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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탈출기와 거울 보기(1) - 김영선 루시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7.

탈출기와 거울 보기 (1)

(1) 하느님이 인간에게 희망하시는 것

김영선 루시아 수녀

 

 

성녀 클라라는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여,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안팎으로 단장하고 여러 색깔의 꽃으로 치장하여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과 정결한 정배에게 있어야 하는 온갖 덕행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매일 거울을 보고 단장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덕행으로 단장하라는 권유입니다.

 

우리 삶에 반사된 하느님의 현존

 

저는 성녀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이 꼭지의 이름을 ‘탈출기와 거울 보기’로 정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탈출기라는 말씀의 거울 앞에 서도록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어서입니다. 우선 탈출기라는 거울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거울 앞에 서기 위한 방법을 일러 드리겠습니다.

 

창세기가 이스라엘 성조 개개인의 신앙 여정을 전해 주는 책이라면, 탈출기는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걸어갔던 신앙 여정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들의 신앙 여정은 이집트에서 시작됩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의 초반부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탈출기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이집트와 광야 그리고 시나이 산이 됩니다.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후 그들은 두 번째의 광야 여정을 거쳐 모압 평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은 민수기에서 소개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집트 땅을 거쳐 시나이 반도에 들어서는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시나이 산에 이르는 신앙 여정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탈출기에 담긴 하느님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흩어진 옷매무새를 고치게 될 것이고, 때로는 모습을 다듬어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 자신의 삶에 반사된 하느님의 현존과 발자취를 발견하고, 그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지를 발견하기

 

이번 호에서는 탈출 1,1-14에 나오는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겠습니다. 탈출 1,1-14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1,1-7)은 요셉이 이집트에서 재상으로 활약하던 시절에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 일흔 명이 이집트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하셨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단락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 담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시다.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계속해서 늘어나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1,7)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주셨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보잘것없었던 그들이 하나의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그 안에서도 하느님의 성실하고 중단 없는 축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와 가정의 삶에, 우리 교회 공동체의 역사에, 그리고 우리나라와 온 인류 역사에 내내 베푸셨고, 지금도 나누어 주시는 축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단락(1,8-14)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전해 줍니다. 요셉의 공로를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이집트에 군림하면서 이집트인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더 많고 강하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품고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강제 노동으로 억압하고자 그들을 피톰과 라메세스라는 양곡저장 성읍을 짓는 데 동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널리 퍼져 나갑니다. 첫 번째 억압 정책이 실패하자 파라오는 더욱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고자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을 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또한 삶의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에 날벼락처럼 날아든 불행의 경험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조각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 단락에서 하느님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숨어 계신 듯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듯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1,12)고 합니다. 심한 억압을 받고도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가정을 지키며 더욱 번성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표지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불행을 경험하였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표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숨겨진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갈피갈피에 감추어진 하느님 현존의 표지들을 발견해 봅시다. 그리고 미처 드리지 못했던 때늦은 감사를 온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이 여전히 숨어 계신 분이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출기의 거울 앞에서 그분의 뒷모습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울 보기 팁 1

 

묵상 노트를 하나 마련하기 바랍니다. 제가 이 꼭지에 드린 숱한 질문을 묵상하고 마음속에 떠오른 답을 기록해 보십시오. 그러면 탈출기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동시에 자신의 삶에 함께해 온 하느님 현존의 자취도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2)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김영선 루시아 수녀

 

 

탈출기 1장의 세 번째 단락은 1장 15-21절입니다. 이 단락은 이집트의 강력한 파라오와 이 파라오의 살해 지시를 받은 히브리인 산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절대 권력을 지닌 파라오와 파라오의 명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두 여인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파라오보다 하느님을 경외한 산파들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를 저지하기 위한 세 번째 억압 정책으로,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여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산파들이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길을 찾아냅니다. 1장 17절에 의하면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기들을 살려 줍니다. 산파들은 파라오보다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파라오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그 신앙에서 나온 용기는 아무리 감탄해도 다 감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파라오가 그들을 불러 따져 물었을 때도 그들은 지혜로 충만한 대답을 합니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달리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1,19). 이 두 산파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아 파라오의 처벌을 피하였고, 그들의 집안은 하느님의 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이 현명하게 처신한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번성하고 강해졌습니다.

