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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1) - 박승찬 엘리야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6.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1)

첫 번째로 토착화한 성경, 셉투아진타

박승찬 엘리야

 

 

성경과 이를 수용하는 문화의 상호 관계는 종종 ‘토착화(inculturation)’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 성경(구약성경)과 그리스도교 태동기의 주류 문화였던 그리스-로마 문화가 만나 이룬 대표적인 토착화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셉투아진타(칠십인역 성경)’의 번역이라 하겠다.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스무 살에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기원전 356-323년)는 불과 12년만에 그리스 반도 북부의 마케도니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한 강력한 통치자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은 교육을 토대로 자기의 방식과 문화, 곧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령지마다 고향 마케도니아의 대도시를 모방해 원형 경기장과 도서관 등을 지으면서 무려 60개의 도시를 세우고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죽자 제국은 분열되고 많은 알렉산드리아가 사라지거나 더는 그 이름으로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집트 나일 강 하류의 한 도시가 꿋꿋하게 살아남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파로스의 등대’가 거기에 있었다. 기초부터 꼭대기까지 135미터, 40층 건물 높이의 등대는 맑은 날이면 50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운하처럼 넓은 나일 강의 하류에 있어 지중해의 모든 상선이 드나들 수 있었고, 이집트는 지중해 연안의 곡식 창고 역할을 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상선이 이 등대를 바라보고 와서 곡식을 사갔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파로스 섬에 뮤즈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학예의 여신)에게 헌정된 ‘무세이온(Museion)’이라는 종합 문화 센터를 세웠다. 시민들은 문화가 발전하려면 책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센터에 세계 최초의 국제 도서관을 건립했다. 아테네와 로도스에 있던 최고의 서적 시장에서 많은 책을 구입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관에서 엄청난 분량의 책을 통째로 사오기도 했다.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새 책이 발견되면 압수해 필사한 후 복사본을 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한 도서는 무려 70만 권에 달했다. 둘째와 셋째 규모를 자랑하던 에페소나 페르가몬의 도서관이 20-30여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것에 비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난 양의 책을 확보하는 데는 비싼 양피지뿐 아니라 나일 강 유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파피루스로 만든 종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유다인 디아스포라와 셉투아진타의 탄생

 

알렉산드리아를 세울 때부터 그곳에는 이미 유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정벌 때 자신을 도운 유다인들에게 새로 만든 도시의 일정 구역을 거주 지역(diaspora)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하여 개방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 동화 과정에서 많은 유다인이 자기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그리스어만 구사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였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eos II, 기원전 308-246년) 왕에게 도서관 차원에서 유다 율법을 번역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인 왕의 초청으로 유다인 공동체 열두 지파에서 각 지파별로 원로 여섯 명이 번역자로 선출되었다. 번역자 일흔두 명이 파로스 섬의 왕궁에 모여 각자 방 하나씩, 일흔두 개의 방에서 72일 간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했다. 번역을 마치고 나서 완성본을 비교하니 기가 막히게 일치해 모든 시민이 찬사를 보내며 도서관에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전설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번역이 기원전 2세기경 백여 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설은 무엇을 강조할까? 아마도 새로운 그리스어 번역본에도 히브리 성경이 지닌 하느님의 영감과 성령의 감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설에 따라 번역본의 이름도 ‘셉투아진타(Septuaginta)’, 즉 ‘칠십인역’이라고 불리고 ‘LXX’로 표시한다(로마 숫자로 L은 50, X는 10을 의미함. 따라서 50+10+10=70).

 

셉투아진타의 가치와 중요성

 

셉투아진타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최초의 고대 종교 경전이며, 그 엄청난 분량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더욱이 이 번역 성경은 알렉산드리아뿐 아니라 그리스어에 능통한 모든 디아스포라 유다인의 신앙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고 선교에 유용한 도구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히브리어 전문 용어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의 표준이 탄생했기에 유다교가 그리스-로마 문화와 교류하는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셉투아진타는 초기 그리스도교를 통해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미 예수님 시대에 일반 유다인들은 정통 히브리어에 능숙하지 못하여 아람어로 대화했으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로마 제국의 다른 민족들은 그리스어는 알아도 히브리어는 아예 몰랐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히브리어 원전이 아니라 거의 셉투아진타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로마 11,1)임을 자랑하는 사도 바오로도 히브리 성경이 아닌 셉투아진타에서 주요 구절을 인용했다. 루카를 비롯한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도 여기저기서 셉투아진타의 문체와 표현을 모방했다. 사도 2,14의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귀담아들으”라는 표현이나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사도 2,15-39; 3,12-26 참조)는 셉투아진타의 문체를 모방한 것이다. 마태오는 이사 7,14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셈족 용어 ‘알마(젊은 여자)’가 아니라 셉투아진타에 나오는 ‘파르테노스(동정녀)’를 사용한다(마태 1,23 참조). 욥기 19,25-26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셉투아진타에는 분명히 부활이라는 어휘가 쓰였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후, 1-2세기의 유다인들은 셉투아진타가 히브리어 원문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거나 생략하였기에 부정확한 번역이며 성경의 내용을 교묘하게 왜곡했다고 하여 이를 배척했다. 이러한 경향은 루터 이후 개신교가 5-9세기경에야 완성된 마소라본 히브리어 성경을 유일한 구약성경의 원전으로 인정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1947년 사해 근처 쿰란 동굴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된 후 셉투아진타가 마소라 텍스트와 다른 종류의 히브리어 본문을 원본으로 삼았고, 번역자들이 원문을 매우 신중하고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셉투아진타의 중요성이 재평가되었다.

 

셉투아진타에 대한 평가는 유다인이나 그리스도교의 종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히브리어 성경이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 중에 하나인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성경이 더는 한 민족의 경전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화권 전체에서 경전으로 인정받는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성경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한 언어권으로 들어오면서 그 언어에 담긴 사상적 틀도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빛과 어둠을 다음 호부터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구약의 신 대(對) 신약의 신?

박승찬 엘리야

 

 

마르치온주의에 나타난 이원론적 신관

 

생물학자인 헥켈(Ernst Haeckel)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생물학 분야뿐 아니라 여러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3년간 성경을 통독하면서 구약성경에 묘사된 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리고, 홍수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도록 하시며,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는 등 온갖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 벌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느님을 ‘정의의 신’이라고 부른다고 배웠지만, 어린 초등학생에게는 두려움이 먼저 느껴졌다.

 

그런데 구약을 다 읽고 신약으로 들어오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대표적 예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24)에는 구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버지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탕진해 버리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호통을 쳐서 내쫓기는커녕,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주는 것이다. 신약의 하느님은 어떠한 잘못도 용서해 주실 것 같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분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상이한 두 느낌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한 이단이 나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멀어진 이들의 대표 사상을 ‘마르치온주의’(Marcionism)라고 부른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거부한 마르치온

 

마르치온(Marcion)은 85년경 흑해의 남쪽 해안에 있는 시노페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선주(船主)이자 주교였던 아버지와의 불화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마르치온은 138년 로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가입하며 거금 20만 세스테르츠(은화)를 희사했다. 처음에는 공동체에서 환대를 받았으나 비정통적 가르침 때문에 144년 결국 면직되었다. 마르치온이 독자적으로 세운 교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60년경 마르치온이 죽은 뒤 6세기까지 존속했다. 그렇다면 마르치온을 공동체에서 떠나게 한 ‘비정통적 가르침’이란 무엇이었을까?

 

마르치온은 필자의 체험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선한 신이 어떻게 잔인하게 벌을 준 구약의 신과 같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르치온은 선한 신을 절대화하였기에 용서하는 신과 복수하는 신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결국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거부하며 양자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약의 신은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세계의 창조자)와 같은, 난폭하고 복수를 즐길 뿐 아니라 악의 원천인 물질을 이 세상에 남겨 놓는 능력의 한계를 지닌 신일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약의 신은 월등하게 높이 계시는 초월적 신으로서 전지전능하고 본질이 선하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마르치온은 두 신의 동일성을 부정했다.

