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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이사야서 해설(2) - 안소근 실비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4.

[이사야서 해설] (2)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10,20)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사야 예언서 제1부를 복습합시다. 1부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엄청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야서가 워낙 넓고도 깊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나누어 보아도 세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이 책에서 우리는 그 첫 부분인 1-39장을 지난 한 해 동안 읽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라는 인물과 연결된 부분이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6,3)

 

1-39장이 적은 양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한 기간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6,1)부터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36,1)까지만 계산해도 40년 정도입니다. 아하즈 시대에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있었고 히즈키야 시대에는 산헤립의 침공이 있었던, 결코 평탄치 않은 40년입니다.

 

이 40년을 담고 있는 이사야서를 요약하는 신학은,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만났던 하느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사야는 높은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뵙는데, 그때에 천사들은 그 하느님을 노래하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6,3)고 말합니다. 6장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이사야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 곧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이사야가 그분 앞에서 “나는 이제 망했다”(6,5)고 했던 바로 그 하느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닙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합니다(1,4; 5,19.24; 10,17.20; 12,6; 17,7; 29,19.23; 30,11.12.15; 31,1).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41,20; 43,14; 45,11; 47,4; 48,17; 49,7; 54,5; 55,5) 제3부에서도(60,14)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사야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간 이들이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이해하는 전통도 계속 이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사야서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그 세 부분을 하나로 묶어 주는 신학적 요소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전쟁들

 

이사야가 임금들에게 권고했던 것들 역시 이 거룩하신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잠시 그 시대의 두 전쟁을 돌아봅시다.

 

아하즈 시대,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유다로 쳐들어왔던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때에 아하즈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사야는 그에게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고 말하지만, 아하즈는 결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고 맙니다. 가까이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멀리 있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지하려는 것에 반대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자기들 뜻대로 유다에 새 임금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7,7).

 

어쨌든 실제로 아시리아는 아하즈의 요청에 응답하여 전쟁에 개입했고, 유다는 멸망을 피했지만, 이후로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시리아가 유다를 도운 것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겠지요. 곧이어 아람도, 이스라엘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더는 유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습니다. 지난달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 시대에는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합니다(36,1). 과거의 우방, 그런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히즈키야가 아하즈와 달리 하느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랍 사케가 히즈키야와 백성을 조롱해도, 그들의 신앙을 비웃어도 히즈키야는 오히려 하느님의 성전으로 올라가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도합니다(37,1). 하지만 히즈키야도 이사야의 비난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쳐들어올 때, 이집트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31,1)

 

이집트는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는 것입니다(37,36). 유다의 군사력이나 이집트의 군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시리아군을 물리치신 것이지요.

 

이사야의 외교 정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임금들의 입장에서 이사야는 참 대책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쳐들어올 때에는 아시리아에 의지하지 말라 하고, 아시리아가 쳐들어올 때는 이집트에 의지하지 말라 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말일까요?

 

거룩하신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아시리아의 도움도 청하지 말고, 이집트의 도움도 청하지 말라는 이사야에게 중요한 것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의지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세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흐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계획’, ‘결정’도 이사야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결정은 인간에 의하여 조작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여러 나라의 운명을 선고하십니다. 아시리아를 막대로 삼아 이스라엘을 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아시리아가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잊고 교만해졌을 때에 아시리아를 꺾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무조건 이스라엘의 편을 드시는 것도, 무조건 아시리아의 편을 드시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결정과 계획에 따라 나라들을 일으키고 또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니, 그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나라들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유다를 공격해 와도(시리아-에프라임 전쟁),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지키고자 하실 때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포위를 해도(산헤립의 침공), 주님의 천사는 하룻밤 사이에 그들을 물리칩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7,9)

 

그러나 이 ‘믿음’은 결코 작은 요구가 아닙니다. 적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어찌 임금이 살길을 도모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겠습니까? 이사야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내맡기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는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고 말합니다. 많은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청하고 힘을 길러도, 믿음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믿음은, 믿기만 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 자동적인 장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6장), 그에게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선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인간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이스라엘에 하느님은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정의와 공정이 아닌 피 흘림과 울부짖음을 열매 맺는 이스라엘에 하느님은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심판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치실 때에도, 멸망하게 하실 때에도 하느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멸망을 선포하라는 하느님께 “주님, 언제까지입니까?”(6,11)라고 물었던 이사야처럼,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이사야서 안에는 분명 구원의 약속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 제3부로 가면, 멸망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더 넓은 전망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배 전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는 주로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는, 심판과 전쟁과 멸망 속에서조차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말해 줍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이사야서 해설] “복역 기간이 끝나고”(40,2)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사야서 40장은 첫머리에서 “위로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40,1-2)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런데,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언제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사 40,2을 읽으면서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제2이사야’라는 인물과 그의 시대

 

여기가 이사야 예언서 제2부로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흔히 ‘제2이사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편의상’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참 곤란합니다. 40장부터 시작되는 이사야 예언서 제2부를 한 사람이 썼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40-55장을 보아도, 한 시기에 단번에 작성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저자를 가리켜 ‘제2이사야’라는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40-50장까지 본문에서 ‘제2이사야’라고 일컬어지는 이가 늘 같은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호칭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작성 연대, 시대적 배경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적 배경이, 39장에 이어지지 않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충 읽다 보면 감지하지 못할 수 있지만, 39,8과 40,1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복역 기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그 기간이 끝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40장부터 바로 귀환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40장을 읽기 전에 먼저 그 빈틈을 메워 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빌론 임금 므로닥 발아단이…”(39,1)

 

이야기는 39장부터 시작됩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1부의 마지막인 이 장면에서는, 히즈키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빌론 임금 므로닥 발아단이”(39,1) 사절단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히즈키야 시대, 아직은 아시리아가 세력을 떨치고 있고, 바빌론은 이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이 아닙니다. 그래도 바빌론에서 사절단이 왔을 때 히즈키야는 그들을 환영하며 자신의 창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는 그 말을 듣고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이 바빌론으로 옮겨지리라고 말합니다. 궁궐에 있는 모든 것을 바빌론에게 빼앗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창고를 보여 준 것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이 문제는 지난달의 주제와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즈키야는 자신의 재산을 과시하며 바빌론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능력이 있으니 나와 동맹을 맺는 것이 좋으리라고, 은근히 바빌론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사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아시리아와 이집트에게 의지하는 것을 단죄했던 이사야는 여기서도 히즈키야를 꾸짖습니다. 히즈키야가 인간적 세력인 바빌론에 의지하려 했으니 오히려 모든 것을 바빌론에게 빼앗기고 말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이사야 예언서 제1부와 제2부를 이어 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40장부터는 이사야 예언자가 쓴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사람들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 39장에서는, 먼 훗날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이사야가 예고합니다. 유다가 언젠가는 바빌론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될 것을,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을 마치 연속극의 예고편처럼 이 마지막 장면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역사는 이사야를 통하여 선포하신 하느님 말씀이 실현되는 역사입니다. 히즈키야는 멸망의 선포를 들으면서 겉으로는 “그대가 전한 주님의 말씀은 지당하오”라고 응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39,8). 과연, 히즈키야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직 바빌론이 유다를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른 다음에 기록된 이사야서의 뒷부분을 읽는 독자는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전했던 말씀이 역사에서 실현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복역 기간”(40,2)