 

히브리인 산파인 시프라와 푸아는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하느님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시다. 하느님이 아닌 것 때문에 하느님을 포기하는 삶을 살지 않을 지혜와 용기도 함께 청합시다. 어떤 분들은 이 거울을 바라보면서 히브리인 산파처럼 용감하고 지혜로왔던 삶의 한 순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간에 함께 해 주셨던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의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여성들의 연대

 

탈출기 1장의 마지막 절인 22절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려는 파라오의 네 번째 정책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인 산파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아기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파라오는 더욱 잔인한 명령을 내립니다. 앞으로 태어나게 될 이스라엘의 사내 아기들을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 배경을 알려 주는 탈출 2,1-10은 파라오의 이런 강력한 억압 정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에 처한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거역할 수 없는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아기의 목숨을 구한 이는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탈출 2,1-10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입니다. 모세라는 아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힘 있는 남성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파라오의 딸과 그의 시녀들, 이 모든 여성이 모세라는 한 아기가 생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사내 아기가 태어나자 삼 개월을 숨겨 기른 어머니는 더 이상 아기를 숨겨 기를 수 없게 되자 파라오의 명령대로 아기를 강에 내다 버립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기가 살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찾아 실행에 옮깁니다. 아기를 담을 바구니에 역청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만들었고, 바구니가 떠내려 가지 않도록 갈대숲이 우거진 곳을 눈여겨보아 두었으며, 강가로 목욕하러 내려오는 파라오의 딸의 눈에 잘 띌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히브리인의 아기인 줄 알면서도 아기를 구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두려워하기보다 아기에 대한 동정심에 더 크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아기의 누이 미리암은 멀찍이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나타나 히브리인 유모를 불러 오겠노라고 자처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기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뗄 때까지 자란 후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됩니다. 이 사내아이는 자라서 훗날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킬 것입니다.

 

모세의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생명을 죽이는 일보다 살리는 일을 선택했던 용기 있는 여성들 덕분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파라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만큼의 힘은 결코 지니지 못했지만 그의 잘못된 명령을 지혜롭게 거역할 만큼 생명을 사랑하였습니다. 설령 그 생명을 지키는 일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여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거울을 보며 생명으로 나아가기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목숨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에제 18,4.32 참조). 이제 모세의 누이와 어머니, 파라오의 딸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가 분주히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와 말이 주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인지, 혹은 다른 이들의 기를 꺾고 그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일인지 살펴봅시다. 우리의 말과 행위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3) 구원 계획이 무르익는 시간

김영선 루시아 수녀

 

 

지난달에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을 사랑하는 연약한 여인들의 긴밀한 협력을 통하여 살아남은 아기 모세는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라나 성년기를 맞게 됩니다. 탈출 2,11-25은 모세의 성년기를 다루는 본문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한 모세

 

이 대목(2,11-25)을 세 단락으로 나눌 경우, 첫 단락(2,11-15ㄱ)은 이집트인의 폭력에 시달리는 히브리인의 현실 앞에서 모세가 보인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는 자기 동포의 강제 노동의 모습과 이집트인 십장의 횡포를 목격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인 십장을 때려죽이고 모래 속에 묻어 버립니다. 그다음 날에는 히브리 사람 둘의 싸움을 목격하고 그것을 중재하려다 자신의 살인 행위가 드러난 것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 일이 파라오에게 알려져 죽을 위험에 처하자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피신합니다.

 

이 짧은 단락은 성년이 된 모세가 자신의 신원을 깨닫고, 자기 동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을 인식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인을 억압하는 폭력 앞에서 폭력으로 대응하였고,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모세는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폭력의 끝없는 악순환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무엇일까요? 폭력을 응징하는 올바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세는 긴 세월에 걸쳐 그것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하느님의 보살핌

 

둘째 단락(2,15ㄴ-22)은 미디안 땅으로 도주한 모세의 삶을 소개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모세가 그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안배하셨습니다. 미디안 땅에 도착한 모세는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그곳에 왔던 미디안 사제 르우엘의 일곱 딸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목자들이 이들을 방해하자 모세는 이 여인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를 알게 된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르우엘의 딸 치포라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정착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모세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그분의 존재는 철저하게 배경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무사하고 안전하게 미디안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느님은 모든 것을 배려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도주하는 동안 어떤 위협도 받지 않은 채 그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미디안이라는 낯선 땅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도 그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선물이나 도움을 주시는 순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느님은 수많은 도움과 배려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났던 숱한 위기의 순간에 만약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때로는 위기인 줄도 모르고 지나왔고, 그저 ‘다행이었다’는 말로 넘긴 수많은 일도 사실은 하느님의 도움과 보호, 보살핌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감사를 그분께 드려야 할까요? 지금 여기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삶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를 정리하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배우며 구원 계획이 무르익는 시간

 

