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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5.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뼈대 있는 집안 출신 예수님 : 예수님의 족보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뼈대 있는 집안 출신 예수님 : 예수님의 족보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내려가곤 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타계한 터라 할머니가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 마을에 함께 사는 삼촌과 고모와 사촌과 조카들이 많아서 적적할 틈이 없어 보였다. 마을에 박 씨만 사백여 호 모여 살았는데 고향에 내려가면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도시 아이를 구경하러 곳곳에서 친척이 몰려왔다. 아무튼 그중에서 종손 어르신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그분이 나타나면 모두들 쩔쩔매는 모습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종손 어르신이 자신의 뿌리라곤 도통 모르게 생긴 도시 아이를 계도할 요량으로 족보를 몸소 들고 왔다. 그 근엄한 모습에서 족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곤 족보의 인물들을 소개하는데, 우리 가문에는 영의정을 비롯한 고관대작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의 든든한 뿌리에 자부심을 느낄 즈음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6·25때 참전해 전사한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육군 대장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아버지가 어느 회사의 사장으로 떡하니 성함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태 아버지가 당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꼴이다. 스무 살 무렵 곧 진실을 알게 되었다. 6·25 전쟁 당시 우리 군대의 최고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고, 아버지는 5·16 쿠데타로 실직을 하고 작은 신문사 주필로 있었기에 온 가족이 사흘 건너 수제비와 열무김치만 먹던 처지였다. 그런데 육군 대장이 웬 말이며 쫓겨난 회사의 사장이 무슨 조화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진실일까?

 

당시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몇 십 년이 지나 더 ‘어른이 되고 나자’ 족보라는 것에 으레 과장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한 한 가문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허풍을 좀 칠 수 있고, 설혹 허풍이 들어 있다 한들 법적 제재도 받지 않으니 육군 대장이 못 나올 리 없었다. 뜬금없이 족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마태오 복음서가 족보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마태오 복음서를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예수님 역시 우리처럼 뿌리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게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예수님 족보에도 과장이 없진 않다.

 

마태 1,1-17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족보가 나온다. 민족의 조상이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물론 이사악, 야곱, 보아즈, 이사이, 다윗, 솔로몬, 히즈키야, 즈루빠벨, 엘야킴, 차독, 엘아자르 등 구약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모두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이 위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쯤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족보에 과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좀 냉정해지기 마련이다.

 

족보에서 주장하는 화려한 혈통은 예수님과 무관하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탄생했기에(마태 1,18) 화려한 혈통의 아버지 요셉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약점은 같은 예수님의 족보임에도 루카 복음서의 족보(루카 3,23-38)와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루카의 족보는 모친 마리아의 것이기에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두 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다윗, 이사이,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상이다.

 

예수님 족보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기라성 같은 인물을 총망라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인물은 다윗이다. 그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바 있는 메시아로 존경을 받았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 유다인들이 강력한 희망을 걸고 있었던 메시아의 출현, 곧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충족시킬 기린아로서 예수님을 간주했던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족보에서는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위인으로 예수님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발견된다. 어디 그뿐인가? 창녀 라합, 이방 여인으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룻,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 등은 하느님의 특별한 돌보심에 힘입어 그 어떤 역경도 이겨 낸 가문의 전통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보는 의미의 역사다

 

족보는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의미의 역사다. 따라서 족보의 사실 여부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하려는 시도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족보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에 나오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대해 마지않았던 ‘메시아’이므로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며, 여기에 요셉의 양자라는 사실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공백이 있는 혈통으로도 위대한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 또한 아브라함과 구약성경 인물들의 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태오보다 앞 세대의 바오로 같은 일부 반反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하찮게 여겨,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마태오의 눈에 이는 이스라엘 전통과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복음서 작가 마태오는 복음서를 쓰기로 작정했을 때 서두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집필 자료로 사용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사화라든가 부활 후 자세한 행적 등의 역사는 거두절미하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참역사가 시작된다고 보았다(마르 1,2-11). 이는 어딘가 한참 부족한 시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엄한 이스라엘 역사의 맥을 꿰뚫는 근사한 이야기로 예수님의 일생을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분은 여느 인간과 다르게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며, 동방의 위대한 점성가들이 찾아와 경배할 정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분이며,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헤로데 대왕마저 어린 예수님을 처치하지 못해 안달 냈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다(마태 1,18-2,23 참조). 그러니 예수님의 역사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것으로 해야 한다. 하느님의 돌보심은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시원하게 관통한다.

 

앞의 관점을 고려하면 복음서를 시작하기에 예수님의 족보처럼 적당한 도구는 없어 보인다. 세상을 품는 웅장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박 씨 족보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초라할 뿐이다. 혹시 모른다. 내가 죽고 나면 박씨 족보에 대학 총장, 아니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박00 박사쯤으로 출세를 시켜 줄지. 그리되면 20년 시간 강사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내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를 풀이하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든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 성취 인용문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지난 호에서 다룬 마태오 복음의 대표적인 특징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으로 설정한 데 있다.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복음서 작가 마태오가 이 박태식 신부주제를 집요하게 발전시켜 나간 것을 보면 이에 대해 든든한 확신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확신을 추적해 보자.

 

누군가 마태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까? ‘도대체 예수가 이스라엘 전통을 온전히 대변하는 분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바오로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 전통의 집산물인 율법이 예수님을 믿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는대요?’, ‘이스라엘 율법의 수호자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던가요?’ 그러면 마태오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5,17 참조). 제발 딴 소리 마세요! 바오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설정하는 대표적인 논리 중에 하나인 이른바 ‘성취 인용문’은 모두 15번 나온다(1,22-23; 2,5-6; 2,15; 2,17-18; 2,23; 3,3; 4,14-16; 8,17; 12,17-21; 13,14-15; 13,35; 21,4-5; 24,15; 26,56; 27,9-10). 그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게 주로 ‘예언자 ∼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는 말씀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22-23; 참조 이사 7,14).

 

이 구절에는 동정녀 탄생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저자의 뚜렷한 편집 의도가 있다. 세상을 구할 위대한 영웅이 태어나는데 어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과정을 밟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마태오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굳게 믿었고 구약성경에서 그에 적합한 구절을 찾기 원했을 것이다. 마침내 이사 7,14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뒷받침할 만한 예언을 발견하고 자신의 복음서에 싣는다. ‘성취 인용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마태오는 율법 학자?!