 

그리스-로마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신들의 싸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신들의 권력 다툼이나 최고신의 교체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기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여 제거한 후 최고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자기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태어나는 자식들을 모두 집어 삼켜 버렸다. 살아남은 막내 제우스가 꾀를 써서 형제들을 구하고 최고신의 자리에 올랐다. 신들끼리 싸우는 이야기가 일상사인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성장한 마르치온은 이러한 도식을 받아들여 폭력을 휘두르던 구약의 신을 내몰아 준 사랑과 자비의 신을 찬미한 것이다. 그의 신학에서 구약성경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책이다. 실제로 마르치온은 유다교와의 관계를 모두 끊고 신약의 신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주장인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마르치온주의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관

 

가장 큰 어려움은 신약의 신이라고 불리는 예수가 구약의 신에 대해 매우 강력한 신뢰와 사랑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자기가 믿는 아버지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마르 12,26)이라고 불렀다. 또 숨을 거두면서 외친 비명,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 15,34)도 시편 22에 나오는 구절이다. 극단적 상황에서도 구약의 신을 끊임없이 신뢰한 것이다. 신약의 신이라고 불리는 예수가 오히려 구약의 정신을 가장 잘 수행하였기에 마르치온이 제시한 방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마르치온은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을 선한 신의 아들이 육화되어 더럽혀진 것으로 보았기에, 그리스도가 가상의 육체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철저히 분리하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를 구제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마르치온은 인간과 근본적으로 달라 결코 인간적 표상을 통해 이해될 수 없는 분에 관한 소식을 인류에게 전한 것이다.

 

이러한 마르치온의 신관은 단순히 신학 이론에 그치지 않고 매우 강력한 실천을 요구했다. 구약의 신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세상은 구약의 신과 함께 거부되어야 한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는 혼인과 성생활도 금하는 등 철저히 금욕해야 하며, 미사 때에 포도주를 마셔도 안 된다.

 

마르치온은 자신의 주장이 전통 유다교는 물론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도 충돌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을 바꾸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직 깊이 숙고되지 않은 채 신학 체계에 들어온 전승의 불필요한 모든 짐을 떨쳐 버리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는 구약성경 전체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구원에 관해 구전된 그리스도교의 선포도 믿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문서로 기록된 복음서들도 예수의 말을 오해하고 다시 유다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오직 하나의 복음으로 루카 복음서를 선택했고, 바오로 서간 열 편(갈라티아서, 코린토 1·2서, 로마서, 테살로니카 1·2서, 에페소서, 콜로새서, 필리피서, 필레몬서)만을 경전으로 인정했다. 바오로 서간에서 은총과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가장 순수하게 재발견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르치온주의에서 얻는 교훈

 

교부들은 마르치온이 그릇된 선입견을 가지고 그릇된 방법을 써서 그릇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마르치온의 신학에 반대한 이레네오는 오직 한 분인 신이 계신데, 그분은 구약의 신이면서 신약의 신으로서 성경이 인간에게 계시해 준 분이며, 인간 지성의 보편적 빛으로 알 수 있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치온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학이 결정되기 전에 활동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경전 목록은 신약성경의 목록을 확정케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 전까지 각 공동체마다 다양한 경전을 단순히 믿어 왔다면, 마르치온 이후에는 어떠한 기준에 따라 경전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공동체에서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을 수집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하였다.

 

마르치온의 유혹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래 전에 확정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지닌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 제시된 가르침이 도전으로 다가올 때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꾸려 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아 성경의 내용 중에 입맛에 맞는 내용만 선택하려 하는가? 성경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 꼭 숙고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경은 합리적이어야만 하는가?

박승찬 엘리야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를 위해 받아들인 그리스-로마 문화는 영지주의나 마르치온주의 같은 이단을 낳는 부작용도 일으켰다. 그리스 철학이나 세속의 지식을 기준으로 성경을 재단(裁斷)하고, 제 입맛에 맞는 내용만 선택하려는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단이 널리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초창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소위 ‘아프리카 학파’가 등장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 학자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45?년)다.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테르툴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대표적 항구 카르타고의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후 총독 관저의 백인대장이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고향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작열하는 태양만큼 신앙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지닌 이가 많았다. 그 지역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아 순교의 영광을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에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195년경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영웅적 행동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출세를 포기한 그는 평신도로서 사제나 주교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했다. 불같은 열정으로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는 하느님의 전사(戰士)였다.

 

신앙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지닌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나 마르치온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적 능력을 뽐내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은 부끄러워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다. 묻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그리스도의 육신론> 5,4).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믿는 것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전달된 신의 계시를 온전히 믿고 그 길을 따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앙이다. 마르치온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수치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혜와 희망과 구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너는 신앙에 필수적인 이 수치를 없애려 드느냐? 네가 하느님께 부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나에게는 유익한 것이다”(<그리스도의 육신론> 5,3).

 

이렇듯 테르툴리아누스는 순수한 신앙의 가치를 보존하고 싶어 했다. 지식을 자랑하는 신앙인은 오만함으로 인해 위험과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는 명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그리스도의 지혜만으로 충분하다. 그에게 철학이란 진리를 가르칠 능력이 없는 인간적 지혜만 대변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 철학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는 일체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교도와 그리스도교도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 ‘스토아적’, ‘플라톤적’ 또는 ‘변증법적’인 그리스도교의 모든 계획을 파괴시켜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는 어떤 미묘한 이론도 원하지 않으며, 복음을 위하여 우리는 어떤 날카로운 탐구도 원하지 않는다”(<이단자들에 대한 항고> 7).

 

여기서 아테네란 이교도, 그중에서도 세속의 철학으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루살렘이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대표하는 그리스도교인을 지칭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물었다. 호교론자나 철학적 이단처럼 수사학·법학·철학적 부분을 끌어오려는 시도를 스토아적이자 플라톤적 계획,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의미하는 변증법적 계획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러한 모든 계획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왜 철학의 수용을 이토록 강하게 반대했을까?

 

이단의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입교 체험처럼 순교 등을 통한 신앙의 증거가 철학적 논변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의 모습에 감동받고 회심했기에 신앙의 힘을 확신했다. 더욱이 이러한 믿음의 증거가 확실한 선교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늘어난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기 때문이다”(<호교서> 50,13). 이 말은 죽음을 불사하는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다면 그것을 보고 감화받은 사람들이 신앙을 이어 갈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극단의 박해 상황에서는 정교한 논변보다 신앙의 순수성이 더욱 우선시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순수한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해야

 

테르툴리아누스는 성경 읽기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지적 허영심을 증가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읽고 받아들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의 축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방인의 축제는 우상 숭배의 온상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호교서> 42 참조). 그에게는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을 구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관통하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찬례와 함께 행해진 저녁 애찬(아가페)도 이교인 조합의 떠들썩하고 무절제한 모임과 달리 소박하고 검소하게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식사는 그 명칭으로 이미 그 본질과 규정을 제시합니다. 그 식사는 그리스어로 사랑(아가페)을 뜻하는 명칭으로 불립니다”(<호교서> 39,17).

 

테르툴리아누스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굶주린 이들도 공동으로 식사하고 마시고 노래하고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을 때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나아가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그저 공동체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 행위로 연결되어야 했다. 동정심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신전에 돈을 내는 이교인보다 더 많은 돈을 거리의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사랑 실천을 부각했다(<호교서> 42 참조). 특히 재앙이 일어나고 역병이 돌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기꺼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경의 내용을 인간의 이성에 부합하는 합리성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순수한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점을 일깨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배척하려는 신자들에게 그의 열정은 빛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로마 제국의 다신교 문화에 대한 비방이나 박해에 대한 응답으로 적절했던 순수한 신앙에 대한 강조가 테르툴리아누스와 교회에 깊은 어둠을 드리우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은 신앙만으로 충분한가?

