다. 그래도 유혹이 잘 없어지지 않자 예로니모는 히브리어 공부에 더욱 몰두하여 이를 몰아내려 애썼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그는 라삐에게서 짧은 시간에 히브리어를 배웠고, 머지않아 히브리어 성경을 암송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활동한 교황 비서이자 번역가

 

은수자들끼리 서로 대립하며 분열하는 상황에 환멸을 느낀 예로니모는 379년 광야에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지역의 주교들은 학식이 뛰어난 예로니모를 존경하여 자주 자문을 구했다. 그의 명성이 로마에까지 이르자 다마소(Damasus) 1세 교황(366-384년 재임)은 그를 자기 비서로 채용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급하게 번역하느라 문체가 거칠고 오류가 많은 ‘고대 라틴어 역본(Vetus Latina) 성경’을 그에게 수정하라고 명을 내렸다. 예로니모는 짧은 시간 안에 구약성경의 상당 부분과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를 원어에 맞게 수정했다.

 

새로운 번역에서 워낙 뛰어난 능력을 보여 그의 명성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예로니모가 교황의 신뢰를 받고 귀부인들의 영성 상담가로서 명성을 얻자, 시기하여 모함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384년 겨울 다마소 교황이 세상을 떠나고, 그 자리에는 교황 후보 1순위였던 예로니모가 아닌 다른 이가 교황에 올랐다. 예로니모는 모든 명성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 정착했다. 그리고 ‘다마소 전 교황이 자신에게 명을 내린 라틴어 번역 성경의 개정 작업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불같은 열정으로 완성한 《대중 라틴 말 성경》

 

예로니모가 세상의 명예를 버리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꿈이었다. 그는 훌륭한 스승들에게 배워 그리스 철학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는 내 제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며 사제로 살아가고 있지만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로마인들이 모두 존경하던 유명한 인문학자였다. 예로니모는 꿈에서 깨어 주님께서 성경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질책하신 것으로 느끼고, 이후 전 생애에 걸쳐 성경 번역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기념 성당 근처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그는 386년부터 404년까지 18년 동안 자신을 그곳에 가두다시피하며 열심히 번역에 전념했다. 전해 오는 일화에 따르면, 예로니모가 열심히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데 바깥이 시끄러워 나가 보니, 사자가 동굴에 들어와 절뚝거리고 있었다. 워낙 대담했던 예로니모가 사자한테 다가가서 발을 살펴보았더니 큰 가시가 박혀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니모가 그 가시를 뽑아 주자, 신기하게도 사자는 그때부터 예로니모가 집필하는 내내 듬직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베들레헴에서 예로니모는 성경을 개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오리게네스가 편집한 《헥사플라》(6중역본)를 철저하게 분석한 후 히브리어에서 구약성경을 전부 다시 번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완성한 책이 바로, 널리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통용본)이라는 뜻의 ‘불가타(versio vulgata)’ 즉 《대중 라틴 말 성경》 이다. 물론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 번역한 부분도 있지만, 한 명이 번역한 것 중에서 이 정도로 완벽한 번역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성경은 5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아주 널리 보급되었으며,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가 라틴어 성경으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공적으로 선언했다(1546년 4월 8일).

 

과연 예로니모가 사람들에게 심어 준 강력한 인상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에 담겨 있는 진리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권력이나 기대감에도 의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결단과, 반대자들이 가하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용기를 지닌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동굴에 앉아 성경을 번역하던 그를 늙은 사자처럼 느끼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를 보며,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들려주는 진리와 가르침에 어떠한 마음으로 따르려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보에티우스

박승찬 엘리야

 

 

철학 개념을 통해 표현된 성경의 가르침

 

우리나라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자들이 권력을 쥐거나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 ‘왜 선한 이들은 고통을 받고, 오히려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하는가?’ 하는 탄식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이러한 의문은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한 절대자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강력한 형태로 제기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에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악과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선함과 전능함을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은 욥기, 예언서, 그리스도의 수난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이 물음에 답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고통 해석은 종종 신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에게 설득력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서 각 종교의 틀을 벗어나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이 바로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 불리는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5?)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다.

 

보에티우스의 정치적 성공과 몰락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직후 로마의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보에티우스는 일찍부터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모두 배웠다. 로마로 돌아온 그가 박학한 지식과 훌륭한 인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자, 당시 로마를 점령하고 있었던 동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쿠스(454-526)가 그를 중용했다. 동고트 왕국 내의 기술적인 문제부터 재정 문제, 종교 간의 충돌 문제까지 맡겨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결한 그는 승승장구하여 40대 초반에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반면 적대자의 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특히 동고트족의 부패한 귀족들은 강직한 보에티우스를 몇 차례나 회유하고 모함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건재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의 로마인 관료들이 같은 핏줄에 속하는 동로마 제국과 내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원로원 의원 알비우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이 혐의가 모함임을 확인하고 뛰어난 웅변술로 그를 변호했지만 적대자들은 오히려 그 변론을 이용하여 보에티우스를 반역의 주동자로 몰았고, 불안해진 테오도리쿠스는 보에티우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보에티우스는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되어 파비아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인간의 행복과 고통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보에티우스는 앞서 언급한 선한 사람의 고통이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며, 옥중에서 《철학의 위안》을 저술한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의 여신과 대화하며 인간의 행복을 성찰하는 가운데,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고통의 문제를 풀어 나간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악덕에 맞서 투쟁하고, 덕을 장려하며, 심판하시는 신을 끊임없이 찾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다.

 

“필멸하는 존재(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의지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의지에 상과 벌을 제시하는 법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예지하는 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요, 항상 현재하는 그 시선의 영원성은 선인들에게는 상을, 악인들에게는 벌을 주면서 우리 행위의 미래의 성질과 함께 가게 된다. … 그러므로 너희는 악덕을 거부하고 덕을 키워라. 올바른 희망으로 정신을 들어 올려라. 저 높은 곳으로 겸손된 기도를 드려라. … 너희는 바르게 살아야 할 크나큰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니, 너희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철학의 위안》 V, 산문 6).