 

유다교 율법 교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필수 과목은 세 가지다. 첫째 구약성경(정확히는 율법과 예언서), 둘째 그 해석인 ‘조상의 전통, 셋째 수사학이다. ‘성취 인용문’이 15번이나 나온다는 것은 마태오가 율법 학자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변변한 책도 없이 기억력에 의존해 구약성경을 꿰고 있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구절을 기억해 내어 적절한 상황에 적용하고, 그것을 문학 양식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2)는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오 자신을 넌지시 암시한 것으로, 그가 율법 학자 출신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언행은 출애굽의 위대한 영웅인 모세의 재현처럼 보인다. 예수님 탄생 즈음에 아기들의 대학살이 있었고(2,16-18), 어린 예수님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갔다가 유다 땅으로 귀환한다(2,13-15.19-23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초월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면 종종 산에 오르시는데(5,1; 15,29; 17,1; 24,3; 28,16 참조), 이 역시 출애굽 시절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처럼 구약성경에서 ‘산’이란 계시의 장소였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총 다섯 개의 ‘설교 집성문’으로 만드는데 곧 산상 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비유 설교(13장), 교회 설교(18장), 심판 설교(24-25장)이다. 이 역시 구약성경의 ‘오경’을 본뜬 것이다. 이 정도면 마태오 복음은 철저히 구약성경에 근거해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족보와 ‘성취 인용문’은 마태오가 가장 정성을 들여 만든 편집 작업이라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마태 1,22-23으로 돌아가 보자.

 

동정녀 잉태 예언과 예수님의 탄생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동정녀 잉태로 세상에 오실 예언자를 예견했고, 마침 요셉과 동침하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으니(1,25) 앞뒤가 착착 들어맞는 설정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확실하게 성취된 셈이다. ‘하느님(엘)께서’ ‘우리와(아누)’ ‘함께(임)’라는 복합 이름 곧 ‘임마누엘’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일생을 함께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녀’라는 번역에 대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한글 성경에서 ‘처녀’ 또는 ‘동정녀’라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는 원래 ‘젊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알마’ 자체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적령기에 이른 ‘젊은 여인’으로, 잉태한 적이 없는 여인을 가리키는 ‘동정녀’와 직결되진 않는다.

 

사실 신약성경을 둘러싼 세계에도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신화가 많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의 장난에 따라 아비 없이 아기를 낳은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태어난 이들은 대체로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데 그중 헤라클레스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에게도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따라다니는데,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역시 동정녀에게서 낳았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고대 지중해권 세계에서 동정녀 탄생이란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표시로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뜻이다.

 

‘성취 인용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절이 아니라 복음서 작가의 편집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주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동정녀 탄생 신화를 언급했고, 성취 인용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오차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몹시 불편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가르침의 근거가 흔들리면서 겪는 일시적 혼란일 수도 있고 동정녀 탄생에 신앙의 생사를 걸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하느님의 역사를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 우주를 통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어찌 그리 쉽게 흔들릴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인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장을 써 주는 게 옳은지 물어보았다. 이스라엘에서 관행으로 자리 잡은 신명 24,1의 내용을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19,8). 이 규정은 모세의 가필이지 원래부터 율법에 있었던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예수님의 눈썰미가 여간 예리하지 않다. 편집 비평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를 큼직하게 재단하시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도 마태오의 의중을 신중하게 파악하시길 바란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 마태오 교회의 직제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이 말을 들은지 꽤 오래됐다. 50년은 훌쩍 넘었으려나? 아무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개념은 내 머릿속에 이 간단한 대구법문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마태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23,8-10). 참으로 속이 후련한 말씀이다. 모두가 형제자매니 서로를 스승이라고도, 아버지라고도, 선생이라고도 불러선 안 된다는 뜻 아닌가!

 

이 같은 마태오 복음의 ‘호칭론’에 따르면 당장 신부(神父)와 교리교사(敎理敎師)부터 걸리게끔 되어 있다. 거기다가 교부, 교회박사, 몬시뇰, 아빠스, 주교, 대주교, 교황 등등으로 확대하면 가톨릭교회는 가히 호칭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호칭들 하나하나가 공동체 내의 평등은 고사하고 계급의식을 적극 장려하진 않나 의심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주교 착좌식 때 휘황찬란한 조명이 드리워진 제단에 화려한 복장을 한 신임 주교를 요란한 의자에 앉혀 놓고서는 선배 주교가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로 교우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는 권면을 하는 것을 보면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한 마태오 교회의 직제

 

스승, 아버지, 선생 등 평등을 해치는 호칭을 없앴다면 마태오의 공동체에는 직제마저도 아예 없었다는 뜻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마태오는 자신을 하늘나라의 ‘율법 학자’(13,52; 23,34)로 인식했고 예언자(23,34), 또는 현인(소포스: 23,34)이라는 직분으로도 소개한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23,34).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 한 마태오의 사관(史觀)을 이유로, 학계에서는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너희 회당’(23,34)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인 공동체인 ‘회당(시나고게)’과 자신을 별개의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마태오 복음에 두 번 등장하는 ‘교회’(에클레시아: 16,18; 18,17)라는 용어는 이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태오 교회는 ‘예언자’, ‘현인’, ‘율법 학자’ 등의 직분을 유다교에서 그대로 빌려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교 ‘회당’과 구별해 자신을 ‘교회’라 불렀지만,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유다인이었다. 둘째,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유다교의 직제를 수용했다. 셋째, 그러나 유다교 식의 권위적인 계급의식까지 따라오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두 손, 두 발을 걷어붙이고 교회를 이끌 일꾼이 필요했으나 그가 교회 내에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기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평등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

 

