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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탈출기와 거울 보기(2) - 김영선 루시아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8.

탈출기와 거울 보기 (2)

(13) 마싸와 므리바의 물

김영선 루시아 수녀

 

 

말씀의 거울은 참 신비합니다. 거울이 오래되면 반사 기능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말씀의 거울은 전혀 낡지 않습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점점 더 세밀하게 우리의 모습을 되비춥니다. 이달에 우리가 읽을 말씀은 탈출 17,1-7입니다. 이 짧은 말씀이 얼마나 우리의 모습을 속속들이 드러내는지를 깨닫게 되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신 광야를 떠나 르피딤이라는 곳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오아시스가 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물이 다 떨어져서 목이 말라 있었던 백성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달려들어 물을 내놓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느냐고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기적을 망각하고 또 이렇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마실 물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의 목마름이 다급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 짧은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위기 앞에서 하느님의 존재마저 의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17,4)

 

모세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째서 나와 시비하려 하느냐?”(17,2) 모세의 이 말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모세의 말처럼 왜 백성은 모든 것을 모세에게 기대합니까? 과연 모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습니까? 이 기대는 합당한 것일까요? 누군가에게 건 나의 기대가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닐까요? 상대방이 채워 줄 수도 없는 기대를 그에게 잘못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므로 아주 가끔은 우리 자신의 기대에 대하여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걷는 여정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고, 또 그럴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입니까? 내가 기대를 걸고 있는 누군가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입니까? 나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는 자신의 불행에 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을 때 모세 역시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곧 전능자가 되고 싶은 유혹, 백성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이런 유혹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이나 무력함을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혹은 헛된 약속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17,4)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백성이 누구를 향해야 하고,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합니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지도자로서의 우리 모습은 어떠합니까? 모세처럼 자녀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안내합니까? 그들을 살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이끌어 줍니까? 혹은 모두가 나만 우러러보기를 바라고,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보이려고 애씁니까?

 

“그대로 하였다”(17,6)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원로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주님께서 서 계신 호렙의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그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원로들 앞에서 ‘그대로 하였습니다’(17,6).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는 하느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백성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합니다. 이것이 쉬운 일일까요? 모세의 모습에서 진정한 순종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만약 모세가 자신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 명령을 따르는 일에 주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 그분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순종은 자신을 잊은 종에게만 가능합니다.

 

모세의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인식하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르피딤의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물로 그들의 타는 목을 축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 주시는 하느님, 그들의 물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첫 번째 광야 여정 중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그곳의 이름을 ‘시험과 시비’를 의미하는 ‘마싸와 므리바’로 부릅니다.

 

마싸와 므리바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도 하느님의 길은 열립니다.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알고 순종하는 이들의 굳건한 선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물길은 바위를 뚫고 터져 나옵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4) 주님은 나의 깃발(야훼 니씨)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광야 여정은 광야 삶의 고단함을 잘 보여 줍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광야를 달구고, 밤이면 칠흑같은 어둠과 함께 급격히 식어 버린 대지가 한기를 뿜어냅니다. 광야의 혹독한 기후는 식물이나 동물에게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광야를 지나는 이들은 목마름과 굶주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사다리인 광야 여정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로 들어선 첫 순간부터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은 광야가 그저 고통스러운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광야의 곤란 가운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는 하느님, 물과 음식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또 광야에서 자신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였고, 약속의 땅을 향한 그들의 결단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이 두 가지 앎이 결여된다면 진정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참된 신앙에 이르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장소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 위하여 광야를 거쳐야 했다면 오늘 우리가 거쳐야만 하는 광야란 무엇일까요? 오늘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시련과 고통이 혹시 그 광야는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광야 여정은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 고통과 쓰라림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피하고만 싶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시련이나 아픔이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나를 마주하게 하고, 그 가난한 나를 당신의 부요로 품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구원의 사다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이달에 우리 거울이 되어 줄 탈출 17,8-16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경험한 새로운 시련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시련이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면,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고통은 적의 공격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고된 행군에 지쳐 르피딤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곧 그들이 무방비 상태였을 때, 아말렉족이 그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아말렉족은 가나안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네겝이라는 광야를 차지하고 활동하던 유목민들인데,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그들은 무장을 갖추지도 못했고, 그들 대다수는 어린이와 노인, 여자들이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선 모세는 여호수아라는 젊은이를 뽑아 다른 장정들과 함께 아말렉족과 싸우게 합니다. 모세 자신은 하느님의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후르와 함께 언덕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팔을 들고 있으면 전세는 이스라엘에 유리해지고, 지쳐서 팔을 내리면 다시 전세는 불리해집니다. 그리하여 아론과 후르가 모세의 팔을 해 질 때까지 받쳐 주었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는 이 전쟁의 승리가 여호수아의 용맹함이나 훌륭한 지도력 때문도 아니요, 모세의 공로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는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지켜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인한 것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던 모세는 자신이 팔을 쳐들고 있었던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야훼 니씨”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전쟁의 승리가 오직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위기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크게 드러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드러나심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론과 후르의 겸손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가능했습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 기적적인 사건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 덕분에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의 겸손으로써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 하느님이 크게 드러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르피딤이라는 광야에서 야훼 니씨를 고백하였던 모세와 여호수아, 아론과 후르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시다.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고, 하느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양 자랑하는 내 모습이 거기에 있지는 않나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겸손하다면 세상의 모든 일,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기적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일도, 오늘 무사히 귀가하게 된 일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되풀이할 수 있는 것도 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일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느 깃발 아래 서 있는가? 나의 이름도,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닌 주님의 이름이 적힌 깃발 아래 서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2월호(통권 491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5) “짐을 나누어 져라!”