 

이제 “복역 기간”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여기서 말하는 복역 기간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유배를 가서 지낸 기간입니다. 그 복역 기간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히즈키야가 남왕국 유다 임금으로 있던 때,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그 후 유다에는 아직 여러 임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열왕기를 읽어 보면, 매우 훌륭한 임금들과 전혀 그렇지 않은 임금들이 히즈키야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히즈키야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나쎄는 다윗 왕조에서 가장 나쁜 평가를 받는 임금입니다.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열왕기는, 므나쎄가 너무 잘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이제 유다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므나쎄와 다를 것이 없던 아몬이 짧은 기간 왕위에 있은 다음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개혁을 하고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며 주님께 충실하고자 노력했어도, 유다는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시야는 아시리아를 도우러 오던 이집트와 전쟁을 하던 중에 세상을 떠납니다. 40세였습니다. 아쉽게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왕위에 올랐다가 이집트에 끌려간 후 다른 임금들은 전체적으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왕국은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어느새 아시리아가 아닌 바빌론이 패권을 잡았고, 유다의 마지막 임금들은 그러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바빌론은 기원전 597년에 1차 유배로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고, 그 후에 치드키야가 바빌론에 저항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다시 침입하여 성전을 불태우고 더 많은 이를 끌고 갑니다. 다윗 왕조도 이 때에 무너집니다. 기원전 587년, 이것이 말하자면 “복역 기간”의 시작입니다. 이사야가 부름 받을 때에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6,11),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6,12)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내용이 이사야서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관심사는 복역 기간의 시작이 아니라 그 끝입니다.

 

“끝나고”(40,2)

 

바빌론에 유배 가 있는 이스라엘에게, 국면이 전환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기원전 8세기 이사야의 시대에 위세를 떨쳤던 아시리아도 기울어 기원전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가 무너졌듯이, 그 뒤를 이었던 바빌론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절정에 이른 다음에는 내려가는 것이지요.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이미 바빌론은 그 세력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기원전 562년 이후 바빌론은 자주 임금들이 바뀌는 등 불안정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555년 왕위에 오른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는, 기록에 따르면 종교적인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개인적 신심에 몰두했으며 국가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르둑이 아니라 달의 신인 신(Sin)을 섬겼기 때문에, 말하자면 바빌론의 기득권층이었던 마르둑의 사제들과 충돌했습니다.

 

그 사이 성장한 페르시아는 이제 바빌론을 공격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바빌론의 수도에까지 입성합니다. 그 때에, 나보니두스 임금을 지지하지 않던 마르둑의 사제들은 키루스를 승리자로 환영했습니다. 키루스는 전쟁으로 그 수도를 함락시킨 것이 아니라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도성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웠던 바빌론이 이렇게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유다인들에게 페르시아는 적군일까요, 아군일까요? 조금은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유다인들에게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해방자였습니다.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말하는 제2이사야는 그 해방의 시대가 밝아옴을 알아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2월호(통권 491호)]

 

 


 

 

[이사야서 해설] “위로하여라”(40,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지러운 세상, 미래 없이 살아가는 많은 이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무슨 말로 위로하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그 사람들이 들어는 주겠습니까?

 

“위로하여라”(40,1)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

 

이사야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1-39장이 대체로 유배 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위로’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 곧 40-55장은 ‘위로의 책’이라고 할 만큼 자주 하느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이렇게 ‘위로’를 말하게 된 데에는 물론 국제 정세의 변화가 큰 역할을 합니다. 바빌론은 페르시아 앞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배 간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압제자들이 멸망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조금씩 밝아 옵니다.

 

하느님께서 키루스에 대해 “그는 나의 목자”(44,28)라고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당신께서 오른 손을 붙잡아 주신 키루스에게 말씀하시니”(45,1)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페르시아 임금에게 이런 호칭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보입니다. 하지만 유배 중의 이스라엘이 키루스를 이렇게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바빌론과는 달랐습니다. 일단 종교적인 면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신봉하던 조로아스터교는 다른 종교에 관용적인 편이었습니다. 바빌론은 여러 민족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상들을 바빌론으로 가져갔지만, 키루스는 그 약탈물들을 돌려주었습니다. 신상들을 다시 자기 나라로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역대기와 에즈라기에 언급된 ‘키루스 칙령’은 이러한 관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키루스가 유다인들에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것이지요(2역대 36,22-23; 에즈 1,1-4).

 

키루스가 마음이 너그러운 인물이라 다른 민족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계산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행정적인 면에서,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제국을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통제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해 주고 각 민족의 제도와 종교를 존중해 주면서 페르시아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비용도 덜 들고 힘도 덜 들어 더 편안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정책 덕분에 바빌론에 정복당했던 여러 민족에게 키루스는 해방자였고, 유배중이던 이스라엘에게도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목자였습니다. 키루스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선포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40,3)

 

이렇게 상황이 바뀌어 갈 때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이미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윗 왕조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질 때, 이스라엘은 자신이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카 15장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가 목을 끌어안고 잔치를 준비하듯이, 하느님도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위로를 전하고자 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다정히”(40,2) - 자구적으로 번역하면 ‘예루살렘의 마음에’ - 건네시는 그 위로의 내용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의 결과였던(“죗값” 40,2) 50년의 유배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나 가고, 백성은 이제 유배지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기 위한 준비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40,3) 닦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이 그곳을 떠나 광야를 거쳐 약속된 땅으로 들어갔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끄셨던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다시 한 번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이끄실 것입니다. 거친 땅, 황폐한 땅에서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다 죽은 것 같은 이스라엘을 살려 내심으로써 모든 민족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떨치실 것입니다.

