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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2) - 허규 베네딕토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9.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일곱 대접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는 또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15,1).

 

여기 나오는 “마지막 일곱 재앙”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16장)에 의한 환시 전체를 요약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 일곱 재앙의 예고

 

일곱 대접의 환시는 가장 먼저 결과를 소개합니다. 이미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한 이들을 소개함으로써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리 알려 줍니다. 이와 함께 승리의 노래, 곧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15,3-4)가 소개됩니다. 이 노래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어린양의 노래’는 어린양인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승리를 암시하며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탈출 15,1-18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를 떠올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것을 찬양하는 모세의 노래는, 어린양을 통한 구원이라는 점에서 요한 묵시록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 곧 승리의 노래는 마지막 재앙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심판과 그분의 정의로운 업적을 미리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승리의 선취(先取)’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재앙을 소개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승리의 노래 이후에는 일곱 대접의 재앙을 실행할 천사들이 소개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 담긴 금 대접”이 주어집니다(15,6-7 참조). 하느님으로부터 전해지는 일곱 대접은 하느님의 권한이 위임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전이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찼다(15,8 참조)는 표현은 하느님의 분노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하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15,8 참조)는 것 역시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의 재앙들

 

이전의 재앙과 비교할 때 일곱 대접의 재앙이 강조하는 점은 더 이상 공간적으로 제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땅의 1/4(일곱 봉인)이나 1/3(일곱 나팔)과 같은 표현이 없다는 점에서 마지막 일곱 재앙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재앙이 지속되면서 재앙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확장됩니다.

 

첫째 재앙(16,2)은 종기가 생기는 것으로 이집트에 내린 여섯째 재앙(탈출 9,8-12)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이 재앙들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재앙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반대하고 지금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입니다. 둘째 재앙(16,3)은 바다에, 그리고 셋째 재앙(16,4)은 강과 샘에 내려집니다. 물이 피처럼 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에 내린 첫째 재앙(탈출 7,17-21)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재앙 이후(16,5-7)에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찬양이 자리합니다. 이 찬양에서 강조되는 것은 ‘의로우신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찬양 중에 하느님의 심판을 초래한 적대자들의 악행도 표현됩니다. “저들이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들’은 앞에 언급된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15,2)입니다. 제단 역시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을 찬양합니다. 이 제단은 살해당한 이들이 악인들의 심판을 촉구하는 내용(6,9-11)과 연관됩니다. 그들은 아직 심판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답을 받았지만, 이제 하느님의 심판이 의로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해의 뜨거운 열로 사람들을 불태우는 넷째 재앙(16,8-9)은 선택된 이들에게 했던 약속(7,16)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열기도 내리쬐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악인들에게 열기를 내림으로써 실현됩니다. 다섯째 재앙(16,10-11)은 짐승의 왕좌, 곧 황제의 자리에 내린 재앙입니다. 그의 나라에는 어둠이 내리고 그들이 겪는 괴로움이 커서 혀를 깨물 정도라고 재앙의 고통을 묘사합니다.

 

여섯째 재앙(16,12-16)은 유프라테스 강에 내렸는데, 이 강은 로마와 파르티아(페르시아)의 경계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처럼 강물이 말라 동쪽의 임금을 위한 길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용, 짐승, 거짓 예언자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은 재앙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왔음을 알고 ‘하느님의 중대한 날’(16,14; 요엘 2,11 참조)을 대비해 세상의 임금들, 곧 하느님을 반대하는 이들을 모아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들은 모든 임금을 하르마게돈에 모아들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르마게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많은 사람이 에제 38-3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마곡의 전투가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승리한 ‘이스라엘의 산악지방’으로 이해합니다.

 

일곱째 재앙(16,17-21)은 큰 도성 곧 로마가 세 조각 나고, 우박으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30-40kg에 해당하는 ‘한 탈렌트’의 우박은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만큼 하느님의 재앙이 무섭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 재앙부터 등장하는 ‘회개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이집트에 내린 재앙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된 파라오의 완고함과 닮았습니다. 하느님의 무서운 재앙에도 악의 세력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하느님을 모독할 뿐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바빌론에 내릴 심판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 묵시록에서 묘사하는 재앙은 일곱으로 이루어진 봉인과 나팔과 대접입니다. 이 재앙들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묘사되는 환시들은 이제까지 예고되고 보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바빌론에 내려질 심판입니다. “큰 물 곁에 앉아 있는 대탕녀에게 내릴 심판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17,1).