김영선 루시아 수녀

 

 

18장은 첫 번째 광야 여정 중에 발생한 마지막 사건, 곧 모세의 장인 이트로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미디안의 사제이며, 모세의 장인인 ‘이트로’의 이름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가 목격한 하느님의 현현(懸現)을 소개할 때(3,1)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 이후 친척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장인에게 말합니다(4,18).

 

이트로는 모세가 편히 떠날 수 있게 해 주었고,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습니다(4,20). 이렇게 서로 헤어진 후 이트로가 다시 모세를 찾아옵니다(18,5). 친정에 가 있던 모세의 아내 치포라와 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제르를 데리고 모세에게 온 것입니다. 모세가 언제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이트로에게 돌려보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트로가 치포라와 손자들을 모세에게 데려오게 된 계기는 그가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18,1). 모세는 장인을 맞아들이고, 그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에게 직접 전해 줍니다. 이트로는 모세로부터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파라오와 이집트에서 하신 일들과 그들이 광야 여정 중에 겪었던 고생, 그리고 주님께서 베푸신 도움에 대해 들은 후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고맙고 좋은 일들’에 대해 기뻐하며, 이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또, 주님이 그 어떤 신들보다 더 위대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이트로는 하느님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하느님 앞에서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와 함께 친교 제물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는 이트로가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미디안의 사제인 이트로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트로는 모세에게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조언해 줍니다(18,13-26).

 

18,13-26은 이스라엘의 사회 조직이 확립된 배경을 소개하는데, 민수 11,11-20과 신명 1,9-18을 함께 비교하며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동일한 사회 조직의 확립 과정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먼저 민수기에서는, 백성에 관한 무거운 책임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세가 이를 주님께 하소연하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원로 일흔 명을 뽑아 만남의 천막 주위에 둘러서게 하고, 모세의 영의 일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민수 11,11-30). 즉 모세의 짐을 나누어질 원로들의 선정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한편 신명기에서는, 주님의 강복으로 백성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에 관한 책임을 혼자 질 수 없다고 생각한 모세가 각 지파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뽑아 각 지파의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과 관리로 삼습니다(신명 1,9-18). 즉 이스라엘 사회 조직의 확립은 모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에서는, 이스라엘 사회 조직 정비가 이트로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나타납니다(18,13-26).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온종일 조용히 지켜본 이트로는 모세가 행하는 리더십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모세는 주님의 뜻을 물으러 온 백성을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일일이 만나고, 하느님의 규정과 지시들을 가르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트로는 그런 리더십은 지도자도 백성도 모두 지치게 할 것이라며, 새로운 리더십 모델을 제안합니다. 이트로는 모세에게 ‘짐을 나누어 지라’고 말합니다. 백성의 대리자인 모세는 백성의 일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과 규정을 가르치는 일을 맡고, 백성의 송사는 대표들을 선출해 그들이 맡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뽑아 그들이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들이 다룰 수 없는 큰 송사만을 모세에게 가져오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모세도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고, 백성도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합니다.

 

