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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 복음서 해설(1)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0.

[요한 복음서 해설] 한처음에(요한 1,1-5)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나는 자주 묻는다.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성경 말씀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 가능할까?’ 답은 늘 ‘그렇다’이다. 그리고 ‘그렇다’를 확신하며 기뻐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고, 창조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성경 주석학의 발전은 놀라우나, 그 발전의 그늘에는 말씀을 학문의 대상으로 격하하는 유혹과 위험이 상존한다. 성경에 대한 신적 존엄을 인정하는 것은 학자나 문외한인 신자에게나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차이는 말씀에서 오지 않고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온다. 그 해석은 대개 지식 쌓기의 노력 정도에 따라 평가되고 결정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창조적 말씀이 지식 쌓기의 멍에에 억눌려서는 안 된다. 주석학은 말씀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말씀의 궁극적 목적은 생명에 있다(요한 20,31 참조). 생명은 지식의 업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의 실천으로 얻어진다. 성경 말씀에 대한 견해는 학문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삶에서 행하는 실천 역시 말씀에 대한 견해의 또 다른 장이라는 말이다.

 

둘째, 말씀은 모든 이의 신앙에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이 그리 적절하지 않을 테지만, 성경 주석학자가 모두 신앙적이라고 평하는 것은 무모하다. 학문으로 말씀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는 없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세상을 신뢰하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리라 기대하는 무모함과도 같다. 성경 주석학은 과학적 ‘확실성’에 근접하려 하지만, 신앙의 신비에는 매우 취약하다. 말씀은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성경 주석학은 과거의 이야기다. 과거의 해석을 현재와 미래의 신앙적 방향성으로 제시하지만, 어찌되었든 성경 주석학은 과거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주로 담당한다. 현재 살아 있는 내가 성경 말씀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지금 살아 있는 내 신앙의 열매다. 2천 년 전 과거의 신앙고백이 성경으로 구체화되었다면, 지금 살아 있는 나는 2015년에 어떤 신앙 고백을 쏟아 낼지 고민해야 하고 말씀의 화석화를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가끔 도서관에 박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사회 문제와 세상 문제에 너무 서툴고 답답한 자세를 취하면서 세상의 잘잘못을 논하는 모습을 보면,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육화’를 어떻게 설명할지 의문이 든다. 육화는 지금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리에서 재해석되는 것이지, 책을 통해 세상을 가르치려는 도도한 자세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서를 읽기 전에 나는 독자들의 자리매김을 고민한다. ‘주석학 지식을 전해 줄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나눌 것인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말씀을 나눌 것이고, 독자들을 말씀으로 초대할 것이다. 말씀은 창조적이고 살아 있으며 신앙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창조하고, 어떻게 살아 있는 대화를 나누며, 이런 작업이 어떻게 신앙으로 연결될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한처음’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1,1 참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으로 생겨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였고, 하느님이셨다’라고 규정된 ‘한처음’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창조 사업을 공허한 곳에 뭔가를 가득 채워 낸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래서 ‘있는 것’들의 관점에서 ‘없는 것’들을 도외시하는 해석을 ‘한처음’에 갖다 붙인다. 하지만 ‘한처음’은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고, 없는 것이 뭔지 고민한 시간이다.

 

없는 것은 절대적 공허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없는 것은 가능성의 시간이다. 가능성의 시간…, 여기에 나는 독자들을 초대하고 싶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하기에 사회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고독의 자리는 사회적 관계의 출발이자 가능성의 자리다. 뭐든 만들어 볼 수 있고, 뭐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고독이다. ‘한처음’이 그러하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이지만 알 수 없는, 그러나 모호하지만도 않은 다른 존재를 불러올 수 있는 시간이 ‘한처음’이다. 혼자이나 함께하기를 원하는 시간, 함께하는 것이 혼자의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 이것이 ‘한처음’이 가진 의미다.

 

말씀은 그 ‘한처음’에 참으로 어울리게 묘사된다. 1,1의 말씀을 곱씹어 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 자체였다. 바로 자신이면서 ‘함께’ 있는 존재가 가능하다는 점이 신비롭다. 함께 있음이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의 존재 방식이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출발했고, 그 하나는 ‘함께’여야 하는 존재 방식을 고수한다. 다른 것들이 만나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로 이어지고 완성된다. 그래서 빛이 어둠과 구분되어 떨어져 있지 않고, 어둠이 빛을 밀어내지 않는 조화 자체가 모든 것이고 하나다.

 

‘한처음’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설 을 때 어떤 것도 소외되거나 예외일 수 없고, 어떤 것도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어떤 것도 나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제 종류대로”(창세 1,21),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며 서로를 하나로 엮어 내는 데 몰두했다.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서가 쓰일 때,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눠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 하느님마저 ‘착한 신’, ‘나쁜 신’으로 갈라놓으려 했다. ‘한처음’의 시간을 망각한 채 하느님의 조화를 깨뜨린 것이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우리 주변에 맴도는 악함이다. ‘한처음’으로 돌아가는 지혜를 캐는 데 함께하실 분, 여기에 모이시라.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요한 복음서 해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1,6-18)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아침이 밝을 때 새로운 하루에 설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무게로 그 아침마저 밤이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물리적 시간이 흘러도 감정적 시간은 흐름을 멈춘 듯, 때로는 정신을 잃은 듯 어지러이 흘러가기도 한다.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 했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있으면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고, 그렇지 못하면 세상은 악귀들의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허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르다. 내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해도, 옆이 시끄러우면 모든 게 산산조각 난다. 내 마음의 평화만 바라고 성당에 다닌다면 아주 부질없는 헛수고다.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지 먼저 물어 보라. 숙제를 받아 안고 오지 않는다면, 성당은 내 고민의 해우소일 뿐 하느님의 계시 자리가 아니다. 가까운 식구의 부탁도 탐탁지 않을 때가 있는 게 우리네 일상인데,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빛을 좋아한다. 빛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긍정적 신호일 수만은 없다. 빛이 왔다는 사실은 하나의 선택을 부추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빛이냐 어둠이냐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선택해서 내가 바뀔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은 내가 ‘되어 가고 싶은 것’에 이끌릴 때가 많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내린 선택이 실은 현재 나의 상태가 드러내고픈 욕망일 경우가 제법 많다. 사람은 혼자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빛은 영원한 타자로 존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빛은 우리가 ‘되어 가는 무엇’이다. 12,36에 “빛의 자녀”라는 말이 있다. 빛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존재의 목적을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다. 빛은 욕망의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존재의 이유다. 빛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빛과 더불어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되새기게 한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13).