 

“외쳐라”(40,6)

 

이만하면 상당히 기쁜 소식 같지요.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예언자의 대답,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40,6)라는 말은, 도대체 이 상황에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느냐는 뜻입니다.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지친 백성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이 ‘심판’을 선고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듣기 싫어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모스가 심판을 선포할 때 아마츠야는 임금에게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아모 7,10)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선포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즉시 기뻐하며 환영하고 그 말씀을 믿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가 쉽습니까? 치유될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위로하기가 쉽습니까? 그 환자가 가난하기까지 하다면, 무슨 말로 그 가족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 취직 전부터 빚만 잔뜩 지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할 수 있습니까? 예언자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외쳐야” 할 것인지 하느님께 되묻습니다. 위로를 전하면, 그들은 들을까요? 그 위로의 말씀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40,8)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40,6). 세력을 떨쳤던 바빌론도,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이스라엘도 모두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보이는 하느님의 약속, 빈말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 그 말씀이야말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이 다가올 때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예레미야 자신도 그 말씀의 실현이 지체되자 믿음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첫 장에서 하느님은 “사실 나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예레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던 요시야 통치 십삼 년(예레 1,2), 곧 기원전 627년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하느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기원전 587년까지 사십 년 동안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그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제2이사야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이제 “복역 기간”(40,2)이 끝났다고,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백성은 위로의 말씀도 믿기 어려워할 것이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예언자에게도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다름없이, 그도 불신과 거부를 겪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히브 4,12).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해도 하느님은 당신 구원의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십니다.

 

심판을 선고하는 것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영원할 것이라고.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이사야서 해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42,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추리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호기심을 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직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소설 전체를 읽지는 않지요. 범인만 알려고 한다면 중간 부분은 건너뛰고 처음과 끝만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모습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범인을 찾지 못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

 

이사야 예언서 제2부(40-55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님의 종’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만을 품고 본문에 다가가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맙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 ‘주님의 종’의 노래들의 공통점은 종이 누구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본문들이 어떻게 ‘발견된’ 것인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파란색 소제목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등은 성경 원문에는 들어 있지 않지요. 그런데 40-55장에는 ‘종’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이십여 회 되지요. 그중 대부분 ‘종’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종이다”(44,21)라는 식입니다(41,8-9; 44,1-2; 45,4; 48,20 등).

 

‘종’이 이스라엘이 아닌 듯이 보이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지칭하기보다 한 개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종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어떤 사명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종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런 부분들을 지칭하여, 19세기 말에 독일 학자 둠(B. Duhm)이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노래들의 시작과 끝을 어디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다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성경》에서는 42,1-9을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49,1-7을 둘째 노래, 50,4-11을 셋째 노래, 52,13-53,12을 넷째 노래로 봅니다.

 

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집니다. 일단 네 노래에 나오는 종을 동일 인물로 단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네 노래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습니다. ‘종’을 이 예언서가 작성되던 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보기도 하고, 미래에 올 인물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인물은 임금이나 위대한 예언자 또는 메시아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각 노래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점은, 둠은 ‘종’이 이스라엘을 지칭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했지만, 이와 달리 이 노래들에 대해서도 종을 이스라엘로 보는 이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 정도 해 두고 이제 주님의 노래들을 하나씩 읽어봅시다. ‘종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님을 기억합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42,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42,1).

 

어떤 인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것으로 보여서 이 부분을 종의 임명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종이 누구인지는 바로 나오지 않으니 이 단락이 ‘종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그 종은 누구일까요?(나쁜 질문입니다) 여기서도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노래에서 종에 대해 사용된 표현들인 ‘붙들어 주다’와 ‘선택하다’는 바로 앞 장인 41장에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단어들입니다(41,8.10). 하느님께서 손을 붙잡아 주셨다는 것(42,6)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고대에 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에게도 이 종은 분명 이스라엘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42,1의 “나의 종”에 “야곱”을 덧붙였고 “내가 선택한 이”에는 “이스라엘”을 첨가했습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이 전통적으로 본문을 그렇게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42,1)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들에서 종은, 한 민족이라기보다 한 개인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말은 개인에게 더 잘 어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주신다는 것도(42,1) 주님께서 선택하신 판관이나 임금(사울, 다윗 등)과 예언자들에게 주로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특히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것은(42,1) 임금의 역할이고, 이 본문의 바로 앞 문맥을 생각하면 그 임금은 페르시아의 키루스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님께서 “해뜨는 곳”인 동쪽 페르시아에서 그를 지명하여 부르셨고, 그는 바빌론을 점령해 “북쪽에서” 일어납니다.

 

키루스는 여러 민족을 정복했습니다(“통치자들을 진흙처럼 짓밟으리라”: 41,25). 이전의 정복자들인 아시리아나 바빌론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정복된 민족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키루스는 다른 억압자들처럼 외치거나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42,2), 부러진 갈대, 꺼져 가는 심지 같은(42,3) 다른 민족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섬들”(42,4) 곧 여러 민족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바빌론에 유배 가 있던 이스라엘에도 귀향을 허락했기 때문에(“풀어 주기 위함이다”: 42,7), 이스라엘 백성에게 키루스는 정의를 펼치는 구원자와 같았습니다.

 

키루스 외에 다른 역사적 인물을 주님의 종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소수 의견으로는 모세, 즈루빠벨, 다리우스 등을 ‘종’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42,6)라는 구절에서 예레미야를 연상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종’이 이 본문을 쓴 예언자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의 종”(42,1)

 

다시 첫머리로 돌아갑니다. 42,1과 다른 모든 종의 노래들에서 ‘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벳’입니다. 70인역에서는 ‘에벳’을 그리스어 ‘파이스’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파이스’는 ‘종’만 아니라 ‘아이’,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어로 옮긴 이 구절(42,1)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 그 말씀을 인용합니다(마태 3,17; 마르 1,11).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거룩한 변모 장면에서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더욱이 마태 12,18-21에서는 42,1-4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온유한 메시아이심을 말해 줍니다. ‘부러진 갈대, 꺼져 가는 심지’(42,3)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죽어 가는 이들을 살리는 충실한 예언자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

 

이렇게 보면 여러 해석이 모두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입니다. 유다교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종의 노래들에서도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첫째 노래에서 종에게 적용된 표현들이 이사야서 다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에 사용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종’을 한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노래에 묘사된 종이 임금 또는 예언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는 이미 이 노래를 신약성경에서 인용해 예수님의 공생활을 해석했습니다.

 

아직 둘째, 셋째, 넷째 노래들이 남아 있으므로 결론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아직은 추리 소설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 볼 때가 아닙니다. “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잠깐 덮어 둡시다. 그러면 다른 많은 것이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을 선택하고 붙들어 주시며, 그 종은 꺼져 가는 심지를 되살려 가며 세상에 공정을 폅니다. 그렇다면 섬들(여러 민족)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종이 누구이든, 세상은 –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도 – 그런 종을 기다립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4월호(통권 493호)]

 

 


 

 