박승찬 엘리야

 

 

몬타누스파에 빠진 테르툴리아누스

 

순수한 신앙을 옹호하려 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도 노력하여 성인으로 존경받을 법한데 왜 ‘성인 호칭 기도’에 그의 이름이 없을까? 여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역동성이 숨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앙에 대한 열정 면에서는 어떤 초대 교부보다 뛰어났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열정, 또는 ‘순수하고 과격한’ 신앙심을 지닌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종종 신앙 때문에 직장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마저 버리고 구원에만 매달린다. ‘휴거’에 대한 예언과 두려움으로 집단 자살까지 이어진 ‘오대양 사건’이 그 예이다. 저 멀리 올라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믿던 이들도 신앙에 대한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주목할 사실은 그들도 우리가 읽고 믿는 성경의 한 구절을 선택하여 절대적 믿음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위험성이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생애 후반에 분명히 나타난다. 당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종말에 나타날 여러 현상을 두려워하여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같이 재림을 기다리는 외침을 ‘종말 지연(mora finis)’을 위한 기도로 바꾸어 버렸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며 머지않은 재림을 위한 기도를 고수했다(<기도론> 5,1).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열정을 포기하고 방탕한 이교 문화에 동화해 가는 그리스도인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순수하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던 ‘몬타누스파’가 성경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느꼈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에 침체해 있던 몬타누스파에 가입하여 그들의 교리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몬타누스파와 테르툴리아누스

 

몬타누스파는 2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종말에 관한 희망과 임박 기대를 바탕으로 교회를 극단적으로 쇄신하려는 예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창시자 몬타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을 운동의 근거로 삼고, 자신을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 14,26; 16,7 참조)의 대변인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종말을 준비하라고 권고했다.

 

그에게 두 명의 여예언자 프리쉴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합류했다. 그들은 남편에게서 떠나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황홀경에 빠져 방언과 예언을 일삼았다. 더욱이 막시밀라는 “내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예언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죽자마자 묵시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천년 왕국이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Pepuza)라는 마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몬타누스파는 많은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고, 성경보다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권위를 더 높게 평가하였다. 성직자의 권위와 교계 제도를 배척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장시간의 단식과 독신 생활, 세상과의 절연, 자선 행위 등을 요구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성찬식에서 한 살배기 아기의 몸에 바늘을 수없이 찔러 거기에서 나오는 핏방울을 모아 빵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다행히 179년 막시밀라가 사망한 뒤에도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예언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몬타누스파는 뛰어난 조직 관리 능력으로 200년부터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서방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가장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을 선망했다.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사제들의 위계 질서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사제 제도를 비판하고 보편 사제직을 주장했다. 결국 207년부터 몬타누스파의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가톨릭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적대자로 변신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신흥 종교로 개종한 것 같은 충격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11-217년경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들에서 몬타누스파의 엄격주의에 따르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처음과 달리 생각을 바꾸어 간음 등의 중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박해를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순교하지 않았으니 배교자라고 몰아세우며 스스로 순교할 것을 권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군에 복무하면 안 되고, 군인과 공무원을 세례 후보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몬타누스파가 지닌 위험성

 

몬타누스파에서는 성령과 예언자를 강조하는 후대의 운동에서 보이는 위험이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교회 전통을 무시한 채 개별 지도자들의 사적 예언을 성경의 권위 위에 놓는 것은 큰 위험성을 지닌다. 또 영적 순화를 위해 필요한 금욕주의가 지나칠 경우 그리스도교가 지닌 피조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해칠 수 있다. 더욱이 소수의 선택된 자들, 즉 자신의 그룹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구원관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보편된 구원 의지와 상충한다. 이와 반대로 몬타누스파에 반대하며 정통을 자처하는 이들 중에는 몬타누스파가 주된 신학적 근거로 제시한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을 영지주의자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정경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나 이레네우스와 클레멘스와 같은 교부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철학 용어를 도입한 테르툴리아누스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앙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외쳤던 테르툴리아누스가 후대에 미친 영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철학적 기획을 파괴하라고 반(反)철학적 태도를 분명히 밝힌 테르툴리아누스 자신도 이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었다. 신학에 철학자들의 사상을 도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자신의 신학적 사유 역시 여러 철학적 원전(原典)에 의존하고 있었다. 세속적 지식과 투쟁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그는, 많은 철학 이론에 정통하게 되어 평신도 신학자로서 신학 내용과 철학 용어를 접목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 계통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자였다. 삼위일체론에서 사용되는 페르소나(Persona, 위격), 숩스탄시아(Substantia, 실체), 나투라(Natura, 본성) 등의 단어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히려 철학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철학을 신학 안으로 수용하려는 계획을 파괴하라고 외쳤지만, 역설적으로 신학에서 철학이 완전히 무시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비록 생애 후반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에 빠졌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교부에게 섣불리 후대의 기준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가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옳은 부분을 수용하며 정통 교리를 확정해 왔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보여 준 신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보존하면서 이성을 통해 그 열정을 끊임없이 반성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그리스도교는 사기꾼을 추종하는 무리인가?

박승찬 엘리야

 

 

오리게네스의 <켈수스 반박>

 

초기 그리스도교는 정치적·문화적 주도권을 지닌 그리스–로마 문화로부터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대표적 예를 들어 보면 성찬례에서 ‘식인(食人)의 풍습’을 행하고, 그리스도인끼리 혼인하며 ‘근친상간’을 벌인다거나,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다신교를 숭앙하던 국가 제례를 모독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초기에 악의적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간에 널리 퍼진 대중의 선입관에 따라 비방하는 것을 넘어서, 지식인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반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반박한 대표적 인물 켈수스(Celsus, 2세기)는 이교인 철학자로서, 178년경 그리스도인을 논박하는 <참된 가르침>이란 작품을 저술했다(소실된 이 책의 내용을 오리게네스의 <켈수스 반박>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한 그리스 정신에 반대하는 성가신 폭도이며, 거름더미 구석에 있는 구더기들과 같은 하찮은 무리라며 증오했다(<켈수스 반박> 4,23).

 

그리스도교에 대한 켈수스의 비판

 

켈수스가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매우 비합리적이었다. 합리적인 그리스인의 철학적 신에 관한 신앙과 너무나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육화’하여 구체적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에 따르면 완전하고 불변한 하느님은 결코 자신을 낮추어 어린아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한다. 만일 그런 상태에서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내려온다면, 하느님은 선에서 악으로, …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사악한 것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누가 이 같은 변화를 선택하겠는가? 하느님은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없는 존재이다”(<켈수스 반박> 4,14).

 

켈수스는 ‘육화’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동정녀에게서 불가사의하게 태어났다’는 주장도 판테라라는 군인과 간통한 여인이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했다(<켈수스 반박> 1,32.69). 결국 켈수스는 그리스도가 ‘사기꾼이자 마술가’였으며, 그리스도의 육화 및 부활 신화는 사도들이 날조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모든 관점에서 전통 철학보다 열등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유일신론 자체와도 모순 관계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켈수스가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실천 면에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그리스도교는 민족 정신에 바탕을 둔 전통 없이, 어느 민족이든 어느 신분이든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하나의 율법에 결합하려는 세계 종교의 환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환상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조상들에게서 이어 온 민족 종교인 유다교는 용인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켈수스 반박> 5,25; 8,72).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조상들의 관습을 인정하지 않아 도시 종교의 예배에도, 황제 숭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정 기관 근무뿐 아니라 군 복무마저 거부했다. 그래서 켈수스는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한다면, 로마 제국도 외적의 침입을 받아 십중팔구 멸망해 버릴 것”(<켈수스 반박> 8,68)이라고 비난했다.