 

하느님에게서 난다는 것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모를 일이다. 다만 사람의 욕망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은 먼저 나의 인간적 욕망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고, 그 욕망을 안다면 그것을 넘어서서 나아가는 길도 알게 될 터이다. 그 길의 시작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동시에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출발점일 것이다.

 

일상에서 ‘나는 무엇이 될까?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이 혼자만의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믿는다는 것조차 혼자만의 노력으로 환치(換置)하려 한다. 빛이 오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내가 받느냐 마느냐에 몰입한 나머지 빛이 누구이며 빛의 자녀가 되어 간다는 사실을 쉬이 잊어버린다. 빛은 밝히러 왔다. ‘빛의 자녀’를 잉태하러 왔다. 빛의 성격은 ‘다른 존재’에게서 완성되고 추구된다.

 

그래서 빛은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너와 나, 우리의 사회에서 빛은 그 가치가 있다. 빛이 알려지는 방법 역시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빛은 전해지고 이해된다. 주고받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빛은 그 가치를 또 다르게 발한다. 증언된 것은 증언한 자와 그 증언을 듣는 자 사이에 일종의 ‘신뢰’를 전제한다.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팥으로 메주 쑨다는 말에 더 신뢰를 두는 사람은 콩이 메주가 된다는 사실에 둔감해진다. 그래서 진리는 서로에 대해 다가서는 열린 자세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빛은 정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지닌 사람을 찾으러 왔다. 빛이 왔다고 세상에 어둠이 사라져 모두가 정의롭게 정답대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빛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 더욱 많아지고 넓어져야 한다. 그래야 빛이 의미가 있다. 그래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쉰다.

 

빛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쫓기만 하면 되는 듯 ‘예수님 사랑, 예수님 믿음, 예수님 전부’라며 자기 인생을 다그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초자연적 현상에 민감한 나머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일쑤다. 누가 대단한 무엇이 된 사실만 강조하다 보면 대개 비교하는 버릇이 생겨난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나도 가능할까?’ 등의 질문이 쏟아진다. 그러나 누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함께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짙게 깔린다. 여기에 너와 내가 만들어 내는 공동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 공동의 자리에 빛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머물다’는 그리스어로 ‘스케네’라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세키나’와 발음이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함께’하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예수님께서 ‘함께’를 보증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를테면 ‘앙상블’의 대명사다. 함께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보다 조심스레 그분을 위해, 그분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시급하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요한 복음서 해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19-34)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학교에서 일하다 보면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점수도 좋고 학업에 대한 열정이 높은 학생일수록 형편이 나은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접할 때다. 점수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저런 학생 활동이나 봉사 활동, 심지어 학우들끼리 따뜻한 우정을 쌓는 일에도 형편이 나은 집안 아이들이 독식하는 경향이 있다. 돈과 성적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분명해짐을 가슴 아프게 목도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강남에서 용 나고 부촌(富村)에서 용 나며, 개천에는 미꾸라지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탄하는 시대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은 결국 공부 잘하고 성공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일 텐데, 오늘 복음에서 들려오는 요한의 외마디, 곧 ‘아니요’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과 같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1,19) 누구냐는 질문에 맞는 답은 “나는 누구다” 정도일 텐데, 요한의 답은 모두 “아니다”로 끝난다. 우리는 ‘아니요’가 만들어 내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아무것도 아니라 했기에 그를 외면할 일이 아니다. 무엇이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세례자 요한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식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자.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먼저 와서 세례자 요한을 만난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아니요’라는 대답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을 테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 유다 사회의 권력 체제는 그 이면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을 담보하고 있었다. 문제는 신앙의 희망과 현실 권력의 괴리였다. 메시아가 오면 성전은 끝이 난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제가 무너져 버린다. 메시아를 기다리되 메시아가 오면 끝나는 권력의 중심에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 시대를 알리려 미리 재림한다던 엘리야도 아니며(말라 3,23 참조), 모세와 같은 예언자도 아니라는 사실에(신명 18,15 참조) 그들은 자기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으리라고 안도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아니요’를 통해 제도 종교의 권력에서 벗어난다. 이를테면 세상의 권력에 이용당하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다. 제도 종교의 한계에 갇힐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온 이가 세례자 요한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리사이들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온다. 율법의 수호자요 실천자임을 자처한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문제 삼는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세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방법이자 필수 조건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할 세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바라는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변화된 세상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기존의 세상이 믿고 규정한 ‘자격’을 문제 삼는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세례를 왜 베푸느냐고 문제시하면서 “세례를 베풀려면 이런 사람이어야지” 하고 다그친다.

 

‘아니요’로 자신을 규정한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들의 세상, 율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율법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할 그 ‘누구’를 찾으려는 바리사이들의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법칙과 논리에 젖은 이들에겐 ‘아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다.

 

사실 요한 복음서는 유다인과 그들의 세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덧붙여 유다인들이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 곧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사람이 되어 오신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희끼리의 전통과 제도, 권력 체제에 묶여 희망을 절망의 답답함으로 바꾸어 버린 사람들이 유다인이라고 요한 복음서는 생각했다.

 

요한 복음서가 쓰인 시대는 이미 성전 시대가 끝난 때였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제가 무너진 뒤였다(95년 이후). 성전의 자리에 율법과 그 율법을 가르치는 라삐들이 들어서면서 유다 사회는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 참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시대의 요청에 유다 사회는 술렁였다. 요한 복음서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과거 권력의 상징인 사제와 레위인들, 현실의 새로운 권력인 바리사이들까지 모두 언급하고 유다 사회 전체를 조망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아니요’라는 대답과 대립각을 세운다. 이 세상은 ‘아니요’였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아니요’였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법은 ‘아니요’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세상의 소리를 내려놓고 세상이 모르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셔야 한다. 세상이 규정할 수 있고, 세상이 원하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면 세상이 회개할 일도, 세상이 변화할 일도 없다. 모르는 존재를 찾아 나서려면 지금의 가치와 전통과 사상과 권력 같은 일련의 ‘익숙함’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고 추구하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것을 내려놓는 ‘비워 냄’을 위해 필요하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은 인류 역사 전체의 일이지만, 동시에 인류 역사를 뛰어넘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과 대화하되 세상에 ‘아니요’를 외치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의 ‘익숙함’에 퇴행적으로 머물러 그 허망한 쳇바퀴에 매몰되어 살지 말고,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 봄이 좋으리라.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요한 복음서 해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34)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어릴 적에 반성문을 꽤 많이 썼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소위 ‘갱지’라고 불리는 종이를 몇 묶음이나 사다 놓았는데, 그 종이 한 장 한 장을 글자로 빼곡이 채우는 것은 어린 나의 몫이었다. 반성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반성한다고 써내려간 글의 대부분은 “잘못했어요”라는 말로 점철되었다. 반성문을 쓰면서 든 생각은 줄곧 하나였다. ‘빨리 끝내자’ 그리고 ‘빨리 나가서 놀아야겠다.’ 이런 나를 어머니는 어떻게 보셨을까? 반성문의 끝은 늘 어머니의 용서였고 그것은 나의 잘못을 찬찬히 씻어 내는 사랑의 체험이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서는 장면에서 나는 지난날의 반성문을 참 많이도 떠올리고 곱씹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에게 반성문을 쓰러 오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 없는 분이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에게 걸어오시는 것, 죄에 맞서고 죄를 없애러 오셨기에 스스로 반성문을 쓰러 오시는 게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29). 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해석한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이가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라고 규정한다. 공관 복음에서 볼 수 없는 요한 복음만의 규정이다.

