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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1) - 허규 베네딕토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8.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1)

‘보는 책’ 요한 묵시록을 시작하며

허규 베네딕토 신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흔히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불립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성경의 책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내용을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환시’라는 새로운 형태를 통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는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묘사하기 위해 많은 상징을 사용합니다. 초월적 현실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언어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담아내기 어렵기에 마치 그림처럼 저자가 본 것을 비유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상징은 당시의 문화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시·공간이 떨어진 다른 문화권에서는 의미가 모호하거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요한 묵시록은 어려운 책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까닭에 요한 묵시록을 지난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를 해석하거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부 상징은 현시대를 해독하는 열쇠로 여겨지고, 숫자와 함께 나타나는 다양한 표현은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거나, 종말의 시기를 점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의 상징

 

요한 묵시록의 다양한 상징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이 사용하는 상징을 낱낱이 나열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체나 자연에 관련한 상징입니다. 하늘, 별, 천둥과 번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은 원래 이 용어가 갖는 의미 곧 창조 때에 만들어진 궁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요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는 구름과 연기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둘째, 동물과 관련한 상징입니다. 동물은 거의 대부분 상징의 의미를 갖습니다. 가령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 용은 악의 세력, 독수리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으로 등장합니다. 상징으로 사용된 동물 대부분은 의인화(擬人化)하여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 원래 의미로 쓰인 것은 “들짐승”(6,8), “전갈”(9,5), “사자”(10,3) 정도입니다.

 

셋째, 인간과 관련한 다양한 상징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인간의 행동이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혼인, 출산, 노동, 상행위 등 인간의 행위와 이마, 얼굴, 머리카락, 손과 발 등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여 환시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특히 인간과 관련된 ‘옷’은 요한 묵시록에서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넷째, 색에 관한 상징입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색채에서 독자는 요한 묵시록이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임을 깨닫습니다. ‘붉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피와 관련되며, 흰색은 하느님의 초월을 나타내는 데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숫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13,18의 “육백육십육(666)”이 대표적 예입니다. 이 숫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방법과 관련이 있는데, 알파벳이 가진 고유한 값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666은 네로 황제의 이름(Neron Cesar)의 각 철자가 지닌 고유한 값을 더한 형태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숫자를 통한 상징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선 7은 완전함이나 전체를 의미하는데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서 비롯된 이해입니다. 일곱 봉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요한 묵시록 저자는 이 숫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책을 구성합니다. 7의 반에 해당하는 3½은 불완전함이나 전체에 반대되는 부분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마흔두 달”(11,2)이나 “천이백육십 일”(11,3)은 모두 삼 년 반을 의미하고, 불완전한 곧 일시적 사건을 나타내는 데 쓰입니다.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숫자는 ‘12’입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이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며 전체를 완성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나타내는 “십사만 사천 명”(7,4) 역시 12의 배수(12×12×1000)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3’은 하느님과 관련된 것에 사용됩니다. 고대 사람들은 시·공간과 관련하여 ‘과거-현재-미래’나 ‘하늘-땅-바다’처럼 세 부분으로 전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나타내는 3은 신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1,4.8)분이나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22,13) 등은 하느님이나 그리스도에게 사용됩니다.

 

반면에 ‘4’는 지상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땅은 네 개의 방위 곧 동서남북으로 표시되고, 이것을 통해 숫자 4는 지상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5,9)라는 표현은 4와 관련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상징에 대한 이해

 

물론 지금까지 본 상징처럼 하나의 표현이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요한 묵시록을 오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개별 상징과 함께 요한 묵시록의 전체 맥락에서 상징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많이 쓰인 상징적 표현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자신의 환시를 잘 표현하기 위해 구약성경과 유다교에서 사용하던 상징을 이용하지만, 전혀 새로운 환시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개별 표현은 낯설지 않지만 그 표현이 모여 이루어진 환시를 성경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환시의 특징을 ‘모자이크식 환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계시의 내용이나 신학을 논리적 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환시로 마치 그림처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회화적’이라고 할 요한 묵시록의 특징은 다른 신약성경의 책에서 접하지 못한 것이기에 난해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통해 그림을 보듯 환시에 접근한다면 요한 묵시록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

허규 베네딕토 신부

 

 

저자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유스티노, 클레멘스, 이레네오 등 많은 교부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마르 1,19)이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밝힙니다. 이런 의견에는 두 가지 사실이 근거로 제시됩니다.

