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 복음서 해설(3)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2.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삶(11장)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라자로 이야기는 요한 복음의 앞부분, 즉 ‘표징의 책’(1-12장)이라 불리는 부분의 마지막 표징적 사건이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부터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고,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인 라자로 이야기를 통해 믿는 이를 재촉하는 이야기를 결말짓는다. ‘영광의 책’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는 13장부터 펼쳐질 것이다.

 

‘표징의 책’에서 ‘영광의 책’으로 이어지는 요한 복음의 구조는 말하자면 생명에서 죽음을 향하는 예수님의 역사적 행보를 그려 낸다. 죽음에로의 행보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11,53 참조), 예수님은 라자로를 통해 생명을 이야기하신다. 생명에로의 길은 단순히 살덩이에 숨이 붙어 있는 상황을 향해 방향 지워진 게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이 생명의 길에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는 일은 다급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느리고도 느리게 진행된다. 라자로가 죽어 갈 만큼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예수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라자로의 병을 다르게 규정하신다. ‘하느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한다(11,4). 죽음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대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혹은 불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영광’이라 하신 건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니다. 그 ‘영광’은 죽음의 자리 안에 밝게 드러날 ‘영광’을 뜻한다. 라자로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생명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명의 대립이라는 흑백논리로 영광을 이해해선 안 된다. 병을 앓는 라자로가 죽기를 바라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무엇이 영광인지 말하고자 하신다.

 

인간의 논리가 유독 완고하거나 폐쇄적임을 증명하듯 제자들이 등장한다(11,8-10). 제자들은 유다 땅을 죽음의 장소로 인식한다. 이에 예수님은 빛을 이야기한다. 빛이 있으면 넘어질리가 없다. 말하자면, 예수님(빛)이 계시면 죽음은 없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빛으로서 예수님은 라자로의 어둠, 곧 죽음을 없애러 가는 것(11,11)이고 유다 땅은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의 자리가 될 것이다. 다만 그전에 제자들의 변화는 필요하다. 생명이 왔으나,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토마스의 외침은 결연한 것이긴 하지만 빗나간 외침이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

 

라자로의 일을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교육의 자리를 펼치신다. 제자들에겐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제자들에게 해방이고 탈출이어야 한다. 유다를 죽음의 자리로 여기는 강박관념, 라자로는 죽을 병에 걸렸으니 죽을 거라는 강박관념, 이로 인해 지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끄집어내셔야 했다.

 

교육의 대상은 제자들로 시작해서 마르타로 이어진다(11,21-22).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치유자로 인식될 뿐이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 이 말투는 예수님의 시간을 둘로 찢어 놓는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라자로가 살아 있던 시간 즉 과거에만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이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 이 순간에만 필요하다’는 논리, 그리 낯설지 않다. 입시, 취업, 건강, 행복, 성공을 위한 순간에는 예수님이 강력히 요청되나 그 외의 일상에선 예수님이 소외되거나 유폐되는 현상, 그리 낯설지 않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이 삶의 근본이 아닌 삶의 지렛대로 마르타의 논리 저변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고(11,23) 마르타는 그 말을 믿는다고 한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믿음은 ‘아직’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유다의 희망을 재확인할 뿐이다(11,24).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마르타는(11,27) 예수님의 질문에 적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지금, 여기서 라자로를 살릴 생명 그 자체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사후 세계의 희망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주어질 선물이나 보상도 아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질 구체적 사건이고 상황이다. 요한 복음은 이런 사실을 여태 강조해 왔다(3,16; 5,24-25; 11,25-26; 20,31).

 

생명은 그리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지금, 여기’에 대한 사유와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기존 습속과 가치관을 예수님에게 투사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늘 예수님을 저만치 밀쳐 내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세상 것을 마구 끼워 넣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러저러한 반성이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여전히 지금이 아닌 ‘아직’의 상태로 내몰고 있는 듯하다.