탈출기 2장의 마지막 단락(2,23-25)은 모세가 미디안에 정착하여 안정되게 사는 동안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어떠하였는지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던 파라오가 죽었어도 그들의 고통과 고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통으로 탄식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 소리와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보셨고, 그들의 처지를 아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분명히 무엇인가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응답이 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사도 7,23에 따르면 미디안으로 도망갈 때 모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탈출 7,7에 의하면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디안 땅을 떠난 때가 80세이므로, 거의 40년 동안 모세는 미디안 땅에 머문 셈이 됩니다. 이 40년 동안 모세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40년은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의 철저한 부재를 의미할까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 긴 세월은 허무하고 무의미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되겠지만, 이 40년은 하느님의 부재도, 침묵도 아닌 시간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 40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무르익는 시간이었고,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위해 꼴을 갖추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40년은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방법밖에 몰랐던 모세에게 다른 길을 보여 주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인간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을 배우게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도구로 파라오 앞에 나설 수 있도록 그의 내적인 힘을 키우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굳건히 믿는 이들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희망으로 견딜 줄 압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4)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김영선 루시아 수녀

 

 

서정주 시인은 국화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거울 앞에 선 누님’이란 아마도 인생의 원숙한 단계에 이른 상태에 대한 은유일 것입니다. 이 은유가 가능한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원숙함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입니다. 탈출기라는 거울 앞에 서려는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 원숙한 자가 되라는 초대에 응하려는 지난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탈출기 3장의 본문입니다.

 

탈출기 3장은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다시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단락(3,1-4,17)에 속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긴 단락을 ‘모세의 소명사화’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으며, 그 부르심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모세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긴 소명사화의 첫 부분인 탈출기 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3,1-6 ② 3,7-12 ③ 3,13-21

 

첫 번째 단락인 3,1-6은 모세가 하느님의 신현(theophany)을 목격한 장면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소명사화의 첫 번째 요소인 ‘하느님의 자기소개’에 해당합니다. 하느님의 신현, 곧 자기 계시는 모세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장인의 양 떼를 이끌고 광야로 나갑니다. 이번에는 그가 늘 다니던 곳보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갑니다. 신명기에서처럼 3,1은 모세가 간 산을 시나이 산이 아니라 호렙 산이라고 합니다. 호렙은 광야를 의미하므로, 호렙 산이란 광야에 있는 불특정한 산을 지칭할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가시나무에서 불꽃이 일어나는데 가지가 전혀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그 나무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모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하시며,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훗날 여호수아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여호 5,15 참조). 신발은 땅의 온갖 먼지를 실어 나릅니다. 이 먼지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어울릴 수 없는 온갖 부정함과 불결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만 하느님 가까이 설 수 있습니다. 모세를 찾아오신 것처럼 일상의 삶 가운데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좀 더 가깝게 만나려면 우리도 신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어울릴 수 없는 내 안의 부정함이 무엇인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다 벗어 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모세 역시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온전히 깨끗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와 그에게 신을 벗도록 초대하십니다. 그가 묻혀 온 온갖 부정함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분 가까이 머물기 위하여,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신은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벗어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6)이라고 소개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선조와 관계를 맺어 오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심으로써 하느님은 모세를 다시 그의 동족들과의 관계 속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 살면서 미디안 사제의 사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으로, 당신이 선택하고 축복하셨으며 약속을 맺으신 그 백성의 일원으로 돌려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의 본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만난 이들에게도 모세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느님 앞에 서면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 또는 ‘가지지 않은 것’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우리의 ‘참 자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과연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을 가장 몰라주는 이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 모릅니다. 자신을 가장 소외시키고 무시하는 이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 선 모세처럼, 하느님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세처럼, 우리도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듯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좀 더 자주 바라보고, 그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본 이들을 당신의 사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둘째 단락인 3,7-12과 셋째 단락인 3,13-21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의 이 초대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 거울은 다음 달을 위하여 잘 간직해 두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5) 모세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김영선 루시아 수녀

 

 

탈출기 3장의 둘째 단락(3,7-12)과 셋째 단락(3,13-22)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이 사명에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한 인간을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도구가 당신 뜻을 거절할 가능성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하느님은 배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인간인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업적을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과연 모세는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지 지켜봅시다.

 

40년간 동족과 멀리 떨어져 미디안 땅에서 살았던 모세에게, 하느님은 이집트 땅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와 고통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고난을 익히 알고 계신 그분은 이제 그들을 고난의 땅에서 구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는 당신의 계획을 모세에게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파견된 이유 ① 파라오에게 참된 힘의 주인을 알리기 위하여

 

모세는 두 군데로 파견됩니다. 하나는 ‘파라오에게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파라오에게 파견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라고 명하십니다(3,10.18). 파라오가 두려워 도망을 쳤던 모세에게 다시 파라오에게 가라는 말씀과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말씀은 다 어불성설로 들렸을 것입니다. 당연히 모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3,11)라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느님은 왜 모세를 파라오에게 파견하실까요? 파라오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하느님도 모르지 않으십니다. 당신 스스로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3,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굳이 하시려는 이유는 억압자도 참된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지배욕에 사로잡힌 파라오에게도 해방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날 때까지 힘겨루기를 멈추지 않은 파라오를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려 주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도 참된 힘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파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3,12)고 말씀하십니다. 담대한 용기를 약속하신 것도 아니고, 강철 같은 심장을 주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와 함께 있겠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함께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이 말씀이 모세에게는 파라오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일단 이 사명에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굴복하지 않는 파라오 앞에 거듭 나아가기 위하여 모세는 하느님의 ‘함께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모세가 파라오를 만나러 가는 일처럼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대면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이 상황을 직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모세가 파견된 이유 ② 동족을 깨어나게 하기 위하여