마태오는 교회에 관심이 유난히 많았다. 교회에 관한 지침들을 모아 18장(교회 설교)에 집중적으로 담았고, 자신의 교회 직분이었을 법한 ‘율법 학자’, ‘현인’, ‘예언자’에 대해 언급(23,34)했고, 만에 하나라도 직분을 맡은 이들이 교만해질세라 그들을 단속하는 경고도 종종 언급한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마태오 복음에서 제시하는 ‘교회’란 옛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이다. 유다인이라는 민족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신앙적인 기준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구성된다는 뜻이다. 기존의 제도권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 일정한 직제와 그에 맞는 직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에게 직분이란 동료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믿음을 북돋우는 데 필요할 뿐이다. 곧 직제의 참뜻은 그 기능에 있지 권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는 교회 내의 누구라도 스승, 아버지, 선생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누구도 억눌리지 않는, 평등한 하느님의 백성. 그것이 바로 마태오 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의도였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그때부터 교회는 급속도로 제도화의 길을 걸었다. 거대 조직이 생겼고, 조직을 꾸려 나가기 위해 수많은 아버지(?)와 스승과 교회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직분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쩔 수 없이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님은 온갖 불의와 억압에서 우리를 구해 냈으며,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구별은 있으나 차별은 없는 곳, 하는 일은 각각 달라도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인과 죄인의 기준을 만들어 구원의 우선 순위를 정해 놓지 않은 곳. 역사의 예수님이 의도한 ‘평등’은 1세기 교회의 꿈이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가르침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교회를 두고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자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5,13-16 참조)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결코 실현되지 못할 이상적인 대안(代案) 사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의 원뜻을 이렇게 정의할 때 오늘날 교회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필자의 판단으로는 지극히 정상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말은 내려놓고 행동합시다 : 마태오 복음의 율법 이해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약 2천 년 전 그리스-로마 시대의 수사학 중에 ‘파라디그마’라는 것이 있었다. 수사학이라는 게 원래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생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 다양한 방법론이 필요했으며, 당시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져야 했다. 파라디그마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 가족만큼 가까운 관계가 없다’는 말을 누군가 했다고 하자. 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그에 맞는 상황을 설정해 주어야 한다. 일례로 아버지가 간암 말기에 놓여 분초를 다툴 때, 군 복무 중인 아들이 기꺼이 자기 간 2/3를 병든 아버지에게 내준다. 물론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이식 수술 성공률이 99%라고 하니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의 멀쩡한 간을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효자가 많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에선 종종 이런 효행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리곤 하는데 역시 ‘세상에서 가족만큼 가까운 관계가 없다’가 맞는 말이다.

 

이처럼 말에 상황이 더해져 하나의 논리가 성립되면 이를 두고 파라디그마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지점은 ‘말’이 아니라 ‘상황’이다. 아무리 가족 관계가 중요하더라도 그에 적절한 상황이 제시되지 않으면 말의 효력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무리 입을 나불거려도 행동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모두 부질없는 것이다.

 

말씀의 메시아, 행동의 메시아

 

마태오 복음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가깝게 묶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모아서 산상설교(5-7장)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다. 아마 복음서 작가 마태오가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남다른 취향을 갖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나이가 지긋해지다 보니 말씀을 산발적으로 늘어놓는 게 영 눈에 거슬렸을 수도 있다. 마태오는 자신의 정리 습관을 다시 한번 발휘해, 산상설교에 바로 이어 예수님의 열 가지 기적 이야기를 묶어 놓은 편집 작업을 했다(8,1-9,34). 이는 예수님이 비단 말씀에 그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예로부터 기다려 왔던 분,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분의 메시아적 행동으로 확인되었음을 뜻한다. 저명한 성서학자 슈니빈트(J. Schniewind)는 예수님을 ‘말씀의 메시아이자 행동의 메시아’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셨을 때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 점이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4-15).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 저 멀리서부터 세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단박에 알아봤다. 그리고 자신과 상대도 안 되는 높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을 설득하여 세례를 베풀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행동으로 완성하셨다. 사실 마태오 복음서가 쓰인 기원후 80-90년경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인자(人子)로서 그 입지가 누구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따라서 이미 지나간 추억의 인물인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몹시 꺼림칙했을 터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최고 신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세례를 받으셨다. 아니,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도록 허락하셨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극도의 겸손을 통해, 예수님이 결코 말씀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모아서 이른바 ‘대립명제’(5,21-48)라는 문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대립명제의 서론으로 5,17-20을 배치했는데 그중 20절을 옮겨 보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로 나와 있다. 이는 시사해 주는 바가 무척 크다. 율법의 기본 논리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율법 규정이 비록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절망감을 안겨 주지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빛이 나기 마련이다. 대립명제의 서문에 ‘의로움’이라는 낱말을 사용해 예수님 사상의 일관성을 찾으려 한 작업은 복음서 작가 마태오의 큰 업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마태오는 율법의 가치를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예수님이 율법 질서를 수호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율법 자체가 그른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오 복음에는 무려 일곱 번에 걸쳐 이 위선자들을 저주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23장).

 

율법의 핵심은 ‘행동’

 

우리는 흔히 언행일치를 강조한다. 이 사자성어의 기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주의하라는 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마태오 공동체도 예외는 아니었을 테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공동체의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자들이기에 공동체가 지녀야 할 자세의 모범도 예수님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율법의 정신이 환히 밝혀진 셈이다.

 

율법의 핵심은 행동에 있다.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말로는 부족하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18,21-22). 율법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한 바오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한 것이다.

 

수사학 용어인 그리스어 ‘파라디그마’(paradigma)에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패러다임’이 유래했다. 그러니까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강조할 때는 말이 아니라 실제 상황, 다시 말해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몇백 번 강조한들 모든 건물 입구에 휠체어가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 설치를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법을 만들 때는 당연히 경사각도와 길이와 너비를 꼼꼼하게 규정해 놓아야 실제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장애인이 숨 좀 쉬는 나라가 될까? 과연 우리는 언제쯤 예수님이 알려 준 지혜를 깨달을 수 있을까?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행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존재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마태오 복음은 행동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겨 마땅하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라는 말씀이 산상설교의 결론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불어 다음 구절 역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7,24). 행동을 통해 더 큰 차원의 진리를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낯선 이와 처음 만날 기회가 생기면 사전 조사를 해두는 일이 잦아졌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면 대화가 한결 부드러워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여성이자 미국 성공회 여덟 개 관구장 모임의 의장주교이며 과거에 오징어와 문어를 연구했던 해양생물학자. 이는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Katharine Jefferts Schori, 1954-: 성공회에는 여성 사제는 물론 여성 주교도 있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간단한 정보다.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쇼리 주교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처음엔 다소 어색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가진 그에 대한 정보들이 선입견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에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쇼리 주교는 해양생물학자의 모습도 아니었고 남성/여성이라는 성性 구별에 초연했으며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세계 성공회의 역사와 전통을 폭넓게 보는 대범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의장주교로서 자신의 역할에 전념했던 것이다. 미국 성공회 전체를 대표하는 주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얄팍한 선입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행동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천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행동이 단지 당신 말씀에 효력을 가져오기 위한 기능적 역할에 머무른다고 하면, 이는 분명 지나친 과소평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른바 ‘구원 선포’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대목은 마태오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전승으로 물려받은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만 나오는 낱말이 6개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쉼, 안식’(아나파우시스)이라는 주제가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예레 6,16)는 구절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이 대목이 마태오 이전에 형성된 전승임을 알려 주는 증거다. 즉, 예수님 자신에게 이 말씀이 소급될 수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마태오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이곳에 배치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이 대목이 필요했을까?

