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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2) - 강은희 헬레나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20.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2)

베드로의 첫째 서간 (6) 종말

강은희 헬레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신앙인들의 첫 걸음마부터 영적 젖을 먹여 가며 한 걸음씩 인도해 온 베드로의 가르침은 이제 종말로 향한다. ‘종말’이란 개념은 두려움과 정서적인 혼란을 동반한다. 실제로 역사에서 종말과 관련해 극단적인 혼란이 야기됐던 경우를 우리는 수차례 보아 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종말을 향해 사는 우리가 평정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완성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주옥같은 구절로 가득하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4,8)

 

종말이란 말 앞에서 인간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종말이 반드시 온다는 것 외에 그 어떤 구체적 정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그 ‘해야’ 할 바는 행동이 아니라 내적 결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난을 겪으셨던 그리스도와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4,1). 종말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준비는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셨던 그곳을 향해 꿋꿋이 나아갈 다짐을 새로이 하는 것,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무장을 하고서 어떤 실천적 행위를 해야 할 것인가? 오직 사랑이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왜냐면 사랑은 많은 허물을 덮어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허물 없는 사람이 있을까? 완전무결하신 그분 앞에 합당한 순수함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자신의 지나온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씻어 가며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4,10)

 

사랑의 실천은 현실에서 곧바로 장애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저마다의 다양한 은사로 서로 봉사하라고 가르친다.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은사는 서로 봉사하기 위해,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베드로는 우리 각자가 은사의 관리자임도 깨우쳐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자원 관리인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관리를 통제와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내가 받은 은사이며 나는 그것을 돌볼 책임이 있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피조물이 좀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갖추도록 돕고,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은총의 관리자로서 해야 할 도리이다.

 

고난을 겪으면 놀라지 말고, 부끄러워 말고(4,12.16)

 

인생이라는 세파를 헤쳐 나가다 보면 소위 ‘고난’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구별한다. 우리의 어리석음 또는 잘못으로 고난을 겪는 것과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살기에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겪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그 둘이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죽음 역시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죄인으로 처형된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수난이 인간적 측면으로는 수치스러울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겨내라고 격려한다.

 

고난에 대한 베드로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겪는 어려움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분의 뜻에 따라 살면 당연히 축복이 따라야 한다고만 여기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중에 고난이나 오해, 비웃음을 겪게 되면 의아해하거나 분개하고, 심지어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기까지 한 적은 없었던가? 그런데 베드로는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 생명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중에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이를 생명의 길로 초대하고 계실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만 그분을 향한 진정한 찬미가 우러나올 것이다. 비록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모욕으로 짓눌려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기에, ‘마지막’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의 궁극은 ‘종말’이다. 종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지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면 종말은 의미가 없다. 종말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적 탐욕과 힘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이 통치하는 세상이 오는 것이기에 가치 있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이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순간이 이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 도달하려면 현실적으로는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이들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들에게 미리 종말을 보여 주는 값진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종말의 순간이 왔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살아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순간 성부께 드렸던 것과 같은 말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겨 드립니다.’”(루카 23,46; 참조 1베드 4,19)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7) 공동체를 향한 마지막 당부

강은희 헬레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가 내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앞 장에서는 공동체의 풍요를 위해 저마다의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서로 봉사할 것을 권고했다면, 이번에는 공동체 내 세대 간의 일치를 위해 원로들과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합당한 자세를 깨우쳐 준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5,2)

 

공동체의 원로들에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마지막 당부와 같은 말을 한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주님의 양 떼를 보살피는 일은 억지로 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 해서도 안 된다(5,2). 이는 공동체 지도자들이 경계해야 할 양극단이다. 한 공동체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연륜에 떠밀려 원로 자리에 앉게 될 경우도 있다. 그 책임이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까지 보살펴야 하니 성가신 일일 수 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 책임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공동체를 통하여 깨우침과 성장을 얻었으면, 이제 그 혜택을 돌려줄 때가 온 것이다. 또 다른 극단은 소위 ‘감투’의 매력에 빠진 이들을 향한 것이다. 원로의 위치를 세속적 영예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데 악용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진정한 원로란 권력에서 으뜸이 아니라, 섬김과 모범에서 으뜸이어야 함을 깨우쳐 준다. 공동체는 원로의 양 떼가 아니라 하느님의 양 떼이다. 그 양 떼를 돌보라는 명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너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양 떼를 돌보려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라면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5,2) 양 떼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공동체의 어른들이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기도 하다.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5,5)

 

베드로는 이제 젊은이들을 향하여 원로들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는 ‘복종’ 또는 ‘순종’이라는 말이 13회나 등장한다. 본문에서 복종 또는 순종으로 번역된 이 말의 그리스어는 ‘휘파쿠오’와 ‘휘포타소’이다. 휘파쿠오는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고, 휘포타소는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이상적인 모습은 이 둘의 결합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되, 또 한편으로는 명령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명하는 이의 마음과 일치되어 움직이는 것!