 

모세는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도’ 파견됩니다. 그들을 찾아가 구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불어넣고, 이집트 땅을 떠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지의 땅을 향해 걸어가도록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오랫동안 고난에 처해 있던 이들을 설득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재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지 않습니다. 억압을 오래 받으면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현실에 매몰되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일시적인 대안에 중독되기 십상입니다. 이들이 고난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하려면 그들을 압제하는 힘보다 더 큰 힘을 체험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묻습니다. ‘그들이 저를 파견하신 분의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있는 나”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 근거가 오직 자신에게 있는, 그리하여 다른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당신임을 밝히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어떻게 “있는 자”가 되시는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위하시는 하느님의 ‘있음’을 체험하면서, 그들은 삶의 질곡에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무력하겠지만 참된 힘의 주인이신 분을 믿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나”이신 하느님이 그들의 주님이심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숱한 불신의 밤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모세도 아직 주님의 파견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세 차례나 이의를 더 제기한 뒤에야 마침내 일어서서 이집트를 향해 길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불신이 더 나은 믿음으로 인도하는 여정에 속하기만 한다면, 실패와 불신 앞에서 절망하여 울기보다는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을 한 번 더 믿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탈출기 3장의 거울에 비추어 본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6) 부르심 받은 이들의 겸손

김영선 루시아 수녀

 

 

모세의 소명 사화는 탈출 3,1에서 시작되어 4,17에서 일단락됩니다. 지난달에 3장을 살펴보았으니, 이번 달에는 그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40년간 살았던 삶의 터전을 바꾸고,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삶의 우선순위까지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기까지 모세는 여러 차례 주저하고 망설였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소명 사화에 등장하는 다섯 차례의 ‘이의 제기’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두 번의 이의 제기는 3장에서 나왔습니다. 4장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계속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는 계속 이의를 제기합니다. 부르시는 분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시고, 응답해야 할 쪽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재차 말씀하셨습니다(3,16-21). 그러자 모세는 저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도 부정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쭙습니다(4,1). 세 번째 이의 제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첫 번째 표징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 표징은 나병에 걸리게도 하고 낫게도 하는 이적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으면, 나일 강물을 퍼서 마른 땅에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강물은 마른 땅에서 곧 피가 되리라 이르십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솜씨가 없고, 입과 혀가 무딘 사람이었습니다(4,10). 이 약점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모세가 해야 할 일이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파라오를 설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간적 능력이 모세에게 결여되어 있는 셈입니다. 모세는 이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의 약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4,11-12).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인간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시 한 번 주저합니다. 자기보다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보내시라고 말씀드립니다(4,13). 이것이 모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이의 제기입니다. 이제는 하느님도 지치신 듯 모세에게 화를 내시지만 모세를 위하여 그의 형 아론을 대변자로 세워 주십니다(4,14). 마침내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온전히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는 장인에게 돌아가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알리고(4,18), 아내 치포라와 자식들을 데리고 길을 나섭니다(4,24-26).

 

‘이의 제기’를 통해 드러나는 겸손

 

‘이의 제기’는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소명 사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부르심 받은 이들의 망설임이나 고집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르심 받은 이들의 깊은 겸손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수행하기에 자신들이 턱없이 부족한 존재임을 압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의 중차대함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이런 건강한 자기 인식에서 나온 것이 부르심에 대한 ‘이의 제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소명 사화’라는 양식을 통하여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이의 제기’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대부분이 ‘두려워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명 수행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수단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하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도 하느님의 것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과 능력도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힘이나 능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그들은 도구일 뿐이며, 일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충분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사명은 시작도, 그 과정도, 마침도, 다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처음부터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었고, 끝까지 책임지실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부르심 받은 이들의 모범인 모세

 

구약성경의 ‘소명 사화’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모세는 모든 부르심 받은 이들의 훌륭한 모범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인물이라 여기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일을 해낼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만도 품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모세의 이런 겸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땅 위에 사는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였다고 전합니다(민수 12,3). 모세의 소명 사화는 부르심 받은 모든 이에게 참 멋진 거울입니다. 그 앞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고마운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 자주 서 보아야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7)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김영선 루시아 수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세는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과 파라오를 만나 하느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그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파라오에게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파라오가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권위에 굴복하게 되는 과정이 열 가지 재앙 이야기(7-12장)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열 가지 재앙 사화는 두 쪽으로 된 거울처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한쪽이 모세라는 거울이라면 다른 한쪽은 파라오라는 거울입니다. 이달에는 파라오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고, 다음달에는 모세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라오의 완고함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5,1)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파라오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그 주님이 누구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5,2). 인생에 대한 파라오의 자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세상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파라오는 자기 삶의 주인이고 이스라엘의 주인일까요?