 

이 구절처럼 이 책에서는 성경이 전혀 직접적으로 인용되지 않는다. 이런 기술 방식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유언장을 쓰지 않은 그가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는지를 의심하는 이가 많았다. 위의 인용에서는 신에 대한 희망과 기도를 이야기하지만 그 신을 굳이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규정할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심판자로 제시하는 신의 모습은 신플라톤주의의 일자(一者)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과 같은 철학적 개념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던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신의 표상에 더욱 가깝다. 신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으로 보는 개념에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구약의 하느님, 그리고 사람을 시험하여 교육시키는 욥기의 하느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더욱이 신의 섭리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려는 시도에서,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의지 남용에서 죄에 대한 책임을 찾으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 보에티우스는 철학자로서 신학 논쟁에 개입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 등 신학적 소품을 다섯 개나 완성했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로 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정통했다는 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다.

 

철학적 용어로 표현된 그리스도교 정신

 

보에티우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신학적 소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세 단계로 구성된 그의 기획은 원대하고 야심찼다. 첫째 고대 인문정신의 총체인 ‘자유학예(artes liberales)’에 대해 철저히 탐구하기, 둘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셋째 이 두 철학자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과 조화시키기. 이 거창한 계획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하지만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입장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방향을 《철학의 위안》에서 제시하였다. 그 안에 담긴 신(神)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매우 잘 부합하며,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등과 관련한 사상들은 전적으로 철학에서만 오지 않고 그리스도교에서 영감 받은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악인들의 성공 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선한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주려는 태도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을 연상시킨다.

 

철학의 전문용어와 방법론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설명하려던 그의 기획은 약 사백 년 후 스콜라 철학의 태동에 중요한 모범으로 작용했다. 그의 책과 정신에서 영감을 받은 숱한 중세 학자들이 파비아 대성당에 안치된 보에티우스의 유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존경을 바쳤다. 보에티우스의 극적인 생애가 남긴 결실인 《철학의 위안》 앞에서, 우리는 성경이 주는 가르침을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삶에서 새롭게 표현해야 할지 경건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

박승찬 엘리야

 

 

게르만족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

 

거대한 제국이 몰락하면 그 제국의 국교 역시 몰락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짧은 기간 서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멸망 이후에 오히려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갈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후 이 지역 점령자로 등장한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게르만족 용병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제국

 

게르만족의 개종 과정은 무수한 부족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했다. 본래 로마인들은 북유럽에서 만났던 게르만족을 ‘바바리안(barbarian)’, 즉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갈리아 전체를 평정했던 카이사르마저 용맹하나 길들이긴 어려운 게르만족을 점령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로마제국 후기에 동방 훈족의 위협을 받은 게르만족이 피신해 오자, 로마제국은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로마 시민은 증가하고 사치는 만연한데 정작 수탈할 새로운 점령지는 고갈되자 로마의 재정 상황은 나날이 피폐해졌고, 로마제국은 파산 상태가 되어 용병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410년, 용병으로 일하던 게르만족은 돈도 못 받고 굶어 죽을 위기에까지 처하자 불만이 극도에 달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점령했고, 쇠약해진 서로마제국은 결국 47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게르만족의 다양한 그리스도교화 과정

 

게르만족의 일부(서고트족, 동고트족 등)는 이미 흑해 연안에 정주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또한 훈족의 침입을 피해 로마제국에 들어와 살면서, 당시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각 부족의 지도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용병대장을 거쳐 군사령관 등으로 신분이 상승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들이 개종하면서 부족 전체가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믿었지만, 호전적인 성격이 강했던 게르만족의 전사들이 완전히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부족은 정통 가톨릭 신앙보다 자신들에게 친숙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고, 일부 부족국가에서는 가톨릭 신앙을 이단으로 몰아 혹독한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그리스도교를 접했던 게르만족 용병이나 그의 부족들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경계 밖에 있던 게르만족(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등)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데에는 특별한 선교 과정이 필요했다. 6세기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롬바르드족의 대부분은 이교도였으며, 왕을 포함한 소수만이 매우 늦게, 그것도 아리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게르만 부족들은 스페인 등 남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때 로마제국에 점령되었던 브리타니아(현재 잉글랜드 지역)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져 새로운 선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사람이 바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이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96년에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네딕도회 수도자 40명을 브리타니아로 파견했다. 그들은 그곳에 살던 켈트족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6세기 말부터 영국 내에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 종교심이 강했던 켈트족 수도사들은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수도승들과 함께 아직 이교도로 남아 있던 프랑크족에게 성경 말씀을 전했다.

 

8세기경, 브리타니아 출신의 성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료 수도승들이 현재의 독일 지역을 선교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토착화된 성경

 

게르만족이 유럽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라틴어는 죽은 언어(死語)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불가타’와 같은 예로니모 성인의 뛰어난 성경 번역도 일반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에 담긴 정확한 내용과 세세한 표현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중요성을 수용하고 인정했다. 게르만족은 철학이나 수학같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던 민족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던 ‘실체’, ‘본성’, ‘위격’ 등의 추상 용어로는 선교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금은세공과 태피스트리 등 수공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게르만족은 자신들도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인정한 성경을 금박과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했다. 오늘날 대미사 때 부제나 사제가 황금색 바탕에 각종 아름다운 돌과 보석으로 장식된 복음서를 들고 행렬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금은세공이 발달했던 게르만족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 장식에서도 드러나듯 이제 서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사회 전체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따라 사고하며 이를 삶 속에 깊숙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에 그리스 로마 문화와 만나면서 성경의 주요 가르침이 추상적인 철학 개념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표현되었다면, 이제 문맹률 90%가 넘는 게르만족을 위해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으로 다시 한 번 토착화될 필요가 있었다.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고 비그리스도인의 문화를 깊이 이해했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현대인들에게도 의미심장한 선교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기존 그리스도교의 온갖 관습을 강요하지 말고, 수용자의 관습 안에서 연결점을 찾아 그것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승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참된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도 더 쉽게 알아듣도록 이끌어 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거친 사람들을 단번에 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릇 산에 오를 때에는 단숨에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발 한발 천천히 오르는 것입니다”(〈서간집〉 11,56).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화상을 공경하면 우상숭배인가요?