 

대탕녀 바빌론

 

여기에 소개되는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표현은 예레미야서 50-5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예레 51,13)라는 표현은 17,1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이 여자는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여기 나온 짐승은 이미 13장에서 표현된 짐승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천사는 땅의 임금들과 주민이 이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발합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불륜은 신학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혼인 관계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여인의 이미지로 그리고 하느님은 마치 신랑인 것처럼 소개됩니다. 이 관계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불륜은 성적인 죄를 실제로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 관계를 깨는 행위, 곧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결국 땅의 임금들과 주민으로 표현되는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짐승(12,3)을 타고 있는 이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습니다”(17,4). 이 표현은 큰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들고 있는 ‘불륜의 잔’은 상징적으로 심판을 나타내는 ‘하느님의 분노의 잔’(14,10 참조)과 대조됩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다는 것은 이 여자, 구체적으로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황제가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주체임을 드러냅니다.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그것이 또 지하에서 올라오겠지만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따름이다”(17,8). 이 표현은 짐승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미 13장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한 바 있는 ‘네로의 귀환’이라는 당시의 전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표현으로 소개되는 이 짐승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1,4.8; 4,8)으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적대자임을 암시합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있는’ 분이지만 이 짐승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통해 ‘거짓된 신’임을 표현합니다.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일곱 산”과 “일곱 임금”입니다(17,9). 여기서 말하는 일곱 산은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루어진 로마를 말합니다. 일곱 임금 중 다섯은 지금 없고 하나는 지금 다스리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표현을 통해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황제 중에 어느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수를 헤아려야 하는지, 또 지금의 황제가 누구인지를 본문에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지 않습니다. 단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빌론이 로마의 상징이며 앞으로 오게 될 임금이 네로와 견줄 만큼 신앙인들의 박해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들은 모두 힘을 합쳐 어린양과 전투를 벌일 것이고 어린양은 믿음을 간직한 이들과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17,14)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19장에서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탕녀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심판

 

전투에서 패한 짐승은 “그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알몸이 되게 하고 나서, 그 여자의 살을 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버릴 것”(17,16)입니다. 상당히 잔인하게 묘사된 이 표현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은 두 탕녀,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 안에서 ‘옷을 벗기는 것’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불에 태워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을 상징합니다. 특히 ‘살을 먹는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이들에게 내리는 치욕스런 죽음으로 묘사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인물은 예로보암과 이제벨입니다. “예로보암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1열왕 14,11).

 

이제벨은 이스라엘이 바알 신을 숭배하도록 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우상숭배를 가져온 이제벨의 이미지는 불륜을 저지른 탕녀로 표현되는 바빌론, 곧 로마의 이미지와 부합합니다(2,20-21 참조). 이제벨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판 역시 치욕스런 죽음입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우상숭배는 구약성경에서부터 가장 큰 죄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을 반대하고 우상숭배를 통해 믿는 이들을 선동하는 자들, 그리고 이러한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판은 구약성경에서도 가장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 예고는 19,17-21에서 다시 표현되며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그 여자, 탕녀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큰 도성”(17,18), 곧 로마임이 명시적으로 밝혀집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 놓여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박해라는 환난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만, 이 역시 하느님께서 바른길로,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길로 이끄시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고통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날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을 받고, 믿음을 지켜낸 이들은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바빌론의 패망

허규 베네딕토 신부

 

 

대탕녀 바빌론의 심판 예고에 이어 나오는 내용은 바빌론의 패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바빌론의 패망 과정은 전하지 않은 채 패망에 대한 반응만을 말해 줍니다. 천사가 외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18,2) 여기서 이미 심판 예고에 언급되었던 내용이 반복됩니다.