[이사야서 해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번에는 이사야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이 예언서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의 입장에서 종의 노래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시고 보내신다면 어떨까요? 나를 선택하시고 사람들에게 파견하시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내 삶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파견하실 때는 아직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이후에 겪을 일들을 다 안다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하느님께 다른 사람을 찾으시라고, 나는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라고 하고 싶지는 않을까요?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49,1)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42,1-9)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당신 종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며 조용히 세상에 공정을 펼치는 임무를 맡은 그 종을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셨음을 우리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섬들도” 그 종의 가르침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둘째 노래(49,1-7)에서는 종 자신이 먼 곳에 사는 민족들에게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49,1). 이 말을 들으면 바로 예레미야가 생각납니다(예레 1,5 참조). “빚어 만드셨다”(49,5)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에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아셨고 그를 당신 예언자로 택하셨습니다. 둘째 노래에서도 주님의 종은 예언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49,2) 만드셨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암시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 제2부를 읽고 있지만, 이 책의 첫 부분에서는(6장) 예언자가 부르심받을 때에,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술을 숯불로 정화하셨습니다. 지금 이 노래에 나오는 종은 어쩌면 제2이사야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49,3)

 

그런데 다른 구절에서는 갑자기 하느님이 그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49,3). 이 노래에서 사용되는 여러 표현이 이사야서의 다른 부분들에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41,8) 그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43,1). 하지만 종을 바로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종의 사명이 야곱 곧 이스라엘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9,5).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으니, 종은 이스라엘일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노래에 나오는 ‘종’이 이스라엘의 일부, 참된 이스라엘을 지칭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충실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는 “민족들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49,6).

 

이렇게 유보 조건을 둔다면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충실한 이스라엘이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그들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49,4)

 

종이 그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은 셋째와 넷째 노래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둘째 노래만 보아도 그 길이 평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헛수고만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힘을 다 썼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심한 멸시를 받는 이, 민족들에게 경멸을 받는 이, 지배자의 종이 된 이”(49,7)입니다. 분명, 종의 사명은 그런 길을 거쳐 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민족들의 빛이 되고 하느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위대한 대제국을 세워 온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줄 알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강하고 부유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아무 힘도 없는 민족이기에 그들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단락의 제목이 “기적적인 귀향과 복구”이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 회복을 통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49,3)라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들었던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세상의 모든 민족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예언자는 환영을 받기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없는 종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50,5)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50,4-11)에 이르면, 부르심을 받은 종이 그 사명을 수행한 결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를 더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2이사야 자신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셨다는 것은 아마도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 위로의 말씀을 선포한 제2이사야의 사명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40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들도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도 종은, 하느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전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40,6)라고 하느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부르시는데, 그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들처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50,4). 듣지 않고서는 그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 말씀을 전하러 가도 쳐다보지도 않을 이들에게 전할 말씀을 하느님께서 내 귀에 들려주십니다. 어떨까요? 사람들의 반응을 뻔히 예상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귀를 막은 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예언자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나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50,5). 내가 스스로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귀를 열어 주십니다. 그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부르심에 순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조차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모욕과 수모”(50,6)

 

그래도 종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욕과 수모”(50,6), “소송”(50,8)입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종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결국 죽임까지 당합니다.

 

예언자가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그와 반대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늘 좋아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내 말을 즐겨 듣는지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귀에 들려주신 말씀을 내가 그대로 전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를 의롭다 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50,8). 그러나 거부와 박해는 결코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부르심은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5월호(통권 494호)]

 

 


 

 

[이사야서 해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52,13)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3). 근래에 들어 여기저기에서 자주 인용되는 시편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이런저런 의문들이 떠오릅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데에 관심이 많은가?’ ‘이 시편 구절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저 구절을 적어 놓고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할까?’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52,13)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52,13)는 말로 시작합니다. 넷째 노래는 주님의 종의 노래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거운 본문입니다. 성금요일에 읽는 독서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노래가 “성공을 거두리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시편 1,3에 나오는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주님의 종이 하는 일이 과연 잘되고 있는 걸까요?

 

먼저 노래의 짜임을 잠깐 짚어 봅시다. 첫머리에 “나의 종”이라고 하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52,13-15). 하느님은 종이 겪었던 고통과 성공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우리”로 표현된 다른 사람들이 종을 바라보며 말합니다(53,1-10). 그들은 처음에는 종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종이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종의 미래를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53,11-12).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로 여겼다’(53,4)

 

이제부터는 본문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풀어 헤쳐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하느님은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52,13)고 말씀하십니다. 결과가 좋으리라는 뜻이겠지요. 적어도 끝에는 이야기가 잘 풀리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본문은 줄곧 종의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지금 주님의 종의 모습을 보니 그는 사람들이 질겁할 만큼 모습이 망가졌습니다(52,14). 그는 병에 걸렸고(53,4), 찔렸고, 으스러졌고, 상처를 입었고(53,5), 학대받고 천대받았고(53,7),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기까지 했습니다(53,8).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판결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악인들과 함께 묻혔습니다(53,9). 그러니 그를 보는 이들은 당연히 그를 사람들 앞에서나 하느님 앞에서나 죄인이라 여겼고, 그렇기에 그가 벌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욥이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고 병에 걸렸을 때 욥의 친구들은 분명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거라고, 하느님께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해야 한다고 고집하지요. 그것이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굳게 믿는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죄가 많아서 그런 일들을 당한 것이라고, 천벌을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53,4)로 여깁니다.

 

어떻습니까?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겪는 고통이 천벌이라고, 악한 짓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거라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 그의 삶이 “성공”으로 보입니까?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 같습니까?

 

“의로운 나의 종은”(53,11)

 

그러나 그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도 그가 폭행을 저지르거나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53,9). 하느님은 그를 “의로운 나의 종”(53,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데도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53,9)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53,12) 헤아려졌습니다. 전통적인 도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고통에 대하여 전대미문의 설명을 내놓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53,5)입니다.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기꺼이 당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53,7) 그가 벌을 받았기에 오히려 벌을 받아야 했을 우리는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받았기에 우리는 나았습니다(53,5).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구절,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의 가장 특징적인 구절은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라는 말씀입니다(53,11). 그는 “속죄 제물”(53,10)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무죄한 종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속(代贖)입니다. 고통받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죄를 갚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갚았습니다.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53,12).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53,1) 악인이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다른 사람, 아니,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더구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53,6)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왜 “그를 으스러뜨리고자”(53,10) 하셨는지, 그의 억울한 죽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것이 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가 “많은 이들을 의롭게”(53,11) 할 수 있었는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들어 보지 못한 것”(52,15)입니다.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저도 설명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먼저 다니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다니 12,3).

 

‘정의로 이끌다’는 53,11의 ‘의롭게 하다’와 같은 단어이고(같은 어근의 같은 변화형), 구약성경에서 이 두 본문에서만 사용됩니다. 다니엘서에서는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신앙을 지키며 순교함으로써 백성에게 정의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 이들에게서 주님의 종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예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읽다가 필리포스에게,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필리포스는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합니다(사도 8,32-35). 필리포스는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충만하게 실현되었다고 설명합니다(1베드 2,22-25도 참조). 그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 죽음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본문이 여러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52,14)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하지요. 종의 얼굴은 비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하게 실현됩니다. 그분께서 가장 완전하게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53,11)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53,10).

 

이것을 가리켜 이사야서는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죽임을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종의 “성공”이었습니다.