 

이 말씀을 둘러싼 상황은 바리사이가 강조하는 율법 규정의 무게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변두리 사람들의 고통이었다. 예수님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그들에게 ‘쉼’을 약속하신다. 이렇게 자신의 짐을 예수님에게 맡겨 놓고 쉬라는 가르침은 구원의 현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저 예수님에게 삶의 온갖 걱정거리를 넘겨 드리기만 하면, 나는 그간 짊어졌던 고통에서 자유로워져 안식을 맛보게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강조되어야 할 전제 사항은 바로 예수님이, 언행일치의 화신化身으로서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선포한 윤리적 자세의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을 준다. 비록 내가 사막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으니 이는 주님의 지팡이가 나를 지켜 주기 때문이며, 주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어둠을 비춰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있으면 좋은 수가 생긴다. 틀림이 없다.

 

정체성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부터 온다예수님은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라고 이르셨다. 이 말씀이 우리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인도한다. 말에 맞는 행동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바꾸어 보자. 학생증만 있다고 학생인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학생이지! 목에 로만 칼라만 두르면 다 사제인가? 사목을 제대로 해야 사제이지! 마찬가지로 행동하지 않는 바리사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더는 지킬 수 없다.

 

바오로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교회를 세워 준 바오로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서 추천장을 받아온, 겉만 번지르르한 사도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2코린 3,1). 바오로는 그런 코린토 교회에 일침을 가한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1코린 9,2). 진정한 사도는 실무에서 판가름이 난다. 코린토 교회의 실제 개척자인 바오로는 권위형 사도가 아니라 실무형 사도이다.

 

주체 이론의 대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정체성을 ‘수행’과 연결한 바 있다. 그녀는 ‘사람이란 되는(is) 것이 아니라 행하는(do)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앞에 언급한 쇼리 주교가 그 좋은 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1906-1945)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가능성 속에 떠 있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과감하게 붙잡아라. 사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행동에서만 자유가 있다. 초조한 조바심에서 벗어나 역사의 폭풍 안으로 들어가라. 오직 하느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에만 의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법이다. 이쯤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우리 구미에 맞게 슬쩍 바꿔 보자.

 

‘나는 행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하느님과 상대하시오 : 엄격한 윤리 기준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몇 년 전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환경미화원이 정류장에 설치된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그 내용물을 모두 땅에 쏟고 말았다. 순간 한숨을 쉬며 난감해하던 그분은 다시 흩어진 쓰레기들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승객 대부분이 흩어진 쓰레기들을 피해 가며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어느 중년남이 나서서 쓰레기를 같이 줍기 시작했다. 담배꽁초, 가래침 묻은 휴지 등 보기에도 더러운 것들을 맨손으로 부지런히 집어 옮기니 금세 정류장이 깨끗해졌고 환경미화원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표표히 사라졌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요구하셨다.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 ‘산상설교’에 그 답이 있다. 어떤 말씀이든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즐겼던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설교’(5-7장)에서 예수님이 알려 주신 윤리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전체 주제를 ‘하느님 나라의 윤리’라 부른다. ‘산상설교’에는 실로 많은 가르침이 나온다. 행복 선언부터 교회의 역할, 대립명제, 자선, 단식, 기도, 주님의 기도, 재물, 그리고 황금률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쪽같은 내용이다. 그중에서 ‘하느님 나라의 윤리’가 갖는 성격을 잘 밝혀 놓은 곳은 ‘대립명제’(5,21-48)이다.

 

어떤 중년남이 있었다. 그는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씻고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소파로 간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이리저리 작동하다 먼저 뉴스를 선택한다. 뉴스가 끝나면 다시 채널을 돌리다 자칭 정치평론가들의 험담이 오가는 종편에 잠시 머무른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쇼 프로그램으로 이동해서 소녀시대가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무려 다리가 16개나 등장해 현란하게 움직여 대니 눈을 뗄 도리가 없다. 매일 그런 식으로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이상하게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젊은 여성이 지나가면, 어디서든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 여성의 다리에 눈이 가는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7-30).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이르신’ 그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조차 자유자재로 재해석할 수 있는 전권(全權)을 가진 분이라는 엄청난 자의식이 돋보인다. 그러더니 덧붙이는 말씀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면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란다. ‘음욕을 품고 바라본다’는 표

 

현만 보면 추악한 속셈을 가진 눈길이 떠오르지만, 그리스어 성경 원문에 나오는 동사 ‘에피튜메오’는 그저 호기심 어린 눈길을 의미한다. 어느 여성에게 ‘몸매가 좋으시네’, 혹은 요즘 식으로 말해 ‘착한 몸매네’라는 눈길을 던지는 정도다.

 

