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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1) - 강은희 헬레나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9.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가톨릭 서간

강은희 헬레나

 

 

천주교 서간? 보편 서간!

 

신약성경의 목차를 펼쳐 보면 서간으로 모두 스물한 권이 나온다. 그중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부터 시작해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까지 모두 열세 권을 바오로계 서간이라고 부른다. 이 서간들은 공통적으로 편지의 서두 부분에서 바오로 사도가 해당 편지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열세 권의 서간 중 확실히 바오로 사도가 쓴 것으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는 일곱 권(로마, 1코린, 2코린, 갈라, 필리, 1테살, 필레)을 ‘바오로 친서’라 하여 나머지 바오로계 서간과 구별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바오로 사도의 이름으로 된 서간들만 있지 않다. 야고보의 서간, 베드로의 서간 두 권, 요한의 서간 세 권, 그리고 유다의 서간도 있다. 이 일곱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고 부른다. 가톨릭이라면 천주교의 편지인가? 오해할 수 있지만, ‘가톨릭’이란 말은 본래 ‘보편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가톨릭 서간이란 ‘보편 서간’이라는 뜻이다.

 

가톨릭 서간이란?

 

가톨릭 서간이란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이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은 항상 수신인이 분명하다. 코린토 신자들이나 필리피 신자들처럼 특정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이든,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처럼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든 간에, 해당 편지의 수신인을 편지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에 비해 가톨릭 서간은 편지의 수신인이 구체적이지 않다. 단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야고 1,1) 또는 “믿음을 받은 이들”(2베드 1,1)이란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이 편지들은 특정 공동체나 개인이 아닌, 보편적인 신도를 대상으로 쓴 것이라 해서 가톨릭 서간, 곧 보편 서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가톨릭 서간은 바오로 서간과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을까?

 

가톨릭 서간의 공통 배경

 

가톨릭 서간은 그 저자들만큼이나 개별 서간의 동기도 다양해서, 전체 내용을 특정 논점 한두 가지로 통일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서간들을 써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던 배경은 공유한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인 문서인 바오로의 친서들이 50년대 작성되었던 반면, 가톨릭 서간의 대부분은 그로부터 30년 정도가 지난 80년대 전후부터 100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으니 바오로 사도 시대와는 꽤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변화로서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문제, 그리고 이단의 위험 등을 들 수 있다.

 

1) 로마의 박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박해란 그리 낯설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미 유다인들의 배척으로 돌아가셨고,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박해의 성격이 달라진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유다교 교리의 문제였다. 따라서 로마 제국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것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소요를 유다교의 내부 문제로 여겼다. 그랬기에 49년경 로마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당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다인들만 로마에서 추방했을 뿐 예수님을 믿던 로마인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60년대에 들면서, 박해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로마 제국의 적으로 여겨 박해하였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유다교와 구별되는 종교의 신도로서 제국의 공적 박해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의 친서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 공동체들이 자리잡아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게 한다면, 가톨릭 서간은 이미 형성된 공동체들이 박해를 견뎌야 하는 상황을 보여 준다.

 

2) 원로의 권위

 

바오로의 친서와 비교해 볼 때, 가톨릭 서간에서는 원로들의 권위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도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증인들이 다수 살아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의 목격 증인들이 순교로 또는 노쇠하여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사도들의 권위를 계승하여 교회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그 뒤 각 지역 교회에는 원로들이 지도자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3) 이단 문제

 

가톨릭 서간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이단 사상이다. 이단이라는 말은 ‘다른 것을 선택하다’라는 그리스어 ‘하이레오’에서 유래한다. 즉,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른’ 가르침을 선택하였고, 그 결과 교회 안에 이단이 생기게 된 것이다. “거짓 교사들”(2베드 2,1), “속이는 자들, 그리스도의 적”(2요한 1,7)이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이단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가톨릭 서간이 기록되던 때의 그리스도교는 밖으로는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교회를 지켜야 했고, 안으로는 지도자의 세대 교체 및 교회의 정통 가르침 수호라는 과제를 풀어야 했다. 가톨릭 서간은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 구성원을 올바른 신앙생활로 이끌기 위해 초기 교회가 고군분투했던 발자취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 가톨릭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1)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강은희 헬레나

 

 

신약성경의 서간 편에서 가톨릭 서간이 차지하는 분량은 전체 1/4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바오로계 서간에 비하면 차지하는 비중이 꽤 적다. 그럼에도 가톨릭 서간의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야고보 서간은 ‘실천으로 완성되는 믿음’을 강조하여,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물음표를 던지는 듯하다. 얼핏 보아서는 대립적이기까지 한 이 가르침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교 정경에 나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앞으로 6회에 걸쳐 야고보 서간을 읽어가면서, 그 모든 것은 하느님 지혜의 섭리였음을 깨달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누가 누구에게?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1,1).