 

주님의 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다면, 그 성공은 수난과 죽음 후에 오는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구원될 때, 그것이 주님의 종의 성공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이사야서 해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이사 40,28)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천지를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지가 다른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질문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운 분들께는 처방약으로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면 이사야서 40장에서는 왜 하느님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40,28)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느님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는 몇 가지 중요하고 새로운 신학적 주제들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창조 교리는 주로 창세기와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지고, 다른 부분들에서는 단편적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아니기에 그만큼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부의 첫 장인 40장에서부터 이미 창조라는 주제가 되풀이되며 강조됩니다. 이 장에서 하느님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되었고 산과 언덕들을 천칭으로 달았던 분(12절), 하늘을 휘장처럼 펴신 분(22절), 별들을 창조하신 분(26절),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28절)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무슨 의미에서일까요? 지금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요나는 아주까리가 말라 버리자 하느님께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가 아주까리를 심어 키운 사람이었다면 훨씬 더 안타까워했겠지요. 더 나아가서, 왼쪽과 오른쪽을 가릴 줄 모르는 니네베의 수많은 사람을 만드시고 돌보신 하느님은 그들을 아낄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그분께는 그들 모두가 소중하고,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들을 잃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사야서를 읽는 이들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바빌론에 유배를 간 지도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곧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버려진 아이처럼, 아무도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40,27). 멀리 유배지에 가 있으니 더욱 외롭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말합니다. 하느님은 저 수많은 별을 만드셨고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래서 그 모두가 하느님께 소중하다고. 인간이 헤아릴 길 없는 무궁무진한 지혜로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이 먼 땅에 와 있는 너의 발걸음도 헤아리신다고. 그러니 그분을 믿고 힘을 내라고 합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것, 그것은 억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순간마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을 먹거나 말거나, 병이 들거나 말거나, 유배를 가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나에게 눈길을 고정하고 있는 분이 계심을 뜻합니다. 유배 끝무렵의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언자는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40,28)을 말합니다.

 

유일하신 하느님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유일신 사상과도 연관됩니다. 땅의 일부가 아니라 “땅 끝까지” 오직 그분이 창조하셨다면, 다른 신이 자리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것 역시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신학적 특징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처음부터 유일신 신앙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른 시기에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이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이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는 생각할 주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을 섬길지라도 이스라엘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하느님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특히 신명기에서).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라고 말했던 엘리야는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간 것으로 나타납니다. 좀 과감하게 말한다면, 많은 경우는 다른 신들이 존재해도 상관이 없었을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면 주님은 질투하셨겠지요. 그런데 바빌론 유배를 겪던 시기에, 엄밀한 의미의 유일신 신앙이 확립됩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44,6)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은 질투의 대상이라기보다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어떤 단락에서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서 일부는 잘라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그 나머지 토막으로 신을 만듭니다(44,15-16). 그러니 그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들은 고기 굽는 장작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신들은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안고 다니십니다(46,1-7). 우상이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 생명 없는 존재이고, 살아 계시며 역사에 개입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키루스를 부르신 하느님

 

그렇다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유배 온 이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지요.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선포되는 구원은 구체적으로는 키루스를 통해서 실현되고, 이사야서에서는 키루스에 대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 주님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이라고 말합니다(45,1).

 

매우 생소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방인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모세나 판관들처럼 당신 백성 가운데에서 그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 사람을 불러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페르시아 사람이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에게 살 길을 열어 줍니다.

 

만일 여러 신이 있어서 이스라엘에게는 주님이 있고 바빌론은 바빌론대로, 페르시아는 페르시아대로 그들의 신이 따로 있다면, 키루스를 불러 일으킨 이는 아마도 페르시아의 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빌론 사람들은 여러 신이 서로 경쟁하는 속에서 마르둑이 키루스를 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나보니두스가 마르둑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겼기에, 마르둑이 그를 불러 와 나보니두스를 멸망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키루스의 등장 역시 유일한 하느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선언합니다. “내가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니 그가 왔다. 나는 해 뜨는 곳에서 그를 지명하여 불렀다”(41,25). 키루스가 주님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를 당신 도구로 택하신 분은 그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신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창조 신앙과 유일신 신앙은 결국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시작된 때부터 모든 순간에, 그리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모든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하느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는 이 세상 어느 구석도 그 하느님의 통치를 벗어난 곳은 없다고 말합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지금도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돌보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43,1).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이사야서 해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이사 59,2)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한참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고, 지하수를 찾아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보에도 없던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빗방울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비를 주시라고 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나?’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했다는 뉴스가 생각났고, 바로 다른 대답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기후는 인간들이 망쳐 놓고 하느님을 탓하기는….’ 이것이 이사야 예언서 제3부가 작성되던 시기에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제3이사야와 그의 시대

 

제3이사야라는 한 사람의 예언자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 56-66장을 쓴 사람이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가 한 사람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56-66장을 모두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대개는 56-66장 가운데서도 60-62장이 더 먼저 작성되었고, 그 앞뒤에 다른 부분들이 덧붙여졌다고 보기 때문에, 저자가 한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쨌든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라는 예언자가 처음 시작했고, 유배 중에 편의상 제2이사야라고 일컬어지는 다른 예언자가 확장시킨 이 책을, 제3이사야가 다시 한 번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니 그 예언자의 고향이 어디이고 직업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노력은, 제2이사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시대와 장소를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저자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여러 가지 상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아직 성전 재건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유배에서 돌아온 기원전 538년부터 기원전 520년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으니, 그 시대의 상황은 성경의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

 

제2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했었습니다.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40,2), 그러니 바빌론을 떠나 나오라고(52,11) 재촉했습니다. 하느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분이시며(43,19),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이집트 탈출 때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43,18-19). 사람들은 오랜 유배 생활에 지쳐 구원의 약속을 믿기 어려워했고 그냥 바빌론 땅에 눌러앉으려고도 했지만, 적어도 예언자는 그들에게 힘을 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드디어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는 칙령을 반포했고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유배에서 돌아와 보니 상황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성전과 도성이 무너지고, 사회가 깨진 채로 50년이 지났으니, 유배를 갔던 이들도 남아 있던 이들도 모두 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까이서에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바로 성전을 짓지 못한 이유가 나오지요. 사람들이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하까 1,2)고 합니다. 가뭄과 기근이 이어졌고(하까 1,9-10) 백성은 자기 살기에 바빴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임금에게 낼 세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밭과 집과 포도원을 저당 잡히고, 그 빚을 갚지 못해 동족의 종이 됩니다(느헤 5,1-5). 도성을 재건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벽을 보수하다 보니 방해도 많고 일은 끝이 없어 사람들이 “짐꾼의 힘은 다해 가는데 잔해들은 많기만 하구나.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을 쌓지 못하리라”(느헤 4,4)고 탄식합니다. 지치고 기가 꺾였습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59,1)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던가요.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해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닌가? 주님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닌가?(59,1 참조)

 

‘손’은 그 자체로도 힘의 상징입니다. 특히 ‘강한 손’ 또는 ‘강한 손과 뻗은 팔’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칭하여 탈출기와(탈출 3,19; 6,1; 13,3 등) 신명기에서(신명 4,34; 5,15; 7,19 등)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손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끌어내신 강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손이 혹시 짧아서 이스라엘에게 와 닿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체험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이 그들을 파라오의 손에서(신명 7,8) 구해 내신 분이심을 잊은 듯합니다.

