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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 복음서 해설(2)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11.

[요한 복음서 해설] 상상하라!(6,1-15)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청년들이 힘들어한다. 3포세대니, 7포세대니 온통 절망과 포기의 아우성만 그들 속에 난무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표되는 현실은 청년들의 희망을 애당초 거부하고 짓누른다. 청년들은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현실의 처참함에 어떻게든 버텨 보지만, 어른들은 그런 청년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야’라는 잔인한 논리를 들이대며 현실을 외면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현실을 장악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교육’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법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 오르는 것을 연상시키고, 자리 잡고 앉으시는 것은 가르치는 이의 전형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요컨대 예수님은 지금 모세처럼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고자 하신다. 그 가르침이 청년들이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 나라, 이 땅에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자못 궁금하다.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교육 방법은 ‘시험’을 통해서다. 그분이 필립보에게 던진 말씀은 하나의 선택을 불러일으킨다. ‘시험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 받으실 때도 사용된 동사다(마태 4,1 참조). 그때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단호히 견뎌 내셨고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의 화려함을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이겨 내셨다. 어쩌면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셨을까. 세상의 화려함에 굴복하면서 남과의 비교 우위에 젖어 있는 우리 일상의 풍경은 예수님의 시험 풀이와 결이 다르지 않을까.

 

오늘 복음이 파스카와 가까운 때로 시간적 배경을 규정짓는 건 우연이 아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 벌써 일 년이 지난 시간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한다(요한 복음은 삼 년에 걸쳐 파스카를 언급한다. 2,13; 6,4; 11,55; 13,1 참조). 파스카의 의미는 명확하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파스카는 해방과 자유의 가치를 이스라엘 민족 안에 확고히 심어 놓았다.

 

해방의 시간에 예수님은 ‘먹는 이야기’를 하신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자는 일상의 ‘필요함’을 통해 예수님은 필립보를 교육시키신다. 필립보는 세상의 ‘필요함’에 꽤나 충직했다. 큰돈이 있어야만 모두 먹일 수 있다고 미리 ‘계산’하는 필립보. 세상 이치에 참 밝은 편이고, 그것은 정당한 계산이었다. 안드레아는 어떨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음식은 수많은 군중에게 턱없이 부족한 양이기에 안드레아에게 있으나 마나 한 음식이다. 지금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산이고 뭐고 가당찮은 양의 음식을 안드레아는 무시한다. 굳이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탓하지는 말자. 이 두 제자의 말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다만, 예수님의 계산과 달랐을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당한(?)’ 계산을 거슬러 감사와 나눔을 보여 주신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빵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물고기 두 마리는 식사의 부족함을 더욱 부추긴다. 넉넉한 양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된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이 결핍은 감사와 나눔의 가치에 대한 강조와 맞닿아 있다. 결핍의 자리에서 풍성함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예수님의 ‘자유로움에 기인한다. 세상적 가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자유, 말하자면 적은 것에도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비현실적 상상이다.

 

그런데 이 상상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상상이, 꿈이, 희망이 현실이란 이름으로 짓밟힌 시대, 취업을 못하고 돈이 없는 것을 개인이 잘못한 탓으로 돌리는 기막힌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야 미래가 풍요롭다. 대개 사람들은 현실의 논리를 좇는 걸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은 현실을 진리 자체의 근거로 만들어 버리는 세뇌 작업으로 이어진다. 대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므로 그가 어찌 살든 ‘그만하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한 예다. 예수님은 적은 것, 소박한 것, 부족한 것을 풍요롭게 만드셨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셨고, 그것으로 나눌 줄 아셨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빵의 기적을 우린 종종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와 연결한다(2열왕 4,42-44 참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 이 하찮은 음식으로 장정만 오천 명 이상을 먹였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엘리야의 이야기와 중첩되어 되새김할 만하다. 두 이야기 모두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돋보이고, 그 자유로움은 하느님에 대한 의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 흐름을 요약하는 하나의 단어가 ‘감사’다. 감사를 표현하는 말로 요한은 다른 복음과 다르게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를 쓴다. 이 동사는 1세기 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성찬례를 떠올려 준다(마르 14,22-26; 1코린 11,23-25 참조). 이를테면 성찬례는 감사를 통한 풍요로움의 정신을 되새기는 일이 된다.

 

현실은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나 그 현실에서 누구보다 안정적인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오히려 즐긴다. 청년들을 경쟁의 사지에 몰아넣고 안정 속에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가진 자’다. 우리나라 100대 기업이 취업 현장에서 책임진 이는 4%이나 그들이 가져가는 이익은 60%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더 움켜쥐려는 이들만의 세상은 비우고 감사할 줄 모른다. 비우고 감사하면 바보로 취급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바꿀 ‘교육’이 필요하다. 돈만 벌고, 가진 자를 닮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세뇌 장치를 뜯어고칠 교육이 필요하다.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넉넉히 먹을 수 있는, 그래서 더불어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사이고 나눔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입증해야 하고, 무자비한 경쟁의 승자만이 독식하는 세상을 정당하다고 외치는 이들의 무지함에 저항해야 한다. 현실 속에 노예로 살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깨고 뛰쳐나갈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또다시 시험을 내건다. 풀기 힘들지만, 함께라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시험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요한 복음서 해설] (2)

보고 듣는다는 것(6,1-15)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요즘 정치가 참 지루하고 피곤하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셈법은 정상적인 공식을 애당초 불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논리, 저 논리 다 끌고 와 진리의 셈법을 붕괴시킨다. 그리곤 늘 ‘국민의 뜻’이라는 정답이 자신에게 있다는 철없는 생트집만 남긴다.

 

중요한 건, 변치 않는 이념을 붙잡는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슬기롭게 가꾸어 나가는 일이 아닌가. 이념은 판타지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에 길들어 진리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판타지로는 이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념은 제대로 보고자 늘 깨어 있는, 그래서 열려 있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 노력은 대개 낯설고 모호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오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면 더욱 단단해져, 농익은 저마다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어둔 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로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 복음의 한 대목이 저마다의 이념을 다시 한 번 고쳐 보는 데 소용되길 나는 바란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반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지난번 요한 복음서 읽기는 예수님이 ‘홀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15 참조)는 말로 끝을 맺었다. 빵을 함께 나누던 예수님이 제자들과 헤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한다. 빵을 놓고도 세상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가 부딪쳤는데, 상반된 공간상의 움직임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더욱 갈라놓는 형국이다.