 

서간이라고 하면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 서간은 서두에서 야고보가 이 편지를 썼다고 밝힌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모두 세 명이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4,21; 마르 1,19)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마르 3,18), 그리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마태 13,55; 마르 6,3)다. 이 중 어느 야고보일까?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 공생활의 중요한 순간마다 항상 함께했던 제자이다. 그런데 성령 강림 후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헤로데의 손에 순교한다(사도 12,2 참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 승천 후 예루살렘 위층 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의 무리와 함께 있었던 것(사도 1,13 참조) 외에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 이후에도 사도행전에 계속 등장하는 야고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에게서 직접 제자로 불리지 않았지만,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었으며(1코린 15,7 참조) 선교 초기의 갈등 상황을 해결할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사도 15,13-21 참조).

 

따라서 야고보 서간의 저자가 우리에게 알려진 세 야고보 중 하나라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세련된 그리스어 문체를 고려하면,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을 나자렛 사람 야고보가 직접 이 서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야고보 서간은 그리스어에 능통한 누군가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의 이름과 권위를 빌려서 쓴 차명 서간으로 볼 수 있다.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1,1)

 

열두 지파라고 하면 당연히 야곱의 열두 아들의 후손들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그 지파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면서도 정작 그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명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징벌의 기간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유다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모든 지파가 다 귀환한 것은 아니었다. 사도 시대 당시의 유다인들은 유배지였던 바빌론과 페르시아 지역을 비롯해 이집트와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면, 독자들이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서간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서간이 오늘날의 우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서 지닌 특별한 자격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 관계의 핵심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인 토라, 그 토라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아니시던가?(마태 5,17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라면 누구든지 야고보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이 서간의 저자도 그것을 더 기뻐할 것이다.

 

완전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상태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1,4ㄴ).

 

비록 약속의 땅을 떠나 세상에 흩어져 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완전함으로 초대하며 이 서간을 시작한다. “완전”이라고 하면 ‘자칫 그 자체로 완벽하여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상태’를 떠올리기 쉬우나 야고보가 말하는 완전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은”(1,8) 것과 반대되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믿음과 실천 사이에, 또한 말과 행동 사이에 그 어떤 불일치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야고보서에서 추구하는 완전이란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상태이기보다 오히려 철저히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에 가깝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름으로써 완전에 이르게 되는 길을 야고보는 ‘믿음과 실천의 관계’, ‘구약성경 지혜의 가르침’, ‘복음서 예수님의 가르침’, ‘시련과 기도’, ‘빈부의 문제와 자비의 실천’ 등 다양한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다양한 주제에 관해 차근히 살펴보며 야고보서 저자의 육성을 가까이에서 들어 보길 희망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야고보 서간 (2) 믿음과 실천

강은희 헬레나

 

 

성경에 수록된 모든 책은 교회의 가르침으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내용이 똑같은 비중으로 읽히거나 인용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특히 좋아하여 더 자주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덜 펼쳐 보게 되는 책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종파에서도 나타난다. 야고보서는 개신교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책이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데, 개신교는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야고보서를 실천적 신앙으로 이끄는 가르침의 중요한 원천으로 여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7). 이 구절이 야고보서에 나오는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이 가르침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주일 미사 참례 정도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길 뿐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면서 안일한 신앙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꾸짖고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입증해야 비로소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지극히 당연하여 반박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은 오랫동안 입장을 달리해 왔다. 개신교 측에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갈라 2,16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지지했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은 실천으로써 드러나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 왔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떻게 이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가르침들이 나란히 자리할 수 있었을까?

 

야고보의 “실천”과 바오로의 “행위”

 

야고보 서간의 “실천”과 바오로 서간의 “행위”는 둘 다 같은 그리스어 ‘에르곤(ἔργον)’을 번역한 것이다. 에르곤은 ‘일, 행위,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에는 ‘에르곤’이 따라야 한다고 하고, 바오로는 ‘에르곤’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니,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위대한 두 지도자가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도의 가르침은 각기 다른 상황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선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이방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다인들처럼 되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흔들리곤 했다. 게다가 일부 유다인 선교사들이 이방인들도 자신들처럼 먼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방인 중에는 자신들의 구원을 할례라는 행위를 통해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구원은 ‘에르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강조한 것이다.

 

야고보서의 경우는 그것과 다르다. 야고보서의 ‘에르곤’은 할례나 율법 조항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천하라고 명하신 행동들, 즉 사랑의 실천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애덕 실천의 의무마저 면제받은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교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에만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행동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야고보가 강조한 ‘실천’은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고, 바오로가 반대한 ‘행위’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율법에 기대는 행위였다. 믿음과 실천에 관해 상반된 듯이 보이는 두 가르침이 나란히 정경으로서 보존되어 온 것은 초대 교회의 문제들이 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가 역사에서 때로는 가시적 행위로 기울고 때로는 실천적 가치들을 경시하여 입술만의 신앙으로 기울 때마다, 그 시대의 오류에 따른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성경 말씀을 나란히 둔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을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험난한 세상살이에 부닥치며 살다 보니 처음엔 여리디여렸던 양심의 결이 어느덧 무디어진 탓일까? 오늘날 우리는 남을 크게 속여 교도소에 갈 정도의 일이 아니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에 대해 심각히 여기지도 않을 만큼 둔감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 있지 않나 싶다. 야고보서는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속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1,22 참조).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양심이라면, 그 양심은 얼마나 맑고 민감해야 할까!

