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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서와 함께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신앙 - 윤인복 소화 데레사

by 파스칼바이런 2018. 7. 3.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신앙

윤인복 소화 데레사

 

 

카타콤바(Catacomba)는 일반적으로 로마제국 시대 말기에 등장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지하 무덤을 지칭한다. 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었기에 화장이나 옹기장 관습보다 히브리인들의 매장 관습을 선호했다.

 

카타콤바, 초기 그리스도인의 공동 안식처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1세기경,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공동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교도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묘지에 묻혔다. 2세기 중반 쯤부터는 일부 상류 귀족 신자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가족 묘지를 함께 사용하도록 허락하거나 토지를 기부했다. 그리하여 형편이 어려운 그리스도인도 죽은 이를 매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초기 그리스도인의 묘지인 카타콤바가 형성되었다.

 

카타콤바는 보통 유복한 신자의 가족 묘지를 중심으로 생겼으나, 묘지 주인은 신앙을 함께하는 교우도 묻힐 수 있도록 묘지를 개방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과 이교도가 혼재되어 매장된 장소였지만, 증가되는 그리스도교 인구와 그들의 결속성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하 무덤이 형성되어 갔다. 3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규모는 점점 커졌고, 로마 교회가 직접 관리에 나섰다.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공간인 카타콤바에는 그들의 염원이 담긴 다양한 주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시각적 이미지(벽화나 장식)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인의 미술과 신앙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소망과 부활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공동묘지를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는 공동의 안식처로서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 불렀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체메테리움에서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공동체 의식을 추구하고자 했다. 더욱이 그들은 박해 시기에 그곳에 모여 전례를 거행하며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다.

 

카타콤바의 이미지와 상징

 

카타콤바를 장식하는 주요 기법은 프레스코이다. 이는 벽면을 붉은색 띠로 나누어 구간을 만들거나 거친 붓질로 형상을 그린 로마 벽화와 양식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무덤의 입구나 여러 무덤이 있는 묘실 등의 벽면은 거의 회화로 채워졌다. 가끔 대리석 비명이나 간단한 대리석 미장으로 치장되기도 했지만, 벽화는 항상 장식의 필수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카타콤바 내부의 벽면이나 석관 부조 위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매장 일자 등을 새겨 놓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신앙 고백이나 믿음의 증표를 상징하는 이미지들,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차용한 내용을 담은 서술적 이미지들을 남겨 놓았다. 장식적인 상징 이미지는 물고기, 빵, 포도 넝쿨, 공작, 비둘기, 올리브 나뭇가지, 어린양, 착한 목자, 오란테 등으로 벽면과 석관을 장식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요나의 고래 이야기’, ‘노아의 방주’, ‘사자 동굴 속의 다니엘’, ‘아브라함과 이사악’, ‘바위를 치는 모세’, 신약성경에서는 ‘라자로의 부활’, ‘그리스도의 세례’, ‘빵과 물고기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선호되었다. 이러한 이미지 중에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미지나 로마 시대의 다양한 종교 표상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종교의 교리 의미를 쉽게 표현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과거의 예술적 이미지를 잠정적으로 차용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벽화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카타콤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착한 목자’의 모습이다. 헬레니즘 전통의 목가적 형상으로 등장하는 목자들의 모습이 ‘착한 목자’의 존재와 겹쳐진 형태이다. 그리스도를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영원한 젊음으로써 신성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착한 목자’를 예로 들어 보자. 양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목가적 풍경을 배경으로 젊은 그리스도(착한 목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튜닉을 입고, 한 손으로 양의 두 다리를 꽉 잡고 있다. 벽화는 낙원의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한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착한 목자의 양 옆 양들 사이에서 두 젊은이가 힘차게 쏟아지는 물을 마신다. 이 물은 생명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바로 두 젊은이에게 원기를 주는 그리스도이다.

 

뒤에 있는 나무들도 목자인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상징한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1-4).

 

양들을 보호하는 목자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위협도 그리스도의 손에서 양들을 앗아 갈 수 없다고 약속하신다. 착한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구원되어 낙원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영혼을 상징한다. 이 벽화는 목자를 통해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내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것이라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희망을 나타낸다.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중요성

 

카타콤바에는 물과 관련된 주제로 ‘세례’ 장면이 자주 그려진다. 물이 보편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는 ‘죽음’(물속에 잠겨 존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과 ‘재생’(물속에서 나와 우주 형성의 창조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보편적 물의 의미로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세례를 통해 낡은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고, 물에서 나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성사의 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를 이루고, 그리스도가 죽은 후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자신의 부활도 약속되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로마 6,3)

 

또 카타콤바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물고기’를 꼽을 수 있다. 갈리스토 카타콤바 벽화 가운데에는 성찬의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벽화에 그려진 성찬의 식탁에는 일곱 명이 둘러앉아 있고, 그들 앞에 물고기가 접시에 담겨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7’이란 수는 구원을 상징한다. 물고기(ΙΧΘYΣ)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가리키며, 빵의 이미지와도 연관된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 장면은 그리스도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빵과 포도주로 거행되는 성찬 전례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당신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된다. 하느님의 생명이 ‘내어 줌’과 ‘채워짐’의 신비로 성찬의 식탁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끝이 아닌 영원한 삶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한 주제 가운데 자주 드러나는 이미지는 ‘요나 이야기’이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에 불복하여 도망치다가 뱃사람들에 의해 큰 폭풍을 잠재우는 희생 제물로 바다에 던져진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으며, 하느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셨다. 그는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길로 들어선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사흘 밤낮을 땅 속에 계셨다. 이는 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요나의 이야기에 비유한 것이다. 이 맥락에서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하느님에 의해 구원된 요나는 부활의 희망을 상징한다.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암흑에서 빛으로, 덧없는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카타콤바의 이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교리와 전례의 성격을 지닌다. 교회의 가르침과 복음을 표현한 이미지들은 개인의 표현 욕구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정신을 드러낸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언어를 구사한 셈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를 상기시키는 매개적 상징 기호가 된 것이다.

 

* 윤인복 님은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 대학 부설 그리스도교 미술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