 

복종이 권위나 강제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공동체에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겸손과 존중을 통하여 명령과 복종이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친다. 그 당위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5,5-6).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 무엇도 내세울 것이 없기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원로는 젊은이들에게 복종을 명할 때, 자신이 하느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들은 신앙의 전통을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존해 온 원로들을 존중해야 한다. 원로들과 젊은이들 간에 상호존중이 선행될 때 비로소 젊은이들의 복종은 가치 있게 된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5,9)

 

베드로가 제시한 겸손과 상호존중의 미덕은 공동체가 일치되어 흔들림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공동체 내부 못지않게, 공동체 외부에서도 이들을 향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5,8).

 

베드로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를 ‘사자’에 비유한다. 사자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동물로 긍정적으로는 왕권의 위엄을 상징하고, 부정적으로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경우를 다니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다니 6장).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사자 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이 사자를 대적하는 법은 무기나 폭력이 아닌 믿음이었다.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굳건한 믿음으로 맞서 이겨 내라고 격려한다.

 

오늘날엔 직접적으로 덤벼드는 사자는 없을지라도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다. 물질적 풍요와 최첨단 기술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젖어 들다 보면, 나눔·희생·동참 등의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세속의 가치들과 맞바꾸게 된다. 어느 때보다도 굳건한 믿음과 가치관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혼자서 하는 싸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공동으로 상속받은 전 세계 교회, 보편 교회들의 분투에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싸움은 끝없이 이어질 것도 아니다. 정의와 평화가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에 비한다면, 지나가는 싸움일 뿐이다. 지상에서의 싸움에 지쳐 갈 수도 있는 신도들이 영원을 향하도록 용기를 북돋우며,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마무리된다.

 

[성서와 함께, 2017년 2월호(통권 491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유다 서간 (1)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강은희 헬레나

 

 

유다 서간은 가톨릭 서간 중 가장 마지막에 수록돼 있다. 그동안 우리는 야고보 서간과 베드로의 첫째 서간을 읽었는데 벌써 신약의 마지막 서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서대로라면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읽어야 할 듯싶지만, 베드로의 첫째와 둘째 서간은 저자의 이름만 공유할 뿐, 내용상 관계는 없다. 오히려 유다 서간과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 공유하는 내용이 많으며, 학자들 다수는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 유다 서간의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앞서 유다 서간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자는 누구일까?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 유다”라고 소개한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사도 15; 갈라 2 참조).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동생으로 소개함으로써, 이 서간이 제1세대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목격하고 보존해 온 권위 있는 전승임을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주님의 명을 받들어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한 많은 이가 주님의 종으로 불려 왔다. 아브라함(창세 26,24), 모세(탈출 14,31; 여호 1,13), 여호수아(여호 24,29), 다윗(2사무 3,18; 1열왕 8,66), 예언자들(2열왕 21,10), 예수님(사도 4,27), 사도들 및 선교사들(사도 4,29; 2티모 2,24)이 모두 주님의 종으로 불렸다. 저자 역시 자신도 이러한 전통적 직무를 이어 가고 있으며, 따라서 이 서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는 것이리라.

 

왜 이 서간을 썼을까?

 

유다 서간은 단 하나의 장으로 이뤄진 아주 짧은 서간이다. 그 내용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침투해 있는 위험한 이들에 대한 경고다(4.11.18절). 유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멸망뿐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불경한 자들이며 하느님 은총을 방탕한 생활의 방편으로 악용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4절). 불륜과 변태적 욕망으로 몸을 더럽힌 자들이며, 주님의 천사들을 모독하는 자들로서, 오류에 빠져 반항하다가 멸망할 자들이다(7-8.11절). 또한 불평꾼, 불만꾼이며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이들이고, 아첨을 일삼는 이들이다(16절).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전설에서 하느님과 대적해 멸망을 자초했던 사건들과 그들을 연결함으로써, 그들의 운명 역시 멸망으로 끝날 것임을 예고한다. 소돔과 고모라(7절)나 발라암과 코라(11절) 등 구약성경의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탈한 천사(6절)나 떠돌이 별(13절) 등 외경에서 따온 표현도 보인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있는 이름일지라도, 그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아는 내용과는 다른 부분들도 있다. 이는 어찌된 것일까?

 

외경의 권위와 인유

 

유다 서간의 대부분은 인유이다(5-16절). ‘인유’란 저자와 독자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내용을 끌어다가 비유로 삼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가르침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에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결하는 것이다(5절). 구약성경의 사건 그대로를 인유했다면, 구약의 내용을 아는 독자들은 누구나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저자와 독자들은 공유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원천에서 인유한 것이라면, 그 내용이 당대에는 쉽게 받아들여졌겠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유다 서간은 가톨릭 교회의 정경인 구약성경 외에 외경도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다. 외경의 풍부한 이야기들은 구약성경의 배경지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약성경과 다른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발라암이다. 발라암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상속하는 것을 막으려는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고용한 예언자다(민수 22-24장). 발라암은 돈을 받은 대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구약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발라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외경은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서간에서는 발라암을 돈에 눈이 어두워 오류에 빠진 자로 제시한다. 이는 외경에 나오는 발라암 이야기를 인유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유다 서간이 정경보다 외경을 택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구약성경과 외경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면 당연히 외경보다는 정경인 구약성경의 내용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정경의 범위가 확정된 것은 유다 서간이 기록된 시기보다 더 후대의 일이다. 따라서 유다 서간이 외경을 인유한 사실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외경의 가르침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하게 하는 부분이다.