예수님 말씀을 처음 들은 이들은 필시 이해가 불가능했을 터다. 가벼운 눈길 한 번이 범죄에 해당하는 ‘간음’으로 간주된다면 난감한 노릇 아닌가. 사람들의 당황한 눈빛을 의식해서인지, 예수님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다. 오른 눈이 죄를 지으면 차라리 그 눈을 빼어 던지라고 한다. 이해를 돕는 게 아니라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예다. 소녀시대를 보고 ‘참으로 체격 조건이 남다른 처자들이구먼’이라는 생각만 해도 눈알을 빼라는 뜻 아닌가? 이를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가톨릭 남성 교우 중 과연 몇 분이나 성한 눈을 갖고 있을지 걱정된다. 여성 근처라도 가면 죄를 지을까 봐 어머니마저 멀리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신부님이라면 모를까. 상황이 이 정도라면, 예수님의 윤리를 가히 ‘극단적’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 인간의 나약함을 무시하셨을 리는 없다. 이런 때는 별수 없이 말씀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두 번째 중년남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내가 비록 TV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언젠가는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 성을 상품화하는 언론이 문제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또 하나 올라오는 생각은, ‘설혹 내 눈길이 지나가는 여성의 다리에 머물며 잠시 못된 생각을 했기로서니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까지 어찌 알랴. 아마 신부님 중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걸?’ 하지만 그의 판단은 틀렸다. 사람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로 된 율법을 넘어서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제부터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상대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관찰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돈 십억 엔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존심을 팔아 놓고는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떠벌린다. 그러더니 겁이 났는지 정작 협정을 맺은 외무부 장관이 아니라 차관을 보내 할머니들을 위로했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어른들의 잘못으로 수많은 어린 생명이 억울하게 수장당했고, 몇 명은 아직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때라며 서둘러 덮으려고만 한다. 아직도 물속에 있을 어린 생명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 사람들의 눈을 빼고 손을 자르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하느님과 직접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변명이나 어떤 자기 합리화도 하느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행동은 계명 이전의 것이다. 간음을 하려면 먼저 눈에 음욕이 담겨야 하고, 음욕이 눈에 담기려면 추악한 흑심이 발동해야 하고, 흑심이 발동하려면 마음에서 잠시 하느님을 제쳐 두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요구받지 않고 법적인 제재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발 벗고 환경미화원을 도운 첫 번째 중년남은 하느님과 직접 상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좋은 선택을 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의로움의 길을 걸으시오 : 의로움을 내 것으로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어느 판사가 한 사건의 판결을 맡았다고 해 보자. 재벌 2세가 재판정에 섰는데, 아들을 좋은 학군에 보내려 위장전입을 했고 주식을 불법으로 증여했으며 군대에 안 보내려고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재벌 2세도 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해졌다. 판사 자신도 위장전입을 한 경력이 있고 조상이 물려준 땅을 아들 이름으로 슬쩍 바꾸었으며 군대를 면제받기 위해 병을 만든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판사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다른 가능성을 상정해 보자. 여기 모든 죄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재판관이 있다. 그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고, 없는 사람 편에 서서 과부와 고아를 귀하게 여기며, 아들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희생시켜 온 누리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 글자 그대로 ‘의로운 재판관’인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의로움’(체데크)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속성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인간에게 ‘의인’이라는 표현을 적용할 때도 일반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부적으로, 우선 법적 차원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창세 20,4; 신명 25,1; 1열왕 10,9; 이사 5,23 참조), 율법에 보면 “거짓 고소를 멀리해야 한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탈출 23,7)고 한다. 다음으로 의인은 ‘언제나 의를 행하고 흠 없는 사람’을 뜻한다(2사무 4,11; 1열왕 2,32; 욥 12,4; 17,9 참조). 아브라함은 소돔의 파멸을 앞두고 하느님께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라며 자비를 구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경우는 하느님을 완벽하게 의로운 재판관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마태오 복음에도 ‘의로움’(히브리어 ‘체데크’의 헬라어 번역 ‘디카이오쉬네’)이라는 명사가 모두 일곱 번 나온다(3,15; 5,6.10.20; 6,1.33; 21,32). 이들 중 다섯 번이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다루는 산상 설교에 나온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 중 눈에 띄는 구절을 하나 선택해 보자.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마태오는 의로움이 구약성경으로부터 내려오는 개념이며 하느님의 속성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다교 지도자들이 의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법적 차원에서 의인이란 원래 ‘법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나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의인’이란 용어를 법적인 의미보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했고, 회당에서는 의인을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자칭 의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의로움의 내적 자질을 외면한 채 오직 외적 성과에만 매달렸다. 그들의 행동은 선행으로 보이게끔 잘 포장되어 있지만 진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다(23,23 참조). 그들의 말은 청산유수라 누구라도 현혹될 만하지만 언제나 말에서 그치고 말았다(23,3 참조). 말과 행동, 이 모든 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인 하느님의 의로움은 만족시키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은 당연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 ‘의인’이란 본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을 뜻하지 않는가. 이제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23,23.25.27…) 하시는 예수님의 호통에 수긍이 가고,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9,1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

 

마태오가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모든 의로움을 이룸’(3,15), ‘의로움에 굶주린 이’(5,6),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5,10), ‘너희의 의로움’(5,20), ‘너희의 의로움을 가장하지 마라’(6,1), ‘하느님의 의로움’(6,33), ‘의로움의 길로’(21,32) 등, 대부분 인간이 가져야 할 의로움을 가리킨다. 우리의 의로움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의로움을 구현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의 의화(義化) 가르침과 확연히 구분된다.

 

적극적으로 걸어가야 할 의로움의 길

 

바오로 역시 마태오처럼 하느님 한 분만 의롭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놓여 있으니, 죄는 인간에게 숙명이기 때문이다(로마 5,12-19).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력으로 옮아가려면 무엇인가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속량 사건인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가능하고,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로마 3,21-26).

 

마태 5,20은 대립명제의 서문 역할을 하고 그 결론은 5,48에 나온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하느님의 완전함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좇아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수동적인 선언을 받기보다는(義化) 하느님이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어야 하니, 적극적으로 ‘의로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재벌 2세를 봐주었던 판사가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자네 그때 왜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았나?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아예 하지 말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네.” 그 판사님, 적당한 변명거리를 서둘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하느님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의로움과 사랑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이달에는 마태오 복음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를 하나 풀어보려 한다. 마태오 복음의 전반적인 기조가 이스라엘 전통과의 연속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이제까지 수차례 강조했다. 물론 이는 사제들이 장악한 제사 중심의 제도권 유다교나 율법 해석으로 정평이 난 라삐 중심의 유다교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전통’이다. 다시 말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기성 유다교와 구별되면서도 여전히 유구한 이스라엘 전통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이중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 대신 믿음’이라는 논리로 기성 유다교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마태오의 경우, 바오로처럼 분명한 선을 긋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마태오 자신도 유다인이었을 뿐 아니라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의 대부분이 유다인이었던 까닭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안식일이면 회당을 찾았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갔던 유다인이었다.

 

하나의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오는 율법 자체는 좋으나 율법이 운용되면서 의인/죄인의 차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태오는 율법을 무기 삼아 백성을 억압하는 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했고 그 책임을 묻는 심판 설교(23,1-25,46)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심하게 비판한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말이다. 그렇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고 나니 속은 시원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다음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36-40).

 

파스카 축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께 한 율법 교사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데 묶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제시하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이르신다. 당시는 경전의 범위를 ‘율법과 예언서’로 한정했기에 그리 대답하신 것이다.

 

여기서 “둘째도 이와 같다”가 특히 중요하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에는 없는, 여성형 인칭대명사 ‘아우테’(αυτη)를 첨가함으로써 두 계명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계명이라는 뜻이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믿음직한 보완 설명이 25,31-40에 나온다.

 

어느 의인이 종말의 날에 임금의 오른편에 서게 된다. 임금은 그에게 나라를 상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반문한다. 임금은 그때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느님이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한 일이 바로 하느님에게 한 일이라면 결국 그 형제가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니 그를 하느님 대하듯 하라는 것이다. 물론 ‘작은 형제’라고 해서 예수님이 반드시 ‘못난이’를 거론했다고 보면 곤란하다. 오히려 못난이로 대변되는 모든 인간이라 해야 비유의 제맛이 살아날 것이다.