 

마리아에게서도 마르타의 논리는 여전하다(11,32). 예수님은 죽음에 허덕이는 인간의 나약함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11,33). 그리스어로 ‘마음이 북받치다’는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이다. 직역하면 ‘말(馬)과 같이 콧방귀를 끼다’ 정도가 된다. 즉, 화가 났거나 불쾌할 때,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행동이 이 동사에 담겨 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과 그 죽음의 세계에 파묻혀 생명의 주인으로, 메시아로 온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와 유다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두고 라자로를 끔찍이 사랑하셨다고 여긴다(11,36).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선생일 뿐이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또다시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한다(11,38-40).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인간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정확히 맞붙는다. 무덤의 돌을 치우는 건, 완고하고 폐쇄적인 인간의 논리를 끝내는, 그 무모함과 불신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현존은 정확히 인간의 한계에서 시작한다. 필요한 건 딱 하나, 예수님의 말 한마디다. 죽음을 넘어서 생명으로 라자로를 불러내는 건, 예수님의 말 한마디, 딱 그것이면 되었다. 신적 능력의 초월성이나 우월성을 강조하자는 게 아니다. 애당초 예수님은 생명이었고, 그로써 이 세상의 메시아였다. 메시아가 함께하는 자리엔 죽음이 함께하지 못한다는 게 신앙의 핵심이었고, 그 신앙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라자로의 생명을 통해 입증된다. 제자들, 마르타, 마리아의 ‘아직’이 라자로의 되살아남으로 ‘지금’이 되었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사건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전조적 표징이다. 예수님의 빈 무덤 이야기와 연결되고(20,5-7), 죽으러 가자던 토마스의 부활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20,24-29). 그러나 이 표징적 사건은 누구에겐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유다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인간 세상의 권위는 하느님의 생명을 말살하는 데 집중된다(11,53).

 

라자로의 이야기는 믿음으로 삶을 꾸려 가야 함을, 삶이 곧 믿음의 현장임을 깨닫는 자리다. 각자가 만나는 예수님은 다를지라도, 그 예수님을 통해 제 삶의 자리를 무시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라자로를 통해 기억해야 한다. 사는 건 믿는 것이되, 믿음이 지금 삶이 아닌 다른 곳을 지향한다면 우린 여전히 지금 여기에 온 예수님을 가로막거나 죽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삶에 대한 냉철한 사유를 통해 예수님은 지금 여기 살아 계신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요한 복음서 해설] 고별 기도(17,1-26)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해 기도한다. 고별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해 ‘일치’의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는 이들과의 일치로 확장된다.

 

예수님이 요한 복음의 첫머리부터 줄곧 가르치고 보여 준 것은 결국, ‘하나 됨’이다. 이 세상에 살과 피로 오신 하느님,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데 자신의 삶을 포탄처럼 내던졌다.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순전히 세상의 선택이었다. 선택은 하나의 세상을 둘로 갈라지게 한다. 하나를 두고 둘로 갈라진 세상에서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제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17,1-8), 예수님이 누리는 아버지와의 일치에 제자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17,9-19),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역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제자들과의 일치 안에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17,20-26)이다.

 

첫 번째 기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에 대해 말한다. 갈등과 반목, 그리고 대립 속에서 예수님은 숱한 사람을 가르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 즉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했고,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는 현장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려는 마지막 때는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죽음의 순간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 각인되는 방법은 호통치고 군림하는 게 아니었다. 하느님의 방법은 사랑이라는 넉넉함이었다. 세상이 생기기 전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의 개입을 시작하셨다. 하늘 위의 새와 땅 위의 동물들과 바닷속 물고기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었다. 이미 받고 있는 사랑을 아직 못 받았다고 여기는 인간의 무지함을 깨우치기 위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왔고, 살았고, 죽어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또 다른 말이다. 죽음까지 불사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은 세상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구애다. 하느님을 알아 달라는 외침이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났다는 선포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한 분 하느님, 참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며, 그 길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봉헌했다. ‘영원한 생명’은 제 목숨 하나 부지하려는 각자도생의 자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는 데 제 삶을 봉헌하는 이의 헌신과 연대의 결정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헌신과 연대의 결정체를 본다.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세, 그것이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리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호받기를 아버지께 청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바치는 마지막 기도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을 위험과 박해를 감내할 수 있기를 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무릇 박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피할 수 있게 하거나, 아버지 하느님이 그 박해를 거두어 주십사 기도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누리는 ‘일치’에로 제자들을 불러 주십사 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거룩해지도록 비는 것이다.