이 사건 역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거울이 됩니다. 이트로의 지혜도, 그의 충고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모세의 겸손도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만, 이트로가 제시한 리더십의 형태 또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볼 좋은 거울이 됩니다. 모세만큼은 아니라도 우리 역시 각자가 속한 삶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책임을 지고 삽니다. 혹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태도로 다른 이들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나누어 지게 해 놓고도 세세한 일까지 모두 참견하면서 협력을 받는 대신 지배하려 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시다. 이트로는 모세와 작별하고 제고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모세를 구속하는 대신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훌훌 떠나는 이트로의 뒷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뒷모습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6) 이스라엘의 새 이름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의 기나긴 광야 여정의 제1부, 곧 첫 번째 광야 여정은 탈출기 19장에 이르면 끝이 납니다. 그들이 드디어 시나이 산 기슭에 당도한 까닭입니다. 이집트를 떠나서 시나이 산에 이르기까지는 약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제 이곳 시나이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운명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19-2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체결한 계약에 대해 설명합니다. 먼저, 19,3-6에서 하느님께서 계약 체결을 제의하시면 백성은 이에 동의합니다(19,7-8). 백성이 사흘 동안 계약 체결을 위한 준비를 하고 난 뒤(19,9-15), 하느님께서 불과 연기와 우렛소리로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19,16-25). 이어서 계약의 조건인 하느님의 법규들, 곧 십계명(20,1-21)과 계약 법전(20,22-23,33)이 선포되고, 마침내 계약이 체결됩니다(24,1-11). 이 계약을 통상적으로 ‘시나이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계약입니다. 이번 달에는 19,1-8의 내용, 곧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안하신 계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백성이 마침내 시나이 산이 보이는 광야에 이르러 그곳에 진을 쳤을 때, 모세는 하느님께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려는 의도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의 계약에는 동등한 두 상대가 맺는 상호조약이 있고, 주종 관계를 이루는 두 상대가 맺는 수호조약이 있었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체결될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은 수호조약 형식에 가깝습니다. 보통 수호조약에서는 종주국 임금이 종속국 임금에게 베푼 은혜가 나열되고 강조됩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19,4). 이 짧은 구절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해 내셔서 이곳까지 데려오셨는지를 간략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나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독수리 둥지는 보통 아주 높은 바위나 나무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새끼들은 하강할 때 겁을 먹고 맙니다. 혹시라도 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새끼라면 떨어져 죽고 말겠지요. 그래서 어미 독수리는 2미터가 넘는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서 새끼를 쫓아 하강합니다. 이런 독수리의 습성을 잘 아는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데려 내온 과정을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날개에 태워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합니다.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은 자녀를 돌보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부모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하느님의 보호가 늘 나와 함께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음에도 혼자 살아온 것처럼 외로워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은 내 사정 따위는 못 본 체하신다고 울부짖고 있지는 않은지요? 고단한 내 삶에 함께하셨던 하느님의 자취를 알아보고, 그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대 근동의 수호조약이라는 형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이 계약은 법적인 구속력만을 갖는 무미건조한 계약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랑하는 이들이 맺는 사랑의 계약입니다. 이 때문에 첫 번째 광야 여정 전체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는지를 부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고, 이제 그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상대자가 되었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성실히 지키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제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사제들의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19,5-6). 곧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약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소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서굴라’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하느님의 귀한 보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백성 사이를 중개하는 사제의 직분을 수행할 것이며, 하느님에게 속한(=거룩한) 민족, 곧 하느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약을 통해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제안에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19,8)고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응답 안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더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을 따로 떼어 내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19,9-15).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계약을 통해 새 이름을 얻었다면 세례 때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우리 각자가 얻은 새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새 이름을 얻고도 여전히 낡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나의 ‘새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새로워지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4월호(통권 493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17) 계약 체결을 위한 준비

김영선 루시아 수녀

 

 

시나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한 준비에 들어갑니다(19,9-15). 하느님의 신현을 맞기 위해 그들은 사흘 동안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입고 성적 금욕을 실천합니다. 또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지 않도록 산 근처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토록 엄정한 준비가 필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거룩하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나이 계약을 통해 그들의 신원이 변화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계약을 맺고 나면 그들은 계약의 백성이 됩니다. 계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준비하면서 이 계약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그들은 하느님의 신현을 목격하였습니다(19,16-24).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는 가운데 짙은 구름과 연기로 뒤덮인 산 위에 불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만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만큼 그들과 가까운 분이시지만 여전히 그들이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에 큰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느님께서 크고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목적은 그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여 죄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0,20). 시나이 산에 나타나신 하느님은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맺게 될 계약의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20,1-17)입니다.

 

시나이 계약은 조건적인 계약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조건을 준수할 때만 그 효력이 유지됩니다. 이 계약의 효력이란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편이 될 것이며,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오직 하느님께만 충성을 바치는 백성이 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십계명 뒤에 나오는 계약 법전(20,22-23,33)은 이 계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법을 준수한다면 하느님과의 계약은 언제까지나 유효합니다.

 

십계명은 ‘열 가지 말씀’을 뜻하며,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명약관화하게 제시합니다. 이번 달에는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친밀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알려 줍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해야 합니다(20,2-6). 이 말은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느님보다 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의 대상을 하느님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사는지, 누구의 눈치를 보며 사는지를 잘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말은 또한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자리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으리라 여기며 애착하는 대상이 하느님인 사람은 정녕 행복합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차고 넘치도록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명하신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이들에게는 삼 대, 사 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물으신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걸려 넘어집니다. 하느님은 참 잔인한 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 대와 삼사 대는 비교가 안 되는 숫자입니다. 그분의 자애는 심판보다 훨씬 더 큽니다.