 

지난 6월호에 환경미화원을 도운 중년 남자 이야기를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 중년남의 이름이 박태식이었다지 아마? 아무튼 이웃에게 베푼 호의가 바로 하느님께 베푼 호의이고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임이 ‘최후의 심판’ 비유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점을 놓치지 않았고 간단한 편집 작업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람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다.

 

우리들의 잘못된 기대와 어리석은 희망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 섬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웅장한 성전을 세우면 하느님이 매우 기뻐하시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율법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따르면 하느님이 만족해하시리라 믿었고, 절기마다 양과 염소를 바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행위가 된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부활하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공로를 크게 보상해 주시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호통은 서릿발 같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23,33)

 

우리도 비슷하다. 최고의 건축가에게 성당 건축을 맡겨 ‘올해의 건축상’을 받으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여기고, 가톨릭 신자 수가 5백만이 넘고 교무금이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하느님이 쾌재를 부르실 것으로 기대하고, 오만 명이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동양 최대의 성당을 백 년 계획으로 세우면 하느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리라는 희망으로 모금에 열을 올린다. 그러면 하느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됐네, 이 곰 같은 사람들아, 이웃이나 제대로 챙기시게!’ 전 우주를 관할하시는 하느님 앞에 동양 최대 성당이 도대체 무슨 유치한 발상인가?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

 

의로움은 엄격하지만 사랑은 부드러워 언뜻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짝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대조 개념이 아니라 동일 개념이다.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면 그것으로 의로우신 하느님은 만족하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게 열심을 쏟으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완성하는 길에 이른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섬기기에 골몰하느라 사람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

 

‘이웃 사랑’은 사람도 살고 하느님도 사는 유일한 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윈-윈(win-win) 전략인 셈이다. 이웃 사랑을 원수 사랑이라는 극적인 형태로 강조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역시 대립명제에 나오는 말씀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5,44-45).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좋은 몫을 택한 제자들 : 제자상의 재발견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나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 독일에서 학위를 받을 때까지, 제도권과 비제도권 교육에서, 그리고 갖가지 사회 경험에서 많은 분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 모든 교육을 통해 과거의 내가 있었고, 오늘의 내가 있고, 내일의 내가 있을 것이다. 아마 누구나 동감하는 교육 경험일 터다. 많은 스승 중에는 나의 성장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분도, 극히 미미해서 거의 생각조차 나지 않는 분도, 악연처럼 기억되는 분도 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니 반면교사(反面敎師)니 하는 말이 있으니 나쁜 스승도 스승이라 불러 마땅할까?

 

내 경험에 따르면 나쁜 스승이란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요령의 대가(大家)로, 학생과 인격적인 만남을 중시하지 않는다. 요즘 주목받는 인터넷 강의 강사들이 대표적인 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나 교육철학은 사치에 불과하다. 그저 입시교육에 맞선 순발력만 발달했을 뿐이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 중에도 그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23,4)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이 전적으로 입신양명과 생계 수단이 되면 율법 학자 꼴이 나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에는 이상적인 사제 관계도 자주 발견된다. 마태오 복음의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머물지 않았다. 마태오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역사의 예수님에게 소급시켜 그분과 고락을 같이했던 제자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그 증거가 12,49-50에 나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가족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디 집필 자료로 사용한 마르 3,34-35에는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군중)을 둘러보시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는 마태오가 마르코 복음의 ‘군중’(오클로스)을 ‘제자’(마테테스)로 바꾸어 제자들의 위상을 눈에 띄게 한 편집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으로서 제자들은, 첫째로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 머물며 그분이 드러내는 계시의 증인 역할을 담당하고(8,18.23; 14,22.26),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차적으로 접하는 청중이었다(5,1; 13,36-53). 둘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추종한 이유는 기적 능력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메시아적인 요구에 응답한 것이다(10,37-39.40-42; 19,27-30). 즉 맹목적인 군중과는 달리 확고한 의지와 소명감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만 모아 따로 비유의 진정한 뜻을 설명하고(13,10.36-50),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셨다(8,23-27; 14,22-33).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올바로 이해했다는 표현을 종종 한다(13,51; 14,33).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군중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담당한다. 음식 기적(14,13-21; 15,32-39)에서 제자들은 군중의 허기와 열악한 형편을 예수님에게 전달하고 예수님이 강복한 음식물을 군중에게 날라다준다(14,15.17.19; 15,36). 그런가 하면 10,1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군중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이 네 가지 점을 근거로 마태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근거리에 있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이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그에 비해 마르코 복음의 제자들은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종종 등장한다(마르 4,13; 6,52; 7,18; 8,14-21 등등). 그러나 워낙 배운 것 없는 어부나 세리 등의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그런대로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스승은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14,34) 밤새워 기도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14,32-42), 자신의 안전을 위해 스승을 부인하고(15,66-72),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자 일시에 줄행랑을 놓은 것을 보면, 아무리 무식한 제자들이지만 솔직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마태오 복음의 제자들은 혈연을 넘어선 진정한 가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마르코 복음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인물들로 그려진 것에 비하면 제자들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셈이다. 아니면 제자상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십 년 전쯤 대학 시절 은사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댁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빈민사목을 오래 하신 정일우 신부님인데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했다. 아무튼 화곡동 예수회 공동체로 가면서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으나 워낙 뵌 지 오래돼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에 들어서서 신부님의 눈을 보는 순간 돌연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 저 눈빛!’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마 스승의 눈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아, 살아 있는 저 눈빛!’ 저분만 좇으면 내 인생의 문제가 확 풀릴 것만 같은 느낌!

 

스승과 제자는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서조차 수준 있는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 높은 학점과 스펙 쌓기에 노예가 된 학생들이 교수를 바라보는 눈은 취직과 출세의 효율성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교육의 초라한 현주소다.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고 자신들의 인생을 새로 재단하기에 이른다. 지레 패배감에 젖어 있었던 초라한 처지에서 벗어나 복음 선포자로서 거듭난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던 때,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배신하거나 전원 줄행랑을 놓았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사생결단의 신념에 가득 찬 사도로서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았다. 스승의 막강한 영향력에 힘입어 변화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스승을 지금도 한 분 모시고 있다. 신앙의 아버지이자 학문의 아버지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분이다. 죽고 나서 하느님 앞에 서면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약간의 자랑도 할 작정이다. 그러면 지존하신 하느님은 몹시 흐뭇해하실 것이다. “박 신부, 자네는 내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네그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좋은 몫을 택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마태오 복음, 교회의 복음서 : 교회는 누구인가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수년 전 학생들에게 어느 복음서가 맘에 드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가장 많은 대답은 루카 복음이었다. 그들은 루카 복음을 읽으면 왠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온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비유(15,11-32),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30-37) 등 무엇인가 힘들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아끼시는 자상한 하느님이 손에 잡힐 것 같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다음으로는 요한 복음, 마르코 복음이었고, 마태오 복음은 꼴찌를 차지했다.