 

우선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자신을 “요한”(1,1.4.9; 22,8)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저자는 자신을 “당신 종 요한”(1,1)으로, 나아가 환난에 함께하는 형제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1,9)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근거는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공통된 사상입니다. 두 작품은 모두 생명의 물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으며(요한 4장; 묵시 7,17; 22,1-17 참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고(요한 1,1; 묵시 19,13 참조) ‘어린양’이란 주제를 사용합니다. 이 모든 내용은 요한 묵시록과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동일한 인물, 곧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런 전통적 의견과 달리 요한 복음서와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동일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통된 사상이 있지만 차이점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언어의 문제입니다. 우리말로 보면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리스어로 보면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어를, 그리스어에서 히브리어의 특성이 많이 나타나는 ‘셈족화된 그리스어’라고 부릅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육화(肉化)’에 대한 강조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 중에서 육화는 가장 기초가 되는 사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요한 복음이 강조하는 내용이고, 이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론의 기초가 됩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에서는 육화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이라는 유형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묵시문학은 대부분 환시를 사용하고 초월적 세상과 현실 세상을 구분하며, 종말을 심판이나 전쟁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차명성’입니다. 대부분의 묵시문학 작품의 저자는 자신을 누구라고 표현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경우, 저자가 “요한”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요한 복음서의 저자와 같지 않으며, 실제의 요한이 아닌 익명의 예언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의 말씀과 예언의 책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이 전하는 내용을 ‘예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1,3)라고 밝힙니다. 나아가 이런 내용이 천사의 입을 통해서도 표현됩니다(22,7.10.18.19 참조). 이 여러 본문은 저자가 자신을 예언자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순회)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원래 팔레스티나 지역,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스라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 유배에 처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요한 묵시록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이미 소아시아 공동체에서는 박해로 인해 순교자가 생겨났다고 말합니다(2,13 참조). 그렇다면 언제쯤 요한 묵시록이 쓰였을까요? 이것을 찾아내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기에 결과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7,9은 탕녀 바빌론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산이며 또 일곱 임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산은 로마라는 도시를 생각하게 합니다. 로마는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임금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요한 묵시록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중에서 요한 묵시록이 쓰인 시기는 80년 이후로 여겨집니다. 로마를 ‘바빌론’으로 일컫는 것이나 ‘열두 사도’(복음서는 보통 ‘열둘’이라는 표현으로 제자들을 나타낸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80년 이후에 찾을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만족시키는 것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의 통치 시기입니다. 로마 제국은 시작부터 황제를 신격화하려 했습니다. 황제들은 재임기에 ‘신의 아들’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죽은 뒤에는 ‘신’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재임 중에 이미 ‘우리의 주님이시며 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소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자신의 신상을 세워 경배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런 황제 숭배 의식을 행하도록 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황제 숭배 의식을 확장하고 예전보다 강하게 요구하였기에 그리스도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 숭배는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에 살던 신앙인들이 황제 숭배 의식을 거부한 것이 그들을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런 배경에서 쓰인 책입니다. 점차 심해지는 박해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고 신앙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려 합니다.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믿음을 지켜나가는 이들에게 ‘종말이 멀지 않았고 그때에 하느님께서 악의 세력을 모두 심판하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은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전하는 계시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사람의 아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 묵시록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도입(1,1-20),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장), 주요 환시(4,1-22,5), 마침(22,6-21)입니다. 전체 구조에서 볼 수 있듯,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환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 환시를 전하는 부분은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대한 환시가 중심을 이룹니다. 환시를 묘사하는 많은 표현은 구약성경의 여러 상징과 연결됩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자가 본 환시를 지금 우리는 글로 읽는다는 점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머리말

 