박승찬 엘리야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 파괴 논쟁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상을 보고 절하거나 동방정교회의 신자들이 이콘에 대해 특별한 신심을 보이면 개신교 신자나 이슬람교도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나 성인들의 생애를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공경하면 우상숭배가 아닌가?’ 현대의 종교들 사이에도 제기되는 이 질문 때문에 실제로 한 나라가 엄청난 분쟁에 휘말린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유다 율법의 영향을 받아 성상을 만드는 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물고기나 배와 같이 간단한 상징물이나 착한 목자와 같은 소박한 그림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갑자기 늘어난 신자들을 위해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했고, 이미 6-7세기경에는 교회, 수도원, 카타콤, 개인 집 등에서 성화가 그려져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자들은 특정 성화들이 치유, 외적의 침입 방지, 이교도 개종 등 주술적인 힘을 지닌다고 믿으면서 과도하게 그것을 공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성화상 공경을,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느라 참된 인성은 그 안으로 흡수되어 버렸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이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성화상 파괴의 시작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주로 제국의 동쪽에 있던 이단자들이나 이교도들이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자 이들을 포용한다는 명분으로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726년 구약성경의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시작된 성화상 파괴운동(iconoclasm)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통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광적인 성화상 반대론자였던 그는 753년에 338명에 달하는 주교를 모아 히에레이아(Hiereia)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주교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근거로 성화상뿐 아니라 성인 유해 공경, 성모 마리아께 기도드리는 행위까지 모두 단죄하고 철저하게 박해했다. 많은 재속 성직자는 이에 굴복했지만, 수도자들은 대체로 격렬하게 반대하여 수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성화상 파괴에 대한 반발과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대한 공격은 비잔틴 제국 안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성화상을 공경하던 백성은 이러한 명령을 내린 황제와 이를 따르는 주교들을 불신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수도자들에게 기대었다. 황제를 반대하여 성화상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발전시킨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 Damascenus, 675년경-749년경)은 성화상 파괴자들을 반대하는 강력한 변론을 썼다.

 

이후 황제가 바뀌며 박해는 약화하였고, 자신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을 맡은 황후 이레나는 전임자들의 성화상 파괴 정책을 중지했다. 787년에 그녀는 새로 임명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교황 아드리아노 1세와 협상을 하여,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는 오히려 성화상 파괴자들을 단죄하고 성모 마리아 신학과 성인 공경, 성화상 공경에 대한 교리를 확정지었다.

 

동서 교회가 함께한 마지막 공의회인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논쟁을 ‘흠숭’과 ‘공경’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했다. 흠숭은 하느님께만 해당하고 공경은 피조물에게도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성화상 공경의 교의적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공의회에서는 공경을 남용하는 것도 경계했다.

 

그러나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인 군부가 세운 레오 5세가 813년 황제로 즉위하자 다시 한 번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황후 테오도라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섭정하면서 막을 내렸다. 더욱이 사순절 첫 주일에 성화상을 공경하는 축제를 지내고 이후 동방교회에서 이날을 “정교회의 대축일”로 정했다.

 

성화상 파괴 논쟁의 영향과 평가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 파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100여 년에 걸친 논쟁은 서방교회와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오 3세의 명령에 따라 성화상 파괴 운동이 시작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파괴 중지를 요구하며 주교들이 결정해야 할 교의적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후임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도 로마에서 두 번의 교회 대표자 회의를 열고 성화상 파괴, 비방, 제거 행위를 단죄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레오 3세는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의 교회 재산을 몰수했다. 이제 상황은 동서 제국의 극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됐다.

 

한편 서방교회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의 사항 중 몇몇 대목이 잘못 전달되어 성화상 문제가 신학상의 문제가 되었다. 프랑크족 주교들에게는 그리스어 ‘흠숭’(λατρεία)과 ‘공경’(προσκύνησις)의 구별에 상응하는 라틴어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성화상에 대한 동방의 소위 ‘흠숭’을 부당하게 논박하였다(《카롤로 법령집(Libri Carolini)》, 790년 편집). 그러나 차츰 니케아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이 반대 논쟁은 실제로 10세기에야 끝났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을 신학적으로 확정했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성화상을 공경하는 것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원형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고,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생생한 교육적 효과를 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나치거나 그 대상 자체에 매몰될 경우 우상숭배나 그릇된 신심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충고는 현대 교회의 신심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했지만, 몇몇 비잔틴 황제들처럼 자신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성화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이런 행위가 오히려 더 우상숭배에 가까울 수 있다. 우리도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 개념만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한다면, 비록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지는 않아도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전 유럽에 성경을 보급한 카롤루스 대제

박승찬 엘리야

 

 

20세기 후반부터 가톨릭교회에서 성경 공부가 활성화되면서, 요즘에는 일반 신자들의 가정에도 《공동번역 성서》, 《200주년 신약성서》, 주교회의에서 펴낸 《성경》 등 다양한 종류의 성경이 있다. 성경이 이렇게 널리 보급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 누구일까? 성경 보급에 큰 힘을 쏟은 역사적 인물이라면 아마도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 742-814)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자 -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는 742년경,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오늘날의 서부 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을 정도로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무역을 부흥시키는 등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훌륭한 정부를 구성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러한 정치·문화적 업적으로 인해 서유럽인의 민족적 영웅으로 길이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다.

 