 

앞서 되짚었듯이,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길은 십자가로 대변되는 사랑의 길이었다. 제자들 역시 예수를 증거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한다. 이미 십자가의 길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길이 사라져 몸도 마음도 안온한 상태를 예수님은 바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그 미움 안에서 제자들이 단단해지고 굳건해져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보듬고 살길 원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비는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성속(聖俗)을 갈라 속된 것을 제거한 후, 성스러움만 움켜쥐겠다는 제례적·윤리적 혹은 규범적 편협성이 아니다. 이 세상의 민낯을 정확히 짚어 내고 그 속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증거자의 결기와 하느님의 사랑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관계의 예술이다. 매 순간, 어느 장소에서라도 하느님이 함께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자세, 제 신념과 가치관이 전부인양 떠들지 않는, 그래서 열린 마음과 정신과 태도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과 갈등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단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름 받은 증거로 제 삶을 세상에 내어놓는 자세,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비는 ‘거룩함’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위해 청한다. 이들이 제자들과 다른 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믿는 이들’은 요한 복음이 쓰인 1세기 말엽을 살았던 그리스도인일 수 있고,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갈 수많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은 세상 안에 없다. 살과 피로 존재하는 예수는 더 이상 믿는 이들 곁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부재는 상실감이나 패배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증거자들의 말과 행적이 수많은 예수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후반이 그러했고, 지금껏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통해 예수님은 늘 살아 숨 쉬고 있다. ‘믿는 이들’이 예수님과,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바라는 기도의 내용은 실은 ‘믿는 이들’이 증거자의 대열에 합류하길 바라는 부탁과 같다. 예수님의 부재를 증거자의 삶으로 채워 나가 하느님의 현존이 영원하길 바라는 호소와 같다. ‘믿는 이들’을 통해 이천 년 전 예수는 오늘에 살아 있고, 태초의 하느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할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다시 시작점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17,24).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래서 세상에서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태초의 시간과 맞닿아 있기를 예수는 아버지께 청한다. 태초에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 안에 하나였다. 사랑은 이 세상이 시작하는 이유였고, 세상의 모든 시간 안에 변함없이 새겨진 하느님의 섭리며 선물이다. 역사의 어느 한 꼭지를 살더라도 예수님 안에 믿음으로 하나 된 이들은 태초의 사랑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사랑을 뿌려놓으셨고, 사랑으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매 순간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통해 끊임없이 되새겨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드리는 청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겐 하나의 요구이며 초대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위해 또 다른 예수로 살겠다는 것, 천상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 세상 한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증거하겠다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과 세상이, 세상과 그 속에 숨 쉬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데 제 삶을 바치겠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신앙을 가진 이라면 제대로 실천해 보라는 초대가 바로 예수님의 계명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요한 복음서 해설] 수난받는 하느님(18,1-38)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이 보여 주는 수난의 길은 자유로움의 극치다.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겟세마니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청한 것이 아닌 예수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 유다를 중심으로 한 세력, 그들의 구성이 꽤나 흥미롭다.

 

로마 군대를 비롯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 그들은 만나서도 안 되며 만날 수도 없다고 저들끼리 강변하는 무리다. 예수님을 잡는 순간, 그들은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 머문다. 저들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된다.