 

두 번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하거나 그분을 찬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른 이들에게 그분을 선포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만약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려고, 혹은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괴롭히려고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목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정으로, 이는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주님을 위해 바치라는 것입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식일에는 집안의 식구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 집짐승과 이방인들도 모두 쉬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이 계약에 참여합니다. 이 세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성공과 성취를 하느님보다 앞세우며, 부와 권력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일의 쉼을 어떤 식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의 쉴 권리를 강탈하는 세상에 협력하지는 않습니까? 십계명은 여전히 새로운 거울로 우리 모습을 비춰 줍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5월호(통권 4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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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옛 계약의 표시와 새로운 계약의 표시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 기슭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조건이 달린 계약입니다. 계약의 조건은 십계명(20,1-17)과 계약법전(20,22-23,33)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난달에 우리는 십계명 가운데 첫 세 계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세 계명이 하느님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한다면, 나머지 일곱 계명은 이 계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넷째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입니다. 부모 공경은 지혜문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가치로 다루어지는데, 그 가르침에 따르면 부모 공경이란 부모의 가르침과 교훈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잠언 1,8; 6,20), 부모가 주는 견책을 달게 받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과 태도를 바꾸는 것(신명 21,18 참조), 생명을 주신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집회 7,27-28),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집회 3,1-16)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의무’란 말과 행동으로 부모를 공경하되 상전처럼 섬길 것, 연로하신 부모를 젊었을 때와 똑같이 존경하고 설사 지각을 잃게 되더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지혜문학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고 장수를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집회 3,3.6). 이처럼 부모 공경을 강조한 이유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라키 예언자는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와서 메시아 시대를 준비할 때 그가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는 것’(말라 3,24)이라고 선포합니다.

 

다섯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설명하시면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21-26). 나와 함께 사는 이들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며 무시하는 행위가 곧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계명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음욕을 품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것이 곧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마태 5,28). 내가 마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만의 과거와 현재가 존재하고 미래의 꿈도 품은, 한마디 말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존재입니다. 그런 그의 본질적 측면은 보지 않고 그의 얼굴이나 몸 등 신체의 일부만을 보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의 전 존재를 잔인하게 축소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간음이 가져올 두려운 결과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욕구의 대상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 뺏는 것만이 도둑질이 아니라 내 몫이 아닌 것을 갖는 것,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차지하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충분함의 윤리’를 주창하는 이들은 충분히 쓰고도 남는 것은 다른 이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내 서랍과 옷장에 일 년 동안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은 내게 필요없는 것인 동시에 다른 이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제 몫이 아닌 많은 것을 소유한 도둑인 셈입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가진 것들을 정리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여덟째 계명은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구약 시대의 법정에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만 유죄가 성립됩니다(민수 35,30; 신명 17,6; 19,15 참조).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거짓 증언을 한다면 억울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봇입니다. 나봇은 그가 하느님과 임금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한 두 불량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1열왕 21,11-14). 이처럼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도 거짓 증언이지만,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거짓 증언에 해당합니다(23,1). 증언을 회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레위 5,1 참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요즘, 나의 말이 사람을 살리는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며,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을 더욱더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탈출기의 마지막 계명(20,17)은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인데, ‘이웃의 집’ 곧 이웃의 소유에는 이웃의 아내,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등이 포함됩니다. 신명 5,21은 이 구절을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분리합니다. 즉 이웃의 아내는 이웃의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적인 범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명기 십계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홉째와 열째 계명 모두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 ‘탐내다’(하마드 חמד)는, 어떤 것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얻고자 구체적으로 궁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귀한 것이라도 부당한 수단으로 얻으면 흠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흠은 그것을 소유한 이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비뚤어지게 합니다.

 

십계명의 모든 명령은 한 사회가 적절하게 유지되는 데 꼭 필요한 규정들입니다. 하느님은 이 열 가지 말씀을 돌판에 새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고, 이 돌판은 그들에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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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계약법전에 담긴 사랑의 지혜

김영선 루시아 수녀

 

 