 

시간적 배경 역시 갈라짐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오늘 복음의 시간적 배경은 ‘어둠’이다. 어둠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스코티아(σκοτία)’는 ‘빛의 부재’를 의미한다. 요한 복음에서 빛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반해 어둠은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나 거부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작용한다(1,5; 3,2; 13,20 참조). 예수님은 어둠 속에 홀로 항해하는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셨다(6,17ㄴ). 어둔 밤의 항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니면 예수님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섣부른 발걸음일 수 있다.

 

예수님 없는 항해는 혼란스럽다. 큰 바람과 호수의 물결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 두려움을 무턱대고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자.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했다(탈출 3,6; 판관 6,22; 이사 6,5; 묵시 1,17 참조). 많은 경우,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것은 침묵과 절제다. 신 앞에 나약한 존재로 서 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어떤 말과 행위도 의미없음을 전제하는 일이다. 결국 두려움 앞에 선 인간의 유일한 자세는 침묵과 절제로써 신의 다스림에 오롯이 귀의하는 전적인 의탁이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stadion)쯤 건너갔다는 사실에서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인간적 안간힘을 느낀다. 한 스타디온이 190미터 정도이니 4.7킬로미터 또는 5.7킬로미터 거리는 족히 나아간 것인데, 그만큼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쓸수록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에는 서툴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을 만난 듯 놀라는 것 또한 당연하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없다. 적어도 항해의 혼란 속에 예수님은 부재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거친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제자들의 노고를 두둔하는 말로 이해하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 모습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나다’라는 말이 이를 강조한다. ‘나다(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는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신 그 표현이기도 했다(탈출 3,14 참조).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규정하고 있다. 두려움에 갇힌 나머지 진작 알아봤어야 할 당신을 몰라본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일갈一喝이 혼란스러운 밤바다에 울려 퍼진다(시편 107,23-32 참조). 빛이 어둠 속에 왔으되 어둠은 빛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라 외친들, 빛이 빛일 수 있는 건, 어둠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급히 배 위로 초대하지만, 배는 어찌된 일인지 제자들이 가고자 했던 곳에 닿아 버린다. 혹자는 예수님을 만나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음을 강조하는데,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였지 예수님이 원했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6,60 참조).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적지는 여전히 다르고 멀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대개 사람은 보이는 걸 보고 들리는 걸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보고 두렵게 느끼는 건 내 삶의 자리가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운 내 삶의 자리 옆에 예수님은 늘 가까이 계신다. 다만, 우리의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계신다. 함께 가고자 하지만,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거리감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에 필수적이다.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한다지만 자칫 오해나 욕심으로 인해 그분의 뜻을 곡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잡는 작업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힘에 달려 있다. 제 욕망을 투사하듯 바라보고 만나는 모든 대상을 다시금 열린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개방성이 예수님을 만나는 필수 요건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은 내 주위의 모든 존재가 내게 호소하는 ‘자기 계시’의 외침과 같다. 들을 귀가 있는 자, 볼 눈을 가진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것이다. 저만의 이기적 논리를 앞세워 타협이나 조율에 능한(정치, 경제, 문화) 모리배꾼들의 눈과 귀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순수하고 단순한 눈과 귀가 예수님을 만나는 첩경이다. 보고 듣는 것, 너무나 쉬운 것이되, 매번 어렵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요한 복음서 해설] 지금의 여유(6,22-40)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육적인 배고픔을 잊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우린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곤 한다.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은 육과 대립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육적인 바람들’을 애써 없애는 데 우리의 성경 읽기는 집중한다.

 

나는 이런 의견에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육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살덩이’로 온전히 오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육적인 바람으로 그분을 찾아나선 걸 그리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라면, 자기 삶이 아프고 고단해서 위로받고 치유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인가?’다. 내가 진정으로 그분을 메시아로, 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누추한 맘속 속된 욕심조차도 쉽게 고백할 터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랑만이 육적인 것보다 낫다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매일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것이 육이든 영이든 간에….

 

표징을 표징으로 보는 지혜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군중을 영원한 생명을 찾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로 규정한 건 사실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이를 직역해 보면 예수님이 군중을 바라본 태도에 흠칫 놀라게 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었고, 그것도 게걸스럽게 먹었기 때문이다.” ‘배불리 먹었다’는 표현인 ‘코르타조(χορτάζω)’는 그리스어로 동물이 게걸스럽게 먹을 때 사용하는 동사다. 예수님은 군중이 ‘빵만’을 보고 자신을 찾는 게 마뜩잖다. 빵이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요한 복음을 읽을 때 늘 아쉬운 것은 표징을 표징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보는 우리의 근시안적 태도다. 묘사된 사건 속에 감추어진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노력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우리는 조금만 깊은 이야기를 할라치면 ‘머리 아프다’며 회피할 때가 잦다. 빵을 빵으로만 보지 않는 태도는 앞선 복음 이야기에서 충분히 깨우쳤다(6,1-22 참조). 예수님은 유한한 빵을 통해 무한한 나눔을 보이셨고, 그것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셨다. 빵의 가치를 돈의 논리로 따지는 우리의 일상적 가치판단은 무한한 나눔의 가치판단과는 결이 다르다. 다른 것을 생각할 ‘사고의 여유’가 표징 너머의 의미를 고민해 보고 찾도록 길을 제시한다. 게걸스럽게 빵을 먹더라도 먹는 것이 무엇인지, 왜 먹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산다는 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질문해 나가길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분명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6,39-40 참조). 영원한 생명은 요한 복음이 쓰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말마디다(20,31 참조).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숨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며 늙어 가되 늙지 않으려는 살덩이를 움켜쥔 채 사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6,27 참조). 예수님은 진정한 삶이란 현실에서 영원성을 기억해 내는 일련의 노력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키신다(6,35 참조). 이를테면, 빵을 먹는 지금 이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

 

사람들은 대개 전통과 과거의 습관에 집착한 나머지 지금 벌어지는 것에 소홀할 때가 잦다. 빵의 이야기에서도 유다 사람들은 탈출 16장의 ‘만나’를 떠올린다. 굶주림의 위협 속에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먹거리는 현실의 삶이 팍팍하면 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달콤한 충격일 테다. 다만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파시즘적 표징으로 작동하고, 행여 다른 관점을 이야기하는 이에게 퍼붓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비판의 핑곗거리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과 군중의 대화가 그러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갈망하는 군중에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셨고(6,27 참조), 군중은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군중은 예수님에게 표징을 원한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징에는 관심조차 없던 군중이 이제 표징을 원하는 건, ‘예수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라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군중은 표징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어도 조상이 먹었던 ‘만나’ 수준의 놀라운 이적 정도는 되어야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일 태세다(6,30-31 참조). 군중이 예수님에게서 바라는 표징은 탈출 16장에서 보는 만나, 딱 거기에 멈춰 있다. 과거의 가치는 과거의 시간적 배경 속에서 의미를 갖되, 새롭게 다가온 현실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덴 더욱 냉철한 분석과 비판의식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군중에게 대답하신다. 이 세상에 내려온 하느님의 빵이 바로 자신이라고 군중에게 말씀하신다(6,35 참조). 이 빵은 아버지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의 ‘계시’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신기한 이적이나 낯선 풍경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을 통해서다. 빵이라는 일상의 필요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신다. ‘일상’은 ‘만나’처럼 신기할 것도 없다. ‘일상’은 그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믿는다는 게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나 부정하지 않은 채 현재 내 앞에 있는 이를 사유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6,35). 예수님은 빵의 표징을 통해 일상의 필요성과 신적 초월성을 하나로 엮어 내는 유일한 하느님의 계시 자체가 된다.