 

“죽는 날까지 …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신앙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 구절이 아직은 시린 3월의 바람처럼 다가온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3) 하늘에서 오는 지혜

강은희 헬레나

 

 

야고보서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 등 교리와 관련된 내용보다 올바른 삶에 관한 윤리적 가르침이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다른 문서들에 비해 그리스도교 정경으로서 가치가 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의 문서 중 가장 철저히 구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야고보서의 관심사는 신앙의 신조나 교리 설파 이전에 하느님 백성으로서 올바르게 살아 완전하게 된다는 데 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예수님 역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달에는 야고보서의 가르침 중 구약의 지혜 전통에 뿌리를 둔 내용에 귀 기울여 보자. 참 지혜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삶임을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1,5)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혜라는 말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실생활에서 어리석음을 피하고 좋은 결과를 맺게 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지혜 곧 실용적 지혜이다. 이런 실용적 차원의 지혜는 건전한 상식과 관찰력을 통해 얻을 수 있으며, 지혜로워지기 위해 반드시 하느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지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차원의 지혜다. 지혜의 원천인 하느님의 법을 배우고 그것을 일상의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는 지혜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를 하느님께 청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참된 지혜는 인간의 이성적 관찰이나 경험을 넘어서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실용적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가 무조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이 다를 때는 서로 대립할 것이다. 야고보는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을 시구 한 자락을 인용해 이를 깨우쳐 준다.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1,11)

 

실용적 지혜는 현세 삶의 성공을 돕는다. 그런데 구약의 지혜 전통에서는 삶이란 덧없는 것이며, 그 덧없음은 풀과 같다고 가르쳤다. 풀과 꽃은 한때 무성한 듯 보이다가도 결국 말라서 사라져 버린다(욥 24,24; 시편 37,2; 90,5; 이사 40,8 참조). 야고보는 많이 모아두면 둘수록 든든히 자신을 지켜 줄 것처럼 보이는 물질적 풍요도 결국은 말라 버릴 풀처럼 허무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제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 재산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죽음의 순간에는 “자기 일에만 골몰”(1,11)했던 시간이 하느님을 등한시하고 이웃에게 무자비했던 시간이 되어 오히려 화를 부를 것이다. 여기서 세상살이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야고보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에, 새로운 가치에 눈뜨라고 초대한다. 비천한 형제는 자신의 고귀함을 보고, 부자는 자신이 비천해졌음을 자랑하라고 한다(1,9-10). 이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자리 잡으시도록 할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물질적 가난의 삶은 언젠가 죽음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겠지만,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은 영원히 지속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힘든 삶일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물질적 부유함이 천상적 재화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 세상의 부귀영화도 하느님 앞에서는 비천할 뿐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하느님의 지혜에 눈뜬 것이다.

 

마음속에 하늘의 지혜를 품고서 살아가십시오(3,13-18)

 

이 세상에는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인정받거나 본인 스스로 그렇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야고보는 그들을 향하여 자신들의 지혜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살펴보라고 권고한다. 지혜가 하늘의 가치를 향하지 않고 세속적 가치를 향해 있다면, 그 지혜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자기 자신의 일에만 골몰하는 지혜는 영악함과 교활함으로 변질될 것이다. 오늘 내가 지혜라고 여겨 실천에 옮긴 행동이 나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줄지라도, 나의 주위에 혼란을 야기한다면 그 지혜는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3,15)이라고 야고보는 가르친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나 자신의 만족보다 자비와 사랑을 선택하도록 하며, 이러한 지혜야말로 나도 살리고 다른 이들도 살린다.

 

이러한 지혜의 삶은 달리 표현하자면 올바른 삶, 의로운 삶이다. 구약의 지혜 전통에서는 지혜로운 이와 의인을 동일시한다. 지혜가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라면 지혜로운 이는 올바른 길을 걷는 자, 바로 의인이다. 그래서 지혜는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통해서 일하며, 그 평화 속에 의로움의 열매가 맺어진다고 야고보는 가르친다(3,18 참조). 참된 지혜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야고보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라고 권고한다(4,8). 하느님께서 지혜의 근원이시니, 지혜를 구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그분께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로 가까이 오신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이 가까이 서로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의 벗이 될 것이다. 세상의 그릇된 가치들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진정한 벗으로서 살아가라는 초대, 이것이 야고보가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4) 예수님 말씀의 메아리

강은희 헬레나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우리 귀에 친숙한 가르침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의심하지 말고 청하라’(1,6),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4,11), ‘녹슬고 좀먹는 재물’(5,2-3),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5,12) 등. 이 말씀들은 모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의 그 어느 서간보다도 충실하게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사용하여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길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닦아 진실만을 전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오히려 그 주인이 되어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바로 잡음: ‘혀의 통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말은 무엇일까? 말은 ‘사람됨의 표출’이다. 말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3장과 4장에는 말에 관한 가르침이 모여 있다. 말조심은 구약의 지혜 전통에서 오랫동안 가르쳐 온 것이다. 집회서 28장은 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지혜서 1장은 지혜로운 삶은 혀의 단속에 있다고 강조한다.