 

요한 복음에 예수님은 빛으로 묘사된다. 어둠이 가득한 밤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등불과 횃불로 상징되는 빛을 가지고 왔다. 빛을 흉내 내는 무리가 참된 빛인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혹자는 세상과 종교의 대립을 말하며 참된 진리를 전하러 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맞는 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이원론을 필두로 한 영지주의에 저항한다. 하느님이라 자처한 인간 예수, 하늘과 땅이 온전히 하나로 맞닿아 있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유다 사회는 거부했다. ‘감히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라니!’ 그들에게 하느님은 저 천상에 유폐된 존재였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선다. “누구를 찾느냐?”라고 직접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나’임을 밝힌다. 모세에게 나타난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당신을 드러내셨듯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임을 계시한다. 그런 예수님 앞에 무리는 뒷걸음치다 넘어진다. 신적 현현 앞에 선 인간의 나약성이 제대로 드러났다. 예수님은 지금 유다 사회의 신앙적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그것도 가장 실패한 모습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혀 유다 사회로부터 제거의 대상이 된 채로, 예수님은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이야기한다. 실패와 제거의 상징인 예수님 앞에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넘어지는 세상 권력의 나약함은 요한 복음이 그리는 승리의 방식이다.

 

베드로가 나서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을 통해 이루려는 야훼의 현존 방식을 가로막는 꼴이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세상의 방식이고, 사랑으로 세상을 껴안으려는 예수님의 자기양도를 폄훼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아버지 하느님이 주신 잔을 받아 마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잡히는 건, 아버지 하느님을 어둠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논리에 정확히 내어 바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한나스의 집으로 끌려간다. 예수님은 이미 성전이라는 공개적 · 공식적 자리에서 유다인들과 논쟁했고, 그 논쟁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10,22-42). 한나스의 집은 공식적인 대사제의 집이 아니었다. 그는 6-15년까지 대사제였고, 예수님의 신문이 펼쳐진 30년경의 대사제는 카야파였다. 예수님은 지금 ‘불법적으로’ 한나스 앞에서 신문받는다.

 

스승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은 이런 불법의 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외치는 베드로, 유다 사회의 숨겨진,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 앞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베드로의 비겁함은 스승의 불법적 신문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예수님은 잡힐 때 ‘나다’라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지금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며 스승과 대척점에 서 있다. 스승을 모른다고 하는 건, 야훼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이며, 하느님을 모르는 건, 결국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제껏 살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베드로를 잡아다 신문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지금 한나스의 집에서 자행되는 불법적 신문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질투의 신문이었다. 예수라는 인물이 가지는 유명세와 인기몰이는 유다 사회의 주류와 권력층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권력이 아닐까, 행여 내 권력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며 두려워하는 세상의 질투는 한나스의 집에서의 신문으로 더욱 구체화된 것뿐이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갈릴래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유다 사회 전체에서 가장 공적인, 그래서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을 비난하고 거부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공개적이고 개방적인 가르침이라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듣는 귀가 없는 이들의 악다구니가 신문받는 예수님 앞에서 여전히 쏟아진다. ‘도대체 당신의 가르침이 무엇이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애당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사제’라는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예수님은 당당히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항변했다. 그런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성전 경비병은 가르침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제의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예수님을 이해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되지 않을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서로가 사랑하길 바라는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간적 삶 안에 완벽히 용해되어 스며들었다. 세상은 믿음과 사랑보다 권력과 계급의 차별로 질서를 잡기에 바빴고, 권력과 계급이 믿음과 사랑으로 무너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에게 끌려간다. 유다인들은 총독 관저 밖에 있었고 예수님은 안에 머문다. 총독 관저 밖, 파스카를 위한 정결에 유독 세심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지만, 총독 관저 안에 머무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지 못한다. 총독 관저 밖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끌고 가려 하지만, 총독 관저 안의 빌라도와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죄에 대한 빌라도의 신문은 싱겁다 못해 가볍지만 진리에 대한 그의 질문은 무겁고 깊어서 답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밝혔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진리를 앞에 두고도 깨치지 못하는 빌라도는 요한 복음을 읽는 독자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우린 진리를 깨치고 있는가? 우린 총독 관저 밖, 제 잇속에 어긋난다고, 제 이해를 벗어난다고, 제 익숙함을 무너뜨린다고 말하는 자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투명함이 아닐까.