1,1-3은 요한 묵시록 전체에 대한 소개와 같습니다. 책의 처음에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는 앞으로 전해질 내용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저자가 기록한 대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1,1)에 관한 계시가 요한 묵시록의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들을 그리스도께 알리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통해 “당신 종 요한”(1,1)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 내용은 하느님의 종들, 곧 모든 신앙인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서 드러난 특별한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1,3)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단순히 ‘읽다’라고 표현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청중 앞에서 읽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낭독’이란 표현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회중 앞에서 읽는 것, 곧 요한 묵시록이 전례에서 낭독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요한 묵시록에 전례적 성격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특징에 비하면 그리 비중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편지의 서문

 

1,4부터 나오는 인사는 전형적인 편지 형식입니다. 그 특징을 바오로의 서간과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편지 서두에는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는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이에 대한 소개이고, 둘째는 편지의 수신인에 대한 언급이며, 셋째는 수신인에게 전하는 인사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발신인이며, ‘일곱 교회’는 앞으로 전개될 내용의 수신인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길게 표현한 인사말은 여느 서간에서 보이는 것처럼 수신인에게 은총과 평화를 빌어 주는 형식으로 기술됩니다.

 

요한 묵시록의 편지 서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직접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1,5)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1,6) 하셨다는 내용에서 세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백성(또는 자녀)이 되는 것은 세례로 얻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표현을 통해 세례를 기억하도록, 세례 때의 첫 마음을 기억하도록 요청합니다.

 

지금도 전례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1,8)이라는 용어는 구약성경의 “만군의 주님”에서 유래합니다. 현재 용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구약성경에서 사용하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표상이 담겨 있습니다.

 

소명 환시

 

1,9-20은 저자 ‘요한’이 소명을 받는 내용을 환시로 전합니다. ‘소명’은 예언서의 주된 특징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환시와 함께 전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요한 묵시록의 저자 역시 예언자들의 전통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을 “형제”이고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1,9)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현재 파트모스라는 섬에 갇혀 있습니다. 이 모든 정황은 저자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1,9), 곧 신앙으로 인한 박해 때문에 유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저자에게 전해진 소명은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 에 보내라”(1,11)는 것입니다. 이 소명은 앞으로 소개될 책의 내용이 ‘보는 것’, 곧 환시라는 점을 명확하게 합니다. 소명을 전해 준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1,13)입니다. 이 표현은 다니 7,13(“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1,13) 있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사제의 복장을 떠오르게 합니다(탈출 28장; 39장 참조).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다 고대사>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3권 7장 참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흰 눈에 비교되고 그분의 눈은 불꽃에 비교됩니다. 그분의 발은 놋쇠 같고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습니다. 흰색은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초월을 상징하기에, 환시를 통해 전해지는 이미지는 이미 사람의 아들이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불(꽃)은 많은 경우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암시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눈이 불꽃과 같다’는 표현은 앞으로 펼쳐질 정의와 심판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을 다니 7,9과 10,6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표현된 사람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분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1,18). 소명 환시에서 보이는 사람의 아들은 앞으로 일어날 종말 때의 심판을 이끌어 갈 분으로 소개됩니다. 특히 1,16에 표현된 일곱 별을 쥐고 일곱 교회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이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쌍날칼”은 심판이라는 그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환시에서 보이는 여러 상징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사람의 아들이 가진 역할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암시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1)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와 함께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2-3장에서 만나게 되는 이 부분은 짧은 편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 보면 동일한 표현이 반복해서 사용된다는 점 역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공통적으로 “…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각 공동체의 지도자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요한 묵시록의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천사들에 대한 언급을 생각해 본다면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호천사 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지는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 을 주겠다”는 표현으로 마칩니다. 이처럼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반복되는 표현으로 구성됩니다.

 

에페소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에페소 공동체입니다. 당시 에페소는 경제가 상당히 발전된, 소아시아의 주도(主都)였습니다. 에페소는 특별히 신약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곳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는데, 그 후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요한 복음서와 사목 서간이 그곳에서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에페소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여인들과 사냥의 수호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자신을 위한 신전을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처럼 에페소는 소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였습니다.