 

마태오 복음의 꼴찌는 의외였다. 초대 교황 베드로에게 열쇠를 쥐여 주는 장면이 마태오 복음(16,17-20)에만 나오고, 하느님 나라의 윤리(5-7장)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원칙들(18장), 족보로부터 시작되는 빈틈 없는 구성과 일사불란하게 정렬한 도덕률 등이 있는데, 이런 소중한 가르침들을 무시하듯이 어떻게 꼴찌일 수 있는가.

 

지난 호에서 우리는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성서신학의 기술적인 문제를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으로 확정된 것은 역사의 예수님이 직접 물려주신 것이기보다 1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유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여러 증거가 있는데, 이를테면 배신자 유다 자리에 보궐 선거로 마티아를 보충해 12라는 숫자를 완성한 점(사도 1장), 10,1-4와 마르 3,16-19의 12사도 명단이 일치하지 않는 점, 루카 10,1에 나오는 72사도단, 그리고 예수님을 밀착 수행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존재가 이를 알려 준다. 예수님의 측근에 열두 제자가 아니라 세 제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마태오는 특히 ‘12제자’의 입지에 대해 굳건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네 복음서 중에서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

 

마태오에게 12사도의 파견은 길 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두에 둔 것이고 이는 분명 12부족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를 모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십분 들어 있는 제자 선발이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G. 로핑크). 그렇게 모인 이들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성취되고 나면 이제 세계를 향해 복음이 전파될 차례다. 복음의 세계화 전망은 마태오 복음의 대단원인 28,16-20에 등장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치 하느님의 현현처럼 산에 올라 12제자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

 

마태오는 그렇게 열심인 제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확장을 ‘교회’(에클레시아: 16,18; 18,17)로 보았다. 말하자면 교회란 옛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 혹은 ‘진정한 이스라엘’인 셈이다. 유다인이라는 민족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구성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까?

 

마태오는 18장에 교회 설교를 실어 놓았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들을 취사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실어 놓은 것이다. 그중 압권은 단연 18,15-18이다. 만일 교회 공동체 내의 어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단둘이 만나 잘못을 타이르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설득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전 교회에 사안을 공지하여 설득하고, 만일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내보내도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8).

 

예수님은 교회의 판단에 그렇게 엄청난 힘을 실으셨다. 그분이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장면에도 18,18과 똑같은 말씀이 나온다(16,19). 베드로 개인에게도 교회 전체의 결정과 맞먹는 권한을 준 셈이다.

 

마태오에 따르면 12제자는 예수님을 근거리에서 모시는 친위 집단이고(5,1) 이들은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14,13-21). 마태오의 ‘12제자’ 이해는 1세기 그리스도 교회에 12사도 집단 지도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부활 발현 목격자 명단인 1코린 15,5에 나오고,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일곱 봉사자를 선택하는 사도 6,1-7에도 등장한다(특히 6,2). 말하자면 마태오 복음이 제시하는 ‘12사도 집단 지도 체제’는 1세기 교회 조직의 이정표였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마태오 복음은 수백 년간 미사에서 가장 친숙한 복음서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마태오 복음은 거의 매 주일 읽혔다. 마태오 복음은 교회 중심적이고, 신앙교리서 형태를 띠며, 가톨릭교회의 요구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회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법한 복음서이다.

 

어르신들의 취향에 따라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건네받은 전권(全權)을 유지하기 위해, 또한 그에 맞는 몸집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단지 존재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이 필요했고, 영향력을 갖기 위해 좀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마태오는 의문을 제기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25,42-43).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경계를 없앤 인물로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베드로와 교회에 하늘의 전권이 주어졌다’는 말에서 전권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짊어진 무거운 짐에 집중해야 한다. 전권을 가진 교회이니만치 모름지기 이 세상에 정의가 넘쳐 흐르도록 할 책임이 있고, 그 책임감에 하늘의 무게를 담아내야 한다. 교회여, 당신은 고통당하는 사람들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예수님은 언제 오십니까? : 마태오의 종말 이해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 보자.”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던 시절, 야당에서 내건 선거 구호다. 한국 전쟁 이후 서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기에 이런 구호가 나왔을 터다. 부정부패까지 만연했으니 서민들은 더더욱 살기 어려웠으리라. 살기 어려워지고 고통이 쌓여 가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마련이고, 변화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온통 맘을 뺏기기도 한다. 50-60년대에 유독 신흥종교가 많이 나온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험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조건도 비슷했다. 정복자 로마의 압제, 의인·죄인의 구별이 분명했던 억압적인 유다 사회, 이방 땅에 몸 붙여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 처지도 모자라 제도권 유다교에서 제거당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이 세상을 평정해야 우리가 맘을 놓고 살 텐데, 도대체 예수님이 오실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1세기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자주 오갔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마르 13,4),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2베드 3,4), “이자들은 진리에서 빗나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망쳐 놓고 있습니다”(2티모 2,18).

 

마태 24-25장을 두고 흔히 종말 설교라 부른다. 이 본문은 마태오가 독자적인 경로로 예수님의 말씀을 수집해 쓴 것이 아니라, 이미 마르 13장에 있던 내용을 집필 자료로 사용해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와 마태오, 두 복음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가려내면 마태오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마르 13,10).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 24,14).

 

<성서와함께>를 매달 읽는 독자분이라면 두 본문의 차이점이 바로 눈에 띌 것이다. 마르코 복음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지만, 마태오 복음은 복음 선포와 종말의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마르 13,10은 문법적으로 ‘데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 부정사’ 구문인데 비해, 마태 24,14는 ‘미래형 동사’(케뤽테세타이, 선포될 것입니다)를 사용해 현재 요구되는 복음 전파의 급박함을 강조한 마르코 복음보다 훨씬 여유 있어 보인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으로 종말까지 시간을 좀 번 셈이다. 이를 두고 ‘지연된 종말론’이라 한다.