 

예수가 유다인의 임금으로 고발된 건, 유일한 임금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유다 사회가 로마 황제를 임금이라 외치는 위선이 드러난 가시적 사건이다(19,15). 제 잇속을 챙기려 진리의 세상을 거부하고 제가 믿고 바라는 것조차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거짓, 그건 원죄의 논리이기도 하다. 예수의 신문은 이런 거짓과 탐욕, 그리고 이기심을 드러내는 장이 된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오”(19,5)라며 죄 없는 예수님을 넘겨줄 것이다. 태초에 하느님은 사람을 찾으셨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그 답을 빌라도가 대신한다.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행보는 역설적이게도 태초의 인간, 그 모습으로 방향지어진다. 숨었던 사람이 밝히 드러나는 자리, 끊겼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예수의 수난으로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요한 복음서 해설] 발견(20,1-31)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일상을 산다는 건 때론 견디기 힘든 무미건조함을 참아 내는 것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새로운 것 하나라도 움켜쥐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들에겐 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들의 여유가 때론 부럽고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그게 우리 서민들의 삶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무엇을 찾는 것, 나는 그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몸뚱아리가 어떻게 변할지, 그 몸뚱아리가 하느님과 어떻게 함께할지에 대한 질문은 요한 복음서, 나아가 다른 복음서들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발견이다. 인간이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그려진다.

 

‘빈 무덤’ 이야기는 그 새로운 발견의 작업장이다. 주간 첫날, 새로운 날이다. 어제의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처음은 새롭고 설렐 수 있지만, 빈 무덤은 누군가에겐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찾고 있는 건, 예수라는 익숙한 사람,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20,1) 예수님을 찾았다. 이른 아침이나 아직 어둠이 있는 시간이다. 빛으로 오신 하느님을 아직 어둠 속에서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통해 어둠을 걷어 내고 빛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발견할 것이다(20,16-18). 새로운 발견은 일상에서 낯선 것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여행이다. 이 여행은 제 지식의 범주와 제 신념의 더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우리는 요한 복음 전체에 걸쳐 강조되어 온 ‘믿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카나의 혼인 잔치부터 시작한 ‘믿음에의 요청’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맞닿아 있다. 이 세상에 육화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 그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죽어 간다는 것, 그리고 죽었지만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이미 인간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요한 복음의 ‘믿음’이다. 다만 그 믿음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누군가가 알려 주고 깨우쳐 주는 지식의 축적이나 수련의 땀방울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믿음의 진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한 예수님의 개인적 관계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 마리아는 부활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천사의 등장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는 서서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요한 복음의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마르 16,6-7 참조). 천사들의 질문은 “여인아, 왜 우느냐?”(20,13)이다. 마리아의 울음은 죽음의 자리에 묶여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한 상실감에 젖어 있다. 천사들의 질문은 그 상실감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20,15).

 

울음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유 없음’으로 끝이 나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신의 자리에 천사들이 앉아 있었고, 예수님은 지금 부활한 몸으로 마리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울 이유가 없었다. 잘 알다시피 천사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존재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시신의 사라짐에 얽매인 마리아의 울음은 이런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는 행동이 되어 버린다. 마리아가 눈앞의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제 지식과 신념에 묶인 채 대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건, 인식의 굴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마리아는 그 굴절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마리아의 해방은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개인적으로’ 부른다. “마리아야!”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라뿌니”, 곧 ‘나의 스승님’이란 뜻이다(20,16). 이 호칭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의문을 부추긴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20,17). 마리아는 지상의 예수님, 자신에게 선생이었던 예수님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다. 그 만남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 하여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다. 만남 이후 마리아는 복음의 전도사가 된다.

 

제자들에게 뛰어간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20,18). ‘주님’은 통상 부활한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초대 교회가 사용한 호칭이기도 하거니와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정체성을 담아낸 호칭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건넨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자.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20,17).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먼저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며, 그다음으로 그 하느님이 육화한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형제가 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온전히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주님’이라는 호칭 속에 녹아 있다. 마리아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나, 그 믿음 안에 이미 하느님은 인간과 하나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부족한 믿음 안에 계시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제거된 믿음의 자리나 신앙의 본보기가 될 인물들이 아닌, 두려워 숨어든 비루하고 비겁한 제자들 가운데 등장한다(20,19). 예수님의 발현으로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하고, 그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이어진다. 문을 걸고 있었던 폐쇄적 태도는 세상을 향한 개방적 태도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죽음의 반대가 부활이 아니고, 세상의 반대가 교회가 아니며, 악의 적대적 대립이 선이 아니다. 예수님의 발현은 세상의 이원론적 대립을 무너뜨린다. 부활은 죽음 안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악은 선을 향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당신의 발현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따지고 편을 나누는 세상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태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 모든 것 안에서 조화를 지향하고 조화를 관리하며 살아갔던 인간의 본디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창세 2,7 참조).