 

“역겨운 것들의 어미”(17,5)로 소개되었던 바빌론은 ‘마귀들의 거처, 더러운 영들과 새들, 짐승들의 소굴’이라는 비유로 묘사됩니다(18,2). 그리고 이것은 불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불륜은 신약성경에서 성적인 죄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뒤이어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기 전에 몸을 피하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내 백성아, 그 여자에게서 나와라. 그리하여 그 여자의 죄악에 동참하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앙을 입지 마라”(18,4). 이 말씀은 바빌론으로 표상되는 로마에 내리는 심판과 벌이 도시 전체에 미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 바빌론 곧 로마가 지은 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진노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도시 전체에 내려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 도시에 내려지는 하느님의 진노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올려 줍니다(창세 19,12-29 참조). 요한 묵시록의 이 본문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 백성아, 바빌론에서 나와라. 저마다 주님의 타오르는 분노에서 제 목숨을 구하여라”(예레 51,45).

 

천사의 선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그 여자가 남에게 한 것처럼 되갚아” 주라는 말씀입니다(18,6).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 악한 행실을 그대로 되갚아 준다는 것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나오는 주제입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은 종말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자주 등장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사치를 누린 만큼 고통과 슬픔을 안겨 준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또한 이미 심판 예고에서 언급된 것처럼 여러 재앙이 닥치고 결국 그 여자, 즉 바빌론은 불에 탈 것입니다.

 

다음에는 바빌론의 불륜과 사치에 동조하거나 이득을 본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사치는 이미 구약성경에서부터 부정적으로 이해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치는 특히 종교적 윤리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불륜과 사치로 요약될 수 있는 바빌론의 죄는 그에 동조하거나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은 이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억눌린 이들의 탄원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세 번 반복해서 표현되는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저 큰 도성!”(18,10)이라는 외침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짓눌리는 당신 백성의 탄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불행 선포 역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향합니다. 그들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며 하느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숭배한 땅의 임금들, 바빌론의 사치 때문에 경제적 이득을 보았던 땅의 상인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땅의 임금과 상인들은 이미 언급된 바 있지만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금방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 표현이 에제 27,25-32을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땅의 상인들이 육로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면,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닷길을 통해 로마와 교역하여 이득을 얻은 상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우리나라처럼 반도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땅에서 살해된 모든 사람의 피가 바로 그 도성에서 드러났다”(18,24). 천사의 이 마지막 외침은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 언급되는 ‘피’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로마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로마는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린 모든 이에게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에서 남은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이 실현되는 일뿐입니다.

 

다가오는 구원과 영광의 시간

 

그리스도의 재림 곧 종말을 나타내기(19,11) 직전에 마지막으로 전해지는 것은, 이 모든 업적을 이룬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종말 때에 신앙인들이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이제 곧 실현될 구원의 시간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19,7-8).

 

이 마지막 찬미가에서 두드러진 점은 ‘대탕녀 바빌론’과 대조되는 ‘신부’의 이미지입니다. ‘자주색과 진홍색 옷’으로 치장했던 바빌론과는 대조적으로 ‘어린양의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으로 몸단장을 했습니다. 여기서 뚜렷한 옷 색깔의 대조는 세상의 화려함과 천상의 영광을 각각 대비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흰색을 연상시키는 고운 아마포로 단장한 신부의 모습은 승리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종말이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함축해서 표현합니다.

 

어린양을 신랑, 신앙인들을 신부, 그리고 마지막 때의 기쁨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는 것은 복음에도 나오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써서 책의 마지막에 신부로 표현되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환시(21,9-22,5)를 준비합니다. 거룩한 도시라는 상징은 하느님과 어린양과 영원히 머물게 될 구원받은 이들, 곧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종말의 때가 오면, 하느님의 약속이 모두 실현되는 때가 되면 신앙을 굳건히 지켜온 이들은 마치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도시처럼,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의 행복선언

허규 베네딕토 신부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행복하여라”는 말씀을 행복선언이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전에는 진복팔단이라 많이 불렀던 참행복에 관한 말씀(마태 5,1-12)이나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행복선언(루카 6,20-23)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이러한 행복선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행복선언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 행복선언은 요한 묵시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7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행복선언이 일곱 번 등장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시를 중심으로 한 내용에서 행복선언은 요한 묵시록의 목적을 잘 드러내기에 더 중요합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14,13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16,15  “깨어 있으면서 제 옷을 갖추어 놓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19,9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20.6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다.”