 

파라오는 늘 하던 방식대로 모세와 아론에게 응수합니다. 강제와 억압이 유용한 통제 수단이라고 믿는 그는 이스라엘을 더욱 모질게 박해합니다. 벽돌 제작에 필요한 짚을 제공하지 않은 채 동일한 벽돌 생산량을 요구하는 파라오의 억압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영도력을 약화시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정녕 그는 강한 손에 밀려 그들을 내보낼 것이다”(6,1). 이어지는 열 가지 재앙 사화는 주님의 강한 손이 파라오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데 굼뜨고, 하느님은 그런 파라오가 당신을 알아보도록 이끄시는 데 한결같으십니다. 그것이 열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재앙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는 파라오

 

처음 나타나는 피와 개구리, 모기 등 세 가지 재앙은 하느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의 마술사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보여 줍니다.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 재앙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8,15)임을 알아채고 파라오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꿈쩍하지도 않습니다. 이어서 등에와 가축병, 종기의 재앙이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이집트인들에게만 일어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당신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분명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넷째 재앙이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파라오는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이 땅 안에서 너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라”(8,21). 모세는 이스라엘의 제사 방식을 혐오하는 이집트인들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광야로 가는 것은 허락하되 멀리 가지 말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하지만 재앙이 사라지면 파라오의 마음은 다시 완고해집니다. 다섯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온 가축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이스라엘인들의 가축은 모두 무사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주님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재앙으로 파라오의 마술사들은 완전히 무력해집니다. 그들마저 종기에 걸려 꼼짝도 못하게 되었지만, 파라오는 여전히 완고합니다.

 

이어서 유례없던 우박과 메뚜기, 어둠의 재앙이 발생합니다. 이 재앙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냅니다. 파라오는 마침내 잘못을 인정하고 타협을 제안합니다. “장정들이나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10,11). “다만 너희 양 떼와 소 떼만은 남겨 두어라.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가도 좋다”(10,24). 파라오의 신하들은 파라오가 졌음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포기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기 위해서는 그의 맏아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그제야 파라오는 다급해집니다. 한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 “너희가 말하던 대로,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12,31)고 합니다. 비로소 파라오는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권위를 온전히 내려놓을 만큼 겸손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모세와 아론이 처음 만났던 그 파라오는 더 이상 아닙니다. 자신을 능가하는 힘이 세상에 존재하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의 이야기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도 파라오처럼 마음이 굳어져 일상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읽어 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고집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이 나를 마비시키고 있지 않나? 나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하느님을 모른다고 고백하던 그 파라오인가? 아니면 전부가 되시려는 하느님 앞에서 적당히 타협을 시도하는 파라오인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고 자신의 왕관을 그분 앞에 내려놓은 겸손한 파라오인가? 이 거울 앞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나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참으로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8) 적당히 타협하며 살자는 유혹의 목소리를 거슬러

김영선 루시아 수녀

 

 

제아무리 원대한 뜻을 품고 떠난 길이라 해도 어려움이 닥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왜 길을 떠나야만 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길 떠나기 전의 상황을 그리워하며, 차라리 길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거나,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길의 끝자락에 망연자실한 채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품었던 뜻이니 끝까지 가보리라는 각오를 새로이 다지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길 떠난 이들이 만나게 되는 장애물은 길을 떠난 이유를 되돌아보고, 다짐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길을 떠난 모세도 엄청난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과연 모세는 이 장애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요? 열 가지 재앙사화는 장애물 앞에 선 모세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를 처음 만났을 때 모세는 80세, 아론은 83세였습니다(7,7 참조). 성경 저자가 굳이 이들의 나이를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원숙함을 드러내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젊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선택에는 제한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실패는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을 더 주춤거리게 할 수 있습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절망하지 않는 모세

 

파라오와의 첫 대면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의 명령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마저 부인합니다. 모세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 곧 ‘내 백성을 내보내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억압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 강도는 더 세집니다. 결국 그 모든 탓은 모세와 아론에게 돌려집니다. 모세는 이 상황을 주님께 말씀드렸고, 주님은 파라오가 결국에는 당신께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파라오가 마침내 주님을 알아보게 되기까지, 모세와 아론은 긴 좌절의 시간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도 파라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재앙도, 개구리 소동도 파라오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땅의 먼지를 치자 이집트 온 땅에 모기가 들끓었습니다.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이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임을 알아보았지만, 파라오는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거듭된 실패는 ‘절망’이라는 독버섯이 자라는 온상입니다. 절망이 퍼지기 시작하면 어둠으로 뒤덮인 그 마음의 땅에는 ‘새로운 시도’라는 새싹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유혹에도 타협하지 않는 모세