 

성경을 중요시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만을 진리의 전부로 여긴다면 성경은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은 성경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시다. 성경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깊어 갈수록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하느님에 관한 무수한 증언 중 지극히 일부분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유다 서간 (2)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십시오

강은희 헬레나

 

 

유다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을 향해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아가야 할 공동체를 방해하는 이들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그릇된 행위를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애찬’이라는 말은 유다서에만 나오는 말이며, 문맥으로 보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자리다.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그 먹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함께 모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께 영위하는 행위다.

 

애찬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유다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이들이 음식을 나누는 것을 ‘애찬’(그리스어 ‘아가페’)이라 부름으로써, 이 음식 나눔이 사랑의 행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애찬에 참여하면서도 애찬을 애찬이 아니게끔 더럽히는 이들이 있었다. 애찬을 더럽히는 행위는 무엇일까?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만 돌보는”(12절) 것이다. ‘잔치’란 여러 사람을 불러서 함께 음식을 즐기는 모임이다. ‘잔치를 벌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쉰유오케오마이’이다. 여기서 ‘쉰’은 접두어로 ‘함께’라는 의미이다. 잔치의 본질은 ‘함께’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자신만을 돌본다는 것은 잔치를 잔치가 아니게 만드는 행위다. 유다 서간의 저자는 그렇게 애찬을 더럽히는 이들을 떠돌이별에 비유하며 강한 어조로 꾸짖는다.

 

‘떠돌이별’이란 고대 사회에서 부정적인 말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일정하게 자리를 지키지 않아, 항해하는 배를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떠돌이별을 불길한 것으로 여겼고, 이들을 타락한 천사들과 연관시켰다. 이들 타락한 천사들과 떠돌이별의 운명은 동일하며(6절, 13절), 애찬을 더럽히는 이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조롱꾼들을 경계하십시오

 

유다 서간의 저자는 마지막 경고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것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불경한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다”(18절). 그리스어로 ‘조롱하다’는 ‘엠파이조’이며, 이와 연관된 단어는 신약성경에 십여 차례 등장한다. 그중 루카 14,29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수난을 조롱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유다 서간의 저자는 이 조롱꾼들을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19절)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며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과 그리스도의 가치관이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 왜 그들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향하는 곳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현세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치욕일 뿐이다. 손해 보는 삶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늘 나라의 가치에 희망을 둘 때 가능하다. 결국 현세적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마음에 두고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 안에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마음에 두고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성령을 지니지 못한 채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여 있는 이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분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이들, 조롱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주변의 방해가 있어도,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서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 성장에는 기도와 자비가 맞물려 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현실적인 것들에 막혀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을 열어 주어, 올바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준다. 그곳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는 것이다. 또한 유다 서간은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이들답게 우리의 자비가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도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친다. 의심하는 이들의 나약한 믿음을 이해하고 자비로 감싸 주고, 이미 악에 빠진 이들도 구할 수 있다면 그 불길에서 구해 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죄는 철저히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악에 빠진 이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할지언정,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라고 한다(23절).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조롱꾼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절에만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방식으로 조롱에 노출되어 있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러한 도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 믿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유다 서간의 짧지만 강한 가르침을 되새기며, 정죄보다는 의연함과 자비로써 조롱을 감싸 안는 지혜를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4월호(통권 493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둘째 서간 (1)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얻는 은총과 평화

강은희 헬레나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특이하다. 저자는 베드로라 되어 있으나 베드로의 첫째 서간과 연결되는 내용은 없다.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유다 서간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권위를 차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 서간의 관심사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둘째 서간만의 특징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서는 그리스도의 앎을 강조한다.

 

다른 서간들과의 연관성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베드로의 첫째 서간과 유다 서간을 합쳐놓은 듯한 인사말로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유다 1,1)과 “사도인 베드로”(1베드 1,1)를 하나로 합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저자 자신을 소개한다. 또한 인사말의 마무리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간과 동일하게 “은총과 평화”를 기원한다. 그런데 인사말 이후 이어지는 본문은 유다 서간 1,4-18절의 내용과 대부분 겹친다. 유다 서간이 불과 25개 절로 이루어진 짧은 서간임을 고려하면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유다서의 내용 대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살펴보았듯, 유다 서간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불경한 자들’을 강한 어조로 단죄한다. 그들은 죄지은 천사, 소돔과 고모라, 지각없는 짐승, 카인과 발라암 등에 비유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조롱하는 이들로 묘사된다(유다 1,6-7.10-11).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거짓 교사”들을 그와 동일한 표현으로 단죄한다(2,4.6.12.15; 3,3). 유다 서간에서는 공동체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와 애찬을 더럽히는 불경한 자들이 문제가 되었다면,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1,16)라고 공격하는 이들이 문제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을 허구로 변질시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뿐만 아니라 멸망의 길로 끌어들이는 자들이라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께 대적하다 멸망해 간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에서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는 다양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나 유다 서간의 처방은 “믿음”이었다(1베드 5,9; 유다 1,20).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앎”(3,18)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앎’의 중요성은 이 서간의 인사말에서부터 두드러져 보인다. 다수 서간의 인사말에서 일반적으로 기원하는 은총과 평화를 이 편지의 저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앎으로써” 얻게 되는 은총과 평화로 구체화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진정한 은총과 평화는 오직 하느님과 그 아드님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앎이란 단순한 지식 차원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과 평화의 통로임을 강조한다.