 

유다 전통에서 죄를 없애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에는 속죄일이 있어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삶을 영위하고 존속시키기 위해 반드시 속죄를 해야 했다. 속죄에는 숫염소 두 마리가 필요했다.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주님께 바치고, 죄 지은 자의 죄를 대신 짊어질 다른 숫염소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냈다. 그것으로 죄 지은 자가 깨끗하게 된다고 믿었다(레위 16,22 참조).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한 요한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이 염소처럼 대속물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대속물이 하느님이라고 요한은 외치고 있다.

 

어린 양도 매한가지다. 대속물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사 53장에 남의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은 어린 양에 빗대어 등장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침묵하듯, 대신 희생당하는데도 불평하지 않는 종의 모습에 예수님을 갖다 놓는 것이 요한의 해석이다. 탈출 12장의 제물이 된 양 역시 그러하다. 자신은 죽어 갔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파스카의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요한은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우리의 파스카 양”(1코린 5,7)이라고 칭한다.

 

염소든 어린 양이든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기억의 흔적은 온통 희생으로 물들어 있다. 이건 수동적이고 맹목적이며 슬픈 일이다. 이렇게 끝나면 하느님 앞에 선 백성은 죄의식에 짓눌려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설렘보다 하느님에게서 행여 내쳐지지 않을까 조바심에 휩싸여 살아갈 뿐이다. 지난날의 내 어린 시절처럼 “잘못했어요”라는 말로 반성문만 써놓는 꼴이다. 반성문을 쓰고 나서 맛있는 간식이나 마음의 평화로 생기를 되찾은 발랄한 아이를 염소와 어린 양의 대속물로는 만나기 어렵다.

 

예수님이 ‘죄를 없애러 오신 어린양’이라는 말은 알려져야 했다(1,31 참조). 예전의 속죄와 희생이 새롭게 알려져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만 가득한 대속물이 횡행하는 세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백성의 회개뿐 아니라 당신과 세상의 만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사실 요한 복음은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5,18-19). 요한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거슬러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선택하게끔 부추긴다(20,31 참조). 이 세상에 머물러 자기 죄를 씻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세상에 미련이 많다는 방증이다.

 

오랫동안 대속물을 바쳐 왔으면서도 여전히 죄에 허덕이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죄를 씻어 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염소든 어린 양이든 대속물의 자리를 자처하셨다. 예수님의 대속은 죄를 씻는 데 소용되지 않고 죄를 없애고 하느님을 알리는 데 소용된다. 이를테면 물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 내 죄가 사해진다는 생각은 참으로 이기적이다. 자신이 깨끗해지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오만한 자기 방어이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심지어 하느님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어린 시절 반성문 작성은 꽤나 지루하고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반성문을 쓰던 그 시절을 미소 띤 얼굴로 만난다. 반성하려면 기쁨과 희망을 지향해야 한다. 반성과 기쁨과 희망은 극명한 대비가 아니라 명징한 인과관계에 놓인다. 죄를 없애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 본질은 예수님이지 죄 사함이나 어린 양의 희생이 아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일에 게으르지 말자. 내가 죄인이라도….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요한 복음서 해설] 들음의 은총(1,35-51)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듣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들을 귀는 참으로 귀하다. 소리가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닫기란 참으로 어렵다. 한국 사회를 보면 더욱 그렇다. ‘진보다, 보수다’ 하고 외치고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게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진보가 무엇인지, 종북이 도대체 무엇인지 따져 물으면 ‘묻지 마’식 비난만 쏟아내는 무늬만 보수인 사람들,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왜 바꾸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대화를 포기한 채 그저 자신들의 소리만 내지르는 파시즘적 진보 인사들. 그들에게 듣는다는 일은 요원할 테고 그들로 인해 한국 사회는 피곤하다.

 

요한 복음서는 제자됨의 기본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외치자 제자 둘이 그 소리를 듣는다. 들음은 찾음으로 이어지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만남은 객관적 두 실체의 공존만이 아니라 주관적 신앙의 고백으로 재탄생한다.

 

예컨대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라 고백하고, 필립보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가 기록한 분으로 예수님을 인식하며, 나타나엘은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인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시작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역사와 전통 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날것이 아니다. 메시아, 율법과 예언서가 기록한 분,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님 또한 그러하다(시편 2 참조). 예수님을 만나 그에 대해 여러 가지 호칭을 가져다 고백하는 건 과거와 현재의 만남, 지난 전통과 지금 여기가 만나 만들어 내는 융합의 창조물이다.

 

제자는 예전의 고정된 사고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메시아를 볼 줄 아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열림은 서로에 대한 이끌림으로 연장되고 이끌림은 함께함으로써 거듭난다. 제자가 스승 예수님에게 다가간 첫 일성(一聲)이 이러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예수님께서는 훗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15,4).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특별한 재능도 능력도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정신적 배고픔’이 필요하다. 나타나엘의 모습은 이를 적확하게 보여 준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사회와 전통 안에서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배부른 사고방식은 새로움을 감시하고 탄압하며 금지한다. ‘왜’라는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변화의 자유에 둔감하다. 그리하여 하나의 방식과 주류의 강력한 힘의 논리에 어떤 견제나 면역력 없이 매몰된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뒤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고야 만다. 나자렛은 ‘의미 없다’라며 기존 가치 체계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신앙고백이지만, 그 비현실이 나타나엘에게 현실이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제자됨의 기본이다.

 

공관 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엘은 제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만 전하는 나타나엘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아닐까? 현실과의 줄다리기에서 비현실적 희망을 현실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은, 세대를 거쳐 시대를 통해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이 즐기는 정신적 배고픔이 만들어 내는 창조 행위다.