 

구약성경의 여러 가르침을 배우며 자라셨을 예수님 역시 복음서 곳곳에서 말을 신중히 하라고 가르치신다. 형제에게 분노하여 막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 하셨고(마태 5,22), 남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다(마태 7,1). 특히 헛맹세를 엄히 금지하여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까지 이르셨다(마태 5,34). 거짓 맹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느님마저 팔아넘기려는 악행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개탄하시며, “예” 또는 “아니요”로 군더더기 없는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37).

 

야고보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말에 관한 가르침을 펼친다. 교사로서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3,1)과 시기심이나 이기심에서 하는 거짓말(3,14)은 하느님을 거역하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형제에 대한 험담(4,11)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혀만 놀려서도 사람은 자신과 이웃을 망가뜨릴 수 있다. 야고보서는 우리 몸에서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지체가 혀이기에(3,8),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자기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으며 완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친다(3,2). 섣불리 자신의 생각을 얹어 남을 헐뜯거나 판단해서도 안 되며, 오직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권고한다(5,12).

 

재물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

 

“너희는 가진 것 팔아 불쌍한 자 도와주어라. 그 재물을 하늘에 쌓아 주님 상급 받아라. 천국에는 좀도 없고…”(가톨릭 성가 459장). 이 가사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다(마태 6,19).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재물이 꼭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재물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람은 남을 속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쌓아둔 재물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녹슬어 버리고, 정작 자신은 그것을 써 보지도 못한 채 하느님의 심판을 맞게 될 수 있음에도 말이다.

 

루카 복음서에는 모아둔 재산을 곳간에 가득 채워 넣고 흐뭇해하는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다 하셨다(루카 12,18-20). 바로 그날 밤 그 부자는 죽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는 자신의 재물을 쌓아 놓기만 했을 뿐, 그 어떤 선한 일을 하는 데에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서도 세상의 이익을 좇아 삶을 설계하는 것이나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허세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까지 하였다(4,17). 한꺼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 6,24)에 따라, 야고보서 역시 하느님과 세상의 이익은 양립할 수 없으며, 지금이라도 세상과 사귀지 말고 하느님과 사귀라고 권고한다(4,4).

 

생명을 낳는 말씀의 길로

 

물질적 재화와 마찬가지로 말에도 양면성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구원에 이르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세 치 혀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느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이들이라면, 말로 인하여 자신과 이웃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주신 입에 어떻게 찬미와 저주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느냐며 탄식한다(3,9). 이러한 현실이 비단 초대교회 시절에만 국한된 것이었을까? 오늘날은 더욱더 교묘한 방식으로 말 때문에 숱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심지어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도 한다. 진위가 확인되지도 않은 악의에 가득 찬 말들이 화살처럼 공중을 날아다닌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다. 하느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속성을 닮은 것이고, 그분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일까, 죽이는 말일까?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5) 시련 중의 인내와 기도

강은희 헬레나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이들이 당혹해지는 순간 중 하나는 옳은 일을 하는 중에 큰 시련이 닥쳤을 때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법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잘될 것이라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이들은 타인들을 괴롭히고 불의하게 살아가면서도 승승장구하는데,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의인들이 오히려 고난을 겪는 현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누가 기꺼이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 하겠는가? 이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련의 올바른 이해

 

‘시련’ 또는 ‘유혹’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가 야고보서 1,12에서는 시련으로, 1,13에서는 유혹으로 번역되어 있다. ‘시련’이 자기 자신의 잘못과는 관계없이 겪게 되는 것이라면 ‘유혹’은 자신의 약점과 연결된 시험(1,14)이라는 어감이 강하다. 하느님은 인간이 악한 길로 빠져들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나약함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다. 특히 아직은 불완전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누군가의 힘과 노력이 필요할 때라면, 그 몫은 의인이 당하는 수난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견뎌 내야 한다고 야고보서는 가르친다. 우리의 영혼은 시련을 통하여 단련되고 완전하게 될 것(1,12)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닥쳐오는 시련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어떻게 이겨 내야 할까? 야고보는 욥의 인내와 엘리야의 기도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인내의 모범 욥(5,11)

 

욥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의 이름은 고통받는 의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히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욥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약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흠없이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재앙이 닥치자 욥의 친구들은 그 재앙이 자신들은 모르는 욥의 죄 때문에 내려진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참고 견디면서 하느님의 변호에 자신을 맡겼고, 마침내 하느님은 욥의 무죄함을 인정해 주셨다. 욥의 이야기는, 의인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받는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진가를 증명해 주기도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욥의 모범을 제시하며, 야고보서는 역경에 처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운다. 의인에게도 시련이 닥칠 수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이유 없이 주어진 시련은 본인의 잘못으로 당하는 징벌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시련을 견뎌 냄으로써, 인간의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신비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성숙한 신앙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의인은 역경 중에서도 올바른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의 완전한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의인의 기도 : 엘리야의 모범(5,17-18)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야고보서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행동을 강조했다 해서, 영적 측면을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우리가 야고보서를 읽을 때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야고보서는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로써 이겨 내라고 가르친다(5,13). 특히 의인의 기도는 큰 효력을 발휘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일까지도 가능하게 함을 상기시키며, 엘리야의 모범을 제시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홀로 하느님 편에 섰던 위대한 예언자였다. 그는 삼 년이 넘도록 비를 멈추게 하였다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인 가운데 다시 비를 내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놓았다(1열왕 18장). 어떻게 인간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바로 그 하느님께 도달한다. 의인의 기도는 자신의 세속적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찌 못 들은 체하시겠는가!