 

신앙의 순수성 주장만으로 비판을 반박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켈수스의 비난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은 국가의 박해와 이교인 백성의 불신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성장기에 그리스도교가 선교에 성공하려면 켈수스의 비판에 어떤 식으로든 답변이나 반박을 제시해야 했다. 켈수스가 “그리스도인은 무식하면서 허세 부리는 가난뱅이”라고 규정한 것이 선교에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문명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켈수스는 가난한 하층민 즉 절망에 빠진 육체 노동자, 베 짜는 직공, 신발 장수, 무두장이를 신자로 포섭하는 그리스도교를 경멸했다. 이를 보고 켈수스는 “목수에서 도둑의 두목으로 탈바꿈하고, 열등한 사람들, 세리, 어부 등을 자기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로 선택한 예수”를 따른다며 비아냥거렸다. “이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자만 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들은 바보와 무식쟁이, 노예와 여자와 어린이들만을 유혹한다”(<켈수스 반박> 3,44).

 

더욱이 켈수스는 몇몇 그리스도인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롱했다. “몇 사람은 그들이 믿는 것에 관해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해명을 요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파헤치지 말고 믿으시오’, 그리고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 ‘현세 생활에서 지혜는 악이고 어리석음은 선입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켈수스 반박> 1,9).

 

이 구절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그리스도인의 이상으로 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을 패러디한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순수성만 강조하는 테르툴리아누스식의 태도로는 “그리스도교는 바보와 우매한 이들이 믿는 종교”라는 켈수스의 비판을 해결할 수 없었다.

 

오리게네스가 저술한 <켈수스 반박>

 

켈수스의 비방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강력한 반박은, ‘셉투아진타(칠십인역)’가 번역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를 통해 제시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몇몇 지도자가 오리게네스에게 켈수스를 반박하라고 요구했다. 오리게네스는, 왜곡된 비난은 무관심으로 극복할 수 있다며 처음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아직도 전혀 맛보지 못했거나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로마 14,1 참조)(<켈수스 반박> 서론 6)을 위해 반박서를 집필했다.

 

오리게네스의 반박서는 켈수스의 책 순서에 따라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우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가 유래된 경위와 일반적 신론과 육화론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의 영웅 숭배 및 제신(諸神) 숭배를 비교한다. 이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이 주로 다루어지는데 삼위일체, 창조, 선과 악, 신과 세상의 관계, 교회론,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과 종말론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교인, 유다인, 그리스도인의 신 흠숭 차이점에 대해 논하며, 한 분이신 참된 신과 그분에 대한 흠숭을 다룬다. 오리게네스는 켈수스의 비판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로 그리스도의 기적 및 그리스도인이 늘 실행하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로 논증했다.

 

반박의 기초를 이룬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

 

오리게네스의 이 모든 신학적 답변의 기초를 이룬 것은, 바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 켈수스의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한 ‘영적 해석’의 시도였다. 켈수스는 성경, 특히 네 복음서의 모순을 계속 지적했다. 예를 들어 ‘소위 자기 제자 일당에게 배신당해 붙잡힌 그 사람을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문자나 보고된 사실 배후에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음을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했다.

 

오리게네스는 영감을 받아 집필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이를 토대로 켈수스의 비판에 반박했다. 그는 문자적 해석에서 오류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우의적 해석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우의적 해석은 단순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 이교인의 비판을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선포할 수 있게 하는지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다. 오리게네스는 우의적 해석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켈수스와 같이 성경을 웃음거리로 만든 반대자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리게네스가 이 ‘영적 해석’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는 다음 호에서 다루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문자적 해석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영적 해석

박승찬 엘리야

 

 

오리게네스의 <원리론>

 

켈수스나 포르피리오스 같은 이교도 사상가들은 성경에 나타난 모순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러한 비판을 막는 주된 방법은 ‘영적 해석’을 통해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자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는 호메로스의 작품 등을 해석하며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하던 영적 해석을 그리스도교에 적극 활용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을 지니고 자랐다. 20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로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사춘기의 오리게네스는 아버지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는 배교를 하고 살아남아서 우리한테 빵과 무엇을 마련하시는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더 존경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후 성인(成人)이 된 그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순교하려 하자, 이를 반대한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옷을 숨기고 나서야 순교를 열망하는 그의 혈기가 가까스로 꺾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살았으며 그로 인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 19,12)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스스로 거세去勢를 감행했다. 훗날 자신의 행동을 ‘주석의 오류’ 중에 대표적인 것이라고 뉘우치면서 성경의 ‘영적 해석’이 반드시 필요함을 절감했다.

 

영적 해석의 필요성

 

신구약 성경의 몇몇 저서나 특정 부분만 집중하여 해석한 이전의 주석가들과 달리 오리게네스는 신적 진리를 인식하고자 성경의 모든 책을 주해했다. 이때 동시대의 문법학자들에게 배운 본문 주해 방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문자와 정신, 상징과 진리 간의 긴장감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에서 필론(기원전 25?-기원후 50년)은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였다. 스승 클레멘스를 통해 필론의 영적 해석 방법을 잘 알고 있던 오리게네스는 <원리론(De Principiis)>에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양한 지침을 제공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쓰인 성경 해석에 관한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받는 제4권에서 문자적 해석에만 머무를 경우 두 가지 근본 오류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유다인은 예언의 문자를 배타적으로 고집해 오류에 빠진다. 마르키온과 영지주의 이단자들은 신을 인간에 비유한 구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악한 창조자와 완전한 하느님으로 구분하는 오류에 빠진다(<원리론> 4.2.6 참조).

 

원시 그리스도교는 구약에서 유용하게 보이는 예언서 · 시편 · 도덕적 품행에 관한 규범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여겨지는 의례나 예식 규범을 구별해 오류에 대항했다. 그러나 다른 이단들도 각자가 정한 기준에 따라 성경을 선택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이나 구약의 보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불변의 가치를 지닌 규범을 선별하는 규칙을 발전시켜야 했으며, 시대 상황에 따라 쓰인 구약을 영적 의미로 해석하는 작업이 새롭게 요구되었다.

 

성경 말씀에 담긴 다양한 의미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성경 말씀은 문자적·도덕적·영적이라는 삼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과 영(靈)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그리스 철학에 근거한다. 이 구분을 토대로 사람들은 각자의 수준에 맞게 교화되어야 한다.

 

“더 단순한 사람은 말하자면 성경의 육으로 교화될 수 있다. 반면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사람은 말하자면 성경의 영혼으로 교화될 수 있다. … 완전한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영적 율법’으로 교화될 수 있다”(<원리론> 4.2.4).

 

그렇지만 이 삼중적 의미가 성경에서 항상 규범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많은 성경 구절에 문자적 의미가 없고 영적 의미만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원리론> 4.2.5 참조). 구약에서 하느님을 의인화하는 구절, 독수리를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규정,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사자 몸을 한 동물을 먹으라는 규정이나 ‘오른 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는 복음서의 말씀 등이 그러하다.

 

또 삼중적 의미가 모든 성경 본문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기에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로 나누는 이분법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영적 해석 방법에 도덕성에 관한 단순한 훈계, 유형에 따른 인간학적 해석, 가장 흔히 사용되는 전통적 예형론 등 여러 유형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잘 알려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담, 남자,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음으로써 타락한 남자의 운명을 본다. 예루살렘은 천국 또는 천상 예루살렘이다. 예리코는 이 세상이다. 강도들은 적의를 가진 마귀들과 그리스도 이전에 이 세상에 들어온 거짓 사상들을 상징한다. … 사제는 율법을, 레위는 예언을 상징하며, 사마리아인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체를 취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관은 교회를 상징하며, 여관 주인은 사도들과 사제들의 후계자, 즉 주교들과 교회의 교사들을 상징한다. … 다시 오겠다는 사마리아인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한다”(<루카 복음 강해> 34,2-3).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문자적 의미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지고(至高)한 영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적 해석을 통해 드러난 구약과 신약의 긴밀한 연관성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가 성경 전체에 나타나므로 구약의 사람과 사건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그의 성사와 교회를 예언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나팔 소리에 요새 담벼락이 무너진 여호수아의 예리코 점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사제들이 복음을 통해 우상 숭배를 없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여호수아기 강해> 7 참조). 그는 바오로가 율법을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을 받아들여 더 완성된 방식으로 교회에 정착시켰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사도의 약속에 따라 모든 것에서, 신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 - ‘하느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 의로운 이들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며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지혜’(1코린 2,7-8 참조) - 를 찾아야 한다”(<원리론> 4.2.6).