 

22,7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22,14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일곱 가지 행복선언의 내용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책의 머리말과 맺음말 부분에 담겨 있는 동일한 내용의 행복선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합니다”(1,3)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22,7)는 같은 내용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 대한 행복선언이 책의 시작과 끝에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이 요한 묵시록에서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하여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약속을 신앙인들이 굳게 믿고 살아가도록 용기를 주며, 특히 박해받는 신앙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켜가도록 격려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행복선언은 중요합니다. 이 선언이 곧 요한 묵시록을 기록한 목적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신앙인들이 처해 있는 박해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가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14,13)라고 합니다. 황제숭배 의식을 거부해서 겪게 되는 박해가 점점 더 심해지는 처지에서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승리와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알몸’은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두 표현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이미 3,18에서도 언급되었던 이 표현이 16,15에서는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구원을,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알몸이나 부끄러움으로 표현되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옷과 관련된 행복선언은 두 가지입니다. 옷을 준비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는 이들(16,15)과 자기들의 옷을 빠는 이들(22,14)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옷은, 많은 경우에 정체성 곧 그 옷을 입은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옷을 준비하고 자신의 옷을 빠는 이들은 하느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삶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맞게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옷을 준비하고 옷을 빠는 이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는 기쁘고 충만한 구원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제 박해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온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종말 이후에 올 ‘천 년 통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 년 통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종말과 새로운 창조 사이의 이러한 중간 시기는 요한 묵시록의 특징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신앙인들에게 더 이상의 죽음은 없습니다.

 

박해받는 신앙인들을 향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요한 묵시록은 환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그로 인해 순교하게 되는 당시의 상황을 때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신앙인들에게 힘겨웠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상황은 분명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라는 전통적인 믿음에 회의를 가져다줄 수 있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믿음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전해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특히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약속은 실현되고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 역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커다란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보여 준 승리와 구원이 멀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을 지켜 가는 신앙인들은 모두 그 승리와 구원에 참여할 것입니다. 비록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과 영광에 먼저 참여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곧 올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실에 따라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하느님의 기사 (1)

허규 베네딕토 신부

 

 

묵시 19,11-21에서 소개되는 환시는 흔히 ‘하느님의 기사(騎士)’로 불립니다. 이 환시는 종말의 때를 전하는 요한 묵시록 환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벌어진 여러 재앙과 심판에 대한 예고는 모두 이 환시를 향해 있습니다. 이 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성격이 다른 새로운 환시는 ‘하늘이 열려 있는’ 모습과 함께 시작합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9,11).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다른 표현과 비교해 볼 때(4,1-하늘의 문, 11,19-하늘의 성전), 종말의 때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환시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하늘이 완전히 열려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제 이 하늘은 다시 닫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흰 말을 타신 분의 정체

 

흰 말을 타고 있는 분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하느님 기사의 눈은 “불꽃 같았”(19,12)다고 하는데 ‘불꽃 같은 눈’은 정의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이 표현은 1,12-16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상징을 통해 저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과 하느님의 기사가 동일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결국 이 하느님의 기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또 “작은 왕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19,12). 왕관은 일반적으로 권력이나 힘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용(일곱 왕관)이나 짐승(열 개의 왕관)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용과 짐승은 헤아릴 수 있는 왕관을 쓰고 있지만, 하느님의 기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용과 짐승의 권력은 유한하지만, 그리스도의 권력과 힘은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와 함께 흰 말을 탄 기사는 “피에 젖은 옷”(19,13)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살해된 어린양’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에서 사람의 아들, 어린양, 흰 말을 탄 기사는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드러납니다.

 

하늘의 군대와 마지막 전투

 

하느님의 기사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하늘의 군대입니다.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19,14)을 입고 하느님의 기사를 따르는 이 군대는 천사들의 무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묵시 12,7에서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하느님의 군대도 하느님의 기사와 함께 악의 세력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이 종말을 이야기할 때 전쟁과 심판의 이미지들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 앞장서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묵시 1,16; 2,16; 19,15.21)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칼은 ‘말씀을 통한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심판하고 “쇠 지팡이”(19,5)로 다스릴 분입니다. 쇠 지팡이는 이미 2,27과 12,5에서도 나온 말입니다. 결국 쇠 지팡이를 통해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와 하느님의 기사는 모두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격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짜는 확을 친히 밟으실 것입니다”(19,15). 성경에서 포도밭과 포도나무 그리고 포도주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특히 포도를 수확하여 확에 넣고 확을 밟아 즙을 내는 이미지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큰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혼자서 확을 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일한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았고 진노로 그들을 짓밟았다”(이사 63,3). 이제 요한 묵시록은 구약의 하느님 모습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구약의 하느님에게 유보된 심판은 두루마리를 건네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한이 됩니다.