 

우리는 일상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는 듯하다. 늘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들을 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 막연한 미래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를 회피하게 된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리…, 그래서 미래의 유토피아에 목마른 우리…,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을 제대로 보는 용기 있는 눈이다(6,36.40 참조). 지금을 제대로 보는 것은 영원함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6,40). 이게 하느님의 뜻이고(6,38), 그래서 하느님은 지금, 내 곁에 빵으로 오셨다. 지금이 여유롭지 않으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요한 복음서 해설] 신앙 대 신념(6,41-59)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곧 ‘육화’라는 개념이 요한 복음에선 자주 강조된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과 가까운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서 인간과 하나가 되었고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요한 복음이 빵이라는 형상으로 예수님의 육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1세기 후반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과 겪은 갈등에서 비롯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어, 하느님은 처음부터 영원히 저 높디높은 하늘에 계셔야 한다는 논리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라는 사실(팩트 fact)은 ‘하느님은 인간이 될 리 없는 초월적 존재이시다’라는 인간의 철옹성 같은 신념 때문에 무시되거나 억압되었다.

 

사실, 신앙의 대상이나 내용은 늘 선명했고 올곧았다. 주님의 날, 주님과 하나 되는 날,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는 날, 그날은 ‘모두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사 54,13 참조)이라는 목적 아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데 늘 열심이었다.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상은 주로 예언서에 나타난다(이사 54,13; 예레 31,33-34 참조). 요한 복음은 예언서들이 약속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예수님의 육화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한다. 예언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말이고, 그 완성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표현으로 강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신앙이 없는 데에, 또는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을 찾아 나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예전부터 가져온 우리 신앙의 가치들에 매몰되어, 하느님이 안 계셔도 신앙만 있으면 그만인 것처럼 살아가는 맹신적 행태에 있다. 이를테면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신앙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묻지 않은 채, 성당 가서 미사 드리고 신심활동 하는 것, 그것이 습관적인 일이 되어 버리는 것, 그래서 신앙과 그 대상인 하느님은 예전 내가 믿어 온 바, 교리 책에 적혀 있는 바, 딱 그만큼만 이해되는 것 등이 맹신적 행태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팩트’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체험적 앎을 통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선명히 각인하면 할수록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건 요원하다(6,42.52 참조). 신앙은 팩트 안에서 이해되고 성장한다. 다만, 팩트가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을 통해 익혀야 한다. 팩트는 인간의 해석에 따라 부분적 혹은 왜곡된 앎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매번 보고 듣는 모든 팩트는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의 투사물인 경우가 많다. 보고 듣는 것을 뛰어넘는 데서 신앙은 시작한다. 유다인들은 만나를 통해 하느님을 기억하게 되고 인간적 배고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이 그들에겐 충격적인 팩트였다. 그 팩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신념으로, 이데올로기로 길러지고 다듬어졌으며, 하느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게 아니라 만나를 주셔야 하느님일 수 있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하느님이 만나에 굴복하게 된 건 순전히 인간 신념의 고집 때문이고, 시대의 흐름 속에 하느님을 묻지 않고 신앙을 되짚지 않은 인간의 게으름 때문이다.

 

팩트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보여 주고 들려주는 것은 보고 듣는 주체와 그 대상이 하나여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보고 하느님만이 그분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들려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법은 유일하고 동시에 완전한 것이다. “먹고 마셔라”며 스스로를 내놓는 방법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하나 되었고, 그 하나 됨으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완전히 들리고 보인다. 누군가에게 먹히고 마셔지는 것이 그 누군가를 배부르게 하지만, 그 배부름 이면에 하나의 희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먹히는 예수님은 자신을 ‘살’로 내놓으셨다. 이 ‘살’은 영성적 표현이 아니다. 구체적인 ‘살덩이’(사륵스 σάρξ)다.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인간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피를 마시는 건, 유다 율법상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는 범죄로 인식된다(레위 17,10-14 참조). 예수님은 인간의 인식과 신념,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서 육화하셨다.

 

예수님의 육화는 2천 년 전의 유일회적 사건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신앙인 사이에 또다시 분명한 팩트로 이어진다. 요한 복음이 그것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은 1세기 말엽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찬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그 성찬례를 오늘 우리가 계속 거행하기 때문이다. 6장 51.53.54절에서 ‘먹는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에스티오(ἐσθίω)’인데, 그리스어 동사 형태 중 ‘아오리스트형’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 형식은 어떠한 행위가 유일회적 혹은 결단적인 차원일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먹고 마시길, 지금 이 순간 결단하길 바라신다. 이어서 56절에서 먹는 행위는 ‘트로고(τρώγω)’로 달리 표현되는데,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한 번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는 동안 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이라는 팩트가 우리 신앙인의 옹졸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늘 살아 있는 실체로, 그 실체가 우리 신앙인을 통해 이 세상에 참된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 신이 있다, 없다 논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팩트’로서 계속해서 우리와 하나 되고 그것으로 하느님은 인간들 사이에 현존하신다.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존재한,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막아서지는 못한다. 인간은 저들끼리의 논리와 신념을 주고받는 데 혈안이 되기 쉽다. 거기엔 예수님의 육화나 죽음은 거부되거나 무시된다. 신앙은 논리와 신념의 유연성에서 시작한다. ‘이것만이다’라는 논리와 신념에 ‘왜? 다른 건 없어? 다른 건 안 돼?’라고 질문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희망으로 싹튼다. … 필자는 이 글을 ‘필리버스터’가 한창인 우리나라 국회를 보면서, 그 국회를 연일 비난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런 정치를 외면하고 피곤하다고 여기는 국민을 보면서 쓰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요한 복음서 해설] 의심하는 믿음(6,60-71)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 거북한 이유는 자명하다.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마음이 없어서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명확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냥 당신을 ‘먹어 달라’고 하셨고 먹는 이에게 ‘거저 주겠다!’고 하셨다. 애원에 가까울 정도로 줄곧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거북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리라. 워낙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씀이어서 그렇고, 현실적이지 못해서 그렇다. ‘마음’이 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대개 각자의 ‘몸’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와 직결된다. 수많은 말을 하고 들으며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하루 동안 주고받는 말들을 살펴보면 매일 거기서 거기다. 그 단순한 말들 속에서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고 흩어지는 요란한 마음은 잠시도 쉴 틈을 허용치 않는다. 산다는 건, 몸의 한계성에 묶여 있느냐, 아니면 그 구속 너머 새로운 삶의 방식에 열려 있느냐의 문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거나 극복하는 모험이다.