 

오리게네스의 주장에 따르면, 구약은 그림자이며 완전한 진리의 이미지는 신약에서 나타난다. 그가 제시한 영적 해석을 통해 구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이 곧 자의적恣意的 해석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그는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이해로 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영적 의미를 통해 깊은 이해로 완성되어야 한다.

 

오리게네스가 자의적 해석에 빠질 위험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또 영적 해석의 놀라운 창의성을 살려 이후 모든 성경 해석의 귀감을 어떻게 제시했는지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영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의 균형 잡기

박승찬 엘리야

 

 

오리게네스의 다양한 주해서

 

지난 호에서 다룬 <원리론>에서 보았듯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는 영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성경에 대한 정확한 문헌적 탐구를 경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고 히브리어를 배웠다. 성경 해석이 역사적·문자적 의미를 찾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먼저 성경 본문을 문헌학적·비평적으로 탐구했다. 사실 그는 고대 교회에서 어느 누구보다 역사-문헌 비평적 감각으로 충만한 주석가였다. 무엇보다 정확한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문자와 영을 연결하는 것이며, 문자적 해석은 일부 경우에만 결점이 있다(<원리론> 4.2.6; 4.3.4 참조)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230년경 구약성경에 대한 최초의 본문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헥사플라>(Hexapla, 육중역본)를 편집하는 놀라운 작업을 이루어 냈다. 그는 여섯(hexa) 개의 사본, 즉 히브리어 원본과 히브리어 원본의 발음에 대한 그리스어 표기, 그리고 성령의 영감(靈感)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인정되던 그리스어 번역 ‘셉투아진타(칠십인역)’ 외에도 아퀼라 · 심마쿠스 · 테오도시우스의 번역본을 함께 수록했다.

 

이러한 문헌 연구는 그에 의해 영지주의에서 벗어난 암브로시우스라는 부자가 일곱 명 이상의 속기사를 제공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에 오류나 모순된 내용이 있을 수 없으며, 기껏해야 본문을 변질시킨 인간의 잘못이 문제라고 믿었기에 문헌을 정교하게 비판하여 인간의 오류를 수정하려고 노력했다. 더욱이 히브리 성경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한 라삐들과 논쟁해 가면서 문헌 연구를 하였기에 본문 해석의 기반이 한층 확고하게 마련되었다.

 

영적인 사람만 이해하는 ‘영적 의미’

 

오리게네스에게 문자적 의미는 독자들이 이해의 낮은 차원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갈 수 있게 한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성경 본문의 문자는 마치 그리스도가 취하신 인간 육체처럼 신적 로고스를 둘러싼 외피로 기능한다. 따라서 <헥사플라>와 같은 텍스트를 완성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당시의 모든 연구 방법을 성경 해석에 적용하였다. 정확한 연구 방법은 당대의 영지주의자들이 영적 의미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었다.

 

지난 호에서 다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해석에서 잘 드러나듯이,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지만 성경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 의미를 발견하는 깊은 이해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영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문자적 표현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리게네스는 모든 사람이 성경의 깊은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성령이 성경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진리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는 이들이 진리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든 율법은 영적이지만, 율법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모든 이가 아는 것이 아니고, 지혜와 지식과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들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원리론> 1, 서론).

 

따라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까닭에 오리게네스는 예언서나 복음서를 읽을 때 자신이 생각한 의미를 그리스도의 의미로 전가하지 말라고 늘 경고했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했다(<편지> 3 참조).

 

또 오리게네스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수련만이 아니라 종교적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별안간의 깨달음’이란 표현에서도 나타나듯 영감이나 조명이 필요한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러므로 오리게네스가 사도 바오로를 따라 자주 말했듯이, 오직 영적인 사람만이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영적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연관해서 검토되어야 하며 성경의 다른 구절로 입증되어야 한다(<원리론> 4.2.9 참조).

 

영적 해석의 불분명함으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

 

그러나 그리스 철학을 적극 수용하고 그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 탐구와 의미를 갈구했던 오리게네스는 그 열정이 지나쳐 몇 가지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그의 놀라운 신학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리스도교 초기에 나타난 이단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가 적극 활용한 플라톤주의 등 당대의 철학 체계였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교의상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성자는 성부보다 낮고 성령은 성자보다 낮다’는 종속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1코린 15,24)라는 구절을 토대로 만물 복귀설(apokatastasis panton)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만물은 종말에 자신의 궁극적 근원으로 되돌아가며, 신은 모든 것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자의 구원 행위는 모든 영혼, 심지어 악령과 악마도 정화의 고통을 겪어 마침내 신과 일치하게 한다. 이는 지옥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 플라톤주의의 영향 하에 영혼의 선재설(先在說)과 정령설을 인정했다. 인간의 영혼은 세상 이전에 창조되었는데 영혼이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어떤 정령은 별이 되고 어떤 정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육체에 갇혀 인간이 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주장하는 정통 교리와 달리 창조를 필연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오리게네스는 후대에 평가절하되었으며, 그가 죽고 난 뒤 200년이 지났을 때 그의 이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안타깝게도 그리스도교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고 말았다.

 

영적 해석의 창의성과 철저한 비판 정신의 조화

 

오리게네스는 성경과 독자의 관계를 정적으로 보지 않고 동적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주석가는 자신의 노력으로 메마르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간파할 수 있지만 모든 말씀을 완전하게 터득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탐구하면서 향상되고, 열성적인 연구로써 진보하며,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고 이성의 조명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연구의 최종 목적지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주해> 14,6).

 

오리게네스가 보여 준 영적 해석의 놀라운 창의성과 철저한 비판 정신의 조화는 그 후 모든 성경 해석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성경을 탐구했지만,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에서 확정될 모든 신학에 대한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직접 읽어 보면 오리게네스가 성경에 탄탄한 토대를 두고 ‘신앙의 규칙(regula fidei)’에 얼마나 충실하려 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그는 “교회 전승에서 전해진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마태 복음 설교> 46)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오리게네스는 성경에서 단순한 지식을 얻으려고도 교회 신앙의 전통적 길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그의 영적 해석은 단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구체화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가 완결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풍부한 가능성은 안티오키아 학파와 후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경의 통합적 해석을 시도한 안티오키아 학파

박승찬 엘리야

 

 

우의적 해석에 대한 비판

 

신플라톤주의에 바탕을 둔 오리게네스의 우의적 해석(allegoria)은 그리스도교의 성경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의 해석을 기계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신플라톤주의 전통에 속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던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305?년)는 그리스도인, 특히 오리게네스가 성경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교도 지식인이었던 그는 호메로스의 작품과 신화를 알레고리로 해석할 경우 임의성과 자의성에 빠질 수 있다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그리스도교 비판에 적용했다.

 

포르피리오스의 비판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지식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에서 오리게네스가 산을 사탄으로 해석한 내용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들은 알레고리 해석이 독자의 귀를 현혹시키고 남모르게 본문의 의미를 혼란시키며, 어려운 구절들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기 쉬운 도피 수단을 찾는다는 포르피리오스의 견해에 공감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나친 알레고리 해석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쪽은 안티오키아 학파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문자적 · 역사적 의미 강조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는 이미 사도 시대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의 활동에 힘입어 다른 민족 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대도시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매우 활기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법규(6조)에 따르면,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의 서방과 이집트 지역을 대표하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동방 지역에서 수석 대주교좌가 지니는 교회의 우위적 위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 중요성만큼 대주교의 임명도 민감한 사항이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신앙고백에 대한 차이 때문에 분열이 심해질 정도로 다양한 신학 이론이 열띤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성장한 안티오키아 학파는 알레고리 해석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우선 신플라톤주의 영향이 지배적이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비해,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닌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과 논리학적 명확성 등이 그들의 사상에 녹아 들어가 있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지만, 주석 방법과 신학은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Diodorus, 344?-394?년)에 이르러 체계가 잡혔다. 그의 제자들이 활기차게 활동한 결과 4-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디오도루스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주해하는 ‘역사적 · 문헌학적 방법’으로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디오도루스는 알레고리 해석 방법과 대조되는 ‘테오리아(Theoria)’를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알레고리는 성경 본문에 숨어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위해 그 문자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을 지니는 반면, 테오리아는 자구를 약화시키거나 삭제하지 않고 그 자구가 품은 더 깊은 수준의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테오리아’를 활용하기 위해 당시 이교 사회에서 즐겨쓰던 비판적 해석 방법을 도입, 칠십인역 본문의 비판본을 만들어 정확한 문자적 의미를 확증하려 노력했다. 또 자의적 알레고리 해석을 피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성경 해석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구원사 전체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치라는 공통되는 실제성의 두 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역사적 실재는 장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암시(예형론)를 내포할 수 있기에 역사적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디오도루스, 〈시편 주석서〉 118 서론).