 

주님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탄원이 그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배 중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40,27)고 탄식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내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귀가 어둡기 때문이라고, 문제는 하느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런 생각들이 틀렸다고 선언합니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 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이사 59,1). 하느님은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의 처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문제는 다른 편에 있습니다. 하느님 편이 아니라 인간 편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 죄악이”(59,2)

 

예언자의 진단은 명백합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59,2).

 

이 죄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3-4절에서 열거될 것입니다. ‘손이 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폭력 때문이고(6-7절 참조), ‘입술로 말하는 속임수’는 이어지는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을 가리킵니다. 아시다시피 거짓 증언은, 십계명에 포함될 정도로(탈출 20,16) 중대한 문제였지요. 거짓 증언은 무죄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다니 13장, 수산나의 예). 재판에도 진실과 정의가 없고, 약자의 권리를 지켜 주어야 할 재판이 악을 저지르는 수단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러한 악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그 죄악은 “너희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59,2) 놓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갈라놓다’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단어이기도 하고(창세 1,4.6.7 등), 사제계 문헌에서 주로 사용되어 성(聖)과 속(俗)의 분리를 지칭합니다(레위 10,10 등). 성과 속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속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접하면 죽습니다(이사 6,5 참조). 거룩하신 하느님은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에게 머물러 계실 수 없으시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성전을 떠나가셨습니다(에제 10장). 하느님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내 성전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이스라엘 집안이 여기에서 저지르는 이 몹시도 역겨운 짓들이 보이느냐?”(에제 8,6)

 

이제 답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팔이 짧아서 또는 귀가 멀어서 이스라엘에게 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담을 쌓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얼굴을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59,2). 이것이 제3이사야가 ‘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묻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응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 제3부의 다른 본문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행한 자연 파괴로 비가 오지 않는다면, 비를 주시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이사야서 해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이사 56,3)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방인 문제,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요?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에서는 이방 여인들을 배척하지만, 요나서에서는 니네베인들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룻기에서는 배척받던 모압 여자가 하느님 백성으로 들어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생기면서 바오로 서간, 특히 로마서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 깊이 논합니다. 이방인들도 구원되는가?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원수였던 민족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좀 다른 각도에서 이방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입니다.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56,1)

 

먼저 이스라엘에게서 시작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56,1).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 나오는 하느님의 첫 말씀이며 이 부분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유배에서 돌아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구원이 지체되는 이유를 물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대답입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그분의 귀가 어두워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59,1 참조). 구원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바로 문 앞까지 와 있는데 이스라엘이 문을 막고 못 들어오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장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정의와 공정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사실 이사야서 1장부터 되풀이되던 주제입니다. ‘정의’와 ‘공정’ 두 단어를 굳이 구별해 본다면 ‘정의’는 ‘의로움’과 연관되고, 이사야서에서는 구원과도 연관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라는 측면 때문입니다. 한편 ‘공정’은 ‘재판, 심판, 법칙, 법’이라는 의미도 가진 단어입니다. 어쩌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보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함께 씀으로써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의와 공정’이 거의 매번 함께 쓰이는 것을 보면 이사야서의 신학적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되짚어 보면, 과거에 예루살렘은 충실한 도성이었고 “공정이 가득하고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는데”(1,21) 그 정의와 공정을 잃어버리고 ‘창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 이사야 예언서 제1부였습니다. 하느님은 “공정을 줄자로, 정의를 저울로” 삼아(28,17) 시온을 심판하고, 그 정의와 공정으로 예루살렘을 구원할 것입니다.

 

“시온은 공정으로 구원을 받고 그곳의 회개한 이들은 정의로 구원을 받으리라”(1,27). 이사야 예언서 제1부에서는 메시아 임금도 정의와 공정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9,6; 11,4).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 이르면 이미 그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아 정의와 공정으로 심판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도 역시 정의와 공정입니다. 먼저, 이사 56,1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실천해야 할 정의와 공정입니다. “행복하여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56,2)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 59,9.11에서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가리켜 ‘정의와 공정’이라는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폭력과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는 멀리 있고 또한 미치지 못합니다(59,9). 빛을 바라고 공정을 바라고 구원을 바라지만(59,11), 모두 그들에게서 멀리 있을 뿐입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은 실현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빛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의를 원한다고 하면서 불의 속에 머물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이 빛을, 정의를 누릴 수 있을까요? 제3이사야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기를 원한다면 인간 편에서 그 구원을 향해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정의와 공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56,3)

 

여기서 이방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되고 다른 민족들이라고 해서 모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되지 못한다면(65,8-16 참조), 이방인이라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56,3)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유다인의 핏줄이 아니면서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이지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특히 에즈라-느헤미야 시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해서 살고 있던 유다인들이 그 여인들을 쫓아내기까지 했지요. 이유는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보존하지 않는다면 다시 멸망하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왕국이 무너지고 유배를 갔다가 50년 만에 돌아왔으니, 한편으로는 약간 국수주의적으로까지 기우는 열성이 일어났던 것도 그들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서의 주인공 요나가 그러한 태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줄을 알았기에(요나 4,2),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을 피해 도망갔던 요나에게 하느님은,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들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사 56장에서도 하느님은 이방인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방인은 “주님께서는 나를 반드시 당신 백성에게서 떼어 버리시리라”(56,3) 하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떼어 버리지 않으십니다(느헤 13,3과 대조). 이스라엘인이면서도 전례에 참여할 수 없었던 고자도 마찬가지입니다(신명 23,2 참조). 그들은 후손이 없어도 성전에(56,5 참조) 기념비가 남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고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56,6) 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종이 됩니다.

 

주님의 종(들). 우리말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사야서에서 ‘종’과 ‘종들’은 각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는 “주님의 종”이 있습니다(‘주님의 종의 노래’ 참조). 그 종은 죽었습니다(53,8 참조).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그의 뒤를 이어 ‘종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54,17 참조). 이어서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는 여러 차례 “주님의 종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고, 구원될 이들이며, 주님의 종의 뒤를 잇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도 그런 주님의 종들이 됩니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다면, 또 주님을 따른다면, 그들은 하느님 백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모여 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56,7)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주님의 백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유다인이 아니어도, 주님을 섬기고 사랑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집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나를 당신 백성에게서 떼어 버리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를 배척하려 할지라도, 그 집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흩어 버리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들이는(56,8 참조) 분이십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56,7).