 

‘앎’이라는 주제는 서간 전반에 걸쳐 전개된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앎으로써 생명과 거룩한 삶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1,3). 이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앎’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1,5-7). 믿음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궁극의 덕행인 사랑으로 완성되는 여정의 중간에 ‘앎’의 자리를 두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수덕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앎’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진 자는 더 갖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믿음에 앎을 더하며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다 보면 더욱 굳건히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더 깊이 그분을 알게 되고 더 성숙한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과 앎이 서로를 심화시키며 사랑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이 순환의 여정은 인간이 하느님을 뵙게 될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서간의 저자는 믿음, 덕, 앎, 절제, 인내, 신심, 형제애,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를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1,5-8). 곧,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항상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신앙과 이성

 

성경의 가르침은 주로 신앙적 또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앎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균형 잡힌 가르침을 제공한다. 흔히 신앙과 지식은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앙과 지식은 함께 가야 한다. 알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강조하는 저자는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1,20).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일은 신심 위주로 흐르기 쉬운 신앙생활에 균형을 잡아 주는 매우 중요한 투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초월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성서와 함께, 2017년 5월호(통권 494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둘째 서간 (2) 그릇된 앎의 앙화

강은희 헬레나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은총의 통로이며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덕성이라는 사실을 시작부터 강조한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오히려 앙화(殃禍)가 될 수도 있다. 그 앎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이다. 이번에 살펴볼 베드로의 둘째 서간 2장은 바로 그 잘못된 앎이 끼치는 해악이 어떤 것인지를 일러 주며, 그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

 

당시의 공동체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거짓 교사들 때문에 그릇된 길로 빠져드는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참 예언이 있는 곳에 거짓 예언도 있듯이, 참된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훼손하려는 거짓 교사들도 있기 마련이다(2,1). 이제 막 참 진리의 길에 들어선 순수하고 열심한 이들이라면, 그들은 진리에 더 목말라하며 그에 관한 가르침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배우려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참이라는 가면을 쓴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거짓 교사들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한다.

 

저자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세 가지로 묘사한다. 그들은 이단을 끌어들이고 주님을 부인하며 파멸을 초래한다(2,1). 이 세 가지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단’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 공동체의 뜻과 다를 때,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공동체에서 갈라져 나와 이단이 된다. 다시 말해 이단이란 애초부터 특정 교파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기준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단은 누구일까?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이다. 즉 그들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 이들이다. 주님께서 진리의 근원이시며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일진대, 그분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그들에게 닥칠 운명은 파멸뿐이다.

 

교만과 탐욕

 

진리의 길을 벗어나 다른 것을 선택한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이들의 특성을 교만과 탐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는 자들이다(2,1.10). 교만한 이는 자신이 누군가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만 하는 것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이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다. 저자가 말하듯, 그들의 가르침은 “지어낸 말”(2,3)일 뿐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별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취하되,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번거로움은 외면한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만, 실상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업신여긴다. 그들은 지어낸 말의 대가로 금전까지 요구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구원 수단이 아닌 개인적인 탐욕의 충족,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이는 천막 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계와 선교 비용을 조달했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엉뚱한 자유까지 약속하면서, 특히 참된 삶의 길로 갓 들어선 이들을 미혹시켰다(2,18-19). 주님을 이제 막 알게 된 이들의 열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은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손쉬운 공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내세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유’다. 그리스도를 알고 따름으로써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사는 길이건만, 그들은 허황된 자유를 내세워 인간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며 자신의 몸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란 실상 육체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누린 자유는 대낮의 술잔치, 간음, 방탕함이었다(2,13-14). 저자는 이들을 자기가 게운 것을 다시 먹고, 진창에 뒹구는 개와 돼지에 비유한다(2,22).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짐승처럼 사는 데 사용하는 그들에게, 저자는 그들 역시 ‘저주받은 짐승의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2,12-13).