 

니콜라오스파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낯선 두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과 ‘니콜라오스파’입니다. 에페소 공동체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켜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거짓 사도들과 니콜라오스파는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들이 황제 숭배 의식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황제 숭배를 접목한 가르침을 전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의 구체적 소행은 페르가몬에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2,14)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거짓 사도들, 니콜라오스파, 발라암의 가르침, 그리고 여예언자 이제벨은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통해 신앙인들이 잘못된 길을 걷게 하는 부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로 인한 폐해가 신앙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묵시록 저자는 그것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에페소 신자들에게 강조되는 것은 ‘회개’입니다. 이것을 요한 묵시록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2,4)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2,5)는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회개의 의미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어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2,7)는 것입니다. 생명 나무에 대해서는 22,19에서도 다시 표현됩니다. 생명 나무는 구원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을 연상케 합니다.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전합니다(창세 2,9 참조). 이러한 암시에서 요한 묵시록이 전하고자 하는 새로운 창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미르나

 

스미르나는 에페소 북쪽에 있는 바닷가에 인접한 도시로, 소아시아에서 형성된 초기 도시로 여겨집니다. 이미 26년에 스미르나에는 황제 티베리우스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다고 전해집니다. 70년 유다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후 많은 유다인이 이곳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미르나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스미르나 교회에 소개되는 사람의 아들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2,8)입니다. 이 표현은 5,6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과 동일인물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스미르나 공동체를 특징짓는 것은 환난과 궁핍입니다. 유다인들이 이방인들과 경제 교역을 피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유다인이 많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경제적으로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 맞게 스미르나 공동체는 유다인과 갈등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2,9)은 니콜라오스파와 관련이 있다기보다 스미르나에 살던 유다인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유다인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종교생활의 특혜를 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박해가 닥치자 유다인은 자기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과 구분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이러한 배경이 요한 묵시록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궁핍과 박해로 인한 환난에서도 신앙을 끝까지 지키라고 권고하는 것이 이 편지의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생명의 화관입니다. 그 내용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2,11) 면하는 것입니다. 20,6.14과 21,8에서 두 번째 죽음은 천년의 다스림 후에 오는 것으로 완전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죽음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환시에 따르면 새로운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2)

허규 베네딕토 신부

 

 

페르가몬

 

페르가몬은 오늘날 터키의 베르가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페소 이후에 소아시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관청이 있고 지방관이 머무른 곳이며 기원전 133년 로마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된 도시입니다. 이미 기원전 29년 페르가몬에는 로마의 여신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었을 정도로 소아시아 지방에서 황제 숭배 의식과 관련이 깊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라암의 가르침

 

페르가몬은 “사탄의 왕좌”이자 “사탄이 사는 고을”이라고 표현됩니다. 아마도 황제 숭배 의식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페르가몬을 황제 숭배 의식의 중심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 공동체에서는 박해로 인한 순교가 벌어졌습니다. 황제 숭배 의식으로 인한 안티파스의 순교로 여겨지는데, 이 사건이 페르가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안티파스의 순교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발라암의 이야기는 민수 22-2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발라암은 이방인 출신의 예언자로 등장합니다. 모압의 임금 발락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에게 청합니다. 민수기에서 발라암은 겉으로는 하느님의 신탁을 충실히 수행하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유다교 전승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승은 발라암이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는 부분에서 나귀도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천사를 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은 본보기로 제시합니다(민수 22,22-35 참조). 또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의 여인들과 죄를 짓게 하여 바알 신을 섬기게 한 장본인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민수 25장 참조). 이런 점에서 발라암의 가르침은 내용상 불륜과 우상 숭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여기서 강조되는 것 역시 불륜과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받는 것은 심판이며, 그것을 저자는 “내 입에서 나오는 칼”(2,16)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소명 환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심판은 요한 묵시록에서 전쟁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반면에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받는 약속은 “숨겨진 만나”와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2,17)입니다. 숨겨진 만나는 탈출 16장에 묘사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표현은 2,14에 언급된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상의 음식과 천상의 음식이 대조를 이루는 셈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만나는 요한 6장의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설명합니다. 현재의 전례에서 성체성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연결됩니다(19,5-10 참조). ‘아무도 모르는 이름’은 3,12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밝혀집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께서 계시한 이들에게만 알려진 이름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을 간직한 이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이름은 장차 우리를 구원할 이름입니다.