매일 미사에 참여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카롤루스 대제는 새 정복지들도 모두 그리스도교화 되길 원했기 때문에 다소 강제적이긴 했지만 많은 이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종교적 통합을 이루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로마 교황에게서 제왕의 관을 받아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황제 대관은 서유럽인들에게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전쟁에 몰두하느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카롤루스 대제는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제대로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신화, 언어, 문화 등에 매혹된 그는 자신의 광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재건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헨(Aachen)에 있던 그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서 고대 문학의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자신을 그리스도교 제국의 황제라고 여겼던 카롤루스 대제는 주교의 책무, 교구의 설립, 성당의 참사회 조직, 모든 신자의 예배 참석 장려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제도와 신학을 정비하고 개혁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 모든 계획을 실천하려면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 필요했으나 프랑크 왕국 안에서는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조력자를 찾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훌륭한 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모든 학문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능통하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를 본 순간 그가 프랑크 왕국의 교육을 개혁하는 데 최적임자라고 느꼈다. 그가 바로 잉글랜드 요크 출신의 학자 ‘앨퀸’(Alcuin, 735?-804)이었다. 앨퀸은 782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아헨의 궁정학교를 재건할 총책임을 맡았다. 그가 개혁한 궁정학교로 전유럽의 훌륭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문맹률이 높고 우수한 교사가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교육을 시키는 데 필요한 기반시설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앨퀸은 도서관 건립을 계획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렴하게 책을 만들 수 있는 파피루스를 생산하던 지역은 당시 모두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해서, 서방에서 책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양피지뿐이었기 때문이다. 앨퀸은 카롤루스 대제에게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선 양피지를 대량으로 확보해 줄 것을 청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프랑크 왕국 전체에서 생산된 양피지들은 아헨의 궁정학교와 투르의 필사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한 앨퀸은 경험 없는 새내기 필경사들을 이끌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솔선수범하여 서적의 생산과 도서관 설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앨퀸은 카롤루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제국을 만들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개혁을 돕는 데 헌신했다. 교육 개혁에 필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필사실에서 보냈다. 추운 겨울에는 손이 얼고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앨퀸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완성을 꿈꾸며 고생스러운 필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앨퀸과 동료들이 필사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은 성경과 성경 주해서였다. 현재 서양 문화가 자랑하는 양피지 필사본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이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작성된 것인데,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앨퀸은 이 작업을 위해 소문자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유럽어는 대문자로만 쓰였고, 지역에 따라 그 모양도 달랐다. 카롤루스 대제는 새롭게 개발된 소문자를 사용하도록 장려했고 그의 명에 따라 이전 책들 중 90% 정도가 이 소문자로 필사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서유럽에 남아 있던 필사본의 숫자는 네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성경 보급과 연구의 활성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은 성경을 소중하게 여겨 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시기에는 이러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보석이나 상아조각으로 장식된 예술품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앨퀸이 주도한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정책이 성경 장식에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앨퀸은 과거에 각광받던 수사학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학과 문법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교도 문학을 잘 이해하기 위해 개발된 라틴어 문법학을 성경 해석에 적용함으로써 이후 그리스도교 문화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 더욱이 이렇게 발전한 문법학을 활용하여 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 성경》을 언어학적으로 고친 교정본은 9세기 이후에 널리 활용되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데에는 카롤루스 대제와 앨퀸 같은 숨은 일꾼들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 필사실에서 성경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옮겨 쓰던 필경사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성경의 소중한 가치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나요?

박승찬 엘리야

 

 

예정론 논쟁과 에리우게나

 

신문이나 잡지에 별점이나 사주 항목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 대부분은 미래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세속적 성공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성경 곳곳에 나오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영벌을 받을 자를 미리 정해놓으셨는가?’ 하는 ‘예정론(豫定論)’ 논쟁이 이미 스콜라 철학이 태동하던 9세기에 벌어졌다.

 

스콜라철학 초기에 나타난 고트샬크의 이중 예정론

 

예정론 논쟁은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의 결실로 학교 제도가 개편되고, 논리학과 문법학을 포괄하는 ‘변증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을 일으킨 사람은 어린 나이에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던 고트샬크(Gottschalk, 808-867?)였다. 고트샬크는 변증론과 성경 공부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스승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사춘기에 접어든 고트샬크는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아갈 마음이 없었다. 스승들에게 수도원 학교를 떠나기를 청했지만, 그의 재능을 아꼈던 수도원장과 주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고트샬크는 수도원 학교의 교사로 살게 되었고 자신의 뛰어난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할 사람과 악마의 노예가 될 사람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는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고트샬크는 개인의 자유를 무시당한 자신의 부정적 체험 때문에 이런 이론을 주장하게 된 것일까? 수도회의 장상과 주교가 보기에 그의 이론은 영원한 운명이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예정되어 있다고 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선교 활동을 폄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입장을 철회시키고 싶었지만, 이미 변증론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춘 교사 고트샬크는 더 이상 윽박지를 수 있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예정론 문제를 해결하며 등장한 에리우게나

 

곤경에 빠진 교회 지도자들을 구해 줄 뛰어난 학자가 혜성같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77)였다. 교육 수준이 높았던 아일랜드에서 자라난 그는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까지 능통한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는 고트샬크의 책을 읽고 그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뛰어난 변증론의 지식을 활용했다.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하느님은 절대적 단순성을 지니고 계시므로 예정론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하느님은 흘러넘치는 선(善)이시기 때문에,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며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 죄인에 대한 진정한 벌은 그 죄인이 자신에게 내릴 뿐이다. 에리우게나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변증론을 활용한 치밀한 논변으로 고트샬크의 주장을 무력화시켰다. 교회 지도자들은 위험한 고트샬크를 무찌른 에리우게나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이후 그가 더 위험해 보이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에리우게나는 이중 예정설을 반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성경 연구를 통해서 찾아낸 종말론에 대한 여러 생각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그는 이중 예정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며 어떠한 예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처벌은 불길이 치솟는 지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후회가 바로 지옥이라고 했다. 지옥을 특정한 장소적 개념으로 보지 않은 에리우게나의 주장은 당시 뜨거운 불이 타고 있는 땅 밑의 지옥만을 생각하던 신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았다. 에리우게나의 주장은 고트샬크의 이론보다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교회에서 단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경 연구를 위해 변증론 논의를 수용한 에리우게나

 

마침 에리우게나의 재능을 아꼈던 카롤루스 대머리왕(Charles the Bald)이 직접 개입하여, 그에게 새로 발견된 《위(僞) 디오니시우스 전집》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겼다. 이는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자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에리우게나는 이 작업을 훌륭하게 완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존 신학 지식과 번역 작업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된 통찰력을 집대성하여 《자연 구분론》이라는 대작을 남겼다. 그 안에서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된 ‘자연’을 분석했다. 에리우게나는 이 저작을 통해 신이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한 순간부터 아담의 추방, 육화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우주의 통일성 있는 원리를 설명하고, 세계의 기원이 되었던 신과 다시 합일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에리우게나는 이렇게 자신이 철학에서 배운 용어들을 토대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총정리했지만, 그의 핵심적인 관심은 성경을 통해서 얻은 지혜였다. 그는 자연과 성경을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두 장소라고 믿었다. 성경은 진리의 지식을 향한 길을 보여 주고, 구체적인 언어로 표시된 성경의 내용은 암시적이고 표징을 가득 담고 있는 자연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영적 독수리’라는 별명을 지닌 성 요한 복음사가를 지성인의 표상이라고 칭송했으며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요한 복음서 서문에 대한 주해》를 저술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유학예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이성적 규범이 적절하게 응용된다면 신학적 논제를 전개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을 통해 알려진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한 변증론을 바탕으로 성경을 주의 깊게 분석하는 과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진정한 종교와 진정한 철학은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는 것이었다.