 

여기서 우리는 그릇된 앎의 앙화를 본다. 한때 주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됐을까? 그 앎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주님이 누구이신지 진정으로 알아들었다면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부인한다면, 나아가 그분을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불완전하게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앎이 완전하다고 자만했기에, 그들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심지어 ‘지어낸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올바른 길을 알면서도 그 길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몰랐던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한다.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알면서도 저지른 잘못에는 변명의 여지 없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은총과 평화로 들어서는 관문인 동시에 책임 있는 삶의 길로 나아가는 기초임을 잊지 말자. 한 번 입문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앎에 질문하며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둘째 서간 (3) 올바른 앎의 열매, 온전함

강은희 헬레나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은총에서 시작하여 그릇된 앎의 앙화를 거쳐 올바른 앎의 열매인 구원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분명하고도 종말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이 서간은 종말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준비를 앎과 연결시켜 가르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조롱하게 만든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3,4) 차라리 그들이 그리스도를 몰랐더라면 그분의 재림을 조롱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릇되게 알면서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오만에서 조롱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징조와 시간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 하느님의 시간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지함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상기시킨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3,8).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품고 계시는 하느님의 시간을 인간의 단위로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을 곧 일어날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에 재림의 지연은 심각한 의문과 당혹감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또는 겉으로 드러내어 이런 말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 하지 않으셨던가?”, “그분의 약속은 헛된 것일까?”, “정말 하느님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이 서간의 저자는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금 우리들의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재림 사이의 시간은 하느님 자비의 시간이다(3,9).

 

지연되는 재림은 주님의 무능이나 부재가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시간이다. 서간의 저자는 주님의 재림을 우습게 여기고 그 지연을 조롱하는 이들을 ‘무식한 이들’이라고 단언한다. 사실상 성경의 전통에서 무식함, 곧 알지 못함은 죄악과 재앙으로 이르는 관문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서도 그들에게 땅을 상속해 주신 하느님을 알지 못할 때마다 죄악을 저질러 왔다(판관 2,10).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탄식을 들려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3). 주님을 알지 못한 결과는 재앙과 황폐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임을 예언자는 상기시킨다(이사 1,9).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토록 파국적인 사태를 초래하기에 서간의 저자는 오류에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주님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갈 것을 권고한다(3,18).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재림의 시기는 철저히 주님의 영역이지만, 그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기에 이 서간의 저자는 재림이라는 사건 자체보다는 재림 때 우리들의 준비된 자세에 관하여 강조한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3,14). 단 한 줄의 권고이지만, 이 가르침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티 없고 흠 없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탈출 12,5; 레위 1,3; 민수 6,14 등). 동시에 인간의 경우 윤리적 흠 없음으로도 사용된다(잠언 11,5). 따라서 티 없고 흠 없는 인간이란 올바른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이 재림의 그날 누리게 될 시간은 무법한 자들이 누리는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서간의 저자는 재림의 순간을 굉음 및 불길과 더불어 갑자기 들이닥치는 파국적 혼란의 시간으로 묘사한다(3,10). 그러나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세상의 원소들을 논해 온 무법한 자들에게 종말이란 그들이 신봉하던 원소들과 함께 소멸하는 파국의 시간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말 성경에 “나설 수 있도록”(3,14)으로 번역된 그리스말 원문은 “발견되어지도록”이라는 수동형이다. 누가 누구에게 발견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눈에 그렇게 발견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재림을 흠 없는 상태로 맞이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의 흠 없는 상태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잘못을 범할 때마다 일일이 벌주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의 자비로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타인이 잘못할 때 역시 하느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신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의 부재라고 의심한다. 바늘귀보다 더 좁은 눈으로 하느님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며 살아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전히 나의,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이어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 자비의 증거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주어진 시간을 가벼이 여기지 말며, 진정 흠없는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을 살아갈 것을 베드로 둘째 편지의 저자는 권고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요한의 첫째 서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강은희 헬레나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은 요한 복음, 요한 묵시록과 더불어 요한계 문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요한이라는 이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서간들이 요한 복음의 가르침을 반복한다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이 서간들을 살펴보면 요한 복음의 특징적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각 서간이 저술되어야 했던 목적에 따라 달리 방점을 찍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통하여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들의 성장 과정 중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의 특징

 

요한의 첫째 서간은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여태까지 우리가 읽은 서간들은 저자의 이름과 수신인 그리고 인사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요한의 첫째 서간에는 그 모든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끝 인사마저도 없다. 평화나 축복을 빌어 주는 인사말이나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도 없이 “우상을 조심하십시오”라는 한마디 당부로 서간은 끝이 난다. 따라서 형식으로만 보자면 이 문서가 서간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간 곳곳에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라는 표현이 무수히 반복되며, 특정 현안에 관하여 공동체와 의사소통을 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1,4; 2,1.7.12-14.21.26; 5,13) 이 문서를 서간으로 간주할 수는 있다.

 

대개 서간의 인사말과 맺음말에 언급되는 저자, 대상, 지역 교회 이름 등을 통하여 서간의 저자, 저작 연대, 그리고 서간이 저술된 장소 등을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요한의 첫째 서간은 그 모든 것이 생략되어 있으므로 이 서간의 역사적 배경을 추측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에 매달리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서간의 내용을 통하여 이 문서가 저술된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서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생명의 말씀

 

요한의 첫째 서간은 인사말이 없는 대신 머리말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1). 요한 복음을 읽어 본 독자라면 이 첫 구절을 보는 순간,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는 요한 복음의 머리글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과 같이 이 서간의 ‘생명의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이나 요한의 첫째 서간 모두 머리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말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요한 복음은 한처음부터 계셨고, 말씀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의 근원에 방점을 두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다. 그에 비하여 요한의 첫째 서간은 처음부터 있어 온 그분이 바로 우리가 듣고 보고 만져 본 그분임을 강조한다. 또한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영광’이라는 말이 41회나 사용된 데 비해,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외견상 유사하게 시작된 두 문서의 머리글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마무리된다. 요한 복음에서는 한처음부터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에서 바로 하느님의 곁, 영광의 자리로 상승한다. 반면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다시 말해 태초의 존재에서 육화로, 육화에서 지극히 감각적인 경로들을 통한 인간과의 친교로 향한다.