 

악의 세력이 맞이하는 비참한 최후

 

19,17부터는 심판의 결과에 대한 환시입니다. 전쟁을 위해 모인 악의 세력들은 이제 패배하게 되고 심판의 벌을 받게 됩니다. 심판의 결과를 미리 알리는 천사의 선포는 에제 39,17-20을 떠올려 줍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벌인 마지막 전투에서 곡의 패배를 알리며 전투의 결과로 수많은 장수와 병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잔치’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합니다. 조금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 하느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확고한 승리에 대한 증거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승리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19,19부터는 사탄의 세력에 동조하고 앞장섰던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로마의 황제숭배 의식과 관련된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로마의 패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판은 우상숭배를 강요한 짐승이나 거짓 예언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미 요한 묵시록이 지속적으로 회개하라고 권고한 것처럼 우상숭배에 동조한 이들 모두가 심판에 포함됩니다. 하느님 없이 살았던,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에 동조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모든 이들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점진적으로 내려진 재앙이 보여주는 것처럼 회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종말의 때에 그 행동에 맞게 심판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종말과 재림을 나타내는 환시 안에 구체적인 전투의 과정은 묘사되지 않고, 전투의 결과로 악의 세력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선포와 그 선포가 실현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즉, 잔인한 결과를 통해 전투에서 벌어진 치열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하느님의 기사 (2)

허규 베네딕토 신부

 

 

지난달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하느님의 기사(騎士)에 관한 환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기사를 묘사하는 19,11-16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이 기사의 명칭입니다. ‘명칭’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준 이후에(탈출 3,13-14) 성경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별히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를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1,5),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며 마침”(1,8; 21,6; 참조 22,13)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명칭들은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19,11)

 

성경에서 ‘성실하다’와 ‘참되다’는 표현을 함께 사용한 책은 요한 묵시록이 유일합니다(3,14; 19,11; 21,5; 22,6). 이 두 단어는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아멘’이라는 표현에서 왔습니다. 원래 히브리어인 이 단어의 의미를 칠십인역 성경(그리스어로 된 구약성경)에서는 ‘참되다’와 ‘성실하다’는 두 가지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참되다’는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사용된 이름인 동시에 하느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특별히 ‘진리’를 강조하는 요한 복음이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며, 하느님 또는 예수님께 적용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참되다’는 표현은 주로 재판과 관련된 언급들(3,14; 6,10; 16,7; 19,2.11)이나 ‘말씀’과 함께 사용됩니다(3,7; 19,9; 21,5; 22,6). 이러한 용례는 하느님으로부터 종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어린양, 곧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또 완성에 이르게 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는 참된 하느님의 모습은 종말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업적을 통해, 특히 그분의 심판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성실하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성실하심’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특성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는 성실함의 모범이십니다. 여기에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온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성실하신 분입니다. 성실함의 바탕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은 구원 역사의 시작과 완성이 그분의 주도권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업적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실해야 한다고 표현합니다(2,10). 특히 묵시록 저자는 성실하다는 것을 세 번에 걸쳐 ‘증인’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합니다(1,5; 2,13; 3,14). 구체적으로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박해의 힘든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그 믿음을 살아가는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분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19,12)

 

“그분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표현되는 ‘새 이름’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2,17; 3,12). 이 숨겨진 이름은 신비로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이름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전까지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이름, 곧 숨겨진 이름은 종말의 때, 곧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구원을 완성하시게 될 때,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기 전까지, 믿는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그 이름이 숨겨진 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19,13)

 

“하느님의 말씀”은 요한 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증언’과 함께 표현됩니다(1,2.9; 6,9; 20,4). 하느님의 기사의 이름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의 하느님과 종말에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분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특히 예언과 관련된 이 표현은 요한 묵시록에서 황제숭배 의식을 전파하던 거짓 예언자(16,13; 19,20; 20,10)와 상반된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사를 통해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이 계시되고 이것을 통해 거짓 예언자의 선포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폭로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기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세력을 심판하고 진노의 처벌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19,16)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 사용되던 이 이름은 이제 그리스도에게 부여됩니다(신명 10,17; 시편 136,2 참조). 이것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정한 통치권을 가진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은 로마의 황제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몸에 새겨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13,1; 17,3)이란 표현과 상반되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권력을 잠시 가졌던 로마의 힘은 끝이 났음을 암시합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통치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보여지고 악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 역시 성취됩니다.