 

이집트 온 땅을 뒤덮은 등에 떼(넷째 재앙) 앞에, 드디어 파라오는 모세와 타협을 시작합니다. “가거라. 그러나 이 땅 안에서 너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라”(8,21). 그러나 모세는 단호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주 저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그분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8,22-23). 실패를 거듭하였기에 작은 성공에 주저앉을 수도 있었을 텐데, 모세는 파라오의 작지만 놀라운 변화 앞에서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재앙들에서 파라오가 자신의 결정을 여러 차례 번복할 때에도 모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메뚜기 떼가 온 이집트를 공격하는 여덟째 재앙 때 파라오는 다시 한번 타협을 시도합니다. “장정들이나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10,11). 아홉째 재앙인 어둠이 이집트를 덮치자 파라오는 조금 더 양보합니다. “너희는 가서 주님께 예배드려라. 다만 너희 양 떼와 소 떼만은 남겨 두어라.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가도 좋다”(10,24). 그러나 모세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파라오로 대표되는 세상의 힘과 권력 앞에서 만약 모세가 타협하였다면 그는 좀 더 일찍 성공하였을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조금 더 일찍 데려 내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세가 일의 성공만을 추구하였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타협의 유혹을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라오와 끊임없이 대화는 시도하지만 절대로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주 저희 하느님께 저희가 바칠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내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집짐승들도 저희와 함께 가야 합니다. 한 마리도 남아서는 안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주 저희 하느님께 바칠 것을 골라야 하는데, 저희가 그곳에 다다를 때까지는 주님께 무엇을 바쳐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0,25-26).

 

적당히 타협하며 살자는 유혹의 목소리는 어디든 있습니다. 장애물 앞에서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커집니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따르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라고 부추길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 앞에 머물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타협 없이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세상의 논리와 타협하느라 하느님의 말씀을 반 토막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애초의 부르심을 절반으로 축소하면서 장애물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세의 거울이 우리를 돌려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9) 하느님이 가져다주실 해방

김영선 루시아 수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모세의 굳건한 의지는 이집트 땅에 열 번째 재앙이 내릴 때까지 충돌합니다. 열 번째 재앙 예고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11장 참조). 파라오에게 이 재앙에 대한 예고가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 이전 단락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0,28에서 파라오는 모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날 그를 죽여 버리겠노라고 협박하였고, 모세는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파라오의 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열 번째 재앙은 사전 예고 없이 이집트 땅에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열 번째 재앙과 파스카 축제

 

열 번째 재앙 이야기는 12,29-30에서 아주 간략하게 보도됩니다. 한밤중에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해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제야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을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줍니다(12,31).

 

그러면 열 번째 재앙 예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지고, 그 재앙이 발생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으로 그날 밤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12,1-28).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첫째 달 열흘째 되는 날에 일 년 된 양이나 염소 가운데 흠 없는 수컷을 따로 골라 두었다가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저녁 어스름에 잡아 그 피를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불에 구워 익힌 고기에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다 먹고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 음식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었습니다. 그들은 이 밤이 새기 전에 이집트 땅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구원 업적을 해마다 기념하고 이 예식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며,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그들의 집들을 구해 주셨음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12,27 참조).

 

참된 힘의 주인이신 하느님

 

이 본문과 우리 삶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어떤 면에서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될 열 번째 재앙과 파스카 축제에 관한 이야기를 연결하여 보도하는 방식은 여러 면에서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결정적으로 해방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억압하는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힘과 직접 대결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맏배가 죽임을 당하는 일에 이스라엘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경 저자는 그들이 그 시간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노라고 보도합니다.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한 힘에 대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깊은 신앙 고백입니다.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온 분은 하느님이시지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음을 그들은 대대손손 고백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뒷짐 지고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하시도록 방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파스카 축제, 곧 전례의식을 통하여 그들의 의식 전체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거짓 힘의 영향력에 패배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의식을 고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가져다주실 해방을 한마음으로 고대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인이지만 모두가 다 온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이었다면, 우리는 생명을 해치는 악한 습관이나 중독, 자유를 옭아매는 피해의식이나 열등감, 애정 결핍과 지나친 경쟁의식 등에 사로잡힌 종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의 첫걸음은 자신이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살이에서 어떻게 해방될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에서 배워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이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고된 노역에 고통받으며 하느님께 울부짖었고, 그 울부짖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가엾은 이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파라오의 억압에서 해방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우리의 해방도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간절한 원의를 품고, 그 원의를 들어주실 분께 말씀드리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은 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지던 그 밤에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그들의 해방을 실현하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가져다주실 해방을 고대했습니다. 우리의 해방도 우리가 참된 자유인이 되기를 바라고 희망하시는 하느님의 원의와 우리의 원의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죽을 힘을 다하여 지금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하시는 대신, 오늘 우리에게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고 싶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이 건네시는 손을 마주 잡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2장의 거울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으시는 하느님을 비추어 줍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어떤 거리에 있습니까?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0) 믿음으로 산다는 것