 

“영이며 생명”인 예수님의 말씀(6,63)은 실은, 살아 있으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기 때문이다. ‘혐의(嫌疑)’를 품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건, 결코 부정적인 자세가 아니다. 어쨌거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니까, 어떻든 예수님과 더불어 논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살아 있음은 낯선 이야기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한다. 듣는 이의 영을 깨워 육의 익숙함을 걷어치우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마음이 거북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가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건 제 몸뚱이의 탐욕이나 욕망만을 좇겠다는 선언이며,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영과 생명을 등지고 제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곳은 육의 익숙함일 테다. 대개 요한 복음이 육을 영과 대비시켜 부정적으로 다룬다고들 말하지만, 요한 복음은 육이 꼭 필요한 것임을 말하기도 한다. 적어도 요한 복음에서 육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할 유일한 자리이자 방법이었으니까(1,11 참조). 육을 통해 생명이 가능한 것이고(3,16 참조), 육이 죽어야 생명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복음의 논리이기 때문이다(마태 16,25; 루카 14,27; 요한 12,25 참조). 요한 복음에서 육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건, 육이 가지는 본디 가치가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때문이다. 대개 육의 완고함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갖는 제 신념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주는 영광에 물들어 그 영광의 단맛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이들의 비겁함에서 비롯된다(12,42-43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는 건, 어쩌면 제 삶의 자리에서 해방되는 일일 테다. 제 삶으로 되돌아가는, 제 삶의 익숙함을 선호하는, 그리하여 제 삶에 떨어질 이익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결코 제 삶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제자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 제 삶으로 되돌아갈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리는 답은 그래서 신선하다.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하는 장면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마태 16,16; 마르 8,29; 루카 9,20 참조). 모두 비슷한 듯하지만, 실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이 가진 독특함이 있다. 공관복음이 베드로의 답변을 유다 사회가 기대하는 메시아상과 관련하여 그려냈다면(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 복음은 제자 대부분이 떠나가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상이 예수를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신앙고백의 주체로 베드로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6,69)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진다. 요한 복음의 목적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데 있음은 자명하다(20,31 참조). 물론 베드로의 고백이 모든 제자의 동일한 고백일 수는 없고, 그 고백이 전적으로 모든 신앙고백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의지적으로’ 뽑았고,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루카 22,22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고 그분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건, ‘혐의’를 배제한 순도 100%의 신앙으로만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착각과 편견은 버리자. 신앙고백은 육의 익숙함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육의 본성적 한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성장한다. 떠남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다. 떠나거나 따르거나 둘 중 하나라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인 듯 타협인 듯 여전히 헷갈리며 세속 논리와 신앙 논리를 식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일이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예수님 옆에 있으면 된다. 멋지고 올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스스로를 옥죄며 예의 바른 이로 하느님 앞에 서 있으려 하는 교만을 벗어던지는 태도가 오히려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믿음은 제 걸음으로 예수님 옆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처럼 똑같이 걸어가는 게 아니다. 비틀거리더라도 제 걸음이 삶의 여정을 신앙으로 물들인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요한 복음서 해설] 눈뜬장님(7,1-52)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7장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고, 공간적 배경은 예루살렘이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을 두고 예수님과 형제들이 갈등을 겪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초막절은 추수에 대한 감사와(탈출 23,16; 34,22 참조) 예전의 광야 체험이 연결된, 이를테면 현재와 과거를 엮어 기억하는 축제다(레위 23,33-44; 신명 16,13-15 참조).

 

초막절은 하느님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셨는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것이며, 지금의 삶이 어떻게 하느님을 향해 있느냐에 대한 결단을 내포한다. 현재든 과거든, 하느님이 누굴까 생각해 본다는 건, 그분이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셨는가에 대한 체험적 회상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직접 보고 듣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만들어가는 존재인 까닭이다. 다만,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한 게 인간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기억하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서 일하고 말하시는 예수님에게 유독 적대적이었다. 대부분의 논란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고, 이 논란은 배척과 단절로 이어지곤 했다(5,16–18; 7,19.30.44; 8,37.40.59; 10,31.33.39; 11,8.53 참조). 이 논란은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요한 복음이 전해진 1세기 말엽,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하다.

 

다시 정리하자면, 요한 복음 7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펼쳐진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선한 사람인가, 속이는 사람인가(7,12), 아니면 예언자인가(7,40-44) 하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 논란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 형제들의 태도에서 그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은 예수님이 드러내놓고 다니시길 원한다. 예수님의 이적이 공개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인정’이란 게 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 앎이나 이해의 문제로 바꿔 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인식하는 딱 그만큼, 인간이 알아주고 이해하는 그만큼 예수님은 드러나고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타인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과의 단절이거나 타인을 무시하고 나아가 타인을 제거하는 짓이다(7,5 참조).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알기 위함이 아니라 의탁하기 위함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누구를 믿는다는 건, 그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얼마나 그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인간 대부분은 세상에서 지금껏 인정받은 것, 혹은 앞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들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 인정 속에 계급 권력이 똬리를 틀고, 권력에 취하거나 그것을 동경하는 이들이 그 똬리를 더욱 견고케 한다(7,47-49 참조).