 

많은 신앙인이 자신이 구원받을지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 버리는 강제력을 지니지 않는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가 강조해 왔다. 이 지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결코 알 수 없는 결론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거나 불안에 떨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모든 이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에리우게나처럼 주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다해 애쓰면서 그분의 뜻에 맞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찬례 논쟁

박승찬 엘리야

 

 

변증론자와 반변증론자의 대립

 

성경을 ‘그대로’ 믿어도 될까?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면, 성경에서 읽은 내용과 전공에서 배운 내용이 충돌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 온 개신교 학생들이 이런 충돌을 느낄 때 더 큰 갈등을 겪는다. 이성을 중시해서 성경 내용을 신화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면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문적인 내용을 거부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은 초대 교회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주도하는 학문이 등장할 때마다 새롭게 제기되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갈등이 첨예한 논쟁으로 발전하는 일이 스콜라 철학의 초기에도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성찬례 논쟁’이다.

 

‘스콜라’(Schola)라고 불리는 중세 학교는 일곱 가지 ‘자유학예’(artes liberales)를 주로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 이 세 학과가 모든 학문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세 시대에는 문법학과 논리학을 합쳐서 ‘변증론’이라고 불렀는데, 라틴어가 사라지게 되면서 변증론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변증론자들은 변증론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신학도 이러한 변증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적과 같은 신비적인 것에 기대지 않고, 변증론의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증명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반대하는 이들도 많이 나타났다. ‘반(反)변증론자’들은 변증론이란 기껏해야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변증론이란 신학의 고유한 보물을 훔쳐 가기 위해 악마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라고까지 단언했다.

 

재능 있는 두 친구 :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쿠스

 

당시의 열띤 분위기를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샤르트르 주교좌성당 학교에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와 ‘란프랑쿠스’(Lanfrancus)라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이 있었다. 이 둘은 수업시간에 수준 높은 질문을 던져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하고, 중요한 토론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란프랑쿠스가 문법학 수업에 나오지 않았고, 토론대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베렌가리우스는 란프랑쿠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져서 그의 뒤를 밟다가, 학교 경당의 성체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친구를 발견했다. 얼마 후 란프랑쿠스는 친구에게 “나는 변증론을 포기하고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명상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겠다”고 선포했다. 베렌가리우스는 크게 실망했지만, 친구를 감싸 안고 그의 결정을 축복해 주었다. 두 친구는 각자의 길을 갔다.

 

성찬례 논쟁

 

베렌가리우스는 변증론 공부를 계속하여 최고의 변증론 선생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문법학과 논리학을 가지고 성경의 내용을 완벽하게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베렌가리우스는 73권이나 되는 성경을 모두 해석하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새로운 길을 찾았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일일이 해석할 것이 아니라 가톨릭 미사 중에 가장 핵심적인 문장을 멋지게 분석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성찬례의 핵심이 되는 라틴어 문장이 “Hoc enim est corpus meum”, 음독(音讀)하자면 “혹 에님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뜻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장이다. 그런데 변증론의 기본에 따르면, 문장에 사용되는 지시대명사나 인칭대명사를 분명히 해야 그 문장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Hoc’(이것)과 ‘meum’(나의)라는 단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선 ‘이것’이 사제가 들고 있는 빵을 가리킨다면, 이 문장은 ‘이 빵은 예수님의 몸이다’로 해석되어 예수님이 마치 호빵맨처럼 빵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이미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면,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의 몸이다’라는 동어반복이 되어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 된다. 사제가 성찬 기도를 바치는 동안에 변화가 일어나서, 빵이었던 ‘이것’이 ‘나의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해도, 베렌가리우스에게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못 되었다. ‘그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아무런 의문 없이 미사에 참여했던 이들로서는 이런 베렌가리우스의 질문들이 듣기 불편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감히 뛰어난 변증론자인 베렌가리우스와 논쟁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바로 베렌가리우스의 옛 친구 란프랑쿠스가 “그만!”이라고 외치며 나타났다. 그는 베렌가리우스가 자신의 변증론 지식을 가지고 신학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란프랑쿠스는 성찬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변증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해 새롭게 설명했다. 드디어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쿠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둘 다 뛰어났던 만큼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창 토론이 무르익어 갈 무렵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토론에 끼어들었고 아직 제대로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란프랑쿠스의 승리를 선언해 버렸다. 더욱이 베렌가리우스에게는 파문당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며 그의 이론을 철회할 것을 강요했다.

 

그 당시의 논쟁을 묘사한 다음 그림에는 후광이 빛나는 란프랑쿠스와는 대조적으로 베렌가리우스가 난쟁이처럼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변증론자와 반변증론자 사이의 논쟁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휴전에 들어가고 말았다. 교회 지도자들이 개입하여 반변증론자의 승리로 결론을 내렸지만, 이성적인 열망이 강했던 사람들은 이런 성급한 결정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신학적으로 논의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에 교회의 권위가 성급하게 개입하는 방식은 결코 성숙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도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신앙은 마치 비이성적이거나 반(反)이성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맹신과 광기가 신앙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드는 경우 교회 공동체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음을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제3의 길이 있을까? 다음 호에서 이 길을 찾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를 통해 이 질문에 답해 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이성만으로 논증된 성경?

박승찬 엘리야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이런 주장과 비슷한 논조가 담긴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엄청난 반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큰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에 관한 언론 보도는 대부분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신론자들이나 종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아무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종교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은 인간 이성, 특히 자연과학의 성과나 가능성만을 신뢰한다.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종교에 대한 실망감으로 성경에 담겨 있는 구원의 진리를 믿지 않고, 마음의 빗장을 닫아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단서를 주는 멘토가 있다. 바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이다.

 

안셀무스의 성장 배경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059년 노르망디 지방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크 수도원의 원장은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하던 변증론자 베렌가리우스를 논쟁에서 무찔러 명성을 얻은 란프랑쿠스였다. 106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안셀무스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더불어 문법학과 논리학 등의 정규 과정을 배우는 한편, 수도원 도서관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의 책을 섭렵하였다. 1067년에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제자인 동료 수사들을 위해 많은 작품을 썼고, 윤리와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유럽 최고의 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성만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모놀로기온》

 

안셀무스가 최초로 쓴 저서인 《모놀로기온(Monologion, 독어록獨語錄》(1077)의 서문에는 집필 동기가 언급되어 있다. 제자들은 스승 안셀무스에게 성경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은 이미 달라진 베크 수도원 학교의 학문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과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이 항상 신앙과 신학을 위한 첫째 원천이었다. 서구 신학의 최고봉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성경에 근거를 둔 논증을 이성에 근거를 둔 논증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이성만을 강조하던 변증론자와 신앙만을 강조하던 반변증론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성급하게 종료된 이후(<성서와함께> 7월호 참조), 수도원 학교의 젊은 학생들은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한 논증을 기피하고 있었다.