 

지연된 종말론에 따라 ‘종말이 오기 전에 서둘러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이제 ‘미래에 닥칠 종말 때까지 주어진 시간 동안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는 현실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마태오가 복음서의 결론으로 제시한 28,16-20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 그리고 종말에 벌어질 일들을 알려 주는 ‘탈렌트의 비유’(25,14-30)에서도 주인은 여행을 갔다가 “오랜 뒤에”(25,19) 집으로 돌아온다. 즉 현재란 철저히 종말에만 기대어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게 하는, 따라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시간이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에서 ‘종말이 곧 올 테니 서둘러 준비하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는 현실 인식도 있었다. 복음을 전달받지 못한 민족에겐 사실 억울한 노릇이기는 하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말을 맞을 순 없는 일 아닌가. 따라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 사명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사고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 현재와 미래, 복음 선포와 종말, 유다인과 이방인 등 다양한 조건들을 고려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복음을 전해 받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것은 예수님은 누구인가였을 테고, 더욱 궁금했던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였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이다. 사도들이 자꾸 예수님을 믿으라고 독촉하는데 믿으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길까?

 

마태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종말의 날에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예수 재림이라는 신앙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4,29-31). 그날이 오면,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3,12)이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리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25,34).

 

그런데 곧 오겠다며 승천하신 예수님은 감감무소식이고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마태오가 복음서를 완성한 때를 대략 기원후 80-90년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셨던 30년경과 무려 50-60년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2세대마저 나이가 들어 혼란의 조짐이 교회 내에 보이고 있었다.

 

마태오는 공동체가 궤멸할지 모를 위기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했다. 마태오의 목소리를 재현해 보자.

 

“우리를 박해하는 유다인들과 부활 신앙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헬라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목숨을 버려가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려 하는지, 또한 왜 우리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려 하는지.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시대의 정신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이며, 이것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생생한 미래입니다. 그들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마지막 힘을 냅시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시오(10,7).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28,20).”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마태오의 자화상

박태식 신부(대한성공회 소속)

 

 

렘브란트는 63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20대에서 60대까지 이어지는 자화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자기 모습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달리 말한다.

 

“렘브란트는 인간 내면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싶으면 빛이 드는 안방은 물론 음침한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자아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거장은 비참한 존재에 몰린 자신을 인식하고 ‘용기와 새로운 젊음’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 경험의 고갱이를 건드릴 줄 알게 되었다. 병적이리만치 자신에게 집착하는 자세가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섬기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리고 또 그리지 않는 한 누군가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헨리 나우웬, 《나이 든다는 것》).

 

나이 들수록 걱정이 많아지고 쉽게 노여움을 타며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늙음에 꼭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렘브란트에게는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계기가 되어 그의 정신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섬기는 심정’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다.

 

산상설교(5-7장)는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는’(7,13) 도무지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눈을 빼거나 손을 자르거나 왼뺨마저 대 주어야 하고 천 걸음을 더 가 주거나 내 눈의 들보를 빼내야 하며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 또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자선을 숨기고 단식도 숨기고 기도도 숨겨야 한다. 심지어 자식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하란다. 그러니 어디 숨이나 쉬고 살겠는가. 산상설교의 예수님은 자비심이라곤 한 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8-9장이 남아 있다.

 

마태오는 정리계의 대가답게 예수님의 기적 사화들을 8-9장에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았다. 본디 기적 사화란 기적을 으레 있는 일로 받아들였던 시대에 나타난 문학 양식이다. 오늘날 남미 어딘가에서 어느 남성이 하루 만에 나무를 말라 죽게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하자. 그러면 다들 생각할 것이다. 어떤 속임수가 있는 건 아닌지 우선 살펴봐야 하고, 만일 사실이라면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지 따져 봐야 한다고. 그러나 2천 년 전에는 달랐다. 그 시절엔 기적의 진위를 따지기보다 이를 통해 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 나무를 삽시간에 말려 죽였다면 우선 두려워할 테고 혹시 기근의 징조가 아닌지 걱정했을 것이다.

 

8-9장에는 기적 사화가 많이 등장한다. 나병 환자 · 백인대장의 종 · 중풍 병자 · 하혈 병을 앓던 여자·말못하는 이 · 눈먼 이를 고친 치유 기적 사화, 풍랑을 잠잠케 한 자연 기적 사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구마(驅魔) 기적 사화, 죽은 사람을 살린 소생(蘇生) 기적 사화 등. 이렇게 많은 기적 이야기를 한곳에 정렬하려면 당연히 원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기적 사화를 많이 모아 단순히 나열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태오는 이를 기적 모음집 속에 두 개의 요약문(8,16-17과 9,35-38)으로 실어 놓았다. 첫째 요약문에서는 예수님이 많은 이를 고쳐 준 일을, 둘째 요약문에서는 예수님이 온 유다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이사 53,4)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8,17).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9,36).

 

앞엣것은 ‘성취 인용문’으로 마태오가 만들어 넣은 구문이고, 뒤엣것은 마르 6,34의 말씀을 여기에 실었다. 그러니 둘 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인 셈이다.

 

요약문을 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베푼 이유는 단 하나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인데, 여기서 ‘가엾이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 splanchnizomai)는 원래 하느님에게만 적용되는 동사이다. 또한 군중을 목자 없는 양으로 가엾이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심성을 공유한 분이라는 증거다. 예수님이 행한 모든 기적은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 그분께서 우리를 목자 없는 양떼처럼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으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담은 산상설교의 결론은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심을 떨쳐내고 오직 예수님의 명령대로 따라야 한다. 5-6장의 실천 강령들은 그 준엄함이 추상같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8-9장의 기적 모음집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고 부드럽게 감싸 주는 예수님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을 보노라면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든다. 젊은 날의 잘생기고 패기 넘치던 모습이 슬금슬금 사라지더니 막판에는 거울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만 보일 뿐이다. 노년의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우웬은 렘브란트가 단순히 ‘표현법을 연마하는 모델’로서가 아니라 ‘가장 내밀한 인성을 통해 영적인 것을 탐색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그렸다고 한다. 복음서 작가 마태오도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분명 자신의 신앙을 꾸준히 성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 공동체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예수님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실 분은 교회 내에 선생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 집필은 마태오에게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비둘기처럼 순하지만 뱀처럼 약은 예수님을 그리고 싶었으며, 평생 다져온 자신의 신앙을 복음서에 투영하길 원했다. 1세기 교회에서 불꽃 튀게 부딪치는 극단의 입장들(예: 갈라 2,11-14)을 통합하는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가려 했던 것이다. 정의와 사랑을 하나로 합쳐야 교회가 산다. 여기 중도의 인물 마태오의 자화상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2).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