 

복음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큰 일’을 예고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열 번 정도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 역시 유다 전통에서 종말론적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이었다(다니 7,13;10,16 참조). 유다 전통에서 사람의 아들은 힘이 있어야 했고,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광 가득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대적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독보적 존재였다. 유다인은 그런 사람의 아들에 집착했고, 그것으로 현실의 고단함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통을 재구성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다(3,14; 8,28; 12,23.34; 13,31 참조). 예수님께서 예고하시는 또 다른 큰 일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요한 복음서는 이 죽음을 ‘영광’이라 부른다. 세상은 죽음을 피한다.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서는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 안에서 영광을 찾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역시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상 죽음은 끝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고프고 배고픈 사랑이자 열림이기에, 요한 복음서는 십자가를 영광이라 여겼다. ‘너’를 통한 영광이지 한 사람에게 집중된 영광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하고, 기존 가치 질서를 극복해야 하는 지난한 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일일 터이다. 세상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변화하며 흘러 왔고 흘러 간다. 변화의 몸부림은 꽤나 아픈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현실에 매몰되어 새롭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놓치고 만다. 상처를 기꺼이 받아 낼 수 있는 내적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현실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 옆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예수님이 계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요한 복음서 해설] 표징과 믿음(2,1-12)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이야기이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초능력’은 낯설다. 낯설기에 기적이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에 감탄한다. 하지만 ‘역시 주님이야’ 하며 감탄사로 복음을 읽는 데는 낯설지 않다.

 

믿음이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을 향한 한 개인의 열정 또는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믿음은 자기 욕망을 예수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이를테면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솔직히 물어 보면, 자신의 삶이 무너지고 내팽개쳐져서 한없이 아픈 삶 곧 십자가의 삶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진 않는다. 한평생 얼마간의 평온함과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며 무탈하게 살아간다는 전제 조건 하에 예수님께서 여전히 홀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예수님, 사랑합니다’가 될 수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분명 잔치이고 기쁨의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혼인날은 메시아의 도래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이사 62,4-5; 마태 22,1-14 참조). 메시아가 오면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기본 습성이다. 이 습성으로 카나의 혼인 잔치를 읽어 가다 보면 잔치에 빠질 수 없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임을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잔치의 기쁨이 훼손되지 않는 딱 그만큼의 요구에 예수님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 예수님의 때는 카나의 혼인 잔치 시간에 매몰되어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 없는 다른 시간을 예고한다. 요한 복음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때는 언제일까? 놀랍고 낯설기 짝이 없는 순간, 사도 바오로의 표현(1코린 1,23 참조)을 빌리자면 걸림돌이고 어리석음이 될 수 있는 십자가 사건에 담긴 예수님 당신의 충만한 때를 말한다. 요한 복음은 그때를 ‘영광의 때’라고 말한다(7,38-39; 12,23; 13,31 참조). 대개 성경에서 영광이란 말마디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1열왕 8,11 참조). 하느님의 현존이 십자가 사건으로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 영 마뜩잖다. 우리는 지금 혼인 잔치의 기쁨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보다야 사는 게 낫고, 슬픔보다야 기쁜 게 낫지 않겠나. 그러나 요한 복음은 이런 이분법 개념을 가차없이 무너뜨린다. 죽음과 생명, 슬픔과 기쁨이 전혀 어울릴 수 없다는 의견에 요한 복음은 어울린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혼인 잔치를 제일 먼저 예수님의 충만한 때, 곧 죽음과 생명이 만나고 슬픔과 기쁨이 하나가 되는 때를 위한 표징으로 내세운다. 이 표징을 통해 잔치에만 취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를테면 흔한 잔칫집의 술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또 다른 술에 취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 너머에 다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그 사건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표징 너머의 다른 무엇을 볼 수 있게 우리를 준비시킨다. 어떤 준비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믿음에 대한 준비이다. 표징은 표징일 뿐, 그것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충만한 때, 곧 영광의 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요구된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지난(至難)하다. 먼저 마리아의 말에 주목하자.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예수님께서는 말을 아끼신다. 그저 “물을 채워라”, 그 물을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는 말씀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과방장의 입을 통해 ‘좋은 포도주’가 인정되고 확정된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독보적 초능력만 강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득 채우라고 하신 물은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독과 절묘하게 조우한다. 잔칫집에 어울릴 좋은 포도주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유다이즘의 정결례에서 시작한다. 메시아를 만나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일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영광을 보고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 가치 체계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체해야 한다. 세속의 논리에 젖어 잃어버린 신앙감을 찾는 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는지 되묻는 작업이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독에 물을 채우는 행위다. 그 물독이 가득 찼을 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나는 참된 잔치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다.

 

믿음의 결과는 영광을 보는 눈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11,4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저 구름 위 하늘에, 또는 저 세상에 지으려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변화를 통해 드러내려 하셨다. 다만 우리의 믿음, 우리의 변화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 가치 체계와의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3,1-21)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흔히 ‘바리사이’라고 하면 거부감부터 드는 게 우리 신앙인의 습관적 태도다.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우며 예수님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은 대상이 바리사이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절에 바리사이는 훌륭했다. 그들은 613개나 되는 율법을 생활의 실천 사항으로 지켰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다만 율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보여 준 사정없는 폐쇄성이 예수님의 열린 사랑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불편케 한다.

 

바리사이로서 니코데모는 열려 있었다. 비록 낮이 아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조심스러운 면도 있으나, 훗날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 그분을 두둔하고(7,51 참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몰약과 침향을 섞어 가져 오기도 했다(19,39 참조).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 종교적 논란 속에서도 예수님을 존경했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얻고자 한 개방적 인물이었다.

 

니코데모의 태도에서 먼저 짚을 것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경이나 호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바리사이보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말을 건네면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을 육체적 ·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3,4)

 

니코데모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관점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세상 것에만 휘둘려 하늘의 뜻과 가르침을 멀리하는 삶에서 탈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요엘 3,1-2; 이사 44,3 참조).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분을 존경하여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몇 수 얻은 뒤, 자기 삶을 더욱 갈고 닦아야겠다는 윤리적 의지의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져 하늘의 큰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에제 36,25-28 참조). 요컨대 기존의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의 변화는 각자의 삶을 갈고 닦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한계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며, 더구나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가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혼자 잘 살려 해도 관계가 헝클어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숱하게 겪지 않는가!