 

토마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통합적 사고’를 더더욱 견고케 한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첫 발현을 보지 못했으나 두 번째 발현에서 ‘믿는 자’로 거듭난다. 첫 번째 발현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토마스를 두고 불신의 대명사로 이해하는 건 곤란하다. 다른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믿음이 토마스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믿음은 죽음의 흔적,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통해서였다.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는 걸 두고, 토마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탓할 이유도 없다. 믿음은 본디 그러하다. 약하고 부족하고 휘청거리더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끈기가 믿음이다.

 

요한 복음이 쓰인 시대의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재림은 더디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없다며 힐난할 때, 요한 복음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보기는커녕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육의 예수님이 아닌 믿음의 예수님이 진정 필요할 때,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21,1-25)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요한 복음의 마지막 장이다. 대개 요한 21장은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21장은 요한 복음 전체, 나아가 요한계 문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사랑’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요약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것인가?

 

요한 복음은 참으로 아픈 사랑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그려 낸 복음이 아닐까 한다. 어둠과 불의, 그리고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외아들을 보내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어떻게든 세상을 껴안으려는 하느님의 절규와 몸부림이 가득한 복음, 그것이 요한 복음이 아닐까.

 

예수님은 늘 세상과 하나였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 비범한 하느님을 증거했다. 외딴 곳, 신비스러운 곳, 낯선 곳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냈다. 요한 21장은 다시 한번 일상 속 하느님 사랑을 먹는 이야기를 통해 전개된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기적의 서술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사실, 요한 복음은 기적이나 이적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징 너머의 의미를 찾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고기를 많이 잡는 데 시선을 두지 말고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사건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요한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의 표징적 사건을 보았다. 예수님은 함께한 사람들을 먹이고 그들의 영육을 채웠다. 이른바 ‘나눔의 풍성함’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계속된다. 한번 세상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 일상의 풍요로움을 위해 함께하신다. 다만, 일상에서의 하느님은 쉽게 발견되나(21,1.14), 쉽게 알아보기 힘든 존재다.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가 그분을 가리켜 ‘주님’(21,7)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호숫가를 지나가는 라삐 정도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베드로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은 제 부족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건, 요한 복음이 줄곧 강조해 온 믿음의 사람이 갖는 특권이다. 요한 복음은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흔적을 더듬는 유일한 방법으로 ‘믿음’을 제시한다. 믿음은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소극적 도박이 아니다.

 

베드로는 낯선 남자의 제안을 따랐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어부가 다른 데 그물을 쳐보라는 낯선 이의 말을 순순히 따른다는 건, 제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해방과 자유를 이뤄 내는 용기 있는 일이다. 믿음은 제 삶의 완전함을 위해 수련과 완덕의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수련과 완덕은 어찌 보면 제 삶과 그 가치에 더욱 몰입하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타인과 주변에 무감각해지게 하는 위험도 내포한다. 요한 복음의 믿음은 자기로부터 해방하여 일상 속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식구라도 서로를 알지 못해 반목하는 경험은 숱하지 않나.

 

대개 사람은 보는 것, 듣는 것을 보고 듣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는다. 예수님의 역사적 존재가 사라진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기존의 제 삶에 대한 안온함이 아니라, 제 삶에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태어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아침을 먹는 일상은 반복되고 반복된 만큼 지루할 수 있으나,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아침은 ‘주님’을 깨달은 기쁨과 풍성함의 시간이 된다. 반복된 일상에 묻혀 살더라도 자신으로부터 진정 해방되어 예수님과 함께 사는지, 아니면 그 일상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며 예수님을 철저히 소외시키는지 요한 복음의 저자는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고쳐 보자면 이렇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일과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일상의 수많은 사건과 상황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우리 삶의 자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 요한 복음이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다.