시나이 계약의 체결은 탈출기 24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시나이 계약의 조건이 되는 십계명과 계약법전의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십계명에 이어 나오는 계약법전은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에 따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계약법전이라는 제목은 “계약의 책”(24,7)에서 나온 말로, 이 책의 내용이 법이기 때문에 학자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모세는 이 책을 계약예식 중에 백성에게 읽어 줍니다(24,7 참조). 오경에는 계약법전(20,22-23,33) 외에도 사제계 법전(25-40장: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사제와 연관된 법들), 신명기 법전(신명 12-26장), 그리고 성화법전(레위 17-26장)이 있습니다. 이 법전들을 비교해 보면 - 노예 해방이나 안식년, 축제일에 관한 규정 등 - 동일한 규정에 대한 세부 설명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법전들이 형성된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성실히 지키려고 한다면 오경에 나오는 규정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서로 다른 성경의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해 줄 율법 학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친절한 율법 학자는 없지만, 위대한 스승이신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시나이 계약의 조건이 되는 계약법전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법전의 순서를 살펴보면, 먼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우상숭배와 제단에 관한 법’(20,22-26)이 언급되고, 이어서 ‘민법과 형법에 해당되는 일련의 규정들’이 소개됩니다(21,1-22,16). ‘윤리적 · 종교적 권고 모음’(22,17-23,19)이 그 뒤를 따르고, 이 법률 규정들을 지킬 때에 따라오는 ‘보상과 경고’를 언급하는 후문(23,20-33)으로 법전은 종결됩니다. 그런데 이 법전은 완전하고 체계적인 법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 상거래나 결혼과 상속, 행정에 관한 법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탈출기 안에 계약법전을 포함시킨 저자는 이스라엘의 고대 법전을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의와 종교에 대한 이상적인 원칙을 제시하기 위하여 특정한 법을 선택하여 소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약법전은 ‘제단에 관한 법’(20,22-26)으로 시작됩니다. 계약법전 뿐만 아니라 성화법과 신명기법전 모두 예배와 예배 장소에 대한 법으로 시작됩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탈출 20,24-25은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되,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하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제단을 쌓을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의 첫머리인 신명 12,5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려고 … 선택하시는 곳” 바로 그곳에서만 제단을 쌓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명합니다. 따라서 제단을 쌓을 때, 충돌하는 이 두 법 중 어느 규정을 따라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탈출기의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인 이스라엘에게는 어디에서든지 제단을 쌓고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실천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처한 사회 ·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법규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법은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지만 근원적으로 그 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제단에 관한 법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제단에 관한 법 규정이 말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예배하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정해진 규정 안에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가 율법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나의 욕구와 필요를 내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려면 수시로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나의 욕구와 의지를 길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법은 노예 해방에 관한 법(21,1-11)으로 히브리인이 종이 되었을 경우에 일곱째 해에는 해방시켜 주라는 규정입니다. 이 법이 여자 노예에게는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의 취지는 묵상해 볼 만합니다. 이 법은 적어도 7년마다 종속관계가 발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형제관계로 회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옛 규정이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만약 우리가 적어도 7년마다 어긋난 인간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법 규정들, 특히 탈출 21,12-23,19에 언급된 법 규정들도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법 뒤에 감추어진 사랑의 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20) 진실한 예배와 진실한 관계

김영선 루시아 수녀

 

 

계약법전은 ‘우상숭배와 제단에 관한 법’, ‘민법과 형법에 해당되는 일련의 규정들’ 그리고 ‘윤리적·종교적 권고 모음’과 후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윤리적·종교적 권고 모음’에 해당하는 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공동체에 관한 규정과 하느님에 관한 규정이 교차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약자보호법’(22,20-26)과 ‘정의 실현에 관한 법’(23,1-9)이 공동체에 관한 규정이라면, ‘하느님을 섬기는 법’(22,27-30)과 ‘안식년과 안식일, 삼 대 축제에 관한 법’(23,14-19)은 하느님에 관한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에 관한 규정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법에는 당시 사람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들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약자보호법의 규정에는 이방인, 과부, 고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모두 그 사회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 낼 수 없는 약자였습니다. 약자보호법은 이 약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또 왜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억압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규정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고, 따라서 이방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불이익과 결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무도 보호해 줄 이가 없는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고 하는데, 그들이 하느님께 부르짖으면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복수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셋째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자를 물리거나 채권자 행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규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자보호법은 이런 규정들을 통하여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공동체 안에서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을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한 사회나 국가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보장하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마련할 때 비로소 그 사회나 국가는 진정한 안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약자보호법은 또한 하느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정의 실현에 관한 법 역시 공동체의 삶을 위한 규정입니다. 이 법은 무엇보다 관계에서 정의를 요구하는데, 관계 정의는 진실에 바탕을 둘 때에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법은 다양한 차원의 사실 왜곡을 금지합니다. 첫째, 있지도 않은 사실을 유포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따라서,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것, 다수를 따라 정의를 왜곡하는 것이 금지되는데, 이는 모두 누군가의 생명을 해치는 두려운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둘째, 뇌물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뇌물을 받고 정의를 왜곡하거나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명합니다. 부자라고 편들거나 가난하다고 편들지도 말며, 편파적인 재판으로 법적 정의를 왜곡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의 실현에 대한 요구는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짐승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비록 원수의 소나 나귀라고 하더라도 길을 잃거나 쓰러져 있을 때 외면하지 말고 돌보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법률 역시 공동체를 위한 규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법은 하느님을 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데, 이는 백성의 수장을 저주하지 말라는 규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성의 수장은 하느님이 선택하셨기에 수장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곡식의 맏물과 짐승의 맏배, 맏자식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주저하지 말고 기꺼이 그것을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거룩한 하느님에게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들이 거룩함을 드러내는 한 방법은 맹수에게 찢긴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또 안식년의 휴경과 안식일의 쉼도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안식일의 쉼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소와 나귀, 종과 이방인들 역시 쉴 수 있게 하려는 인도주의적 배려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도 금지됩니다. 또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무교절과 수확절, 추수절에는 모든 남자가 주님 앞에 나아와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올 때는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되며 땅에서 얻은 맏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오고 누룩이 든 빵은 바치지 말라고 합니다. 축제에 관한 이런 규정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것을 막아 줍니다.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이웃을 섬기는 일과 별개일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탈출기의 계약법전이라는 거울에 우리 공동체를 비추어 봅시다. 우리 공동체의 약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우리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한 어떤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관계는 진리에 바탕을 둔 것입니까?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요한 4,23 참조).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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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계약의 혜택