 

유다의 전통에서 사람과 세상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 속에서 다듬어져 왔다(다니 7장 참조). 하늘에서 내려온 이는 분명 하늘을 알고 있다. 이 세상만이 아닌 저 높은 하늘의 신비를 알고 있는 존재가 ‘사람의 아들’이다. 세상살이의 한계를 하늘을 통해 직시하고, 하늘을 품어 땅을 변화시키려 했다. 거기에 ‘사람의 아들’만큼 적확한 표현은 없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되, 누가 뭐라 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두 세계가 사람의 아들을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무르시는 예수님은 유다 사회가 기다리고 열망하던 ‘사람의 아들’ 바로 그분이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생명을 위해서다. 생명은 인간 삶의 지속적 영위나 풍요로움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만나는 데서 이루어지는 관계 지향적 개념이다. 그래서 생명은 하나의 ‘만남’이고 온전한 의탁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 인간의 손에 전적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 바치는 것이 십자가였다. 하늘과 땅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바치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것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셨다. 마치 저 옛날 목마름과 배고픔, 생명의 위협이 득실대던 광야의 척박함에서 구리 뱀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고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듯,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스스로 죽어 가시되 하늘을 갈망하는 백성이 하늘과 하나로 묶이게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늘과 땅이 함께 누리는 생명이다.

 

신앙생활은 인간적 삶을 다듬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전복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남들과 잘 어울리고, 도사처럼 온유한 미소를 짓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나만 보고 나의 삶과 사고와 신념에만 집중하는 신앙은, 생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하늘의 신비를 전하는 예수님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스스로 유폐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보다 죽음으로 운명 지어진 인간적 삶에 자신을 가두는 행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표로 삼아 죽음으로써 생명을 기억하고 살아 내는 이가 신앙인이라면, 신앙의 지향점은 오로지 하나다. ‘빛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뿐이다. 내 안에 머물러 어떻게 나를 잘 갈고 닦을지 골몰하기보다 타자에게,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관계 지향적 삶이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며 신앙의 길이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통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지혜를 떠나 하늘의 열린 생명으로 초대되는 순간을 체험했다.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자기 비움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에서 우리가 기억할 바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4,1-42)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메르스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시끄러울 때마다 국민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세월호 참사 때는 선박과 구조(救助)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고, 이번 메르스 사태 때는 감염병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다. 전문가여야 할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국민이 전문가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 국민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단절되는 일상을 체험한다. ‘내 아이만 괜찮으면…, 내 건강만 괜찮으면….’ 서로서로를 ‘위험 물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연한 2015년 대한민국의 일상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여느 때와 같이 살고 있었다. 야곱의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일상은 그 여인에게 너무나 당연해서 그 삶이 전부인 양 그렇게 살았을 테다. 예수님의 등장은 이런 일상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는 데 소용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두 가지 낯선 경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유다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남자가 자신의 옛 삶을 매우 똑똑히 안다는 것이다. 낯선 경험을 한 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여 전문가가 된다. 그 경험이 일상을 뚫고 나와 새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라고 부추긴 것이다.

 

사마리아 지역은 남쪽 유다 지역 사람들에게 더러운 곳이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점령된 후, 이방 민족들이 뒤엉켜 살게 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2열왕 17,24 이하 참조). 그런데도 사마리아 지역 역시 나름대로 전통을 간직하고 살았다. 야곱을 조상으로 섬겼고, 그리짐 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남쪽 유다 사람들의 예루살렘과 견주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역사의 단절을 뚫고 길을 재촉하셨다.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는데 굳이 버려진 땅, 소외된 땅, 사마리아를 거쳐 지나가신다. 여인이 당황한 것은 유다와 사마리아의 역사적 단절을 예수님께서 뚫고 나오셨다는 데 있었다.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일상 저 너머에 예전에 체험하지 못한 ‘창조적 자리’를 만들어 내셨다. 목말라 다시 길으러 와야 할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얻을 수 있는 자리, 그곳은 ‘하느님의 선물’, 그리고 ‘살아 있는 물’의 자리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로 사마리아 여인을 초대하신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은 성령이었다(7,37-39 참조). 살아 있는 물로서 성령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관계는 ‘살아 있는 물’, 곧 성령을 두고 역전된다. 아직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을 달라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선다. ‘관계의 재정립’이 시작되는 셈이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이 ‘관계의 재정립’은 더욱 명확해진다. 자신의 현상황을 솔직히 고백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식하는 데까지 다다른다. 그 여인의 태도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처음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셨을 때 건네신 말씀이 그 답을 찾아가는 셈이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고백하면서 예배의 문제로 이야기를 옮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예배에 대한 관점은 장소와 시간의 두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예배의 때는 ‘바로 지금’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영과 진리’는 예수님 바로 그분을 가리키고, ‘지금의 때’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도 모르고 그때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25절). 자신 앞에 버젓이 물을 달라고 청한 이가 그리스도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의 답을 듣고야 만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내가 바로 그다!” 우리는 이 단호한 자기 계시적 표현을 모세 앞에 나타난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탈출 3,14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선포가 “내가 바로 그다!”라는 외침 속에 녹아 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지금’이 참된 예배의 때라는 말이다. 이 산이냐, 저 산이냐, 아니면 이 민족이냐, 저 민족이냐, 또 아니면 신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포기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예배이고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라면, 이런저런 인간적 방법과 전통이 오히려 예수님에게서 유리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을로 가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29절) 이 말로 여인은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다려 온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거의 근접한 셈이다. 나아가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청하여 이틀이나 예수님과 머물렀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고백한 이들에게 확연히 드러났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세상이 소외시키고 외면한 사마리아인들에게서 확증되고 보증되었다. 단절을 화합과 신뢰로 이어 놓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적 자리’에 두 발을 담그는 일상의 긍정적 일탈로 가능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늘 일상의 무덤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나의 일상이 현실의 제도(그것이 종교든 정치든 그 무엇이든)에서 빗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그저 다시 목마른 물일 수밖에 없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나의 우물을, 나의 두레박을 던져 버릴 용기를 가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요한 복음서 해설] 참된 예수, 참된 신앙(4,43-54)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역사에서 수없이 많았고 지금도 많을 테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뒤틀렸던 적 또한 수없이 많으니, 참된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우리 교회는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신앙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이 모든 일이 참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들이 저질렀던, 그분에 대한 개념을 왜곡한 행태다.