 

아침식사 후 본격적으로 사랑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사랑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모난 부분을 상쇄한다.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맡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보자. 그분이 바라는 건, 오로지 당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본디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 친교라고 해도 좋고, 연대라고 해도 좋다. 양들을 위임받은 베드로 역시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 위에 이른바 ‘목자’가 될 수 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기반 위에 서로가 형제가 되는 데 있다. 세상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상하관계의 틀로 대하고 규정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도 벗으로, 인간과 인간도 형제적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15,14 참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박해를 비껴갈 수 없다. 베드로가 양을 치는 건, 베드로가 순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21,18 참조).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겪은 현실적 박해는 어떤 의미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표징과 같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이고, 주님은 그 길로 신앙인을 늘 초대하고 있으며(21,19 참조), 그 초대는 결국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고통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광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걸어간 길을 애써 찾는 이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사랑의 길은 홀로 걸을 수 있는 용기 있는 길이다. 많은 신앙인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교는 대부분 자기비하로 연결된다. ‘저 사람처럼 신앙심이 깊으면 좋을 텐데’, ‘매번 기도해도 신앙심이 커지기는커녕 무미건조한 마음만 스산히 남아.’ 이렇게 자책하는 신앙인을 많이 본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을 다시금 되짚어 보자.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비교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호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사유를 기본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신앙심이 더 깊어지거나, 신앙의 모범적 모습에 맞갖게 살고자 하는 태도는 실은 각자도생하겠다는 제 욕심이지 하느님께 나아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다. 이미 오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또다시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다. 요한 복음은 그 해방의 기록을 담고 있다. 숱한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앎과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버젓이 일상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증언하고 기록한 것이 요한 복음이다.

 

빛이 어둠에 왔으나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오로지 인간의 완고함 때문이다. 신앙을 언급하기 전에, 예수님을 언급하기 전에, 제 삶이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 먼저 묻는 게 요한 복음을 읽는 이의 일관된 자세여야 한다. 태초부터 말씀은 계셨고, 종말까지 말씀은 계실 테다. 일관되게 인간 세상에 사랑으로 다가서시는 하느님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듣고 듣고 또 듣는 일뿐이다. 들을 귀도 없으면서 늘 들었다고 되뇌는 우리의 완고함이 예수님을 가로막고,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묻어 버린다. 예수님을 살리는 길은, 또다시 사랑이다. 사랑하면 열리고 사랑하면 듣는다. 그게 전부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사랑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복음서를 읽는 건, 당연히 예수님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다만 앎을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가 그리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적잖이 당황한다. 저마다 복음서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그 실천에 있어선 가히 적대적일 만큼 뚜렷한 갈등을 보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대통령 탄핵 정국을 보자. 촛불 시민에게는 적폐 청산이 시대적 요청이었을지 몰라도 태극기를 든 어르신들은 촛불만큼이나 뜨겁게 상기되어 촛불을 저주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사제들과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평신도들의 대립은 하나의 신앙, 하나의 예수를 놓고 수없이 갈라지고 으르렁댄다. 양비론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식별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투명하고 담백한 답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한 복음은 여전히 필요하다.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은 역사의 예수님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 복음을 영적인 복음이라 말하고, 그 영성의 깊이가 진정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 빵, 목자, 생명, 가시관 쓰신 이스라엘의 임금까지 다양하게 소개한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런 서술은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군중과 제자, 나아가 예수님을 적대시한 유다인들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사람’을 형성하는 데 예수님에 대한 서술이 소용된다. 말하자면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환치되어야 한다. 하여,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알려고 애쓰는 이의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우린 두 단어와 자주 만났다. ‘믿음’과 ‘사랑’이다. 복음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믿는 사람이 되기를 요청했고, 후반부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믿음은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전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기도 했다. 나타나엘이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다. 나자렛을 폄훼했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했고 그리짐 산을 중심으로 제 신앙과 신념을 지켜 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했다.