 

시련에 처한 공동체를 위하여

 

편지라는 한정된 지면에 온갖 주제를 다 담을 수는 없다. 편지란 막연히 좋은 말들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편지의 수신자에게 구체적으로 해야 할 말이 있기에 쓰는 것이다. 편지에 특정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주제가 그 편지를 읽는 이들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전반적으로 시련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겪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박해라는 시련도 함께 겪고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욥과 엘리야의 모범을 제시하여 공동체의 용기를 북돋우고 시련을 통하여 더욱 굳건해진 그리스도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고난 중에도 끊일 줄 몰랐던 인내와 기도의 삶은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 삶의 마지막 날까지 가셨던 길이 아니었던가!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6) 공동체와 사회윤리

강은희 헬레나

 

 

야고보서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에 가톨릭 교회의 사회윤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야고보서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기도 중에만 만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직접 만나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물질을 향유하며 사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숙제이다. 그 외의 영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충분히 채워 주실 것이다. 야고보서가 성경의 다른 문서들에 비해 신학적 논리가 부족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약한 이들을 도와주라는 이 당연한 가르침에 무슨 신학적 논거가 필요하겠는가! 야고보의 가르침은 그 윤리적 당위성 때문에, 그 어떤 말로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매우 단순하고 강렬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자는 나쁜가?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복되다’고 가르치지만, 또 한편으론 부자 되라는 그 말에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가난한 사람들도 있지만, 부자들 역시 교회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부자들은 비난하는 말씀들을 자주 대한다. 가난한 이들은 위로를 받겠지만, 부자들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심지어 부자와 죄인을 거의 동일시하는 성경 구절들도 있다.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만 감싸는 것일까? 부자들은 과연 부자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죄인인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는 재물을 가진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것을 권고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는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부유한 이들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오히려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야고보서의 비난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그 재물을 좋은 일에 쓰지 않은 채 움켜쥐고만 있는 부자들을 향한 것이지, 모든 부자를 향한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가 경고하는 부자들은 일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고, 올바른 이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하고, 빼앗은 결과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이다(5,4-6). 그렇게 모아들인 그들의 재산은 단 한 번도 타인을 위하여 사용되어 본 적 없이 차곡차곡 쌓여만 있었기에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5,2-3). 이것이 바로 죄악인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죄악이 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도 잠식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사치와 쾌락에 절은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겪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름진 마음’(5,5)을 고발한다. 부유함은 그것이 타인을 향할 때는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으나,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는 하느님과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든다. 이미 기름진 마음을 더욱더 살지게 하며, 사람으로부터도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야고보서는 차별하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차별 행위는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다. 그것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대하는 유일한 기준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 차별이 생겼다는 것은 곧 악이 세상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차별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가장 큰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결국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살인 등은 죄라고 인식하지만, 차별을 죄라고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경고한다. 차별은 엄연히 범죄이며,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2,9). 이러한 주님의 심판을 이기는 길이 있으니, 바로 ‘자비’이다(2,13). 자비는 상상이나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비의 실천을 통하여 부자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향하여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윤리이다.

 

야고보와 사회정의

 

재력이나 권력이 옳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됨으로써 발생하는 부정과 불의는 초대교회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직면한 도전이며 과제이다. 교회는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연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순수하게 영적 추구의 영역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도 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데 있다. 예수님의 삶은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기도는 예수님 활동의 원천이었음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기도만 하시지는 않았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일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물질적·육체적 희생을 치르셨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게 사셨고, 옳지 못한 권력 앞에서는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셨으며, 마침내 당신 육신과 생명까지 내놓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영적 가치만을 내세우며 물질적 차원의 희생을 외면하고 부정과 불의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야고보서는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타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장 직설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 서간 (1)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희망을

강은희 헬레나

 

 

야고보 서간에 이어, 이달부터는 여섯 회에 걸쳐 베드로의 첫째 서간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에는 주님을 따르려는 뜨거운 열정,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서투름,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하는 인간적 나약함이 섞여 있다.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성령의 힘으로 변화된 베드로를 만날 수 있다. 숨어 있던 다락방에서 나와 용감히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사도 2장), 보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바오로 사도를 중재함으로써(사도 11장, 15장) 이방인 선교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방인 선교는 바오로 사도의 업적으로 여기지만, 그 선교가 가능하도록 교회의 문을 열어 준 이는 베드로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베드로의 이름으로 두 권의 서간을 전한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을 읽으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원숙해진 원로의 가르침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

 

복음서의 베드로와 서간을 쓴 베드로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가 누구에게?

 

전통적으로 베드로 서간은 베드로 사도가 직접 쓴 편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비평적 성경 연구와 더불어 이 서간은 베드로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두 가지 증거가 자주 거론된다.