 

하느님의 기사에게 부여된 이름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그리스도가 다른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구원 역사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에 이른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천 년 통치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 묵시록은 종말과 함께 그 이후에 오게 될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종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 이후에 올 다른 세상을 위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 외에 유다교에서 나온 다른 묵시록들 역시 비슷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사라진 이후에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세상이 오기 전에, 이 세상이나 악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 종말 때 이루어진다고 묘사됩니다. 물론 묵시록은 아니지만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창세 6,5-7). 하느님께서 의로운 이들을 선택하여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순교자들이 부활해 그리스도와 함께할 천 년

 

20장은 종말 이후에 대한 환시입니다. 하느님의 기사(騎士)를 통해 보인 종말 때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환시 이후, 여기서는 천 년 통치와 사탄에 대한 심판을 보여 줍니다. 종말 때에 하느님의 세력과 맞서 싸운 짐승과 거짓 예언자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그 주동 세력에 대한 심판이 나옵니다.

 

지하에 대한 권한을 가진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9,1 참조). 이 천사의 역할은 악의 세력이 더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가두는 것입니다. 묵시록은 악의 세력을 용으로, 그리고 악마이며 사탄으로 소개하고 더 나아가 “그 옛날의 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이미 12,9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묵시록 저자는 악의 세력을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죄와 연결합니다. 하와와 아담이 죄를 짓도록 했던 뱀을 악의 세력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세상과 인간의 시작 때부터 죄를 짓게 한 악의 세력은 종말의 때에 비로소 심판을 받습니다. 창조에서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종말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것처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 역시 그렇습니다.

 

악의 세력은 더는 사람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천 년 동안 갇혀 있습니다. 이와 함께 종말 이전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 곧 순교한 이들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로 소개됩니다. 이 부활은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천 년 통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다른 신앙인들은 천 년에 걸친 이 통치 이후에 살아나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종말 – 천 년의 통치 – 마지막 심판

 

요한 묵시록에서 보여 주는 종말과 천 년 통치, 그리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내용은 종말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예언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달리 말해 이 환시의 목적은 종말 후에 반드시 이런 모습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천 년 통치로 표현되는 중간 시기가 유다인들이 갖고 있던 기다림을 나타낸다고 이해합니다.

 

유다인들은 구원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임금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다윗 임금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 흩어진 이스라엘의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민족적인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유다인들은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종국을 맞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종말의 때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이 심판을 통해 하느님은 의로운 이들을 선택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을 보편적인 종말론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 묵시록이 보여 주는 환시에는 이 두 가지 기다림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전체적인 종말에 대한 환시는 보편적인 종말론과 비슷하고 천 년 통치에 대한 환시는 유다인들의 민족적인 종말론과 연관됩니다. 종말 이후에 나타나는 중간 시기는 메시아와 순교한 이들이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부합합니다. 이 통치 기간이 지나면 사탄은 다시 풀려나고 심판을 받습니다. 이 기간 이후에 악의 세력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20,10)입니다.

 

20,11-15에서 마지막 심판이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된 대로, 자신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3,5 참조). 이때에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죽음 이후에 다시 벌을 받습니다. 이것을 묵시록은 ‘두 번째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이들에게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드시 성취될 하느님의 구원 약속

 

종말 – 천 년의 통치 –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지는 요한 묵시록의 환시는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의와 비교해 본다면 천 년 통치라는 환시가 없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요한 묵시록이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종말과 그 이후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마치 요한 묵시록이 묘사하는 환시 내용이 종말 이후의 세상을 알려 주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이 강조하는 것은 종말의 구체적인 모습이기보다 하느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던 신앙인들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을 얻을 것이고, 악의 세력과 그에 동조한 이들은 죽음과 함께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 이후의 환시 내용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표현되는, 승리한 이들에게 주어질 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종말 이후의 환시에서 이러한 약속과 성취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환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21,1). 이 표현과 함께 요한 묵시록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시를 시작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 66,22; 2베드 3,13) 그리고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바다는 고대 사회에서 악의 세력이 머무는 장소를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완전한 세상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는 크게 두 부분, 새로운 창조에 대한 선포와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나뉩니다. 가장 먼저 새로운 창조를 통해 강조되는 새로운 관계가 선포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3-4).