 

안식일 계명도 그렇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본디 존재치 않았다.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축젯날은 하느님의 거룩한 날로 바뀌었고, 거룩함을 해치는 일상의 평범함은 내려놓자는 뜻에서 안식일은 행동거지를 통제하는 날로 그 성격이 굳어졌다. 여기엔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유다 사회의 사제들이 그리 원했고 그리 강요했다. 사제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기원전 53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였고, 통치자였으며 권력자였다. 대부분의 율법 금지 조항들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체제의 흔적에서 유래한다. 본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없다. ‘하지 말라’는 율법은 사회-문화적 이해 구도가 만들어 낸 것이고, 사람이 죽든 말든 ‘꼼짝 말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근본주의적 율법 준수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에 할례를 베푸는 것을 문제 삼으신 이유는 이러한 율법주의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에 과도한 노동이나 피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할례를 거행했다. 예수님의 지적은 논리적이었으나 유다인들에겐 거북했다. 그들의 전통을 건드린 까닭이다. 하느님의 지적을 인간의 전통이 거부한 셈이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 사회가 기대한 메시아는 권력자가 지정한 곳, 즉 베들레헴이라는 자리, 다윗 가문의 시작인 곳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 믿었고 믿은 바가 견고해져 당연시되었다. 그렇다면 이사 8,23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곤궁에 처해 있는 그 땅에 더 이상 어둠이 없으리라.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이민족들의 지역’은 갈릴래아를 가리킨다. 어느 관점으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그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다윗 가문과 이민족들의 지역은 상충하고 대립한다.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를 바라보는 두 극단이 부딪히는 자리에 서 계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능력에 대해 놀라워하고 신기해한다(7,15 참조).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촌놈이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과 능력에 대한 의문이 그분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깊이 고민하는 데까지 뻗어가지는 못하였다. 유다인들은 보고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유다 사회의 현실논리와 계급 권력은 촌놈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대로 보고자 하셨다. 하느님을, 그분의 뜻을, 제대로 보고 지키려 하셨다. 자신의 때와 의지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다. 형제들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라고 다그칠 때도, 군중이 자신을 놓고 논란을 벌일 때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군지, 언제 무엇을 할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의 때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광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영광은 자신의 죽음이었다(12,23; 13,1; 17,1-5 참조).

 

목마른 자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찾아 나선다. 초막절 축제 때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 성전 제단에 끼얹는 예식을 행했다. 기쁨의 예식이었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제대로 살고 싶고, 제대로 믿고 싶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 또는 권력의지에 기대어 신앙을 이용하면 안 된다. 신앙이 자신의 익숙함으로 향할 때, 우린 주님이라 부르되 우상을 향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로 교회 밖 구원의 문제를 부각시킨 카를 라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내가 믿는 하느님이 우리 욕망의 투사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지우지 말아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 하느님(8,12-30)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복음 첫 장에서부터 예수님을 가리켰던 표징이 ‘빛’이다(1,4). 빛을 받아들여 모두가 하느님의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요한 복음의 저술 의도이기도 하다(20,30-31 참조). 다만, 빛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우리 선택의 몫이고, 빛을 빛으로 보고 나아가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로 갈라진 두 세상은 요한 복음이 쓰이고 읽혔던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했다(3,19-21 참조).

 

유다인 대부분이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더러는 믿기도 했다(7,31 참조). 예수님은 믿는 이의 탄생을 위해 믿지 않는 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신다.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이가 믿는 이가 되며, 빛이 오셨기에 어둠은 빛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어찌 보면 불신앙의 자리가 신앙이 생겨날 좋은 기회의 자리인 셈이다(8,30 참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궁금해했다. 유다인들은 철저히 하느님을 따르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직접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셨다. 하느님으로 하나 되는데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유다인들은 늘 예수님을 두고 논쟁하기 바쁘다. 매번, 도대체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8,25 참조). 유다인들이 궁금해하는 건, 예수님이 아니라 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러니 늘 묻는다. 예수님께 묻고, 그분의 증언에 대해 확실히 해 두고자 한다. 혼자서 증언하는 것은 참되지 않으니 둘이나 셋이 함께 증언해야 한다는 유다 율법(민수 35,30; 신명 17,6 참조)을 근거로 어떻게든 예수님을 알려고 한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무지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생겨난다. 먼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현혹되어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빛이 세상에 와도, 생명을 주러 하느님이 당신 외아들을 보내셔도, 우린 재테크에, 자녀 교육에, 심지어 오래 살기 위한 건강 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세상이 나아갈 방향과 올바른 가치에 대한 고민은 피곤한 것이라 치부한 채, ‘잘 산다는 것’이 ‘얼마를 버느냐’는 기준으로 갈무리될 수도 있다. 삶이 무언지, 삶의 가치가 무언지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린 세상이 되는 데 일조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 역시 그러했다. 하느님을 따른다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보다 율법을 지켰는지 아닌지, 안식일을 지켰는지 아닌지를 더 많이 묻고 따졌다(9장 참조). 유다인들의 무지는 ‘현실’이라는 비겁한 핑계 속에 하느님을 포박한 데서 기인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근원과 세상이 나아갈 바에 대해 집중하셨다. 파견되신 이로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 하셨고, 그 뜻을 십자가로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요컨대,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셨다(8,14 참조). 행복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고 하면서도 눈앞의 이해관계에 철저히 묶여 있는 우리로선 ‘왜 사는지’라는 물음이 늘 부끄럽다. 목숨까지 걸진 못하더라도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와 방향을 묻는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유다인들이 무지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과 그들이 머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8,23). 물론 세상은 하나고 둘로 나뉜 적이 없다. 요한 복음이 말하는 아래의 세상과 위의 세상은 ‘영성적’ 차원의 구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8,24). ‘내가 나이다’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한 표현이다(탈출 3,13-16 참조). 풀어 이야기하자면, ‘예수, 바로 내가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것은 제 삶이 전부가 아님을, 그래서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 나아가야 함을 고백할 때 가능하다. 예수님을 보면서 제 삶에 유익한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죄에 머무는 것이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다. 제 것에 눈이 멀어 다른 것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뜻과 당신의 논리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된 분이셨다.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8,26).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8,29).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들 안에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하느님의 세상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통해 당신 삶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짚어 내셨고, 그것으로 그분의 삶은 하느님에 대한 ‘증언, 그 자체’였다.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은 곧 하느님 나라였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실제 삶의 자리에선 단죄와 심판을 일삼고 하느님 나라가 멀었다며 이원론적 세계관을 ‘즐기던’ 유다인들에겐 제 삶이 하느님 나라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세상이 낯설고 불편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당신의 근원과 당신이 사는 세상을 밝히 보여 주셨다(8,28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결과다(3,16-17 참조). 하느님의 그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살덩이를 이 세상에 내던지셨는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무관심으로 하늘에 유폐시키는 것은 아닐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식으로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일, 알고 보면 참 쉽다. 의심하면 된다. 묻고 또 물으면 된다. 내가 왜 사는지, 사는 이유가 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살아서 제 삶의 근원과 그 자리를 잃어버리면 이 세상에 당신 천막을 세우신 예수님도 하느님도 잃게 된다.