 

첫째는 이 서간의 저자가 자신을 원로 중의 하나로 언급한다는 점이다(5,1).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원로들이 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이 두 그룹을 뭉뚱그려 원로들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자신을 “같은 원로”라고 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서간은 원로 중 한 사람이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 썼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바빌론’이라는 지명이다. 신약성경에서 바빌론은 로마를 상징하는 일종의 암호이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뒤로 로마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바빌론과 연결되며 은유적으로 바빌론이라 불렸다.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64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편지를 베드로 사도가 썼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 대부분은 베드로 사도를 가까이 따르던 측근이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70–90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 서간을 쓴 것으로 간주한다. 편지의 저자가 예수님과 함께했던 역사적 베드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이 편지의 저자를 베드로라 칭하도록 하자.

 

이 서간의 수신인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1,1)이다. 바오로 서간을 읽어 본 독자라면, 이 지역은 대부분 바오로 사도의 선교지였을 텐데 어떻게 베드로와 연결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카파도키아, 폰토스, 아시아 등은 사도 2,9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출신지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힘을 받아 여러 언어로 말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사도 2,41). 따라서 소아시아 지역과 베드로 사이에는 그때부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이들을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이라 부른다. 좁은 의미의 나그네살이란 이방인 가운데 사는 유다인들이겠지만, 베드로 서간의 다른 부분을 보면 개종한 이들도 편지의 수신인에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난다(1,14; 2,10; 4,3). 따라서 이 편지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아직은 하느님의 나라가 구현되지 않은 세상에서 나그네살이를 하고 있는 모든 신자에게 들려주는 베드로의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희망을

 

베드로 서간의 주요 주제는 희망이다. 흥미롭게도 바오로계 서간에서는 희망이란 단어가 고르게 등장하지만, 가톨릭 서간에서는 희망이란 단어가 여섯 번만 나오는데, 그 중 다섯 번이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 나온다. 이는 당시의 수신자들에게 희망이 절실했음을 의미한다. 희망은 현실의 어두움을 방증하는 것이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어려움이라면 단연 박해가 으뜸이었을 것이다.

 

네로 황제의 박해는 64년경이고 그 뒤의 박해는 90년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있었으며 이 서간이 기록된 시기는 그 사이이다. 다시 말해 이 서간은 이미 한 차례 대대적인 박해를 경험했고, 다시금 박해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쓰인 것이다. 대대적인 박해 법령이 공식적으로 없었다 할지라도, 당시에는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으로도 박해 대상자가 되기엔 충분했다(4,14).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신앙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전의 인간관계로부터 단절된 채, 배척 또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전해진 편지는 그들이 누리게 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대한 자각, 그리고 비록 예전의 친지, 지인들로부터는 고립되었을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어둠 너머로 빛나고 있는 희망을 가리키며, 그곳을 향해 인내로이 전진하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다음 달부터 베드로가 인도하는 그 희망의 길을 찬찬히 따라가 보도록 하자.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

강은희 헬레나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특정 공동체의 구체적 현안을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나 태도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이 서간의 전체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으로써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시련을 견디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승리가 실현될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도록 격려하며 이끄는 것이다. 이달에는 베드로의 첫째 서간 1,1-12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베드로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보자.

 

하느님의 자비로 새로 태어난 우리(1,3)

 

베드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로 서간을 시작한다. 이러한 찬미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신 그분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미 태어나 자연적 생명을 누리는 상태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베드로는 그것을 희망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며 그분의 몫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활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이것이 바로 하늘에 보존되어 있는 우리의 몫이며, 우리 희망의 근원이다. 새로 태어난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하늘의 상속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희망과 감사로 시작한 메시지는 곧바로 시련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는 하늘의 상속이라는 복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시련도 함께 찾아온다. 이 시련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야 할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그 해법을 찾도록 이끈다.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1,7)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거워하라고 독려한다(1,6). “즐거워하십시오”의 원어는 ‘기뻐 용약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아갈리아오’(agalliao)의 명령형이다. 즉 ‘즐거워하라’는 베드로의 권고는 기뻐 뛰며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환희에 차 있으라는 의미다. 왜 이토록 즐거워해야 할까?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돼 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서간의 수신자들이 겪는 것은 갖가지 시련이요 슬픔이다. 그럼에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왜일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재의 복락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현재의 시련으로 얻어지는 것은 금보다 귀한, 순수한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련이란 무엇일까?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정치적 박해를 배경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박해하진 않았더라도 사회적 박해의 가능성까지 배제되진 않았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 과거의 악습을 끊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릇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질시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이들은 근거없는 비방, 따돌림, 그리고 거짓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감으로써 당하게 되는 다양한 시련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시련 때문에 포기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시련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참 신앙이기에 시련은 황금보다 더 귀한, 순수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하다. 시련을 이겨 내기는 쉽지 않고 많은 사람이 시련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에, 그것을 이겨 낸 신앙은 황금보다 더 귀하다. 또한, 시련 중에도 무너지지 않는 믿음은 그 믿음 속에 자기를 위한 욕심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만 채워진 믿음이기에 순수하다. 결국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 시련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현재의 시련을 이겨 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믿는 복된 이들이라고 칭송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베드로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세례로써 새로 태어날 때 무엇을 약속받았던가?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 우리가 취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던가? 예수님만 믿으면 이 세상에서 평안과 번영을 누리리라고 내심 기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베드로의 가르침은 그런 헛된 약속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다.