 

예를 들어 자기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 구리 뱀을 (기둥에) 달아 놓은 모세, 아말렉족을 쳐부수기 위하여 양팔을 든 모세, 파스카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모세 등의 역사적 실재를 제대로 이해할 때,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 해석이 독자의 개별적 성향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기준이 되는 엄격한 규칙을 발전시켜 나갔다.

 

성경 해석의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

 

커져 가는 알레고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안티오키아 학파의 일부 학자들은 가능한 문자적 해석만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했다. 예를 들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us, 350-428년)는 철저한 문자주의자로서 ‘아가’에 나오는 신랑과 신부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보는 전통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가’를 세속적이고 육체적 사랑의 노래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책의 경전성마저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등)는 테오도루스와 극단적 주장을 비판하면서 전통적 그리스도론·교회론적 의미를 인정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 해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학파나 특정한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본문 내용과 난이도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전통적 해석에서는 창세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 전체를 예형론적으로 이해했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야곱이 열두 족장인 아들들에게 행한 말은 족장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딴 부족들의 역사와 관련된다고 이해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와 같은 구절을 해석할 때는 예외적으로 예형론을 받아들였다. 즉 이미 유다인들이 야곱의 축복을 메시아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했듯이, 이 구절이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한 것으로 해석했다.

 

또 시편을 해석할 때에도 전체 시편을 지나치게 알레고리로 과장해서 해석하려는 것은 피했지만, 시편 2, 8, 44, 109 등을 그리스도론으로 해석하는 데는 망설이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문자적 주석만 중시하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영적 해석을 중시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스스로를 뚜렷하게 구분짓던 기존의 견해와 달리, 알레고리적 해석과 예형론적 해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면서 문자적 해석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안티오키아 학파가 발전시킨 성경 해석 방법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현대의 성경 해석학의 경향도 되돌아보게 된다. 근대 이후의 변화만 보더라도 원전비평, 전승비평, 역사비평, 구조주의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다가 최근에 다시 전통 방식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등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문자적 해석이 성경에 담긴 모든 진리를 완전히 밝혀낼 수 없던 것처럼, 오늘날의 해석 방식도 한계를 지니며 성경의 ‘한’ 면을 밝혀내기에 적절할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한두 가지 성경 해석 방법론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각 개인의 해석에는 주관적 취향까지 덧붙여져 더 큰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며 성경을 읽음으로써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한 말씀을 다양한 해석 방법론으로 검증하여 자신과 집단의 편견이 투영된 우상을 제거하고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선한 신이 어떻게 악을 창조할 수 있는가?

박승찬 엘리야

 

 

마니교의 도전

 

마니교의 등장

 

요즘에도 다양한 신흥 종교 또는 사이비 종교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종교 집단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성경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자신들의 교리를 통해 이를 해명함으로써 그들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 중에서 소위 ‘종교혼합주의(syncretism)’ 형태를 지닌 집단은 종종 매우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 그만큼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종교혼합주의는 기존의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른 종교의 장점 등으로 대체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종교의 교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보았을 때에는 여타의 종교보다 더욱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나타난 종교혼합주의적 이단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은 바로 ‘마니교’라고 할 수 있다.

 

마니(Mani, 215?-274?년)는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기존의 종교들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을 모두 차용했다. 예를 들어 불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등에서 발견되는 주요 요인들을 혼합하여 극단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마니교가 비판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는 바로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한 창조주가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마니교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체험하는 악과 고통을 바탕으로 ‘전선한 절대자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도대체 악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신이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앨 수 있으면서도 이를 방치하고 있다면 선한 신이라고 할 수 없고,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악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이를 없앨 수 없다면 전능한 신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신과 악신이라는 이원론적 사고

 

이 난제(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니교는 영지주의에서 선의 원리인 ‘정신’과 악의 원리인 ‘물질’ 사이의 이원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마니교에 따르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악은 모든 선의 원인인 신에게서 유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니교의 스승들은, 세상의 선은 선한 신(Ohrmuzd)에서 유래하며, 악은 악한 신(Ahriman)에서 유래한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며, 정통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선한 신이 악을 제압하는 능력은 항상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악의 원천 역시 최고 실재자, 즉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한 신이 승리하면 세상에는 정의와 평화가, 악한 신이 더 큰 힘을 얻으면 세상에는 불의와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니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악신이 선한 인간들을 괴롭힐 때면 선신이 꼭 사자(使者)를 파견한다는 것이다. 선신의 사자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는 보리수 밑에서 득도하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 부처, 싯다르타이다. 두 번째로 유명한 사자는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예수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악신의 세력을 잠시 몰아내긴 했지만, 다시 악신은 그 세력을 뻗쳐 선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예수가 죽은 지 200년 만에 가장 강력한 선신의 사자, 마니 자신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니는 이렇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와 이론을 다 불러들여 훨씬 더 체계적인 신학 이론을 만들어 냈다. 더욱이 마니는 전에 다룬 바 있는 마르치온의 이론도 들여왔다. 마르치온의 주장과 같이 복수와 공포의 신에 대한 묘사로 가득한 구약은 가치가 없다 하여 구약성경 전체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마니는 온 우주의 창조 질서와 그것을 창조한 창조주가 선하다고 보는 구약성경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이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약 중에서도 구약의 권위나 영감을 인정하는 구절, 곧 우주의 질서와 선하신 창조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구절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이 부분들은 원작이 아니라고 여겼고, 의도적 편집 작업을 통해 모두 삭제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정화한’ 신약성경만을 건전한 책으로 인정했다. 그곳에 마니는 자신의 ‘행전(行傳)’, 즉 자신이 활동한 내용을 첨가했다. 구약의 인용이 삭제되어 사랑과 자비의 신에 관한 내용만 나오는 신약과 마니 자신의 활동 내역이 담긴 행전, 이 두 가지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니 자신을 신격화하고 이에 도움이 되는 모든 근거를 종합해서 새로운 체계로 만든 것이 마니교인 셈이다.

 

종교혼합적인 신흥 종교의 문제점

 

마니교 교리의 장점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이끄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의 충돌과 같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악은 죄가 아니라 운명이며, 윤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육체 안에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니교의 구원은 계시자 마니나 예수를 통해 가르침을 받은 인간이 빛의 섬광을 모아 자신을 억압하는 물질 세계에서 해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마니교에서는 엄격한 금욕과 성적 절제는 물론 매우 복잡한 단식 규정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고기와 피같이 거무스레한 음식은 피하고 그 대신에 빛을 많이 받은 멜론, 호리병박 열매, 과일과 같은 신선한 음식을 먹어야 했다.