 

오늘 복음은 왕실 관리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 지역의 분위기를 언급한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고향 지역이지만 예수님 스스로 예언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이라고 지적하신 바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갈릴래아 사람들은 사뭇 다르다.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식하고 그분의 입바른 소리에 그분을 죽이려고 덤벼들기까지 했다(마르 6,1-6; 루카 4,16-30 참조). 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갈등을 비켜 간다. 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하신 행위를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신기한 일을 하는 마술사로 맞아들여진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듣는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그분은 개념 왜곡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왕실 관리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터다. 죽을 위험에 처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가 아니라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적의 요행쯤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적을 바라본다. 예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표징과 이적을 믿음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이 말씀에서, 요한 복음서는 표징과 이적은 거부되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갖는 데 소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끄집어낸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와 닮은 이야기가 유다이즘에도 있다. 라삐 가말리엘은 아들이 아프자 제자 둘을 라삐 하니나 벤 도사에게 보내어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다. 라삐 하니나는 기도를 올렸고 그 시간에 라삐 가말리엘의 아들이 나았다고 한다. 표징과 이적은 신앙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는 도구로 인식되던 유다 사회였고, 요한 복음서도 같은 맥을 짚어낸다.

 

요한 복음서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치유 행위가 특이한 것은 왕실 관리의 출신 성분 때문이다. 그 관리는 이방인이었다. 지난 호에 읽었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믿게 되었음을 보았다.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예언자인지 기적쟁이인지, 아니면 메시아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방인들, 특히 왕실 관리에게는 간절한 외침 하나만이 중요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이 외침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움직이시길 바라는 데 소용될 터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움직이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왕실 관리를 움직이게 하신다. “가거라”(50절). 이 말씀 한마디는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만나 얻어낸 유일한 소득이다. 그 밖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말씀 한 마디’, 그것이 왕실 관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왕실 관리가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통한 표징이나 이적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왕실 관리는 갈릴래아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신기한 일에 현혹된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또 다른 신기한 일을 기대하는 구경꾼의 수준을 드러낸 것뿐이다. 반면 왕실 관리에게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 그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분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본질을 여실히 목격한다. 왕실 관리는 움직인다. 말씀 하나를 달랑 들고 병든 아들에게 간다. 그리고 발견한다. 아들이 낫게 된 시각이 예수님께서 외쳤던 ‘가거라’라는 말씀이 울려 퍼지던 바로 그때라는 사실을.

 

신앙의 자리는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도출되는 성과물이 놓이는 곳이 아니다. 온전한 의탁, 또는 전적인 간절함이 만들어 내는 실천적 움직임에서 신앙은 도드라진다. 억지 신앙 고백을 하면서 신앙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우기는 세상에서는 피의 보복이 악순환될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예수님을 죽인 우리 교회의 못난 역사가 그 사실을 되새겨 주며 깨닫게 한다.

 

참된 신앙은 단순함 하나로 족하다. ‘말씀 한마디’를 듣고, 그것을 전부로 여기는 태도, 그것이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삶의 언저리를 더욱 넓혀 간다. 내 것을 우겨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은 자신의 삶조차 죽이지만, 단순히 의탁하고 따르는 신앙은 삶의 언저리를 사람들로 붐비게 한다. 왕실 관리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도행전도 참된 신앙이 가정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곳곳에서 보여 준다. 코르넬리우스 집안이 그랬고(사도 10,34-48 참조), 리디아 집안(사도 16,15 참조), 필리피 간수의 집안(사도 16,31-34 참조)이 그러했다. 제대로 된 신앙 고백은 그 열매를 맺는 데 더디지 않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왜곡했던 과거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복잡하게 해석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네’ 한마디 하고 예수님처럼 살면 될 터인데, 예수님은 이렇고 저런 분이라고 강변하면서 무턱대고 자신의 신념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그렇게 하는 우리에게 참된 예수님은 요원할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를 다시 더듬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요한 복음서 해설] 갇힌 믿음에서 열린 믿음으로(5,1-18)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전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기껏해야 영·수 학원이었고, 대개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복습하는 수준이었다. 만일 지금의 광기 어린 사교육 현장을 그 시절 사람들에게 제안해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쳤다.” “애가 무슨 죄냐?”라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프랑스 유학 시절 우리나라 고3 학생들의 하루 일과를 프랑스 국영방송에서 다큐 형식으로 보여 준 적이 있다. 함께 지켜본 프랑스 신부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울랄라! 미친 짓이다!” 왜 우리는 ‘미치게’ 되었을까?

 

신부인 내가 사교육 현장을 비판하면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낳아 보지도 키워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낳고 키운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밀어 넣고, 그 이유를 현실 때문이라 자위하는 부모들의 이유치곤 비겁하다.

 

예수님 시대에도 현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 아픈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대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비겁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데 주저했다. 현실이 그렇다는 이유였다.

 

아픈 이들에겐 희망이 없었다. 소외된 삶의 경험칙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내팽개치게 했다. 어떻게든 ‘다른’ 이가, ‘정상적인’ 이가 있어야만 병든 이가 살 수 있는 ‘현실’이 아픈 이에겐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다.

 

예수님께서 병든 이에게 던지신 질문을 보자. 병든 이의 ‘원의’를 물으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병든 이의 답을 보자.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의지는커녕 낫고자 하는 원의조차 가지지 못한 병든 이는 병과 하나였고,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본연의 자신이 아닌 그는, 아픈 채 머물고 머문 채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세월이 38년이었다(이스라엘의 광야 체험 역시 38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신명 2,14 참조).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예수님의 말씀은 병든 이의 원의나 의지, 그렇다고 간절한 청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병든 이들의 간절함을 본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푸셨다. 요한 복음서의 예수님은 당신을 거부하는 세상에 끝까지 들어와 살이 되어 죽어 가셨다. 그래서 ‘파견된 이’로 그려지신다(1,14.18 참조). 단순히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뱀의 유혹처럼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게 아니라(창세 3,1 이하 참조), ‘일’을 통해 하느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였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그의 권위이자 권능이었다. 세상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은 이 지상에, 이 어둠에 하느님을, 빛을 드러내는 데 그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에 억눌려 화석이 된 믿음을 열린 믿음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치유하셨다는 데 이야기의 초점이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치유와 관련된 표현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공관 복음서에 흔히 등장했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치유의 확인조차 절제되고 있다. 그저 그분 말씀이 전부고, 이 말씀 하나로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서로의 족쇄가 되었던 병든 이와 벳자타 못의 지긋지긋한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가거라.” 병든 이는 가야 한다. 그가 그이기 위해서, 그가 그로 살기 위해서.