 

기억하자,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데서 믿는 이가 탄생한다. 믿음이 있기 위해 우린 삶을 의심하고 물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8,30).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요한 복음서 해설] 하나의 믿음(8,31-59)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아브라함을 두고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논쟁을 벌이는 대목은 우스울 정도로 유치하다. 성경 말씀을 두고 유치하다 말하는 것이 불경스러운가.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유다인들의 논리라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도발적인 글투에 독자들은 당황스럽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조금 강하게 쓰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는 오늘 함께 읽을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였다(8,31). 그러나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권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작동한다. 지금껏 우리가 읽어 온 요한 복음의 내용은 일관되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요컨대,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이다.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두고 갈등을 일으켰는데(7,40-44 참조),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실은 지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지켜 온 의식 체계의 혼란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두고 사유하고 그의 정체성에 접근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지켜 온 것에 대한 집착이 예수님을 갈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유다인들의 의식 체계는 ‘하나’로 요약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셔야 하고, 그 하느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들이 과거부터 켜켜이 쌓아 온 율법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8,41).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긴 것은 유다인들의 오래된 습관이었고(신명 32,6; 이사 1,2; 63,16; 64,8 참조), 관습은 국수주의적 폐쇄성을 부추겼으며, 율법을 통해 다른 민족과의 차별을 철저하게 공고히 했다(신명 6,1-3.17.24-25 참조).

 

‘한 분의 아버지’라는 인격체는 율법이라는 제도와 규칙을 통해 ‘하나’라는 화석이 되어 갔다. 아브라함은 이런 유다인들의 입장을 견지해 주는 보증수표였다. 신앙의 길에 두말없이 순순히 따라나섰던 아브라함은, ‘하나’이신 하느님께 선택된 ‘하나’의 백성으로 떳떳하다는 유다인들의 자존감을 위한 제물로 손색이 없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을 치장하는 데 바빴고, 아브라함의 권위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하느님이 누구든, 아브라함이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선 열심히 율법을 재생산하며 그들의 현실적 계급진영을 더욱 견고히 했다. 유다인들에게 ‘하나’는 자신들의 이름만 드높이는 바벨 탑이었다.

 

여기엔 하나의 위험이 도사린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다른 제도나 규칙, 존엄한 권위 등에 기댈 때에는 자신을 잃어갈 위험이 상존한다. 말하자면 사랑해서 결혼한다면서 혼수로 열쇠 몇 개는 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하는 구태와 닮은 셈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유다인들 앞에 서 있다. 그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으로 스스로를 계시한다. 어디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 하나로 유다인들과 대화한다. 유다인들은 그 대화 속에 참 많은 것을 쑤셔 넣는다. 아브라함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출신 성분까지 들먹인다(8,48). 그들은 지금 하느님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식 체계가 파탄되어 가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잃어가는 셈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죄를 지어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한다(8,34).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 책임을 불러오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죄의 근본은 ‘더 먹음직스럽고, 더 유식해질 것 같으며, 더 멋져 보일 것 같은’ 것에 대한 개인의 폐쇄적 욕망에서 시작한다(창세 3,6 참조). 욕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현실을 자기 편한 대로 조작하고 편집하게 한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렇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8,33). 감히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백성이 종노릇했다고 말하다니!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허나 역사는 말한다. 유다인들은 바빌론에, 페르시아에, 그리스에, 그리고 로마 제국에 철저히 종노릇해 왔다고. 이만하면 유다인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의식의 파탄, 그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을 ‘믿는’ 유다인이라 분명히 말한다! - 믿음의 불순함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을 존경하면서, 심지어 예수님까지 믿으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각종 이해관계를 믿음으로 치장한다. 믿음은 유다인들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블랙홀과 같다. 오만 가지를 다 던져 놓고도 믿는다고 강변하는 유다인들은 실제 하느님을 죽일 수 있는 살인자들과 맥을 같이한다(8,40).

 

믿는 것은 하나다. 한 분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을 전하는 이를 믿고, 아브라함이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든 세상 태초부터 있던 것에 대해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있었다고 하신 말씀은, 태초부터 육체를 갖고 숨을 쉬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하나로 이제껏 하느님의 말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태초부터 하나였다. 본디 하나를 둘로 갈라놓는 것이 사탄이고 악마이며 거짓이고 살인이다. 갈라지는 건 오로지 제 삶이 기대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몸과 마음이 뺏긴 노예근성 때문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치장하는 건 민망하거나 유치한 일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요한 복음서 해설] 앎의 폭력(9장)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8장에서 유다인들과 격정적인 토론이 있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메시아였고, 예수님은 유다인들을 살인자의 자식, 거짓의 자식, 악마의 자식으로 폄하하셨다(8,44). 그런 예수님에게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 했다(8,59). 토론은 갈등과 폭력으로 치달았다.

 

몸을 피해 성전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은 태생 맹인을 만난다. 몸이 아픈 이를 보면 마음이 짠하거나 혹은 피하거나 아니면 고쳐 주려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이야기는 맹인의 ‘죄’를 문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병은 곧 죄’라는 것이 라삐 신학에서는 일반상식에 가까웠다(5,14; 야고 5,15-16).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분명 조상으로부터 하느님의 징벌이 이어진 탓이라는 게 그 이유다(탈출 20,5; 신명 5,9).

 

예수님은 태생 맹인을 고쳐 주셨고(9,1-7), 그걸 두고 바리사이를 중심으로 한 유다인들은 또다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안식일에 태생 맹인을 고쳐 안식일법을 어겼으니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게 유다인들의 주장이다(9,16). 예수님은 태생 맹인인 것이 조상의 탓도, 맹인의 탓도 아닌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신다(9,3). 하느님은 저주하시고 짓누르시며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픈 이를 돌보시고 낫게 하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분이라고 예수님은 이르신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했고 안식일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소외시킨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 편에 있는가 아니면 유다인들 편에 있는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갈등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부재중에 펼쳐진다(9,8-34). 이 갈등이 예수님 부활 이후, 예수님이 더는 지상에서 살과 피를 지닌 채 살지 않을 때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펼쳐진 이야기로 인식하는 주석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그치는 방향으로 결론 지어졌고, 유다 사회의 기존 인식체제가 그만큼 견고하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다. 태어나면서 맹인이면 계속 맹인이어야 한다는 인식, 그래서 계속 죄인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맹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어찌 보면 이 갈등은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 시대의 ‘해석’ 문제였고, 개혁적, 급진적 인식을 갖추기에 너무나 평범한 이들의 보편적 해석이 문제였다.

 

사회적 평범함은 대개 그 사회의 권력에 종속된다. 태생 맹인의 이웃들이 그러했듯, 사회 권력을 통해 기존 인식체제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평범함은 더욱 견고하고 폐쇄적으로 변한다(9,13). 태생 맹인의 부모조차 바리사이로 대변되는 사회적 권력을 두려워했고, 자기 아들에 대한 변호를 기피한다(9,21-22).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 사회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 살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자 메시아였지만 유일신 사상에 집착한 유다인들에게는 그 사실이 불편했다. 90년경의 얌니야 종교회의에서 유다 사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저주하고 단죄했으며 유다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태생 맹인 부모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비겁함이었으며,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사회적 권력은 이용했다. 사회적 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의 무한하고 창조적인 인식 작용을 가로막은 채 점점 더 견고해진다.