 

마니교에서 벌어진 ‘혼합주의적’ 행태는, 현대의 여러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다. 더욱이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은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만화 영화에서 항상 보아 왔고,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무수한 할리우드의 영화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날 정도로 친숙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종교혼합적인 신흥 종교의 문제점은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핵심 교리나 이에 바탕을 둔 윤리 규정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니는 성경의 몇몇 구절이나 주제를 인용하면서 예수가 구속자임을 인정하기는 했다. 다만 예수를 지상에서 살다가 십자가형을 당한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곤궁(困窮)함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았다. 신과 유사한 신성을 지닌 구속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없으므로 십자가형은 현실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상징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이렇게 이해할 경우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전체가 무력화된다. 따라서 마니교는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로운 종교로 등장한다.

 

더욱이 그들은 기존 종교의 경전에 나오는 내용을 신화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교리나 창시자에 대해서는, 이성에 근거한 비판을 철저히 차단한 채 유사 과학적 설명을 통해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해와 달이라는 두 가지 크고 선한 빛을 중시한 마니교의 신화는, 일식이란 해와 달이 우주에서 벌이는 비참한 싸움의 광경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특수한 베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추상적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나 유사한 사고 체계에 바탕을 둔 후대의 이단분파(카타리파, 보고밀파)들은 기존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혼합적 입장의 위험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놀랍게도 무려 9년 동안이나 마니교도로 활동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다. 그가 왜 마니교에 빠졌으며, 어떻게 이를 극복했는지는 다음 호에서 다루어 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마니교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노

박승찬 엘리야

 

 

새 영세자들이나 유아세례를 받은 후 오랫동안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접한 이들은 큰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당혹감에 빠지거나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겪는 이들이 매우 많다. 특히 지적 능력이 뛰어나거나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들이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곤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이러한 의심과 회의를 묻어둔 채 신앙생활을 이어 가지만, 때로는 성경 이해에 대한 어려움이 그리스도교를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 줄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다.

 

아우구스티노의 부모는 재능 있는 아들이 고향 타가스테의 강압적인 교육에 실망하여 방황하자,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 보냈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선 아우구스티노는 그곳에서도 방황하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은 뒤에야 비로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 공부에 매진했다. 그 무렵 아우구스티노는 키케로의 저서 《호르텐시우스》를 통해 지혜 탐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행복을 가져다줄 지혜를 찾기 위해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 모니카가 애독하던 성경을 펼쳐 들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성경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선 그가 읽었던 라틴어 성경(vetus latina)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않은 2세기 무렵의 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이라 문체가 저급하고 조야했으므로, 위대한 정치인 키케로(기원전 106-43년)의 웅변적인 어투나 로마 최고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문장에 익숙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더욱이 창세기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주하는 온갖 모순된 내용들이 눈에 거슬렸다. 해와 달과 별이 나흘째 창조되었다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날을 셀 수 있었을까?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등의 이야기는 그에게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황당한 이야기로 들렸다. 더욱이 모니카가 좋아하던 성조 아브라함마저 이집트의 파라오한테 갔을 때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다(창세 12,10-20 참조). 아우구스티노가 보기에 구약성경은 이와 유사한 성조들의 비도덕적인 이야기, 롯과 두 딸의 근친상간, 야곱이 거짓말로 에사우에게서 장자권을 빼앗는 사건 등 죄로 얼룩져 있었다.

 

키케로가 가르쳐 준 경건한 지혜를 찾던 아우구스티노는 구약성경에 실망하고 신약성경으로 넘어갔지만 거기에도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약성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마태 1,1-17 참조)는 루카 복음서에 한 번 더 나오는데(루카 3,23-38 참조), 이를 비교해 본 아우구스티노는 두 족보가 서로 맞지 않음을 발견했다.

 

예수님의 신성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기록인 족보조차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며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노가 처음 지녔던 철학적 욕구들을 그나마 만족시킨 것은, 지난 9월호에서 다룬 ‘마니교’의 이론이었다. 악의 기원과 같은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합리적’ 답변은 그를 사로잡았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자기 내면의 경향에 대해 고민하던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무마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를 발견하게 된다.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 자기 쪽으로 끌어들인다면, 인간은 이를 거스를 힘이 없기에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를 선택함으로써 어머니의 영향으로 항상 마음을 짓누르던 종교적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마니교 안에서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선택된 이들(elécti)’이 되기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된 ‘청종자(auditóres)’의 역할에 만족했다. 그는 21세가 되던 374년에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1년 넘게 문법과 라틴 문학을 가르치면서 마니교의 교사 역할을 맡게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9년 간 마니교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 그리스도교 성경에 대해 비판했던 것과 같이, 자기 눈에 비친 마니교 체계의 모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지고의 선한 빛이 어둠과의 싸움에서 약하고 무능하다는 마니의 주장은 옳은가? 힘없고 비천한 신성을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는가? 마니교도는 그리스도교를 신화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교리를 위해서는 - 지난 호에서 밝힌 - 신화적 요소를 도입했다. 이미 천문학적 기초 지식을 지니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마니교의 교리 전반에 대해 점점 더 큰 의문을 품게 되었다.

 

마니교를 떠나다

 

마니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인 파우스투스 주교에게서 대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만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로 아우구스티노가 29살 때 카르타고를 방문한 파우스투스를 만날 수 있었지만, 아우구스티노는 부풀었던 기대만큼이나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언변은 매우 뛰어났지만 학문적 지식이 부족한 파우스투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해 주지 못했다. 나아가 극도의 금욕적인 태도로 온전히 흠 없이 살고 있다고 자부하던 ‘선택된 이들’조차,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독신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실망이 최고조에 달해 마니교를 떠나게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에 대해 실망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교로 돌아올 수 없었다. 자신이 성경을 읽었을 때 느꼈던 실망과 회의를 전혀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그의 전기 작가들은 이 청년기를 단순히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불필요한 방황기로 취급한다. 나중에 그는 그 당시 자신의 통찰력으로는 성경의 내적 의미까지 꿰뚫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고백록》 Ⅲ, 5,9). 그러나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그의 태도는 젊은 아우구스티노가, 단순히 어머니가 원하는 길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믿기 위해 고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열심한 신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동료에게 종종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라고 강요한다. 이런 경우는 ‘성경만으로’와 ‘신앙만으로’를 외치는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무조건적 신앙만을 강요하는 태도로는 ‘가라지’처럼 교묘한 형태로 위장해 있는 사이비 종교의 위협에서 신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 일반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의문을 손쉽게 해결해 줄 것 같은 마니교식 교리에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이나 신앙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태도에서는 마찬가지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의 주장과 정통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성경이 실제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인간의 구원이 달려 있다면,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를 위해 필히 수반되는 정당한 질문은 기피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성찰할 대상이다.

 

안타깝게도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살던 북아프리카에서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줄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도, 마니교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일체의 진리를 의심하는 깊은 ‘회의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어떻게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다음 호에서 다루어 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암브로시오를 만나 영적 눈을 뜬 아우구스티노

박승찬 엘리야

 

 

많은 청년이 어린 시절 친숙하게 다녔던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중 일부는 교회에서 만난 신자나 성직자에 대한 부정적인 체험 때문에, 다른 이들은 세속화된 사회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지식이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성경 내용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냉담 상태에 빠진다. 이들의 의심이나 실망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으면, 신심 깊은 부모의 강한 권유도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황실 수사학 교사가 되어 밀라노에 도착한 청년 아우구스티노도 회의론에 빠져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대한 관심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밀라노에서 로마제국 최고위층 자녀들을 새로 만나 교류하면서 굳어 버린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았다. 향락적인 문화가 널리 퍼져 있던 당시의 분위기와 달리 이 최상류층의 자녀들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라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정신적인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 철학 사상을 통해 아우구스티노는 영원불변한 진리에 대한 열망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차원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에 맛들인 아우구스티노가 이미 크게 실망했던 그리스도교로 돌아오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밀라노 대주교 암브로시오와의 만남

 