 

안셀무스는 제자들의 요청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거절했지만, 요청이 반복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놀로기온》에서 성경 및 전통, 교부들의 학설을 배제하고 오직 합리적인 방식만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의 외형만 보면,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의 제자가 아니라 반변증론자인 베렌가리우스의 제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성경에 근거를 둔 논증과 이성적인 논증을 철저히 분리하고 단지 이성 논증에만 근거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려 시도한 것은 안셀무스가 처음이었다. 이것은 매우 과감한 시도였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안셀무스가 여러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책이 필사되어 회람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반변증론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생 사제지간의 정을 유지하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란프랑쿠스도 크게 실망했다. 제목을 지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 책을 받았을 때, 란프랑쿠스는 옛 제자 안셀무스에게 동일한 내용을 풍부한 성경 인용을 바탕으로 다시 쓰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를 새로운 것에 대해 자신만만해하거나 거짓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곧바로 마구 비난하지 말고, 먼저 이미 설명한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삼위일체론》을 주의 깊게 통찰한 다음 그것에 따라 나의 작품을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모놀로기온》, 머리말).

 

안셀무스가 성경을 배제한 이유

 

그렇다면 안셀무스는 왜 계시의 원천인 성경을 배제하려고 했을까? 그는 결코 이성만을 중시했던 변증론자들처럼 성경을 무시할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이성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이런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에서 20개 정도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그렇지만 그 구절들을 결정적인 증명 도구로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사변적인 길을 통해 얻은 결과들이 성경의 어구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성경을 변호하려 했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신앙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나하나 단순한 이성적 숙고로써 얻어 내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비신앙인들을 논박하는 동시에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의 합리성을 통찰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주려했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모놀로기온》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학문적인 정교함으로 실현했다.

 

자신의 의도를 타당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안셀무스는 어떤 것도,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했다. 그는 비신앙인에게도 계시의 도움 없이 신앙의 진리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이에게 “자기 스스로 오직 이성만으로 확신하도록”(《모놀로기온》, 제1장) 요청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의 진리를 계시해 주신 하느님과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는 믿음에서 나왔다.

 

안셀무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만으로 성경의 신비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강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한 답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비의 근간이 되는 육화의 이유를 다룬 그의 책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를 통해 다음 호에서 찾아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

박승찬 엘리야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했고, 이로 인해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렇지만 그가 마치 인간의 이성만으로 성경의 모든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성적 논증의 영역을 확장한 것에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현상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방인 철학자들과 그리스도교 지성인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것이 ‘강생’ 또는 ‘육화’(incarnatio)의 신비이다.

 

영지주의자들이나 일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육화의 신비를 비이성적이라고 여겨 아예 거부했다. 이와 달리 안셀무스는 육화의 신비를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신비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성적으로 탐구했다. 그 결실이 바로 안셀무스가 유배 시절에 집필한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이다.

 

교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1078년 안셀무스가 베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이미 그가 박학하고 덕이 높다는 소문이 당시 노르망디를 포함한 영국 전체에 퍼졌다. 1093년에 영국 왕 윌리엄 2세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란프랑쿠스가 사망하자 안셀무스를 후임자로 임명했다. 안셀무스는 세속적인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노쇠함을 이유로 이 중책을 거절했으나 주위의 간청이 끊이지 않자 마지못해 수락했다. 안타깝게도 주교직 수락과 함께 안셀무스는 남은 생애 내내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영국 왕이 성직자들을 직접 임명하고 교황과의 연락을 제한하는 등 교회 직무에 간섭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성직 서임권 논쟁의 여파로 안셀무스 대주교는 두 번이나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불안한 처지에서 그는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를 완성했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

 

안셀무스는 이 책에서 육화의 신비를 인간 구원과 관련해서 다룬다. 안셀무스 이전의 학자들은 오리게네스가 처음 표명한 소위 ‘속량(贖良) 이론’을 통해 인간 구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속량 이론에 따르면, 악마가 죄지은 인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 이론은 오랜 세월 교회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안셀무스는 속량 이론의 이성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속량 이론은 악마의 권리를 지나치게 인정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위협하는 듯했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인간 본성의 미천함을 회복하고자 받아들인, ‘필연적인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결국 그는 라틴 세계의 독창적인 구원론인 ‘대속(代贖) 이론’을 발전시켰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운 질서(ordo)가 파괴된 것은 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 죄악은 너무나 커서 죽음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그런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하느님을 직관하는 가장 큰 행복(지복직관)에 이르도록 계획하셨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파괴된 세상 질서가 복구되어야만, 즉 손상된 하느님의 영예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의 자발적 보상이 필요하기에 성자의 육화가 필연적인 것이다. 성부께서 시작하신 구원 업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Logos)인 성자가 자원하여 인간의 구체적 · 역사적 · 인격적 본성을 취했다. 이 육화를 통해 신적 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고 구원받게 된 것이다.

 

많은 학자는 안셀무스가 자신에게 익숙했던 사회법적인 표상에 따라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게르만족의 영예 회복 관습에 따르면, 영예가 손상된 자의 품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때렸다면, 사과하고 화해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사나 국왕을 때렸다면, 아랫사람의 사과만으로 쉽게 해결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화해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인 그리스도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육화의 이유를 찾아낸 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육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할 수 없으리라는 교리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각 사물에는 ‘올바름’, 즉 신적인 조화가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는 올바름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 언제나 올바른 것만을 원하시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안셀무스의 대속 이론에 대한 평가

 

안셀무스의 대속 이론은 많은 신학자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원하여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섭리의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가 잘 조화된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았다. 그렇지만 안셀무스의 구원론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성자의 죽음이 지닌 효력만 강조되다 보니 그리스도의 고통이 갖는 구원론적인 가치는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또한, 죄 없이 돌아가신 성자의 업적과 죄지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다 보니, 교부들이 머리와 지체로 강조한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안셀무스의 대속 이론은 하느님과 외부 세계를 본질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안셀무스의 대속 이론은 이후 신학사에서 많은 찬성자와 반대자를 만나게 된다. 안셀무스와 달리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해명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인 신비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육화의 신비를 완벽하게 해명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성경에 담긴 놀라운 신비를 인간의 생각과 언어만으로 모두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신비를 알 수도 없고, 알아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침묵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안셀무스처럼 자신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추어 설명함으로써 그 신비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위대한 신비가의 빛과 그림자