 

신앙인의 삶에서 시련은 필수이며, 믿음은 시련을 통해 증명된다. 그 길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힘으로 맞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 청하시기만 하면 천사들의 군대도 부르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마태 26,53). 그분의 방법은 시련과 십자가 앞에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이었다. 그로써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우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황금보다 더 귀한, 순수한 믿음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새로 태어나는 이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 신자로서 사는 모든 이들이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마음 자세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락을 바라고 믿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금보다 더 귀한 초월적 가치를 향하여 우리를 개방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3) 그분께 가까이

강은희 헬레나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새로 태어난 이들로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며 값진 황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잘 단련시킬 것을 독려하였다(1,1-12). 이달에 살펴볼 1,13-2,10에서 베드로는 그렇게 새로 태어난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삶과 그분을 안 뒤의 삶을 대조하며, 이전의 삶이 욕망에 따른 것이었다면 새 삶은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1,14)

 

베드로는 권고를 시작하면서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1,13) 그리스도께 모든 희망을 걸라고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를 그리스어 원문대로 옮기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이다. 이 표현과 관련된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허리를 동이고 선 채로 파스카 식사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단순히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을 위한 태세를 갖춘다는 의미다. 무엇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인가? 그것은 바로 과거의 청산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수신인들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난 이들이며, 새로 태어났으니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고, 그 변화는 구체적 행동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새 삶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엿볼 수 있다. 베드로는 새 생명으로 들어선 이들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인에게 그 여인의 지난 죄는 묻지 않으시고, 단지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11)고 하신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그들의 지난 과오를 캐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과오는 무지의 탓으로 자비로이 덮어진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진짜 죄악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현재 중요한 것은 단호하게 과거와 결별하는 일이다.

 

주님을 몰랐던 때에 그들은 욕망에 따라 살았으며(1,14), 그들의 삶은 악의, 거짓, 위선, 시기, 중상(2,1)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토록 흉한 삶을 뒤로하고 이제 그들은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새 생명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새 생명이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써 치러진 희생을 통해(1,18-19) 얻어진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무한한 가치를 치르고서 얻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 역시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15)

 

귀한 대가로 얻은 새 삶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베드로는 그들이 단지 바람직하고 선한 정도의 삶이 아닌, 거룩함으로 부름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자녀가 부모를 닮듯,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들은 그들을 부르신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심어주신 거룩함이 자라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갓난아이에게 어머니의 젖이 필요하듯, 신자들에게도 영적인 젖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고 가르친다(2,1-2). 거짓과 죽음, 썩어 없어지는 것들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장과 생명을 길러 주는 젖을 갈망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영혼을 얼마나 해롭게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온갖 죄를 저질렀다면, 이제는 영혼을 살리는 행동으로 영혼을 성장시켜야 하며, 이에 필요한 것이 영적이고 순수한 젖이다. 그것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진리에 순종하라고 가르친다(1,22). 부모의 올바른 가르침에 순종하며 자란 자녀가 고결한 인격자로 성장하듯, 진리에 순종하는 영혼은 세월의 때가 묻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깨끗해질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악습을 끊고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성장을 이루는 이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며, 그들의 남은 숙제는 그러한 생활을 계속 유지해 가는 것뿐이다(1,22).

 

“주님께 나아가십시오”(2,4)

 

영혼의 정화와 성숙은 단 한 번의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끊임없이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라고 가르친다.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은 거추장스럽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겠지만,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이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은 진리의 반석이다. 이 살아 있는 돌, 진리의 반석을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제단임을 알려 준다(2,9). 아론의 후손들에게만 주어졌던 그 고귀한 직분이 이제는 새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 신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제들이 제단을 향해 삼가는 마음으로 나아가듯 그리스도인들도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며,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베드로는 독려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삶의 소용돌이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가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혼탁한 세상에서 삶의 십자가를 지고 어려움을 감수하는 중에 맑은 영혼을 지켜가며 주님께 조심스레 한 걸음씩 다가가는 삶은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가! 주님께서는 또한 그 삶에 얼마나 복을 주시겠는가!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4) 세상의 자유인, 하느님의 종

강은희 헬레나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젖으로 성장하여 거룩함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준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을 뵙기 전까지 머물며 살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다. 2,11-25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순명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분을 모르는 이들이 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해 가야 할지를 일러 준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2,12)

 

베드로는 세상의 육적인 욕망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2,11). 그렇다면 세상과는 등지거나 멀어져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주님을 향하여 돌아선다는 것은 악습을 뒤로한다는 것이지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맞서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병들게 하는 악행들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이든 후이든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의 가치에 영합하는 일 없이, 신자로서 올바르게 처신할 것을 권고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12). 이 구절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의 집단이라는 비방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비방을 받았다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의미다. 베드로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선 신자들이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이 아니라 올바른 방식의 삶을 굳건히 살아 내기를 권고한다.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종으로서’(2,16)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악행에서 돌아섰다고 해서, 세상에 맞서는 불평분자들의 집단으로 오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이들과 공존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한다.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되, 자유인으로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2,13.16). 자유와 복종은 상반된 개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무엇을 위한 복종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때문에 세속 법의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더는 세상의 그릇된 욕망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서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위가 휘두르는 강제력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통해서 돌보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으로 더욱더 가꾸어 가기 위한 복종이다.