 

[성서와 함께, 2017년 9월호(통권 498호)]

 

 


 

 

[이사야서 해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58,5)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어느 해인가 대림 시기 동안, 공동체에서 몇 가지 약속을 정하고 특별히 노력을 하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도 시간에 늦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해 놓고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약속은 뭐하러 하는 거야!’ 한참 화를 내다 보니, 우리가 약속한 것이 또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화를 내지 않기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아…! 이사야서 58장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58,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라고 설교하는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 58장은 특히 단식을 주제로 합니다. 참된 단식, 이 주제는 예언서들에서 고전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그래 왔듯이,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공동체에서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분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식일과 단식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얻으려 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없기 때문에 제사를 바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는 그를 대신하는 단식과 같은 신심 행위들이 중요성을 띠게 되지요. 단식일이라는 날에는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구원은 이런 신심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정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온 땅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적어도 그 일부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58,3) 내가 이만큼 단식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하느님이 우리를 보아 주시고 우리의 처지를 알아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이기적인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58,2)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오지요? 이사 56-66장의 핵심 열쇠였습니다. 이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고 단식도 꼬박꼬박 하지만, 정말로 하느님이 바라는 정의와 공정은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 백성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든 구원을 받기 위해서든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있지만, 정의와 공정을 위한 노력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다음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이사 58,3).

 

단식을 하는데 하느님이 보아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을 하는 것은, 단식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중요한 행위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단식일을 만들고 있지만, 그 결과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3절의 질문이 나옵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에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이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갑자기, 도입 구절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 – 하느님의 고발이 – 쏟아져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이기심, 탐욕,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 있습니다(58,3-4).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일꾼들에게 가혹하게 일을 강요합니다.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동시에 단식을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형제들인 이웃을 괴롭힙니다.

 

5-7절에서는 단식과 함께 행하는 고행들에 대해서도 고발합니다. 무의미한 이런 행위들을 보시며 하느님은, 진정한 단식은 이웃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설명하는 6절에는 자유와 연관된 네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58,6)

 

여기서는 비유적인 표현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아주 정확히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슷한 단어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하나씩 그 의미를 파헤치기보다 전반적으로 조금 넓게 해석해도 될 듯합니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이 절 전체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감옥에서 석방시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본문은 감옥을 지칭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단어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슬, 결박, 멍에라는 표현은 감옥에 사람을 묶어 놓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는 불법적인 계약, 이자, 돈놀이 등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한다면, 저자(예언자)는 정치 · 경제 · 사회 · 종교적 온갖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배의 체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키루스의 칙령을 통해 바빌론의 유배에서 풀려난 후, 유다인들이 마치 바빌론인들이 했던 것과 같이 동족을 대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 종살이를 기억하며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 했듯이(신명 24,18 참조), 바빌론에서 겪은 체험은 다른 이들을 어떤 식으로도 억압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기에서 보듯이 당시의 실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돈놀이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돈놀이를 하고 있군요. … 우리는 이민족에게 팔려 간 유다인 동포들을 우리 힘이 닿는 대로 도로 사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동포들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도로 사 오라는 말입니까?”(느헤 5,7-8) 동족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하느님도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58,7)

 

이렇게 6절이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말했다면, 7절은 ‘굶주린 이들, 집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과 음식, 집, 옷을 나누는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7절의 마지막 구절,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그러한 요구들을 요약해 줍니다. 여기에서 “네 혈육”이라고 번역된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긴다면 ‘너의 살, 너 자신의 살’이 됩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친족을 지칭하여 사용되지만, 저자는 이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을 드러내 보입니다. 고통받는 이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그를 ‘내 살’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과 가난함을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을 나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저 사회문제에 관한 통계 자료처럼만 생각하는 것. 예언자는 이를 개탄합니다. 가난한 이웃의 고통은 바로 너의 고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웃은 ‘너의 살’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6-7절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을, 고행의 날에 실천해야 할 행위를 말해 줍니다. 그럼 단식은 하지 말까요? 글쎄요, 이것은 이사야서 58장에 던질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단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식적인 단식이 아니라 불의하게 억눌린 이들을 풀어 주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준다면, 하느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58,9).

 

이사야 예언서 제3부의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정의와 공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이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다를 것은 없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이사야서 해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60,1)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언젠가 한 학생이 박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주제는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 시편의 일부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교 사명이었습니다. 내용은,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기억은 안 납니다. 그런데 심사를 하시던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유배를 갔을 때, 바빌론 사람들이 개종을 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 질문이 핵심을 찌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의 선교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달에는 특히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 예루살렘이 다른 민족들을 향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다른 민족들에 대한 사명은 이사야 예언서 제2부,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노래에서는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49,3)라고 하니, 이 본문에서 종은 충실한 이스라엘이라고 해 둡시다.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 어떤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민족들이 쳐다볼 만한 업적을 이루어 열심히 빛을 발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종이 그렇게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자신이 쓸데없이 고생만 했다고 생각했고(49,4), 모욕과 수모를 당했으며(50,6), 죽임을 당해 묻히기까지 했습니다(53,8-9). 그런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그의 사명이 민족들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종이 열심히 선교 사업을 해서 바빌론 사람들을 개종시켰을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 머물면서 힌트가 없는지 되짚어 봅니다. 어쩌면, “나의 구원”(49,6)이라는 말이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종은 “심한 멸시를 받는 이, 민족들에게 경멸을 받는 이, 지배자들의 종이 된 이”(49,7)입니다. 그런데도 임금들이 일어서고 제후들이 엎드리는 것은 “신실한 주, 너를 선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때문”(49,7)입니다.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시기 때문에 임금들이 경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60,1)

 

이사야 예언서 제3부(56-66장) 중에서, 60-62장은 더 이른 시기에 형성된 부분이라고 봅니다. 여기서는 귀향 후의 예루살렘을 묘사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60장과 62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게, 앞서 주님의 종에게 했던 말과 유사한 말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60,1). 이 말을 듣는 예루살렘의 처지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의 상황과 같았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완전히 멸망했던 그 땅에, 유배 갔던 이들이 돌아옵니다. 구원의 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아니었습니다. 폐허, 빈곤, 분열, 침략을 비롯한 어려움은 계속 있었습니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다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고 도성을 쌓았다 해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페르시아에 맞서 일어날 만한 세력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어떻게 일어나서 다른 민족들을 비출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앞서 나왔던 “나의 구원”(49,6)과 비슷한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 올랐다”(60,1).