박승찬 엘리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11-12세기에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활약 등으로 스콜라 철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당시의 모든 사람이 스콜라 철학에 감동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성과 논리에 지나치게 의존해 뜨거운 가슴의 종교가 아닌 차가운 머리의 종교가 되는 것을 경고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성경에 기반한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이들의 지도자는 ‘최후의 교부’로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 1091-1153)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호의적 평가와는 달리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 또한 적지 않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베르나르두스는 1090년 퐁텐-레-디종의 작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형제와 친척이 포함된 귀족 30여 명과 함께 시토 수도회에 입회했다. 시토 수도회는 대형화된 클뤼니 수도원을 비판하면서 사도 시대의 청빈과 성 베네딕도 규칙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립된 개혁 수도회였다. 영성 훈련 기간이 끝난 후 수도회의 장상은 시토가 많은 회원으로 붐비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베르나르두스와 친지들을 클레르보로 보내어 기초를 새로이 닦도록 했다. 이후 베르나르두스는 수도원을 66개나 설립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므로 ‘제2의 시토회 창설자’로 불린다. 그리하여 그는 12세기 중엽에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베르나르두스는 베네딕도회 영성의 전통 및 관례를 따라 성경 묵상을 다른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이에 덧붙여 교부들, 예를 들면 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누스 및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등의 주해를 읽으며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영적 가르침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비 외에 어떤 다른 신비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일치와 의미를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두스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그리스도 신비의 핵심으로 여겼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그런데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는 성경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에 의해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동화되어 완전해지려면 교회의 교리,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애덕의 박사’의 하느님 사랑

 

베르나르두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애덕의 박사’로도 불린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는 단계를 베르나르두스는 육체적 · 타산적 · 효경적 · 신비적 단계로 구분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자연 본능적으로 ‘육체적 사랑’을 지닌다. 이것이 은총에 의해 초자연화될 때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지상 생애의 사건에 초점을 두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랑은 종종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이익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비굴한 사랑인 ‘타산적 사랑’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더 큰 성령의 은사가 있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보는 사욕이 없는 사랑인 ‘효경적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서 사욕이 전혀 없는 사랑인 ‘신비적 사랑’이 그것이다. 그는 “신비적 사랑의 단계에 도달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두스는 물론 현세에서 하느님을 사랑함에는 끝이 없고 인간은 절대적 완성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큰 완덕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겸손의 덕이 필수적이다.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겸손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은 결과로 나타난다. 또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해진 사도는 관상가인 동시에 활동하는 인간이라야 한다. 먼저 자기 영혼의 성화를 위해 노력한 후, 다른 이들의 영혼을 성화시키는 데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의 안타까운 실수

 

베르나르두스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많은 제자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모든 면에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146년 제1차 십자군이 주둔해 있던 에데사가 이슬람에 함락되자,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의 설교특사로서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주창했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는 자세와 순수한 용서를 실천하는 새로운 의미의 십자군을 권유했다. 그의 설교에 감동받은 많은 사람이 바로 십자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그의 설교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는 물론 금전적인 이득이나 이교도들에 대한 살상을 목적으로 한 기존의 십자군 관행을 비판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무죄한 사람의 학살을 야기했고, 베르나르두스는 안타깝게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스콜라 철학이 명상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는 것에도 거부감을 표시했다. 특히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라는 12세기 스타 강사가 논리학은 물론 신학적인 주제로 토론하면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고 분노했다. 베르나르두스에게는 아벨라르두스가 ‘지성’이라는 추한 손가락으로 대담하게 삼위일체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였다. 베르나르두스는 아벨라르두스를 박해하고 단죄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신학적인 사고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말았다.

 

베르나르두스는 12세기 전반기 최고의 영적 스승이었다. 특히 《아가 설교(Sermones in Canticum Canticorum)》로 대표되는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주의는 수 세기 동안 독일,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을 거쳐 루터와 경건주의자, 이신론자, 루소와 젊은 괴테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쉽게도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그리스도교인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남겼다. 베르나르두스는 개인적인 신심만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알려주는 타산지석으로 남은 셈이다. 베르나르두스가 그토록 비난했던 아벨라르두스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경 내용의 충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박승찬 엘리야

 

 

아벨라르두스의 《그렇다와 아니다》

 

“이런, 분노가 이성을 지배하고 격정이 판단력을 흐리는구나”(《오셀로》, 셰익스피어). ‘애덕의 성인’으로 불리던 베르나르두스도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결국 베르나르두스는 상스 공의회에서 사전 담합이라는 부당한 수단까지 동원해 아벨라르두스를 단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많은 역사가는 베르나르두스가 아벨라르두스의 새로운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벨라르두스는 누구이며 어떤 정신을 새롭게 도입한 것일까?

 

논쟁을 통해 명성을 얻은 아벨라르두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벨라르두스는 논리학을 섭렵한 후 지방에서 사립학교를 열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파리에까지 진출했지만,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 그러자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학교에 학생으로 등록했다. 아벨라르두스는 당시 스승이었던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을 비롯한 수많은 유명 교사와 공적인 논쟁을 벌여 승리했다. 또한, 논리학에 관한 주해서와 저서를 집필하며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른 교사들이 그가 제시했던 이론을 공격하면, 아벨라르두스는 새롭게 발전시킨 이론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그는 젊은 나이에 ‘최고의 논리학자’라는 명성과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논리학 분야를 평정한 아벨라르두스는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인정받던 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라옹의 안셀무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그 교육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벨라르두스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그를 곤경에 빠뜨렸고, 논리학 지식을 신학에 응용함으로써 금세 신학 분야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학자로 부상했다.