당시 밀라노에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성이라 불릴 만한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년)가 대주교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집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인문교육을 받은 상태로 밀라노의 집정관을 맡았으며, 아리우스파와의 분쟁을 해결한 후 밀라노 대주교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황제의 잔혹한 학살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참회를 끌어낸 암브로시오 주교는 밀라노 대중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편 아우구스티노는 황제의 대변인 역할을 겸했던 황실 수사학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정치적으로 그와 대립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어느 날 신플라톤주의를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이 암브로시오 주교의 감동적인 설교와 놀라운 수사학적 능력을 칭송하자, 수사학에서는 최고임을 자처하던 아우구스티노는 질투심과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아우구스티노는 밀라노 대성당을 찾았다. 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암브로시오의 강론을 기다렸다. 강론대에 선 암브로시오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고요한 밀라노 대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이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그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자유롭게 인용한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등의 로마 사상가들은 아우구스티노도 무척이나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어느새 아우구스티노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암브로시오 주교의 매혹적인 강론을 경청하고 있었다.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의 발견

 

아우구스티노가 감명 받은 암브로시오 주교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남아 있는 설교집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의 내용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가 카르타고에서 성경을 본격적으로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내용에 실망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오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러 떠나는 장면에서 자녀가 아팠을 때 느끼는 부모의 마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신자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있을 때 암브로시오는 그들의 감정을 어루만진 후, 모리야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그 순간 천사가 와 멈추라고 해서 이사악이 생명을 보존했을 때, 경청하던 신자들은 안도했다. 그러나 설교는 곧바로 암브로시오가 의도한 본격적인 주제로 연결되었다. “이제 같이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실제로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바친 분이 계십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많은 신자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때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해 왔는데, 암브로시오는 구약의 사건은 신약에서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豫表)’라고 일깨워 준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을 통해 처음으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러한 성경의 영적 해석 방식을 ‘빵과 포도주의 본질 변화’ 등의 다양한 신학 주제에 적용하여 가르쳤다. 예를 들면,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 행한 기적(1열왕 17,8-24 참조)을 토대로 성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힘을 그리스도의 창조적 전능으로 설명했다.

 

“인간(엘리야)의 축복 기도가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주님이며 구원자의 말씀 자체가 효력을 미치는 신적 축성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엘리야의 말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힘(1열왕 18,36-38)을 지녔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본 요소들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지 못했겠습니까?”(《신비론》 52)

 

암브로시오는 성경을 이해할 때 문자적 의미가 가장 기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일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영적 의미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음을 멋진 강론을 통해 보여 주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

 

암브로시오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사회에 만연한 빈부 격차를 고발하는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합 임금 시대 때 아합과 그의 표독한 아내 이제벨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도원을 뺏긴 나봇(1열왕 21,1-19 참조)을 주제로 한 강론에서, 그는 부유해질수록 더욱 탐욕을 부리는 부자들을 꾸짖는다.

 

“그대는 가질수록 더 원하고, 벌어들일수록 여전히 그대에게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돈 욕심으로 타오른 탐욕은 꺼질 줄을 모릅니다. … 덜 가졌을 때는 자신의 재산을 가늠하여 절도 있게 벌어들일 줄 알았지만, 재산이 늘어날수록 탐욕도 커집니다. … 그리하여 탐욕스러운 부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시기하고 자신의 가난을 탄식합니다”(《나봇 이야기》 2,4-5).

 

암브로시오 주교는 탐욕스러운 부자들을 질타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좋은 실천 방법도 알려 주었다. 그는 “하느님을 빚쟁이로 만드십시오”라고 가르쳤는데, 예수님께서 가장 헐벗고 어려운 자들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내용(마태 25,31-46 참조)을 응용한 것이었다. 곧 부자들의 경우 자신의 돈을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쓰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을 빚쟁이로 만드는 것(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암브로시오 덕분에 목에 가시처럼 걸린 의문들이 제거되자,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을 열정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성경 공부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노는 극적으로 회개하게 되었고, 8개월간 세례를 준비한 후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후에 히포의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노는 죽을 때까지 암브로시오 주교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가령, 그는 이에 따라 감옥에 갇힌 자들과 숱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교회의 성구(聖具)들을 팔거나 처분할 정도였다.

 

교회의 많은 청년이 젊은 아우구스티노처럼 이해되지 않는 성경 구절 때문에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암브로시오 주교처럼 의심에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어 다시 주님의 품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성직자, 수도자는 물론, 오랜 성경 공부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갖춘 평신도 모두의 소중한 과제이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은총과 자유의 변증법

박승찬 엘리야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의 논쟁

 

인간은 진리가 담긴 성경과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선한 의지만 있다면, 과연 동일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성경에 담긴 소중한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 주는 유명한 신학적 논쟁이 있다. 바로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이를 위해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펠라지오가 벌인 논쟁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원죄론에 의거한 필수적인 은총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극적인 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은총을 절실히 체험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서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신이 좋다고 인정한 규범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4-15).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 설화에 바탕을 두고 원죄론(原罪論)을 체계화했다. 근원적인 악과 고통은 각 개인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 질서를 거스른 원조들의 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와 같은 구절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인간의 정욕(concŭpiscéntĭa)이 널리 퍼짐(propágatĭo)으로써 세세대대로 건네지는 원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선한 본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 본성과 공로에 대한 펠라지오의 긍정적인 평가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은 북아프리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펠라지오(Pelagius, 360?-420?년)와 그 추종자들이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영적인 상담자로 유명하던, 영국 출신 펠라지오는 금욕적 호소와 도덕적 성경 해석을 통해 진지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을 제시했다. 그는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에페 5,27) 교회상을 제시하며, 급속히 늘어난 신자 수로 인해 나타난 무미건조한 신앙과 도덕적으로 이완된 경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펠라지오는 여행 중에 체험했던 동방의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에 따라 인간의 본성을 아우구스티노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곧 그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본디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아우구스티노에게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송두리째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더 나아가 펠라지오는 아담의 죄도 세세대대로 넘어가는 원죄가 아니라 단지 아담 개인이 지은 죄로 보았다. 죄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아담이 끔찍한 예를 만들어 놓은 이후 발생한 사회적 습관의 결과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굳은 의지로 아담을 모방하려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신의 공로(merita)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십자가의 은총과 유아세례를 두고 벌인 논쟁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비판을 펠라지오의 제자들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사상 안에는 ‘위장된 자기 구원론’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오의 이런 매우 위험한 논리에 따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의미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만약 “인간이 오직 피조물의 본성과 자유로운 의지 결정을 토대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아 구원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아들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선을 행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에 앞서는 ‘은총’이 필요하고,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세례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유아세례’를 옹호했다.

 

이에 대해 펠라지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확산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인간의 능력은 완전히 무시되고, 동시에 신의 은총은 ‘값싼 은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비판했다. 그들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당시 차츰 더 늘어가는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그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은총을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빛을 주셨으므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차 하느님께서 모두 도맡아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아우구스티노가 보기에 이런 입장은 은총의 중요성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이나 생활 방식, 소위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강제로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진정 절대자라면, 그분의 구원이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그에겐 불합리한 일이었다(《서간집》 214,2). 따라서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아무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행한 모든 공로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월계관을 씌워 주신다면, 그분은 당신의 선물에 월계관을 씌우신다”(《서간집》 194,5).

 

성경 해석에 대한 논쟁이 주는 교훈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 사이의 논쟁은 그들이 사망한 뒤에도 양측의 옹호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마침내 529년에 펠라지오의 견해가 교회에 의해 단죄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논쟁이 진행될수록 아우구스티노는 “자유로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의 운명을 예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후대의 신학적 결정론에 빌미를 마련해 주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 모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이 담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밝히려 노력했지만,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둘 다 제시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논쟁 과정에서 차이점만 부각됐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점,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존중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둘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후대 학자들은 두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은총과 자유의 개념이 서로 다르게 규정되었을 뿐, 서로 다른 차원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진리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의 성경을 근거로 제기된 상반된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 옳은지는 종종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역사적 · 신학적인 성찰을 거쳐 분명해진다.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성경의 일부 구절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44)는 말씀처럼 한 이론을 좇아 발생하는 실천적인 결과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고 있는 성경이 담고 있는 참뜻을 깨닫는 일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1코린 13,12)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우리의 과제이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