김영선 루시아 수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맺을 계약을 제안하셨습니다(19,5-6). 이 계약은 탈출 24장에 이르러 체결됩니다. 계약이 비준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이 내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새로운 정체성에 맞갖은 삶에 대한 규정이 담긴 십계명과 계약법전이 소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십계명과 계약법전에 선포된 내용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계약법전을 종결짓는 후문(23,20-33)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내용을 준수할 때 주어질 축복을 간략히 열거하고, 그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때 일어날 불행한 결과에 대해 경고합니다. 먼저, 이 후문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지가 언급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천사를 보내시어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게 할 것이며, 또한 이방인들에게 주님에 대한 공포와 말벌을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천사의 말에 순종하고, 하느님이 주신 규정을 준수하기만 한다면 질병과 유산, 불임이 그들 가운데는 없을 것이며, 넉넉히 먹고 마시며, 장수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방 민족들의 신들과 계약을 맺고, 이방인들을 그 땅에 머물게 하며, 그들의 신들을 섬긴다면 그 이방 민족들이 그들에게 덫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고,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응답합니다(24,3). 이로써 계약은 체결됩니다. 시나이 계약의 비준에 대해 들려주는 탈출 24장은 사실은 서로 다른 세 전승이 결합된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비준하는 표지가 전승에 따라 식사 혹은 피 또는 증언판으로 다르게 설명됩니다. 한 전승에서는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원로 일흔 명이 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뵙고 식사를 함으로써 계약이 체결됩니다(24,1-2.9-10). 다른 전승에서는 모세가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기념 기둥 열둘을 세운 후 이스라엘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주님께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의 절반을 제단에 뿌린 후 계약의 책을 백성에게 읽어 주자 백성 모두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다”고 응답합니다. 이에 모세가 나머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라고 말함으로써 계약은 비준되었습니다(24,3-8). 또 다른 전승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만이 하느님의 산으로 올라갔고, 모세가 구름 덮인 산 속에서 사십 일을 보낸 후 하느님께서 쓰신 돌로 된 증언판을 받아 옴으로써 계약이 체결됩니다(24,12-18; 31,18). 모세가 증언판을 받아 산에서 내려오기까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탈출 25-31장에서 소개되는데, 이는 모두 성막의 건설과 성막에서 사용될 기물의 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탈출 35-40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성막을 건설하였다는 보고입니다.

 

왜 탈출기의 저자는 성막의 건설과 관련하여 이토록 많은 장을 할애하는 것일까요? 탈출 35-40장은 이미 소개된 탈출 25-31장의 말씀을 거의 반복하는 듯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지시한 그대로 성막을 만들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왜 성경 저자는 지루해 보일 정도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나이 계약이 주는 혜택이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시나이 계약의 결과로 이제 하느님께서는 백성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게 될 모든 축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모시기에 적합한 장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 곳에나 계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이 계실 곳을 어떻게 성별하고 마련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달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현존을 모시기에 적합한 장소를 어떻게 마련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그에 앞서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에 대해 성찰할 때 우리는 자주 계약에 따라오는 의무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약에 따라오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한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시나이 계약의 혜택이 하느님의 현존이라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혜택은 무엇일까요? 어떤 은총이 주어졌습니까? 이 계약 덕분에 누리게 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이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하느님은 그 약속에 성실하셨습니까? 하느님과 우리 각자가 맺은 계약의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 남겨 놓으신 발자국을 돌아보는 한 달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는 성막의 건설과 성소의 기물들의 제작에 대해 설명하는 탈출 25-31장을 읽기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9월호(통권 498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22) 성막의 지성소와 우리 마음의 지성소

김영선 루시아 수녀

 

 

탈출 24,12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을 주시겠다며 시나이 산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직접 쓰신 두 증언판이 모세에게 주어진 것은 탈출 31,18에서입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사십 일의 간격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묵상하게 될 탈출 25-31장의 말씀은 바로 그 사십 일간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증언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옵니다. 이때 모세가 들었던 말씀은 모두 성막 건설과 성소 기물의 제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시나이 계약의 혜택으로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현존하실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장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분을 모실 장소는 그분께 합당한 정결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합당함의 근거는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보여 주신 바로 그 모형에 따라 성막과 그 성막에서 사용될 모든 기물을 제작할 것입니다(25,9 참조).