 

티아티라

 

티아티라는 2-3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필리피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복음을 받아들인 리디아라는 여인이 이곳 출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사도 16,14-15 참조).

 

여예언자 이제벨

 

티아티라에 보낸 편지에는 이제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제벨은 이스라엘 임금 아합(기원전 875-853년)의 이방인 출신 부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유다교의 전승에서 이스라엘에게 바알 신에 대한 숭배를 요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1열왕 16,31-34 참조). 성경은 이제벨의 특징을 음행과 주술이라고 말합니다(2열왕 9,22.30-34 참조). 이러한 배경에서 아마도 당시 니콜라오스파에 속한 여예언자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그를 불륜 및 우상 숭배와 연관하여 ‘이제벨’이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니콜라오스파, 발라암의 가르침과 여예언자 이제벨은 내용상 불륜과 우상 숭배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경고는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라는, 곧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전히 믿음을 잃지 않은 이들에게는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티아티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티아티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는 불륜과 우상 숭배를 버리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제벨의 악행을 따르는 이들이 받는 것은 심판입니다. “나는 너희가 한 일에 따라 각자에게 갚아 주겠다”(2,23). 하지만 이제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샛별”입니다. 샛별은 금성(Venus)을 의미하는데, 새벽녘에 나타나는 특성을 따라 ‘아침의 별’로 불렸다고 합니다. 샛별은 이미 고대 사회에서 ‘통치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샛별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22,16에서도 같은 내용이 표현됩니다. ‘샛별을 주겠다’는 약속은 믿음을 간직한 이들도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주권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쇠 지팡이와 샛별은 통치와 주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을 인용한 본문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겠다. … 그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2,26-27). 특히 쇠 지팡이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다시 언급됩니다(12,5 참조).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3)

허규 베네딕토 신부

 

 

사르디스

 

사르디스에는 아르테미스(Artemis)에 봉헌된 신전과 로마식 극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17년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되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5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면서 도시를 재건했다고 합니다. 26년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셋째 부인인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신전과 원로원을 위한 신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은 ‘깨어 있어라’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은 공관 복음서에서 종말론적 기다림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마태 24,36 이하; 루카 12,36 이하 참조). ‘회개하라’ 역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서 선포된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기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표현된 ‘어떻게’는 의미상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떤 가르침을 간직했는지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약속되는 것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흰옷은 요한 묵시록에서 상징적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의 흰옷은 승리한 모습을 예시하는데, 이처럼 흰옷을 입게 된다는 약속은 그분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책은 요한 묵시록에서 중요한 요소로 사용됩니다(13,8; 17,8; 20,12.15; 21,27 참조).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이와 비슷해 보이는 책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탈출 32,32-33 참조). 다니 12장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설명에서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다니 12,1)는 표현을 찾을 수 있고, 종말에 관한 비밀은 마지막 때까지 봉인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전합니다(다니 12,9 참조).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로 현재에도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알라 셰히르). 이 도시에는 티베리우스와 칼리쿨라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제우스와 아르테미스, 그리고 디오니소스에게 예배하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는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포도주 생산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의 수확을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의 제단이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필라델피아에 보낸 편지의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3,7)는 이사 22,22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하고, 그 권한은 구원으로 향하는 문, 다윗의 도성 곧 새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여닫을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표현은 구원을 새 예루살렘의 환시로 나타내는 묵시 21장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들이 보여 준 좋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인내로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약속되는 것은 성전에 머물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3,12). 신약성경에서 성전 또는 성전을 이루는 기둥에 대한 비유는 다가올 구원의 시간에 보이는 구원의 모습을 말합니다(1티모 3,15 참조).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특별히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서는 성전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를 하느님과 어린양이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이 받는 약속은 곧 구원에 대한 참여입니다.