 

‘너의 빛’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는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은 예루살렘에게 ‘옵니다.’ 예루살렘은 그 빛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위에 떠오르는 그 빛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온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예루살렘 위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비칩니다(60,2). 어두운 무대 위에 많은 사람이 올라가 있을 때, 한 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 눈에 보이겠지요. 그것은 그 사람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이 그 사람만을 비추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 빛이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들고 세상의 모든 민족도 모여듭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60,9).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보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예루살렘을 비추시는 하느님입니다. 예루살렘은 해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달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춥니다. 예루살렘이 빛나는 것은 순전히 주님 덕분입니다(60,9).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60,19).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어”(62,7)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주님은 예루살렘에게 무엇을 해 주시는 것일까요? 62장에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때까지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62,1). 그리고 이 장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소박맞은 여인’,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은 ‘내 마음에 드는 여인, 혼인한 여인’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고(62,4), ‘그리워 찾는 도성’, ‘버림받지 않은 도성’이라 불리며 그 주민들은 ‘거룩한 백성, 주님의 구원을 받은 이들’이라 불리게 됩니다(62,12).

 

소박을 맞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유배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23)라는 말로 요약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은, 이스라엘의 불충실로 인하여 깨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예언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62,1), 다른 이들에게도 쉬지 말고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라고 말합니다(62,6).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62,7). 그리고 하느님은 그 예루살렘을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그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62,4). 이렇게 깨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일으켜 주실 때, 다른 민족들은 거기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봅니다.

 

답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열심히 말을 하면 그들이 들을까요? 바빌론이, 페르시아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까요?

 

이사야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해야 할 일은 업적을 세우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께 구원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60,16) 어떻게 증언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손에 구원됨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사명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주님의 종이 지녔던 역할과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자신은 멸망과 파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철저한 무력함 속에서 하느님께 구원되었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충실하심과 그분의 능력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을 세우시고

당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에 몸을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라.

 

오는 세대를 위하여 이것이 글로 쓰여

다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시편 102,17-19).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이사야서 해설]

“나의 제자들 앞에서 이 가르침을 봉인하리라”(8,16)

안소근 실비아 수녀

 

 

책을 왜 쓸까요? 읽으라고 씁니다. 개인적인 일기가 아니라면, 쓴 사람 혼자서만 간직해 두고 보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책을 쓴다는 것은 쓰는 사람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읽는 사람과 주고받는 행위입니다. 그럼 책을 왜 읽을까요? 그냥 지나간 시대, 지나간 일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책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하여라”(하바 2,2)

 

본래 예언자들은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서들에 행적이 전해지는 엘리야, 엘리사 같은 인물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가지고 있는 아모스 이후의 예언자들도, 그들 스스로 책을 쓴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책을 남겨 주려는 생각보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려 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어떤 상황에서,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드물게나마, 예언자들이 자신의 말을 기록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하바쿡이 대표적입니다. 예레미야서 36장에서,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가져와 내가 너에게 이른 말을 모두 적어라”(예레 36,2)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그 말을 받아 적게 합니다. 바룩이 전한 그 내용을 들은 이들은 여호야킴 임금에게까지 두루마리가 전해지게 하지만, 여호야킴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에 다시 그 내용을 적습니다(예레 36,32). 그는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곁에서 말을 듣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중에 그 두루마리를 읽을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바쿡서 2장에서는 하느님이 하바쿡에게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하바 2,2)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예언자에게 환시를 통하여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시는데, 그 약속이 지금 당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그 실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환시가 정해진 때를 기다리고 있기에, 그것이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예언자는 기다려야 하기에, 그 약속이 오고야 말 것이기에(하바 2,3), 하느님은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하바 2,2)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사람들은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었음을 판에 적힌 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래의 사람들을 위하여 지금 예언자가 받은 말씀을 보관해 둡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이 증언 문서를 묶고 나의 제자들 앞에서 이 가르침을 봉인하리라.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리라. 야곱 집안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신 분 나는 그분을 고대하리라”(8,16-17).

 

맥락은 비슷합니다. 이사야가 ‘제자들 앞에서’ 가르침을 적고 봉인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그 제자들이 아닌 다른 이들은 이사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그는 미래를 위한 ‘증언’으로 이 가르침을 적어 둡니다. 예레미야나 하바쿡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들이 언젠가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인을 하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오히려 그 말씀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그 말씀은 미래 세대를 위한 말씀이 됩니다. 지금은 열어 볼 수 없는 말씀이지만, 언젠가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에는 그가 선포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말씀을 간직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말씀은 미래 독자들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40,8)

 

이렇게 보존된 말씀을 다른 이들이 받아 읽습니다. 제2이사야, 제3이사야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말하자면 그들이 물려받은 두루마리를 펼쳐 본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40-55장)는, 하느님 말씀의 효력에 관한 말씀들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이사야서 40장은 전에 함께 읽었습니다. 예언자는 유배 중의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지만, 오랜 유배 생활로 희망을 잃은 이들은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들을 설득해야 할지 난처해하는 예언자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 55장에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55,11).

 

예언서를 후대에 확장시킨 이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으며 영원히 서 있다는 것과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봉인되었던 두루마리를 펼치고, 불탄 두루마리를 다시 쓰고, 판에 새겨 둔 글을 확인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예언자가 전했던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그들을 향해서도 선포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 두루마리를 자신들의 시대에서 다시 해석했습니다.

 

이사 1-39장에도 후대에 삽입된 장들이 있다는 점을 앞에서 보았지만(예를 들어 24-27장), 잠시 그 문제는 덮어 두겠습니다. 1-39장이라는 두루마리가 있었다고 할 때, 여기에 40-55장을 덧붙인 소위 제2이사야는 단순히 새로운 본문을 더 첨가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1-39장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의 예언자와 대화하며, 이사 1-55장이라는 하나의 책을 만들어 놓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선포했던 심판의 선고를, 이미 그 심판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다시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 심판이 구원 역사의 한 부분임을 더 분명하게 알아봅니다. 또한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제3이사야는, 이사 56-66장을 덧붙임으로써 다시 1-55장 전체를 해석합니다. 이제는 심판을 지나 회복을 향해 가고 있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사야서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이사야서에 세 부분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다시 이사야서를 하나의 책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저자가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편집 과정을 거친 이 본문들이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음에 주목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최종 편집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 최종 편집자는 하나의 관점에서 이 책 전체를 해석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이사야서는 ‘하나의 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예언자에서 시작해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첨가된 모든 부분이 그 최종 편집자와 대화하면서 하나의 책으로 엮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 이루어졌다”(루카 4,21)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구약의 경계를 넘어 신약에 이르면,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 가시어 첫 설교를 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루카 4,18).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은 당신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사야서를 해석하십니다. 그 책은 이 순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구원 약속의 실현을 위한 책이 됩니다.

 

저자가 쓴 책은 그 책을 읽고 해석하는 독자와 대화하고, 그 대화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우리에게 그 대화의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 준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를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사야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읽고 해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사야서의 의미가 온전히 밝혀집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2월호(통권 500호 감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