 

새로운 창조의 핵심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안에 있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새 하늘, 새 땅이라는 물질적인 새로운 세상을 넘어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지속적으로 예언되었던 것처럼 악의 세력에 맞서 승리한 이들이 바로 이 새로운 관계의 주체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21,6-7). 새로운 창조와 관계는 새로운 계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처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내용은 전형적인 계약 문구입니다. 이제 이 계약은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이들, 곧 악의 세력에 동조한 이들은 두 번째 죽음을 맞습니다(2,11 참조). 이것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예루살렘

 

21,9부터는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전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신부의 이미지로, 그리고 어린양인 그리스도는 신랑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이 혼인 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의 약속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19,5-10).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는 마치 저자가 천천히 도시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렇기에 외형을 먼저 보여 준 후 내부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습니다(21,11). 그리고 이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습니다. 열두 성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성벽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초석 위에 자리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에서 가장 지배적인 것은 ‘열둘’이라는 숫자입니다. 성문을 지키는 열두 천사, 열두 사도의 이름 위에 세워진 성벽,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열두 성문. 이것들은 모두 구약과 신약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또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이 이 새로운 도성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12라는 숫자와 관계된 표현인 14만 4000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외형 묘사 이후에 요한 묵시록 저자는 도성의 크기를 이야기합니다. 이 도성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1만 2000 스타디온인 정육면체입니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정육면체는 가장 완전한 도형으로 여겨졌고, 이미 솔로몬 성전의 성소 역시 이러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집니다(1열왕 6,20). 실제로 이 도성의 모습이 네모 반듯한 정육면체라기보다 이 도성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성벽의 두께는 144 페키스입니다. 도성의 크기나 성벽의 두께 역시 모두 12라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제 길이를 계산해 본다면 1만 2000 스타디온은 약 2400km 정도고, 144 페키스는 70m 정도입니다. 이러한 크기와 성벽의 두께는 하느님 도성의 완전함을 의미하며, 그 안에 머무는 이들이 하느님의 완전한 보호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게다가 이 도성은 열두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는 모습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특이한 표현 중 하나는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21,22).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성전이 없었다는 표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 관해 지녔던 독특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특정 장소에 있는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몸소 성전이 되시어 신앙인들과 함께 머무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첫 창조 때의 해와 달처럼 도성 전체를, 신앙인들을 모두 비추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도성에는 밤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도성을 차지하는 이들은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킨 이들,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간직한 이들이 바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승리하는 이들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 어린양과 함께 머무는 완전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생명수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서 최고점은 생명수와 관련된 22,1-5입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는 외부에서 내부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생명수에 관한 환시는 새 도성의 중심부에 대한 표현으로 의미상 가장 중요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22,1ㄴ-2ㄱ).

 

생명수

 

생명수는 거룩한 도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말 자체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느님과 어린양에서 나오는 생명은 이 도성을 감싸고 있습니다. ‘도성’이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도성을 흐르고 있는 ‘생명수’는 ‘신앙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은 이제 신앙인들을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또한 이 생명수가 흐르는 강의 양옆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매달 열매를 냅니다(2,7 참조). 이렇게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 역시 생명수가 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새 예루살렘을 세상 창조 때의 낙원과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새 도성에서 신앙인들은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22,4). 구원된 이들은 더는 구약시대의 전통적인 생각대로 하느님을 마주하지 못하거나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의 이름이 모든 이에게 명시적으로 알려질 것입니다(3,12 참조).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맺음말

 

맺음말 부분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서는 새로운 내용을 전한다기보다 지금까지 보여 준 계시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미 새로운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환시를 통해 일곱 교회에 보낸 약속들은 모두 성취된 것으로 표현됩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주어진 생명 나무에 대한 약속은 22,2에서,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21,8에서, 페르가몬에 주어진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에 대한 약속은 22,4에서, 티아티라 교회에 약속된 쇠 지팡이로 다스리리라는 것은 천 년 통치에 관한 내용에서, 사르디스 교회에 보낸 생명의 책에서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은 21,27에서, 필라델피아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겠다는 약속은 새 예루살렘의 환시를 통해, 라오디케이아에 약속한 어좌는 하느님의 어좌가 사람들의 거처 안에 있다는 말씀을 통해(21,3)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맺음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계시의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요한 묵시록은 시작부터 이 내용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1,1). 마지막에도 역시 저자는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하느님에게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22,6).