 

그럼에도 태생 맹인만은 달랐다. 그는 예수님이 행한 ‘사실’에 집중한다. 예수님이 누군지,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단정하지 않는다(9,25). 그는 예수님을 예언자라 고백하고(9,17) 바리사이들을 오히려 눈먼 이, 귀먹은 이로 규정한다(9,27).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을 손질하는 데 유용하다. 이 ‘사실’이 태생 맹인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9,38). 공부하고, 기도하고, 평생 수도를 한다 해도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에 그렇다. 이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고, 믿음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의 확장이고 증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건, ‘과거’에 머물러 ‘지금’을 상실한 데에서 기인한다. 9,34을 읽어 보자.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태중에서부터 병을 앓으면 죄인이라는 당시의 인식체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태생 맹인은 이미 맹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는 죄인이 아닐진대, 바리사이들에게 태생 맹인은 여전히 죄인이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제거된다(9,34). ‘과거’가 ‘지금’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썩는 내가 진동하는 수구적 중얼거림만 난무한다. “저자는 눈이 멀었다, 눈이 멀었다, 눈이 멀었다.”

 

9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태생 맹인은 예수님을 보고 들었지만, 바리사이를 중심으로 한 유다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모세의 후손이라 율법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지 못하는 건,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을 ‘화석이 된 하느님’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유다 사회에서 쫓겨난 태생 맹인은 다시 예수님을 만난다. 어쩌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완고함과 폐쇄성에서 해방된 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예수님은 줄곧 하느님을 증언하고 입증하시지만,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나아가 복음서 전체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제 행동거지에 대한 윤리 도덕적 판단에 있지 않다. 죄의 본질은 모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얄팍한 지식과 정보로 안다고 우겨 대는 데 있다. 대개 그 지식과 정보는 사회적 권력이 오랫동안 재단하고 설계한 획일적이거나 편향적인 것임에도 말이다. 태생 맹인은 ‘모른다’고 했고, 모르기에 ‘믿는다’고 했다. 몰라서 기존 인식체제에 기생하는 태생 맹인의 부모나 그 부모가 환생한 지금의 ‘우리’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거부하고 단죄하고 죽일 수 있는 비겁함의 주인공일 수 있다.

 

지리멸렬한 과거에 언제까지 ‘지금’을 저당 잡히며 살 것인가. 나는 도대체 어떤 예수님을 원하는가,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원하기는 한 걸까, 또한 믿고는 있는 걸까,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알기는 한 걸까…. 이 질문이 나를 해방시키고 나의 눈을 제대로 뜨게 만들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요한 복음서 해설] 연대 대 분열(10,1-21)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이달에 읽을 요한 복음은 목자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님은 목자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고(10,1-6), 이어서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빗대어 설명한다(10,7-18). 이 두 이야기의 반응이 그리 긍정적인 건 아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10,6),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10,19).

 

목자의 비유는 참된 목자의 진면모를 먼저 소개한다(10,1-3ㄱ). 도둑이나 강도와 대비되는 참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다(10,2). 문지기는 목자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 준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 것으로, 또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으로 참된 목자는 등장인물들과의 ‘신뢰’를 드러내는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목자의 비유를 읽을 때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이러한 ‘신뢰’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목자에게만 집중해 목자를 예수님과 곧장 연결해 버림으로써 문지기의 역할, 양들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외면한다. 하지만 문지기가 목자를 알아보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목자는 양들에게 들어가지 못하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 목소리는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앞서 안식일 법을 들이대며 예수님과 논쟁을 펼쳤던 바리사이들을 예수님은 눈먼 이며 죄인이라고 단정했다(9,39-41). 아무리 참된 진리도 듣는 이가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버리면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본래 목자의 비유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에서 파생된 개념이다(시편 23; 80,2; 이사 40,10-11).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목자이시며, 그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이익에 눈이 멀어 백성을 잘못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거짓 목자, 나쁜 목자로 하느님과 대비된다(예레 23; 에제 34; 이사 56,9-12). 즉 목자는 양을 통해 그 가치가 돋보이고, 양은 목자의 형상을 통해 하느님을 조우할 수 있다.

 

‘목자’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서로의 신뢰를 근본으로 하는 관계의 총체다. 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문이다”라고 계시한다(10,9).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구원과 풀밭을 불러오는 매개체다(10,9). 통로와 매개체로서의 예수님은 어떠한 조건이나 제약을 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통할 수 있는 문, ‘누구든지’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예수님은 자리매김한다. 어떤 삶을 살든 예수님을 거치는 이는 구원과 생명을 보장받는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맞닿아 있다(3,16-17).

 

요한 복음에서 ‘세상’은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암흑인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이 놓이는 구원의 대상이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문’으로서의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문은 걸러 내고 통제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들어올 수 있되, ‘모두’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는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구원과 생명은 그것을 원하는 이가 누릴, 무한히 개방된 자리이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에겐 너무나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런 역설적 논리를 보증하는 유일한 문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다(사도 4,12; 1티모 2,5).

 

그리하여, 예수님은 “착한 목자”다(10,11ㄱ). 윤리 도덕적, 율법적으로 의롭거나 행실이 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착하다’의 그리스어 ‘칼로스’(καλός)는 악과 대비되는 ‘진실하고 올바른 것’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ㄴ). 여기서 ‘착함’은 다시 규정되어야 한다. ‘착함’은 홀로 진실되고 올바른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양들을 알고 양들과 함께 지내는 ‘연대’의 가치를 지닌다. 이 ‘착함’에 반(反)하는 삯꾼은 양 떼를 흩어 버리는 이리를 보고도 달아나며 그로써 양들과의 관계는 소거된다(10,12). ‘착한 목자’인 예수님이 보여 주는 양들과의 연대는 이 지상 것만도, 지금의 것만도 아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아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은 말한다. 예수님이 양들을 알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서 우리 신앙인들 틈 안에서 죽어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 죽음은 하나의 우리(울타리), 한계 지어진 틀 안에서 기념되고 기억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없는 양들, 아직 그를 모르고, 그를 몰라서 하늘의 아버지도 모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는다(10,16). 예수님은 그렇게 땅이 하나 되고, 그 땅이 하늘과 하나 되는 ‘연대’의 길을 당신 십자가의 순간까지 지속해서 만들어 갈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물론 육체적 생명의 끝이다. 그럼에도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시작이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10,17). 이 시작은 예수님의 전적인 자유로 가능하고, 그 자유가 절대적으로 당신의 뜻이라 여기는 아버지 하느님의 배려로 가능하다(10,18). 예수님과 하느님은 이 자유 안에 한 분 하느님으로 조우한다.