 

문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완고한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낫기를 바라며 벳자타 못에 줄곧 머물던 이들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통해 낫게 된 새로운 사건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안식일 논쟁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과 당시 기득권 세력 간의 주요 다툼 중에 단연 최고였다(마태 12,1-14; 마르 2,23-3,6; 루카 6,1-11 참조). 종교적 시간에 얽매어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시간 너머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갇혀, 안식일의 본디 의미인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도무지 찾지 못한다(탈출 31,12-14 참조).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보여 주셨는데도,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을 핑계로 하느님을 밀어낸다. 믿는다 하면서, 믿고 보고 깨닫는다 하면서 자신의 기존 가치에 대한 합리화에 급급한 게 사람이다. 사람들이란 늘 그렇다.

 

병든 이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안식일 논쟁의 본질적 허구가 드러난다. 안식일에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한 이유에 대해, 그 책임에 대해 병든 이는 맞서야 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그가 누구인지, 병든 이는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비켜 간다. 예수님에게 이유와 책임의 짐을 떠넘긴다. 안식일 계명을 핑계로 진짜 하느님을 버린다. 배운 사람이든 아니든 율법을 들고, 전통을 들고, 법을 들고 나오는 이들의 한계는 늘 ‘사람다운 관계 형성’을 거부하는 완고함에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세상과 사람을 먼저 ‘찾으신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나서신다.’ 성전에서 병든 이를 먼저 보고 찾은 분은 예수님이셨다(14절 참조). 나타나엘의 경우가 그랬고(1,48 참조), 눈먼 이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다(9,35 참조). 지금 이야기의 장소는 성전이다. 아픈 이, 병든 이가 들어갈 수 없었던 곳에 병든 이였던 그가 버젓이 와 있다. 비정상인이었던 그가 정상인이 되어, 다수가 ‘현실’이라는 세상 안에 살아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병든 이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다. 은총은 주어지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더디기 마련이다(루카 17,17-18 참조). 다수가 ‘현실’이라고 하는 자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데 비현실적인 자리다. 여기는 성전이다.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줄곧 일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쉼 없이 지금 여기에서도 일하신다는 생각을 수시로 잊어버린다.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그것으로 지시하고 규정하는 현실이 지금 여기에서 너무나 막강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실을 핑계로 하루하루 흘러가듯 안온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부되고 소외된다. 예수님은 현실에 함께 있되, 인간은 그 현실을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데 너무 익숙하다.

 

‘현실이 그렇잖아!’라는 말만큼 신앙에 위협적인 말은 없으리라. 고작 이 현실에 적응하려고 수고롭게 신앙을 갖는 것이라면, 우린 참 서글프지 않을까. 예컨대, ‘대수천(대한민국 수호 천주교 신자모임)’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오늘의 현실이 서글프다. 오히려 ‘하수천(하느님 나라 수호 천주교 신자모임)’을 만들어 이 ‘현실’을 이겨 내고 고쳐 가야 하는 게 믿는 자의 도리가 아닐까.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요한 복음서 해설] 부전자전(5,19-30)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정말로, 진짜로’란 말을 이탈리아어로 하면 ‘체르토(Certo)’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말 중간중간에 ‘체르토’를 양념 치듯 뿌려 댄다. 듣는 이가 대수롭지 않게 듣거나 미심쩍어 하면 ‘체르토’가 가히 폭풍적으로 듣는 이의 귓가를 파고 든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대화할 때는 늘 긴박하거나 쫓기는 듯 힘들었다. 프랑스에서 대화할 때는 또 다르다. ‘내 생각에는…’, ‘내 짐작에는…’이라는 말이 먼저 앞선다. ‘분명하다, 정말이다’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아, 듣는 이가 판단하고 믿게끔 여유를 준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멘, 아멘’이란 말을 자주 쓰신다. ‘진실하다, 확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멘’은 오늘 복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이 말을 자주 쓰시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된 존재’로 소개하신다(19절 참조).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아버지에게서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소개할 뿐이다. 예수님 말씀의 진실성과 확고함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신앙고백과도 같다. 당신을 드러내거나 당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욕망의 허튼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멘, 아멘’으로 끈질기게 강조하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말마디를 불러오고, 아버지는 아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호칭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리고 의존하기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호칭은 서로를 깨우치고 서로를 드높인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19절 참조). 아들의 낮춤 이전에 아버지의 낮추심 또한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몸소 당신이 움직이시지 않고, 아들을 통해서만 세상에서 일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절제를 보여주시고 아들은 아버지만을 드러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절제한다. 우리는 이 둘의 절제를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으로 하나 된 내적 친밀성은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없애 준다. 서로가 닮아서 하나가 된다(콜로 1,15; 히브 1,3 참조).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세상이 함께 나누는데 있다. 아버지는 원래 생명의 원천이셨고(창세 2,7 참조), 그래서 생명을 주는 분이셨다(신명 32,39 참조). 이 생명을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한다(1,4; 2코린 5,17 참조). 예수님이 생명이심은 병든 이를 낫게 하시고(5장), 눈먼 이를 치유하시며(9장),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으로(11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의 신적 속성을 똑같이 누리고 있다는 반증이다(1,4; 5,26; 1요한 5,11 참조).

 

생명은 심판을 통해 또렷하게 사유되어야 한다. 심판은 분명 선악 구도로 실행되고(5,29 참조), 선한 것을 행하면 보상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예로부터 유효하고 분명했다(욥 34,11; 시편 28,4; 62,13; 잠언 24,12; 마태 16,27; 로마 2,6; 1코린 3,8 참조).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악스러운 것들의 종말에 치우쳐 심판이라는 말마디에 몸서리치며 두려움을 갖는 버릇이 있다. 심판은 그래서 늘 나태한 우리 일상을 조심스럽게 꾸짖는 듯하다.

 

심판은 아들에게 주어졌다. 아들이 생명을 갖고 있고 생명이신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면, 심판의 이유와 목적은 생명이어야 한다. 생명으로 초대하는 것이 곧 심판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또렷하게 곱씹어야 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24절). 예수님의 입장에서 심판은 당신과 아버지의 존재를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바라는 데 소용된다. 그래서 심판은 생명을 갈구하고 생명을 좇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유물이다. 심판을 목격하고 생명을 생각하자는 게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한목소리다.

 

목소리에 합당한 자세는 ‘듣는 것’이다.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것으로 생명을 얻어야 한다. 복음은 결국 울려 퍼져 들리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듣는 데는 죽음과 생명의 구분이 필요 없다. 생명의 소리는 산 이와 죽은 이의 구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있는 한, 그분이 말씀하시고 있는 한, 죽음은 생명이고 생명으로 죽음은 재탄생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시간은 시작되었고, 죽음의 시간은 없어졌다.