 

맺음말은 시작과 비슷합니다.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될 때가 머지않았고 이제 그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지는 마지막 담화는 불의한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의로운 이들에게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계속 지켜 갈 것을 권고합니다(22,10-11).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내가 곧 간다”(22,7.12)는 표현과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지금 겪고 있는 박해 상황이 길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제 그때가 다가왔다는 이 두 가지 강조점은 요한 묵시록이 환난 중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가져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악에 대한 심판과 벌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더 강조됩니다(22,12).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닌 이들은 이미 보여 준 새 예루살렘의 환시에서 표명되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에 언급된 ‘무엇도 바꿀 수 없다’(22,18-19 참조)는 내용은 구약성경(신명 4,2; 13,1)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를 전하는 전통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지금까지 전한 본문의 내용이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그 안에 담긴 경고와 권고의 말씀들이 축소되거나 조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묵시록은 1장의 시작과 비슷한 형식으로 자신의 환시를 마칩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은 1,7의 내용을 생각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 부분은 전례에서 사용되던 화답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긴 환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 묵시록이지만 그 끝은 신앙인들의 화답으로 마무리됩니다. 또한,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마지막은 편지에서 사용되던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으로 끝납니다. 요한 묵시록의 처음과 마지막이 보여 주는 특별한 점은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해 이 내용을 듣고 읽은 신앙인들이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을 마치며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요한 묵시록은 다양한 상징으로 채색된 환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상징들의 해석에 따라, 그리고 그 상징들이 나타내는 의미에 따라서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실제로 요한 묵시록의 해석이 과거에는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 적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피해야 할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천문학이나 점성술에 따른 해석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천문학이나 점성술에 따라 해석하려는 경향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요한 묵시록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상징들에도 적용됩니다.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별자리를 바탕으로 여러 상징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중심적인 상징으로 사용되는 ‘열둘’(이스라엘의 지파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두 개의 별자리와 비교되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각 별자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예를 들어, 4,2-8에 묘사된 하느님의 어좌(4,2)와 그 어좌 둘레에 있는 스물네 명의 원로(4,4),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주위에 있는 네 생물(4,6)은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요한 묵시록에 사용된 숫자 역시 별자리의 주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역사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해석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역사나 세계사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언으로 보려는 경향이 ‘역사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천 년 통치에 등장하는 ‘천(千)’이라는 숫자입니다. 숫자 ‘천(千)’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을 따온 킬리아즘(chiliasm)은 라틴어 표현인 밀레니엄(millennium)으로 옮겨져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0년을 맞이할 때 세계에서 보였던 세기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이러한 해석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천 년이라는 시기가 지나면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요한 묵시록을 실제 역사에 적용하여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이미 교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다른 여러 교부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해석의 경향은 요한 묵시록의 여러 상징이 사회, 정치 또는 교회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요한 묵시록 안에 담겨 있다고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18세기까지 상당히 자주 대두되었지만 그 이후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안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에도 시한부 종말론이나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 특별한 선택을 강조하는 일부 사이비 종교들에서 이러한 해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로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에서 이러한 해석은 여전히 힘을 얻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신흥 종교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해석들이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바탕에는 상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역사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으로 보는 경향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해석이든 아니면 앞으로 오게 될 미래에 대한 해석이든,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은 과거에 또는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예언을 풀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혼자서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제대로, 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당시의 박해로 고통받은 신앙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구원을 위해 오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된 요한 묵시록은 지금 우리에게도,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이와 같은 책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해석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을 이들의 수효는 이미 정해져 있고, 거기에 들지 못하는 이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거나, 상징적인 표현이 현재의 구체적인 인물을 지시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내용과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해석들이 명쾌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종말이 아닐 것입니다.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은 그것이 언제 올지 그 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산다면, 비록 어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종말이 언제 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 종말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 오늘을, 지금의 삶을,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22,17).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