 

요한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근원을 증언하는 데 주력했다면, 요한의 첫째 서간은 이미 희미해져버린 지상에서의 그분의 모습, 그래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존재처럼 여겨진 그분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지상에서 그분을 실제로 보고 만져 볼 수는 없게 되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분을 목격한 증인들도 점차 감소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주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오도하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서간의 저자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영광 중에 계셨던 그리스도보다는,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고, 인간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졌던 예수를 힘주어 증언하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인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이 인도하는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그릇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자는 이 서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서간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육화의 목적이 우리 인간과 친교를 나누는 데 있다고 증언한다. 이로써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처음으로 친교의 기쁨을 누린 순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서간이 기록되던 시기의 신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한처음’이 있을 것이다. 주님과의 그 처음을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그 처음의 기쁨이, 복잡해진 세상살이 안에서 조금씩 매몰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요한의 첫째 서간 (2) 그리스도의 적

강은희 헬레나

 

 

요한의 첫째 서간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박해하는 물리적 위협보다는 그리스도 공동체 내면을 흔드는 문제에 직면하여 저술된 것이다.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박해한다면, 공동체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경계심을 갖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공동체 안에 있거나 공동체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다른 이들의 삶까지도 잘못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적

 

이 서간의 저자는 자신과 다른 가르침을 펴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적’이라 부르고 있다(2,18; 4,3).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이었을까?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과거 시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했던 ‘그때도’ 이미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한울타리에 머물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함께’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들의 문제였을까?

 

저자는 그들을 ‘거짓말쟁이’라 칭한다. 그들의 거짓말이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마저 부인하는 것이었다(2,22).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리스도의 적’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입으로는 아버지와 아드님을 고백하면서도, 그 본질에 관해서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가르침과 다른 내용을 주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으며 이 사안은 요한의 둘째 서간에 가면 더욱 명백해진다(2요한 1,7). 인간이며 하느님이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반쪽짜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거짓과 세상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만이 당시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의 전부는 아니었다. 서간의 저자는 신자들의 삶이 거짓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서간에서 언급한 행위들이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당시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경우들을 그대로 지적한 것 같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행위(1,6),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속죄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행위(1,8-10),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행위(2,3-4),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는 사랑하지 않는 행위(4,20) 등이다. 그 모든 사항의 공통점은 말과 행동이 어긋난다는 데 있고, 서간의 저자는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을 ‘거짓말쟁이’로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이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진실하지 못할 때 인간은 세상과 손잡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말할 때는 참으로 조심스럽다. 세상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작품 아닌가? 이 서간에서는 참 그리스도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세상이란 하느님을 반영하는 피조물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피조물을 어지럽히는 욕망과 자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그분께 속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미워한다. 이러한 위협 앞에 놓인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하느님의 승리를 함께 누릴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요한의 첫째 서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그리스도를 믿느냐의 문제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속해 있었던 그들 모두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동일한 복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인간이었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소위 ‘그리스도의 적’들은 자신들이 인간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곧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마저 부인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려 했던 그들의 의도는 예수를 업신여기려 했거나 불신해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에서 그런 생각을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는 자신들이 믿는 분이 좀 더 우월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욕심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님은 우리에게 2천 년 전 베드로에게 던지셨던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서도 그분의 적으로 살아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세상이 끌어당기는 욕망이나 내 안의 자만을 맑은 영으로 경계하며 깨어 있을 것을 이 서간의 저자는 깨우쳐 주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9월호(통권 498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요한의 첫째 서간 (3) 의로움과 사랑

강은희 헬레나

 

 

요한의 첫째 서간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지만, 서간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그들의 회심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그들과 이 서간의 수신 공동체 사이에 너무나 큰 간격이 벌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서간의 진정한 독자는 속이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넘어가지 않은, 아직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다. 서간의 저자는 처음부터 주어진 가르침에 충실히 남아 있는 이들이 죄를 피하도록(2,1),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실천하도록 인도한다.

 

주님과의 친교

 

서간의 저자는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힌다. 저자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빛 속에서 살아감’으로 정의한다(1,5-7). 빛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빛이 있는 곳은 밝다. 어둠 속에선 보이지 않던 작은 티끌 하나까지도 또렷이 보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하여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들거나, 아니면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어 씻을 수 있는 밝음 속에 머무르거나.

 

저자는 빛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당혹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스스로를 무죄하다 여기는 것의 큰 오류를 지적한다(1,8). 이 세상에는 인간이 씻어낼 수 있는 오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오염도 있다. 인간의 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씻을 수 없다. 오직 용서로써만 씻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용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죄를 고백할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응답이다. 저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밝음 속에 머무를수록 자신의 과오를 더 잘 보게 되고, 자신의 어둠을 청산하고자 용서의 원천이신 주님을 더욱 찾게 되며, 죄의 용서로 깨끗하게 된 인간이 주님과의 친교에 들게 되는 과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이끈다.