 

우선,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거룩한 장소는 보통의 장소들과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장소임을 표시하는 성막이 지어질 것이며, 이 성막은 그 거룩함을 보호하는 성막 뜰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성막 뜰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기둥 스무 개씩을 세우고, 서쪽에는 기둥 열 개, 그리고 동쪽에는 입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입구 양쪽으로 각각 기둥 세 개를 세웁니다(27,9-19 참조). 이 기둥들에 휘장을 둘러침으로써 바깥세상과 성소는 구분됩니다. 성막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커룹이 수놓인 폭넓은 천으로 두르고, 네 겹의 덮개를 덮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졌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커룹들이 수놓인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성소가 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면,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장소로 대사제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성막 성전은 나중에 지어질 솔로몬 성전과 마찬가지로 뜰 – 성소 – 지성소의 삼분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막이 세워지면, 성소의 가장 안쪽인 지성소에는 계약의 궤가 놓입니다. 계약 궤는 아카시아 나무에 순금을 안팎으로 입혀 만듭니다. 이 궤는 길이가 1.25미터, 너비와 높이가 0.75미터인 상자로, 네 귀퉁이에 고리가 있어서 두 개의 채를 이 고리에 끼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이 상자의 덮개를 속죄판이라 부릅니다. 대사제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 제물로 바친 짐승의 피를 속죄판에 바르는데, 이로써 성소를 정화합니다. 속죄판의 양 끝에 금으로 된 커룹 둘을 만드는데, 이 커룹들의 날개는 속죄판을 덮을 수 있도록 서로 맞닿아 있고, 커룹들의 얼굴은 속죄판을 향하여 숙여져 있습니다. 이 커룹들 위에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커룹들 위에 좌정하시는 하느님’(2사무 6,2; 2열왕 19,15; 시편 80,2)이라는 호칭이 나타나게 됩니다. 커룹은 일종의 합성 동물로서 임금이나 신의 옥좌를 수호하는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이런 커룹의 일종입니다. 히브리어 커룹의 복수형이 케루빔입니다. 계약 궤 안에는 하느님께서 주실 증언판이 보관됩니다. 고대 근동의 신전에는 신전의 가장 안쪽에 신상이 놓이는데, 이스라엘의 성소 맨 안쪽, 곧 지성소에는 신상 대신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합니다.

 

계약 궤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안쪽에 있다면 휘장 바깥쪽, 곧 성소에 놓이게 되는 기물들은 분향 제단과 제사상, 순금 등잔대입니다. 분향 제단은 휘장 바로 앞에 놓이며, 사제는 아침저녁으로 이곳에서 주님께 향을 피웁니다. 아카시아 나무에 순금을 입혀 만들게 될 제사상에는 하느님께 봉헌될 빵이 놓이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빵이 차려집니다. 등잔 일곱 개가 놓일 순금 등잔대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이때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를 찧어서 짠 순수한 기름이며, 사제들은 성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성막의 뜰에 놓이게 될 기물은 아카시아 나무에 청동을 입혀 만든 번제 제단과 사제들이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보관하는 물두멍입니다. 이 거룩한 장소에서 봉사할 사제들은 특별히 성별된 의복을 입어야 합니다. 대사제는 가슴받이와 에폿, 겉옷과 수놓은 저고리, 쓰개와 허리띠를 입고, 머리에는 “주님께 성별된 이”(28,36)라는 문구가 적힌, 순금으로 된 성직패를 씁니다. 일반 사제들은 아마포 저고리와 띠, 쓰개를 입습니다. 이 모든 규정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의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느님은 부정한 장소에는 머무실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했습니다. 성소가 부정해지면 하느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까? 거룩한 장소를 특별하게 의식합니까? 우리 마음의 지성소는 그분을 모시기에 합당합니까? 마음의 지성소를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장소로 꾸며 보는 그런 한 달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23) 금송아지와 계약 위반

김영선 루시아 수녀

 

 

모세가 하느님께 증언판을 받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갔던 사십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합니다. 모세는 언제 산에서 내려올지 알 길이 없고, 하느님은 과연 그들과 함께 계시는지 의심스럽기만 했습니다. 탈출 32-34장은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났던 중대한 사건과 그 사건의 해결 과정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번 달에는 금송아지 사건과 이 사건으로 일어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위기를 언급하는 탈출 32장을 다루고, 다음 달에는 손상된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탈출 33-34장을 다루겠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느님에게 성막 건설과 그 성막에서 사용될 기물의 제작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 있던 백성은 모세의 지연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론에게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달라’고 종용합니다. 백성은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하느님도, 하느님의 종 모세도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한 그들은 당장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그것으로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이것은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고 만지고 싶으면 만질 수 있는, 달리 말해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들의 뜻에 복종하는 신(神)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아론은 백성에게 금귀고리를 거두어 녹인 후 형틀에 부어 금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금송아지 상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32,4) 하고 외쳤습니다. 백성이 만든 신상은 다른 신의 상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신은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 곧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의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이 상 앞에 제단을 쌓고, 백성에게 내일 주님을 위한 축제를 지내자고 제안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백성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그 제단에다 바친 후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겼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백성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사건 전모를 말씀하시며 산을 내려가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온 백성들이 타락하였으며,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리도 빨리 벗어났으니, 그들을 없애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32,7-10).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자 애를 씁니다. 먼저 저 백성이 모세의 백성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성과 성조들에게 하셨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생각하여 재앙을 거두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백성을 전멸시키기 위해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재가 모든 문제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백성 가운데 자리한 잘못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새겨 주신 두 개의 증언판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온 모세는 진영 가까이에 이르러 백성이 춤추는 모습과 금송아지 상을 보고, 손에 들었던 돌 판들을 깨 버립니다.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백성은 계약을 위반하였고, 그 결과 계약의 표지인 돌 판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 심각한 계약 위반 행위를 바로잡기 위하여 네 가지 조처를 취합니다. 먼저, 금송아지 상을 파괴하고, 이 모든 일의 책임자인 아론을 문책하며, 금송아지 상을 만드는 데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고, 손상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애씁니다.