 

자발적 복종은 하인들에게까지도 명해지고 있다. 특히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가르친다(2,18). 이는 매우 당혹스럽다. 악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악행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가르침은 시대적 상황의 한계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으며, 노예는 주인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노예 주인에게 노예를 주님 안에서 형제처럼 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선동처럼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노예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생계를 위해 모든 것을 참으며 그 주인을 섬기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이다. 모든 탈출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 도망친 노예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현실적인 권고를 한다. 성실한 자세로 주인을 섬긴다면 주인의 신임을 얻을 것이고, 이러한 인식들이 축적되면 결국 그리스도를 섬기는 노예 전체의 평판이 높아져 그들도 존중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노예로서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은 가혹하다. 그 고난의 시간을 베드로는 수난하신 주님과 함께하라고 권고한다. 이는 불의를 묵인하거나 불의에 협조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불의에 저항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거나 이 세상의 불의가 단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나긴 과정 중에 있다. 이 기나긴 불의의 터널을 견디며 뚫고 나올 수 있게 하는 힘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함으로써 얻게 된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2,20)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이 닥칠 때 그리스도 신자들은 당황할 수 있다. 올바른 삶이 모든 이의 환호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그 자체가 악인들을 향한 공격이며, 그렇기에 악인들은 의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수긍이 가는 논리지만, 막상 내게 닥치면 여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베드로의 편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불의는 항상 강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선이다. 그 옛날 그리도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5) 순종과 존중

강은희 헬레나

 

 

2장에서 베드로는 새로 태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가는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줄 길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단죄하고 세상에서 고립되어 독선적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모범적으로 살며 세상이 변화될 기회를 줌으로써 세상의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다. 3,1-7은 성화의 원동력이 될 가정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베드로는 특히 주님 안에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제시한다.

 

썩지 않는 것으로 치장하십시오(3,4)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3,1-2). 이 구절에 저항감을 느끼는 여성들도 많을 것이다. 아내와 남편 간의 관계는 대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순종이라니? 게다가 믿지 않는 남편의 회심의 책임을 그 아내에게 지우자는 것인가? 하지만 베드로의 가르침을 찬찬히 읽어 가노라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종은 노예가 주인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순종은 아닌 것 같다.

 

당시의 상황에서 따져 보자면, 남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부인 혼자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그 자체로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믿지 않는 남편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명하는 ‘순종’이란 두 사람을 한데 맺어준 부부간의 도리에 관한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면, 서로 상대방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배우자에 대한 충실함, 부부간의 신뢰일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여인들이 실천해야 할 아내로서의 순종은 바로 이 부분이라고 가르친다. 결혼하였음에도 남편 외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끌고자 하며, 외모를 치장하고 가정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그 자체가 남편에 대한 불순종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여성으로서의 정숙함과 신앙인으로서의 경건함으로 치장하라고 가르친다(3,3-4).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부인들의 순종(3,5)

 

이러한 아내의 삶에 감화되어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남편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면 좋겠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아내의 경건한 삶에도 남편이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정성과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남편의 불신앙마저 아내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함께 사는 가족이 저마다 다른 신앙을 가질 때, 대립과 충돌을 피하고자 마음의 담을 쌓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섭리에 맡기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함께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 그 희망의 힘으로 경건함과 품위를 잃지 않으며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를 베드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외로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 ‘생명의 은총’의 공동 상속자(3,7)

 

남편들을 향한 베드로의 권고는 세 가지이다.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면 아내의 연약함에 관한 지식을 갖고 살아가며, 아내에게 존경을 표하고, 아내를 ‘생명의 은총’의 공동 상속자로 여기라는 것이다(3,7). 이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으며, 결혼한 여성들을 남편의 소유물로 여겼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매우 놀라운 가르침이다. 베드로는 아내가 연약한 존재임을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남녀 간의 차이점을 인식해 자신의 기준을 아내에게도 똑같이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신체적이든 기능적이든 간에 인간은 자신에게는 가능한 것을 타인이 못하는 경우, 쉽사리 그를 업신여기게 된다. 다시 말해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다. 가장의 권한을 지닌 남편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 달리 부여받은 창조의 선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의 평화는 깨어질 것이다. 또한, 아내를 존중하라는 것은 아내를 자신이 거느린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덧붙여, 아내를 영원한 생명의 공동 상속자로 여기라고 가르친다. 당시의 세속적 상속 관습은 아버지로부터 맏아들 중심으로 이어졌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상속은 여인들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으며, 남편은 그 아내를 동일한 상속 지분을 받는 거룩하고도 귀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베드로는 경고한다.

 

가정이 신앙생활의 요람이 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렵다. 결국 성당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만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삶의 기본 단위인 가정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며 특별히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한다. 존중과 순종, 이는 비단 부부간의 도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약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당연히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 가톨릭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