 

엘로이즈와의 사랑이 가져 온 불행

 

당대에 누렸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벨라르두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가 그의 자서전 《내 불행의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아벨라르두스가 파리에서 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때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위원 풀베르투스(Fulbertus)의 청에 따라 그의 조카딸 엘로이즈(Heloise)의 개인교사가 됐다. 그런데 그는 스무 살가량이나 어린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켰고, 결국 엘로이즈를 자신의 고향 브르타뉴로 데려가 아들을 낳게 한 뒤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의 배신에 진노한 풀베르투스는 사람을 고용해 그를 거세시키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아벨라르두스는 그의 학문적 성과보다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으로 더 화제가 됐다. 그 후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가 머무는 곳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모여들어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여러 수도원을 전전한 끝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 아벨라르두스는 생 주느비에브 학교에서 정열을 불태우며 많은 글을 써서 다시 명성을 얻었다.

 

아벨라르두스가 제시한 신학방법론과 그에 대한 비판

 

아벨라르두스는 자신의 주저인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의 서문에서, 성경에 사용된 단어들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하고, 내포된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초적인 규칙들을 체계화했다(예를 들어, 같은 낱말도 여러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문장들은 문맥에서 따로 떼어 놓으면 종종 잘못 해석되기 쉽다, 심지어 성경도 필사 과정의 잘못으로 왜곡될 수 있다 등등). 또한, 그는 교부들의 다양한 의견을 신학적인 종합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신학 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 반대하는 양쪽의 가장 권위 있는 견해들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대비된 권위 중 어떤 것이 더욱 타당한 근거를 지니는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아벨라르두스는 이전 신학자들이 허용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큰 영역이 이성적 능력에 의하여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벨라르두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신학의 가르침을 수정함으로써 많은 신학자에게 적대감을 샀다. 비판자들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해명의 발상’이 사회 전체를 위협한다며 아벨라르두스를 비난했다. 또한,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학자들은 아벨라르두스가 논리학에서 배운 방법을 그대로 신학에 적용한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아벨라르두스는 하느님, 삼위일체, 그리고 은총과 구원에 대한 모든 신비조차도 무의미한 것으로 밝히려고 지성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렇다면 아벨라르두스는 정말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를 부정하려 했던 것일까?

 

신앙을 해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성

 

아벨라르두스는 신앙의 뿌리를 흔들려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영혼의 구원은 결국 성경에서 오는 것이지 철학자들의 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아벨라르두스는 수녀원장이 된 옛 애인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성 바오로를 거슬러 철학자이고자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한테서 떨어져 아리스토텔레스이고자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를 구원하는 그 이름이 하늘 아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 의식의 기초로 삼은 바위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운 바위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성경의 권위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위를 옹호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는 논리학의 중요한 역할이 신앙의 진리를 해명하고 불신자를 반박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론도 개발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사용했던 방법은 중세 대학 설립 이후에도 정규 토론과 자유 토론 등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화합할 수 없어 보이는 모순들을 발견해도, 무시하고 넘어가거나 잠시 고민하다 해결을 포기한다. 그렇지만 아벨라르두스는 성경의 문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들을 치열한 지성적 토론으로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의 진지한 학문적 자세와 열린 마음은 성경에서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찾으려는 지성인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올바로 표현할 수 있는가?

박승찬 엘리야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은 자연의 심오한 도를 표현하는 데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자연을 창조한 절대자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 문제를 자각한 사상가들이 지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으로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즉 ‘하느님은 …이다’와 같은 긍정적인 문장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을 표현하는 언어를 그대로 하느님에게 사용하다 보면,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의인적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게 되거나, 신과 피조물의 차이를 망각하는 ‘범신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신학의 선구자들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하느님을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은 빛을 발산하는 거대한 물체’라고 생각했던 마니교도뿐만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조차 하느님을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스는 “하느님은 일자(一者)인 동시에 일자를 넘어선 저편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은 물체의 세계처럼 변화하지 않고, 연장이 없는 것으로서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나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절대로 물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것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라는 가르침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안에 정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 신학의 출발점을 부정신학에서 찾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마니교의 신관을 배격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는 하느님을 거대한 물체로만 여겼던 것을 개탄하면서 하느님의 다른 속성들도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시간 안에서 불변(不變)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예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느님은 영원하시다’(aeternus)라는 말도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을 뜻하는 ‘영구함’(perpetuum)과는 구별되며 시간 자체를 벗어나 있는 분으로서 시간마저 창조하신 분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부정의 길을 토대로 ‘생명, 진리, 선, 미, 능력, 지복, 정신’ 등의 명칭들이 지닌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피조물이 지닌 성질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속성에 이르는 길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상징성을 띨 뿐이라고도 생각했다.

 

위(僞)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부정신학을 완성해 후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년경)이다. 그의 저서 《신명론(神名論)》에 따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길로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이 있다. 그는 구약성경, 신플라톤주의 및 앞선 선구자들을 본받아 부정의 길을 더욱 강조했다. 하느님은 극단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이므로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모든 의인적 개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들(예: 술에 취하는 것 등)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해 피조물이 지니는 그 밖의 속성과 성질들 역시 부정해 나가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을 전혀 인식할 수 없기에 우리가 하느님에게 사용하는 모든 명칭 - ‘선, 빛, 아름다움, 사랑, 존재, 생명, 지혜, 진리, 능력, 정의, 구원, 평화’ 등 - 은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명칭은 형용하기 어려운 그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활동만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인간은 모든 감각적 표상, 경험, 사고를 포기해야 함을 깨닫고,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즉, 하느님을 향해 이러한 부정의 과정을 계속해 가면 마침내 인간의 모든 언어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초본질적 암흑’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는 인간의 완전한 무지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신학의 계승자들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서가 알려진 이후, 하느님을 ‘부정의 길’로 설명하는 것이 주류가 됐다. ‘부정의 길’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학자들은 종종 유다인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를 그 대표자로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혼란된 자들의 박사 Doctor Perplexorum》에서 “하느님께 사용되는 모든 명칭은, 그것이 긍정적으로 사용될지라도, 하느님 안에 어떤 것을 부과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어떤 것을 제거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생명이 없는 사물들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에 계승되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 신비주의(타울러, 수소)를 거쳐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까지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부정신학’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표현이 유한한 피조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규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후대 학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흔적 중 하나는 소위 ‘초’(Super)라는 접두어를 사용해 ‘초본질’, ‘초선성’, ‘초지혜’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탁월의 길’(via eminentiae)이다. 그러나 성경 대부분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에 대해 기술한다. 그렇다면 인간 언어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이에 대한 반성은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하여 발전시킨 ‘유비’(analogia) 개념에 농축되어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