 

첫 번째 조처로 모세는 백성이 만든 금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로 빻아 물에 뿌린 후 그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가장 극심하게 모독하는 행위인데, 결국 그 금송아지 상은 인분이 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예후가 바알 신전을 뒷간으로 만든 것과 같은 조처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아론을 문책합니다. 왜 백성을 죄악으로 끌어들였느냐고 묻자 아론은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고 변명합니다. 아론은 큰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처벌은 면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릇된 지도자라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백성에 대한 권한을 지닌 지도자라면 그 백성이 범한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하는데도 아론은 그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론은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요구에 끌려 다녔기 때문에 백성은 제멋대로 행동하였습니다(32,25). 이 때문에 모세는 주님의 편에 서기로 작정한 레위인들에게 제멋대로 날뛰는 백성을 처벌하게 하였고, 그 결과 삼천 명 정도가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취한 마지막 조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이튿날 그는 하느님을 뵙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탈출 32장의 거울에 비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습니까? 그 앞에서 제사를 바칩니까? 아니면 모세와 함께 산 위에 있습니까?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탈출기와 거울 보기

(24) 모세의 빛나는 얼굴

김영선 루시아 수녀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대한 성찰로 ‘탈출기와 거울보기’를 끝맺게 된 것은 하느님이 섭리하신 아주 적절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탈출 33-34장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손상된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보도한다면, 35-40장은 성막과 그 기물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25-31장)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성막 성전에 대한 내용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제 탈출 33-34장만 다루면 2년에 걸친 탈출기 전체의 묵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탈출 33-34장은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 본문으로, 거듭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요한 단락은 백성을 위해 바치는 모세의 중재 기도로 시작합니다. 앞서 모세는 주님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을 주님의 책에서 지워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32,32).

 

하느님께서는 오직 죄지은 자만이 책에서 지워진다고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노로 인해 도중에 백성을 모두 없애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33,3.5). 함께 가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백성은 슬픔에 빠집니다.

 

모세는 진영 밖에 만남의 천막을 치고 다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친구와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호의에 호소하며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33,13).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함께 가는 것에 동의하십니다. 모세는 두 번째로 간곡하게 그들과 함께해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의 간청과 기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고, 모세에게 그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당신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을 간절히 요청한 것일까요? 약속의 땅보다 하느님의 현존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왜 백성은 하느님께서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하실 때 슬퍼하였을까요? 모세의 간절한 중재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행복의 원천이라는, 역사를 통해 얻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청원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느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33,18)라고 청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듯이 모세는 하느님께 당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모세의 요청은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고 싶은 갈망을 드러냅니다. 모세의 요청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거듭 묵상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대답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시며,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어서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의 조건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33,19). 셋째, 인간은 누구도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곧, 인간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고, 다만 그분 영광의 효과, 곧 그분의 선과 은혜와 애정의 결과를 통해서 그분을 알게 될 뿐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등 뒤, 곧 그분이 지나가신 자취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뿐, 미리 그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이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 자신의 편협한 이해를 교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모세의 간절한 중재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 사십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탈출 34,11-26에 소개된 십계명은 탈출 20,1-17의 십계명과 달리 전례와 의식(儀式)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의식 십계명’이라 불립니다. 모세는 이 두 개의 증언판을 들고 빛나는 얼굴로 시나이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 빛은 하느님과 함께한 시간의 결과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외적으로 정화된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빛이었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면의 어둠과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그늘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침묵과 고요, 하느님의 뜻에 맞갖지 않은 내적인 움직임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하려는 한결같은 노력과 원의,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우리의 그늘을 벗겨 내어 본래의 빛나던 얼굴을 되찾게 합니다.

 

이 얼굴을 되찾기 위한 여정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결심하며, 이제는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성서와함께>가 우리의 빛나는 얼굴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던 지난 시간들에 감사드립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2월호(통권 500호 감사호)]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