김영선 루시아 수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집트를 떠나 갈대 바다를 건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살펴보면 믿음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13,17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이집트 땅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현존을 경험하는 신앙 여정

 

지름길은 빨리 갈 수 있는 대신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큽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지름길은 군사도로여서 이집트인들이 추격해 오면 이스라엘로서는 피신할 곳이 없게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닥쳐올 전쟁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돌아갈 마음을 품을까 봐 하느님이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13,17)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이집트를 떠나 자유를 향한 여정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어둔 밤길을 걸을 때면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밝혀 주시고, 광야의 뜨거운 모래밭 길을 걸을 때면 구름 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시며 함께하십니다. 잠시도 이스라엘 백성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13,22). 이처럼 신앙의 여정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로 들어선 여정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시련이라는 신앙의 디딤돌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성숙은 시련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산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련이나 위험이 닥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의 삶에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시련과 위험을 어떻게 이겨 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은 우리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참된 성장과 성숙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임을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큰 시련을 겪습니다. 파라오가 병거 육백 대에 이르는 정예 부대와, 군관이 이끄는 이집트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습니다. 피하히롯 근처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병거 소리에 혼비백산합니다.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 물결이, 뒤로는 추격해 오는 파라오의 병거 소리가 그들을 극심한 공포로 밀어 넣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주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이 모든 탓을 돌립니다. 이렇게 죽느니 차라리 이집트인들을 섬기겠다고도 말합니다. 모세가 어렵사리 이루어낸 모든 일이 결국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놀라운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신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체험하고도 그들은 그 체험과 현재의 위기를 연결 짓지 못합니다. 그들을 구해 내신 하느님이 또 그들을 구해 내실 수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통하여 한 차원 더 깊은 믿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 깊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시련이 키워 낸 굳건한 신앙

 

여러분이 모세라면 이 위기의 때에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앞에는 바다, 뒤에는 파라오의 군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아무 대안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느님에게는 대안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약속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굳건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명령을 내립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14,13-14).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마음을 굳건히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런 후 하느님의 말씀대로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뻗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느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앞에서 환희와 경외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였고, 믿음의 한층 더 깊은 차원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부재가 느껴질 때라도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언제든 그 사랑에 의지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하느님을 조상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의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봅시다. 일상의 삶에서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까? 시련이 닥치면 곧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존하려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시련이나 위기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초대장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곤란과 어려움 한가운데 하느님을 신뢰하며 가만히 있을 줄 압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올 무렵에는 아직 필리스티아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은 때이므로,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13,17)이라는 표현은 탈출기 시대보다 훨씬 더 후대에 살았던 저자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1) 주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시편 78,7)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 앞에서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진퇴양난에 처해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듯한 위기 앞에서 그들은 하느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가능성을 체험하였고, 그 체험으로 그들의 가슴은 환희로 터질 듯하였습니다. 모세의 노래(15장)에는 바로 그 환희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기억이 굳건한 믿음의 밑거름

 

모세는 백성을 대표해 그들을 추격하는 파라오 군대의 위협에서 그들을 건져 주신 구원의 하느님을 노래(15장)합니다. 필리스티아 주민들(15,14)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노래가 모세 시절에 지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을 떠나던 때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12세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의 저자는 바다의 기적 사건(14장) 뒤에 모세의 노래(15장)를 두었을까요? 이처럼 ‘이야기’와 ‘노래’를 연결해 놓은 곳이 또 있습니다. 판관 4-5장입니다. 여자 판관 ‘드보라가 바락 장군과 함께 이스라엘을 가나안 임금의 압제에서 건져낸 이야기(판관 4장) 뒤에 드보라의 노래(판관 5장)가 나옵니다. 모세의 노래도, 드보라의 노래도 모두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지어진 노래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하셨으며, 그들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셨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였고, 이 노래들을 부르고 들을 때마다 그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손손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노래하며 기억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그들에게 당신에 대한 감사를 요구하셨기 때문일까요? 당신이 하신 일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구원 업적의 기억은 무엇보다 그들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하게 체험하였고, 어떤 때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 채 과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나 한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현존이 의심스러울 때에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는 일은, 어려움 가운데서 인내하며 주님의 도움을 기다릴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하느님이 계속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 줍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에도 우리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나 자신의 고유한 구원 노래를