 

그러나 저 자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다 해도 해방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니코데모를 보라.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율법의 전문가며 실천가였다. 그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앎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너무 많이 알아서다. 다시 태어나는 건, 지금의 자기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예수님은 마르타와의 대화에서 분명히 말한다. 바로 ‘지금’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마르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지만, 그 메시아는 ‘내일’의 메시아였다. 지금 오빠가 죽은 건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수 있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예수님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 강변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유다인들을 두고 서글퍼하며 산란한 마음을 눈물로 표현했다.

 

믿으려면 믿음의 객관적 대상에 나아가기에 앞서, 제 모습과 제 신념과 제 신앙을 여유롭게 사색하는 게 필요하다. 자기가 바라고 갈망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제 꼴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무지함에 갇히는 경우가 다반사인 게 오늘날 교회다. 초라한 구유를 선택한 예수님을 위해 화려한 성당 건축에 열을 올리고, 가난한 이들의 벗인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사회적 주류의 입맛에 맞는 행사와 신심 활동을 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요한 복음은 물론이거니와 요한계 문헌 전체는 유다인들에 대해 아주 강한 비판을 쏟아 놓는다. 요한 묵시록은 유다인들을 아예 “사탄의 무리”(묵시 2,9)라 칭한다. 유다인들이 사탄인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너무 잘 믿는다면서 사람들을 갈라 세우고, 단죄하고, 자기들끼리 거룩하다는 것에 집착하여, 세상에 오신 하느님인 예수님을 철저히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매우 단순한 종교다. 신이 인간이 된 것, 하느님이 인간의 살덩이를 취한 것, 이것만 기억하면 되는 종교다. 자기보다 낮고 추하고 비루한 곳에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다. 별 볼일 없던 제자를 부를 때도, 죄인이요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인들과 만날 때도, 무엇보다 죽이려 덤벼드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십자가 사건 때도 예수님은 함께 머물렀다. 예수님은 ‘함께’ 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었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이자 실천의 궁극적 목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을 통한 사랑이다. 세족례를 떠올려 보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세족례를 보여 주었다. 대개 세족례를 희생과 겸손의 상징으로 찬송하지만, 예수님은 희생과 겸손보다는 ‘함께’ 몫을 나누려는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서로 사랑하는 건, 누가 더 많이 희생하고 더 겸손한지를 따지는 봉사와 희생의 경연장이 아니다. 형제로 ‘함께’ 머무는 자리다.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타자에게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요한 복음이 영광이라 말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를 고통이나 희생으로 부각시키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은 십자가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예수님이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지켜 내는 눈물겨운 사랑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광이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식하는 건 꽤나 중요하다. 그 사랑의 바탕은 어떤 처지에서도 함께 머물겠다는 연민과 공감의 여유다. ‘여유…’, 다시 말하지만, 여유여야 한다. 믿음의 순간, 사랑의 순간은 뜨겁고 뜨거운 만큼 급히 식는 게 우리의 경험칙이다. 요한 복음의 믿음과 사랑의 끈은 여유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끝없이 믿고 끝없이 사랑하기 위해선 지금의 삶 전체를 온전히 봉헌해야 한다. 삶의 한 구석에서 믿었다, 사랑했다 끝날 일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사색과 반성, 그리고 해방을 꾸준히 실천하는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느님이고, 태초부터 인간을 사랑했으며, 그 태초를 인류 역사 곳곳에 심으려 직접 인간의 살을 취했다. 그리고 가시관을 자신의 왕관으로 쓰고, 채찍을 자신의 왕홀로 삼으며 이 세상의 참된 임금으로 십자가를 졌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희노애락의 순간에만 믿음과 사랑을 스치듯 쏟아내는 건 야속하고 무지하며 버릇없는 일이다.

 

천천히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부터 되물어 보자. 나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는가를 물어 보자. 그 물음 안에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살덩이를 함께 짊어지고 우리와 함께 머물며, 우리에게 여전히 물을 것이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이 뭔지 묻고 또 묻는 이들이 지닌 특권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2월호(통권 500호 감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