 

문으로서, 목자로서 예수님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가 있을 뿐이다. 그 목표는 요한 복음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암흑일지라도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20,31). 이 믿음의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고 갈라 세우는 데 익숙해져 버린 마음의 편협함이다(6,52; 7,12.25; 9,8-9.16; 10,19-21; 11,36-37). 유다인들의 논란을(10,19-21) 유심히 바라보자. 그들이 무엇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는가. 예수님이 마냥 싫어서, 그의 가르침이 낯설어서일까. 아니다. 유다인들의 논란은, 실은 자신들의 내적 분열에서 온다. 마귀가 들렸다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그들의 눈에 펼쳐진 수많은 표징, 특히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한 것(9장)은 마귀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서 온다는 걸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눈먼 이를 고치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 유다 사회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던 것이다(탈출 4,11; 시편 146,8; 이사 29,18).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신앙이라는 게 별건가…. 다투지 않고 갈라 세우지 않고, 조금씩 양보하며 서로를 보듬는 게 신앙이 아닌가. 사실, 그게 힘들다. 옳고 그름이 명백히 내 안에 자리잡고 있고, 그 옳고 그름이 객관적이지 않음에도 참으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를 힘들게 한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요한 복음서 해설] 떠남(10,22-39)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교회 안팎이 시끄럽다. 폭로에 폭로로 맞서고 사실과 진실은 서로의 입장에 따라 편집되거나 왜곡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논쟁이 사라진 채, 각자가 속한 진영 논리에 따라 말들은 뒤섞이고 갈라지고 찢어진다.

 

현실적 이슈 대부분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데 소용되고 버려진다. 다들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자기의 존재 가치가 현실에서 되새김질 되는 희열을 느끼는 데 열심이다.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부정도 긍정도 아닌 우리 삶의 현상, 그 자체다.

 

문제는 삶의 자리다. 어디에 머무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유다인들과 대립적 입장을 보이는 것도 예수님이 머무는 삶의 자리가 ‘파견된 자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일하고 가르치는데,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자리에 함께하지 않는다. 삶의 자리가 서로 다른 까닭에 예수님의 말에 유다인들은 객관적일 수 없고, 저들의 존재 가치를 거칠게 드러낼 뿐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존재 가치를 대변하는 성전 안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적진 깊숙한 곳에 가 있는 셈이다. 때는 성전 봉헌 축제 기간이었다. 흔히 ‘하누카’로 불리는 이 축제는 기원전 165년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의 호위 아래 새롭게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보통 12월경 여드레 동안 지내는 축제다. 셀레오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에서 벗어나 그리스 신상들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1마카 1장, 4장). 과거의 역사를 축제로 더듬는다는 건,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함이다. 성전 봉헌 축제는 하느님의 자리를 되돌려 드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되새김의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과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물론 새로운 봉헌의 시간과 자리에서 유다인들은 새롭게 메시아로 파견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믿지 못한다(10,25).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위해 세상에 왔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일을 두고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한다. 어쩌면 ‘일’의 문제는 부수적이다. 유다인들이 알고 싶은 건, 예수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예수님이 줄곧 보여 준 ‘표징’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했고,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믿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이유인즉,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10,26). ‘양’의 가치는 ‘따름’에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건,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함인데, ‘손’이라는 형상으로 구체화된다(10,28). 예수님의 손안에 머무는 것이 양의 존재 가치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은 아버지의 손과 하나다(10,29). 양, 예수님, 아버지가 ‘손’이라는 형상 안에 일치한다(10,30).

 

믿음이란 그 ‘손’ 안에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유다인들은 성전을 봉헌했어도 하느님의 ‘손’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건물로 하느님을 찾았고, 건물로 하느님을 잃었으며, 다시 건물로 하느님을 되찾았노라 기념하고 축하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살덩이로 이 세상에 왔다. 건물로서의 하느님에 집중한 유다인들이 알아볼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좋은 일을 보아도, 신기한 일을 보아도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닌 살덩이를 가진 인간임이 확실하니까(10,33). 우리야 살덩이를 가진 예수님을 참된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다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그게 실은 쉽지 않다. 우리가 머물기 원하는 ‘손’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내 자식의 입시, 내 남편의 성공, 내 가족의 건강, 내 돈벌이의 안정, 내 안위의 유지, 내 봉사의 인정 등, 내가 어디 한 번이라도 ‘나’를 떠나 그 다른 ‘손’에 가려던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분명해진다. 유다인들도 양들처럼 목자를 따라 떠나지 않았기에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신성모독으로 말이다(레위 24,16). 예수님은 ‘먼저’ 떠나왔고, 그래서 ‘먼저’ 양이 되었고, 먼저 ‘믿는 이’가 된 셈이다. 아버지와 하나라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떠나왔으나, 그 떠남이 그를 하느님의 외아들, 지독히도 하느님이 사랑하는 소중한 아들로 인지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다시 한번 떠난다. 유다인들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율법의 세계로 떠난다. 시편 82,6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모든 이의 신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요컨대 믿는 이는 신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하느님 그분이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예수님이 율법을 인용하는 것은 유다인과 대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다인이든 그 누구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라면 신이 되고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그 가능성 안에서 예수님은 유다인과 하나 될 또 다른 가능성을 지향한다. 빛이 어둠을 드러내어 빛의 독보적 존재 가치를 뽐내고자 하는 게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다. 빛이 어둠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어둠이 빛을 품어 안길 바라는 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이유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인들과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나 되길 원하신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10,38).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을 증거하는 표징이다. 유다인들이 그 자리에 오고, 안 오고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다.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의 선택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머물지 않으셨고(10,39) 그래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은 여전히 찢어지고 갈라지며 반목한다.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사건과 소식으로 서로 갈라서거나 화합한다. 사건과 소식은 새로운데 우리의 인식 체계와 그 과정은 대개 낡았거나 진부한 것이다. 세대 차이 나는 어르신들 혹은 젊은이들과의 대화가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보와 보수의 견해차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되돌아볼 것은 하나다. 나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머묾이 나를 떠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옥죄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은 떠남으로 머물렀다.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 떠났고, 그것으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으로 살아 계신다.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 내가 나이기 위해 난 어디로 떠나 진정한 나를 찾을 것인가. 복음 읽기는 그래서 늘 숙제로 남는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