 

우리네 인생사의 가장 큰 고통과 그로 인한 절대적 단절은 죽음일 테다. 생명을 알리는 복음이 모든 이, 모든 곳에 닿으려면 죽음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두 범주가 폐기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이 죽은 이를 살리신 일에 그 역시 일조하여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태초에 인간은 죽음을 몰랐으나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명은 죽음 앞에 처절히 짓밟혔다. 그런데도 저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뼈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했다(에제 37장 참조).

 

예수님의 등장으로 생명과 죽음은 ‘힘의 교환’에 따른 이분법적 대립과 오랜 대결 구도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예수님 그분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생명은 하나의 실재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는 죽어 있어도 산 이처럼 듣게 되니, 살아 있는 것이 죽어 있는 것과 대립할 이유가 없어졌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모두가 부활한 새로운 실재로 서 있다(29절 참조). 인간은 비로소 ‘한’ 범주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한’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람의 아들은 이런 논리를 묘사하는 데 적격이다. 사람의 아들은 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드러낸다(시편 8,5-6 참조). 사람이기에 약하나(히브 4,15 참조),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또한 강하다. 약함과 강함이 사람의 아들의 형상 안에 모순적이게도 얽혀 있다. 또한 사람의 아들은 우리 인간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1,18 참조). 사람의 아들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이 조우하고, 모순과 대립 개념이 사라진다. 흑과 백이, 죽음과 생명이, 그리고 인간과 신이 지금 이 시간, 한자리에서 하나가 되는 건, 오로지 사람의 아들 덕분이다.

 

부전자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던 하느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살내음을 풍기신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들으실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하고자 하시는 것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에 닿고야 말았다(30절). 예수님의 인간적 자리에 아버지 하느님은 그렇게 예수님으로 머무르고,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서 말씀하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하면 될 터인데…(5,31-47)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계와 시민 사회가 시끄럽다. 시끄럽기에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고 저마다의 의견을 ‘올바르다’ 외친다.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현상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인다. 인간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힌 현재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핏기 어린 아우성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역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히스토르(ιστωρ)’에서 왔다. 뜻은 ‘판단하다, 조사하다’ 정도로 요약된다. 역사는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해석 주체들이 내놓는 다양한 의견의 조합 또는 대립을 통해 성장하거나 퇴보한다. 그게 역사다. 우린 지금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중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시대에 함께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해석을 부추겼다.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하느님이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과 일로 드러나고 있다(5,36). 이 역사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해석 주체의 범주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유다인으로 대표되는 대립적 부류(5,42)와 세례자 요한을 필두로 모세와 성경까지 언급되어 예수님을 증언하는 부류다(5,46).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 복음서의 한 단락은 해석 주체의 대립 속에 예수님의 말씀과 몸짓 그 너머로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의 등장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데 필요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몸을 통해 하느님은 세상에 보란 듯 활보하신다(5,39). 아버지와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니다. 같은 분으로서 서로의 다름에 대해 증언하신다(5,32). ‘다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용사는 두 가지다. ‘알로스(ἀλλοϛ)’는 같은 종으로서 다름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헤테로스(ἕτεροϛ)’는 서로 다른 종의 차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예수님이 증언할 다른 분을 가리킬 때 요한 복음서는 ‘알로스’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당신을 증언할 다른 이가 있다고 하는 말도 실은 당신이 같은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분이 다른 분을 통해 굳이 증언해야 할 이유는 유다 전통에서 기인한다. 유다 전통은 스스로 증언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둘이나 셋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보장받아야 한다(민수 35,30; 신명 19,15 참조).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와 보여 준 행동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였고, 그것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요컨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 진실로 확증된다. 예수님의 증언은 전적으로 하나 됨 안에서 하는 증언이었고, 그 하나 됨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증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율법을 통해, 또 예언자들을 통해 줄기차게 하나를 이야기해 오셨다. 그 하나는 요한 복음서에서 한 문장으로 쉽게 정리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6). 하느님은 태초부터 하느님으로 사랑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인간으로 그 사랑을 완성시키셨다.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를 통해 사랑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연속적이어서 한결같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등을 돌리고 여전히 어둠에 머무르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와 모습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들려오고 보이는 데도 유다인들은 두 눈 꼭 감고 두 귀를 닫아버린 채, 하느님에 대한 무지를 자기들끼리의 앎으로 드러낸다. 이유인즉, 이렇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5,44) 마음이 없다는 얘기다. 유다인들의 역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지난하면서도 굳건했고, 그리하여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통해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만날 자리를 마련하셨지만 유다인들의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조응하지 못했다. 마음이 떠난 자리엔 여전히 예수님의 증언만이 외로이 머무른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5,38).

 

유다인들은 성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났다.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 모종의 특별 계급을 형성한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간접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데 이른다. 실제 삶을 ‘직접’ 살아 현실의 팍팍함에 지쳐 있는 민초의 처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직접적인 삶’에 살이 되어 오셨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계시어, 한 분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만의 방법이 ‘메노(μένω)’라는 동사에 녹아 있다(5,38). ‘메노’는 인격적 관계의 내적 일치를 가리키는 말로 지속적인 인내와 봉사로 다른 존재와 ‘함께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믿는 이들의 내적 일치를 위해 ‘메노’가 사용된다(10,38; 14,10; 14,20; 15,7). 인격의 내적 일치는 적당한 공부와 지식의 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격에 대한 이해와 인격체 간의 만남이 직접 이루어져야 하고 살 내음이 나야 가능한 일이다. 인격은 직접적 삶의 체험, 곧 함께 머무르는 일로 다듬어지고 가꾸어진다.

 

요한 복음서가 말하는 ‘유다인들’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민초가 ‘함께 머무르는 것’을 방해했다. 실제 삶보다 책이라는 간접적인 삶에 익숙했던 그들은 성경에 대한 앎을 현실을 단죄하는 ‘엄격함의 무기’로 사용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을 통해 교황 요한 23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시대의 잘못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단죄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의 무기로 협박하기보다 자비의 치유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면 될 터인데, 그게 어렵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건, 그분을 증언하러 왔던 수많은 신앙 선조의 말과 삶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 가능하다. 이런저런 지식의 총체 안에 난해한 개념들을 무기 삼아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성경을 공부하지 말고 성경대로 살아야 된다는 명제 앞에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까. 행여 공부한 것에 기대어 하느님에 대한 ‘가장 난잡한 무지’를 드러내는 건 아닐까. 등이 구부러진 채 성당 안에 앉아 홀로 외로이 묵주를 굴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길 바란다. 문자 속에서보다 때론 삶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 속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함께 머무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