 

모세의 노래는 우리 자신의 구원 역사를 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15장과 시편 78편을 천천히 읽은 후, 하느님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루신 큰일들을 기억하게 해 줄 자기 자신의 고유한 구원의 노래를 지어 봅시다. 인생의 온갖 위기에서 그분께서 어떻게 나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셨는지를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주님의 현존이 의심스러워질 때마다 그 노래를 꺼내어 읽어 보고 그때 자신을 돌보아 주셨던 그 하느님께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을 의탁해 보십시오. 믿음이 부족하다면 믿음을 더해 주실 것을 청해 보십시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한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기억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일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곤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금방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5장의 후반부는 기적적으로 바다를 건넌 후 광야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바다를 지나 수르 광야로 나아가 사흘 길을 걸었으나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해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마침내 물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위기 앞에서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그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그 사이에 잊고 만 것입니다. 모세만이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모세는 주님께서 기도 가운데 보여 주신 나뭇가지를 그 쓴 물에 던져 쓴 물이 단물이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백성은 목마름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를 가지려면 그들은 구원 체험을 더 많이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약한 믿음을 모르시지 않는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 이르기 전, 광야 여정 초반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여정 초반에 그들이 만난 하느님을 ‘치유하시는 하느님’ 곧 ‘의사이신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15,26 참조).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만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그분께 어떤 이름을 붙여 드리겠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2) 광야에서 만난 하느님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야 했던 광야는 간간이 가시나무와 같은 식물이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어디에서도 푸른 초목을 볼 수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굶주림과 목마름, 죽음의 위협이 자리한 곳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을 두 차례로 나누어 보도합니다. 첫 번째 광야 여정은 탈출기에 소개된 것으로, 바다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 시나이 산에 이르는 여정입니다(15,22-19,1).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 이른 후 그곳에서 1년 정도 체류했다가 민수 10,11-13에 이르러서야 다시 길을 떠납니다

 

탈출기와 민수기, 두 차례의 광야 여정

 

바다를 건너 광야로 들어온 후 시나이 산에 이르는 여정을 ‘광야 여정 1’, 시나이 산을 떠나 가나안 땅이 마주 보이는 모압 평원에 이르는 여정을 ‘광야 여정 2’라 하겠습니다. 광야 여정 1과 2 사이에 ‘시나이 계약’이라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두 번째 광야 여정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계약의 백성’이 됩니다. 성경 저자는 계약의 중요성과 그에 따라오는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광야 여정 1과 2에 비슷한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므리바의 물 사건과 메추라기의 기적은 두 여정에서 모두 일어나는데, 백성은 한결같이 불평하지만 그 불평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두 여정에서 다르게 소개됩니다. 탈출기의 광야 여정과 민수기의 광야 여정을 비교하여 묵상해 보시면, 성경 저자가 왜 이런 차이를 보이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자리, 광야

 

이번 달에는 광야 여정 1에서 일어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1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 여정 이야기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불평’과 ‘시험’입니다. 광야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으로 사는 법을 익히는 신앙의 학교이자, 그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시험의 기간입니다. 이 신앙의 여정 동안 그들은 시련을 만날 때마다 불평으로 반응합니다.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엘림과 시나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도착합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 챙겨 온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리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터뜨리며 그들을 데리고 나온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16,3) 그리고 비참하고 힘겨웠지만 적어도 굶주리진 않았던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그리워합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16,3)

 

필요와 원의를 채워 주시는 하느님

 

과연 하느님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그들의 불평에 실망하여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십니까? 혹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십니까? 하느님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혀 탓하지 않으십니다(16장). 그들의 불평을 들으신 후, 그들의 바람대로 손수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저녁에는 메추라기 떼, 아침에는 만나를 보내 주시어 당신을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와 원의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여정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그들과 구체적으로 함께하시는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신 광야에서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초대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이 배움의 학교에서 당신을 신뢰하며 사는 법 또한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정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성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풍족히 내려 주시지만 그것은 저장할 수 있는 식량이 아니고,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욕구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길들이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광야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험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16,4). 이 시험은 하느님을 위해 필요한 시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자기 믿음의 정도를 알게 하는 시험입니다.

 

한편 모세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불평한 것이다”(16,8).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걷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나 아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려는 하느님의 원의에 따라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 안에서 우리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갖은 우여곡절로 굽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확신합니까? 이런 확신이 있는 이들의 믿음은 광야의 여정을 통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광야는 시련의 시간인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광야에서만 만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혹시 광야의 여정에 있거나 그 여정을 막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때 만난 ‘하느님의 양식, 나의 만나’는 무엇이었는지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