 

라오디케이아

 

라오디케이아에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지리적 입지 때문에 라오디케이아에 금융업이 발달했다고 전해집니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3,14)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쓰인 하느님에 대한 칭호 “아멘이신 하느님 - 신실하신 하느님”(이사 65,16 참조)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요한 묵시록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그분의 약속은 분명히 실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강조하는 하느님의 성실함은 그분의 계시가 헛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이와 함께 표현된 “창조의 근원”은 요한 묵시록에 자주 등장하는 “처음이며 마침”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와 함께 선재(先在)를 의미합니다. 이미 요한 복음서의 서문(요한 1,1-18 참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굳은 결단으로 믿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3,15)는 것은 믿음을 지니고 살아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타협적 자세를 나무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약속되는 것은 어좌에 앉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좌는 요한 묵시록뿐 아니라 복음서에서 다스리는 권한을 상징합니다(마태 19,28; 루카 22,30 참조). 믿음을 열정적으로 지키는 이들은 하느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구체적 현실에서 칭찬받고 인정받을 점과 부족한 점이 표현됩니다. 믿음을 지키고 그릇된 가르침을 배격하라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구체적 모습이 약속됩니다. 이 약속은 모두 실현될 것입니다. 실현될 모습이 이제 환시를 통해 표현됩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허규 베네딕토 신부

 

 

4,1부터 본격적으로 환시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4장은, 이제 하늘로부터 온 계시가 본격적으로 땅과 저자에게 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에제 1,1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 아마 당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이 환시를 가능케 한다는 표현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미 1,10에서 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말합니다.

 

어좌, 스물네 원로, 네 생물

 

요한 묵시록 저자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하나의 어좌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분’이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시편 11,4; 이사 66,1 참조). 여기서 어좌는 그 위에 앉은 사람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상징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주교좌’라고 부르는 성당에는 주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 자체가 주교의 권한과 임무를 나타냅니다.

 

그 어좌 주위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고 거기에 ‘스물네 원로’가 앉아 있습니다. 스물네 원로는 요한 묵시록에서 열두 번 사용되는데, 구약성경이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지 논란이 많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가대의 상징으로 보는 것입니다(1역대 24-25장 참조). 사제와 성가대는 24개조로 나누어 하느님께 봉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물네 원로가 4-5장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기능상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전에서 봉사하던 24개조로 된 사제나 성가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어좌의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4,6; 에제 1,4-14 참조). 이 네 생물은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로 묘사됩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네 복음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리옹의 이레네오 교부에 따르면, 사람은 복음서의 맨 첫머리에서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을 나타내는 마태오 복음서의 상징으로 보았고, 사자는 복음의 숭고한 면을 강조하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언급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황소는 사제였던 즈카르야의 이야기로 복음서를 시작하는 루카 복음서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황소는 사제가 바치는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성령의 선물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같다고 언급합니다. 독수리가 높은 곳에 떠 있는 것처럼 영적인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어좌 주위에 있는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은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계시를 전함으로써 하느님 곁에서 봉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쉬지 않고 외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4,8) 이 표현은 이미 이사 6,3에서 사용되었고, 지금도 미사 전례에서 사용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환시는 이어지는 어린양에 대한 환시를 뒷받침합니다. 어린양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위임받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린양은 종말 때의 심판과 구원을 이끌어 가는 상징입니다.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 어린양

 

5장에서 처음 묘사되는 것은 ‘안팎으로 글이 적힌,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5,1 참조)입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재앙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오른손에 있는 이 두루마리와 함께 5장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합당함’입니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5,2)라는 질문은 합당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단지 어린양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은 다니엘서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비밀에 부쳐지고 봉인되어 있어야 한다”(다니 12,9). 이제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게 되었다는 요한 묵시록의 표현을 다니엘서에 빗대어 본다면 마지막 때, 곧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5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린양에 대한 묘사입니다. “뿔이 일곱”이라는 것은 어린양이 갖는 완전한 권한에 대한 표현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뿔은 권한의 상징이며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지전능하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즈카 3,9; 4,10 참조).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5,6)입니다. 상징을 사용하는 요한 묵시록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였다는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린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제 “승리하신” 어린양은 하느님에게서 심판과 종말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넘겨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어린양에 대한 암시는 이어지는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의 찬양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5,9).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5,12).

 

하느님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는 앞으로 보일 환시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이미 저자가 책의 시작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어린양에 의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