 

이처럼 주님과의 진정한 친교를 누리는 이들을 서간의 저자는 다양한 표현으로 격려한다. 그들은 ‘강하고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였으며, 악한 자를 이겼다’(2,12-14). 죄를 용서받고 빛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악을 이겨 왔기 때문이다. 악을 이기는 힘의 근원은 무엇이 선하고 옳은 것인지를 아는 데서 출발한다. 선함과 올바름, 그 진리의 근원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진리의 근원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다.

 

서간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에게 절대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경고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함께 머무시는 동안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몸소 그 가르침을 실천하셨다. 특히 십자가상 죽음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의 극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면 그분의 모범이 참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흉내를 낸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위대한 사랑의 행위는 신이었기에 가능했을뿐,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의로움과 사랑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으며 어떤 길을 가셨던가? 서간의 저자는 그분을 의로움과 사랑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겠지만, 신약의 이상적 덕목이 사랑이라면 구약의 이상적 덕목은 의로움이다. 그 의로움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충실히 살아갈 때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흔히 ‘율법’을 떠올리게 되는데, 하느님의 명은 율법이 맞다. 그러나 율법은 편협한 율법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가르침이다.

 

실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것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신명 6,5)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레위 19,18)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의 사랑은 로맨틱한 감성적 영역의 것이 아니라 내가 싫은 것은 이웃에게도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이웃에게도 실천하는 올곧음과 배려의 총체이다. 따라서 의로움과 사랑이란 개별적 덕목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서 가는 것이다. 의로운 이는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는 의로운 이다. 그리고 서간의 저자는 그 의로움과 사랑의 근원이자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분을 따르려는 이들의 시선이 향하도록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의로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셨으며, 또한 인간이기에 그분의 의로움은 그대로 인간의 본성이 된다(1,9; 2,1.29; 3,7). 서간의 저자는 의로움과 사랑을 동일 선상에 둔다. 하느님을 닮은 이라면 의롭게 살아갈 것이며, 그 의로움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드러나기 때문이다(3,10; 4,21; 5,1-5).

 

믿음의 삶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하여 가치 평가를 하며 삶을 투신해야 하기에 눈에 보이는 역할 모델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역할 모델은 응당 그리스도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리스도를 보고 있느냐이다. 그에 따라 실천 행위의 기준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빛, 진리 등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보게 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현실적 척도는 품성으로 드러나는 의로움과 행위로 드러나는 사랑이다. 의로움과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신의 묘기로서 기적처럼 인간 앞에 펼쳐진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께서 어려움과 희생을 치르며 몸소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요한의 둘째 서간

강은희 헬레나

 

 

진리 안에서 겸손하게 걸어가기

 

요한의 첫째 서간은 구체적 발신인이나 수신인 없이, ‘그리스도의 적’을 경계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는 내용인데 비하여 셋째 서간은 ‘가이오스’라는 개인에게 ‘원로’가 보낸 개인적 당부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서간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둘째 서간이다. 이 서간은 내용상으로는 요한의 첫째 서간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으나 형식상으로는 셋째 서간과 공통점이 있다. 발신인이나 수신인, 인사말 등 서간 형식을 갖추지 않은 첫째 서간과는 달리 둘째와 셋째 서간은 둘 다 편지 형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발신인과 끝인사의 내용까지도 유사하다. 이처럼 요한의 둘째 서간은 요한의 첫째 및 셋째 서간과 각각의 교집합을 이룸으로써 세 서간을 요한계 문헌으로 엮어 주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이 서간은 “원로”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1절)에게 보낸 것으로,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으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밝히기는 쉽지 않다. 일단 원로가 연장자에 대한 단순 호칭인지 아니면 당시 형성되어 있던 직분을 일컫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또한 그 원로가 직분의 명칭이라면, 사도 대신 굳이 원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서간의 저자가 예수의 제자 요한이 아닌지, 주님의 제자 요한이 연로하여 자신의 연륜을 앞세워 스스로를 원로라 칭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원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인물들로 볼 수도 있겠지만 교회를 의인화한 표현일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되어 왔으니 교회를 ‘부인’으로, 교회 구성원을 ‘자녀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은 서간의 끝인사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택받은 그대 자매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안부를 전합니다”(13절). 즉 이 서간의 수신자는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이고 발신자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선택받은 부인 자매의 자녀들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서간의 내용은 자매 간의 소통이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를 볼 때 선택받은 부인이란 개인을 특정하기보다 이 서간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정배로서의 교회공동체를 부를 때 선호했던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진리와 이단

 

요한의 둘째 서간은 불과 13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적’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간결하고도 강력한 당부를 전하고 있다. 서간의 저자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명, 진리, 사랑’으로 요약 제시한다(4-6절). 각 개념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그 계명이란 새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명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로맨틱한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셨던 사랑, 곧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이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이들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온갖 종류의 거짓과는 어울릴 수 없다. 서간의 저자는 이처럼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표현하며 함께 기뻐한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4절)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이 바로 속이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적”(7절)이다. 이미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의 정체에 관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부분이 바로 요한의 둘째 서간 7절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신자들을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속이는 자들이다.

 

다름과 오류의 함정

 

요한의 둘째 서간은 짧지만 단호함으로 큰 가르침을 준다. ‘속이는 자들과는 인사조차도 하지 마라’(10절). 이것은 좀 심한 것 아닌가? 교회일치운동과 종파 간의 대화가 오가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편협해 보이기까지 한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던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포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름’을 포용하는 것과 ‘오류’를 용인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다름을 포용하는 것이란 ‘나’를 온 세상의 중심으로 두지 않는 겸손한 행위이다. 하느님 창조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는 틀린 것을 용인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틀린 것을 용인하는 것은 자기애에 기반한 두려움 또는 사심에서 나온다. 우리는 오류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입을 수도 있는 상처가 두려워 종종 너그러움이라는 가면 뒤로 숨기도 한다. 또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픈 사심에서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와 맞바꿔 스스로의 평판을 높이는 어리석고도 비겁한 교만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다름의 포용이며, 어디부터가 오류를 용인하는 것일까? 서간의 저자는 그 기준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함을 천명한다. 이는 다원화된 세상, 저마다 다른 신앙, 다른 신념을 지닌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갈등을 피하고자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진 신앙생활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요한의 셋째 서간

강은희 헬레나

 

 

선의 편에 서십시오

 

요한의 셋째 서간은 요한의 서간들 중 가장 편지다운 편지라 할 수 있다. 서간의 저자는 실명을 밝힌 가이오스라는 인물에게 제삼자의 실명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용건을 전달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사적인 내용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수신자 가이오스

 

가이오스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총 다섯 번 나오며, 요한의 셋째 서간을 제외하고 모두 사도 바오로와 관련이 있다(사도 19,29; 20,4; 로마 16,23; 1코린 1,14). 이 네 개의 본문에 등장하는 가이오스라는 인물이 바오로의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라는 데에는 공통되나 각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거주지 또는 출신지는 다르다. 이들 모두가 동일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인물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바오로의 서간과 요한계 문헌은 시간적으로 최소 30년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서간의 수신자 가이오스를 앞의 어느 인물과 동일시하기에는 무리라고 본다.

 

요한의 셋째 서간은 보편 서간으로서는 드물게 한 개인에게 보낸 서간이지만, 우리가 이 서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이오스 개인의 신상이 아니라 그가 당시 공동체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다. 서간의 저자는 가이오스가 “낯선 이들”을 위하여 성실히 봉사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며,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그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5-8절). “낯선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7절)이다. 종합해 보면, 가이오스는 지역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맞이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교회를 돌보는 원로의 입장에서 지역 교회에 가이오스 같은 믿을 만한 협력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는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교회

 

가이오스가 원로의 기쁨이었던 것에 반해, 디오트레페스는 원로의 고민거리였다. 가이오스와 마찬가지로, 디오트레페스의 신상에 관해서도 역시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서간에 묘사된 그의 행위를 통하여 당시 해당 공동체의 문제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디오트레페스는 “우두머리 노릇 하기”(9절)를 좋아하여 원로와는 대립 관계에 있다. 그는 원로를 나쁜 말로 헐뜯고 원로가 보낸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방해하여 교회에서 쫓아낸다(10절).

 

이 서간에는 앞서 다룬 두 서간과는 달리 이단에 관한 경고나 믿음, 사랑의 본질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없다. 여기서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원로는 참된 증언의 전승자로서 지역 교회를 감독하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로가 이미 해당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던 점, 그리고 앞으로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디오트레페스의 행실을 지적하겠다고 경고하는 점(9-10절) 등을 고려하면,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 볼 때 디오트레페스보다는 원로의 위치가 우위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디오트레페스라는 인물은 해당 교회에서 ‘세속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본인 스스로도 원로의 요청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원로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진리를 전승하고 보전하는 원로의 영향력이 그보다 못한 듯하다. 디오트레페스 개인의 의견에 따라 지역 교회 공동체의 방침이 정해지고, 교회 구성원들은 그에게 동조해야 하며, 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축출되기까지 한다면, 이는 교회의 사유화이고 그리스도의 사유화다. 자신이 주님의 공동체로 부름받았다고 여기기보다는 자신이 주님의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때나 가능한 행위이다.

 

그때도 지금도

 

요한의 셋째 서간은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사이의 한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이루어진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세적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하여, 주님의 공동체를 자신의 뜻에 맞는 집단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애초 좋은 마음으로 모인 이들까지도 주님의 길로 나아가는 데 방해를 받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묵묵히 선을 실천하는 이들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문제 앞에서, 서간의 저자는 악을 피하고 선을 택하도록 권고한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악을 택할 이들이 있을까마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때로는 불완전한 정보로 인하여 악을 선이라 믿으며 선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영향력 있는 이가 속한 그룹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옳지 못한 시류에 묵언 동조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보편 서간의 마지막 가르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그 구성원 개개인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공동선을 추구해 나갈 때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2월호(통권 500호 감사호)]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 가톨릭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