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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 그런 날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 읽다 이 시집을 얼마 전 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날 다운 받은 영화의 결말쯤에 이르러서야 아, 나 이 영화 본 적 있어 그런데 그게 언제지? 도대체 어떻게 끝나지?
오늘 내리는 비는 어제 내렸던 비가 아닐까? 입구를 잊어버려 골목마다 헤매고 다니던 날처럼 이 비는 어제 여기 내렸다는 사실을 잊고 오늘 다시 내리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내일도 비가 오겠지 내가 내일의 비를 만날 때쯤엔 나 역시 우리가 어제, 혹은 그제 만났던 사실을 잊고 이 비 좀 봐, 올해 처음 내리는 비군
그래서 어제의 꽃은 오늘의 꽃이, 오늘의 꽃은 내일의 꽃이 되고 나는 늘 오늘의 꽃을 보겠지 우리가 달의 앞면만을 보는 것처럼 달에게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지금 비가 온다 어제의 비가 내일 내릴 비가 영화가 끝난 화면 위로 눅눅한 시집 위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맨 처음의 비가 활자들이 꿀꺽꿀꺽 빗물을 마시며 자라다 푸른 덩굴손을 뻗어 내 손목을 힘껏 움켜쥐는 날
무크지 『울산작가』 제25호 2018년 발표
송은숙 시인 / 열돔*
오백 년을 산다는 바다거북이 죽었다 뱃속에 비닐 조각이 가득했다 가장 큰 새라는 알바트로스가 죽었다 뱃속에 비닐 조각이 가득했다 살아있는 화석 물고기라는 실러캔스가 죽었다 뱃속에 비닐 조각이 가득했다
비닐과 먹이를 구분 못하는 근시안적 식탁이 최후의 만찬이 되어버렸다
자연은 뒤집기의 명수 총알을 아끼려 비닐을 뒤집어씌우는 테러리스트처럼 한지에 물을 묻혀 얼굴을 덮는 도모지란 형벌처럼 뱃속의 비닐을 꺼내 이제 너희들 머리에 씌워주마 푹푹 삶기는 화탕지옥의 맛을 도무지 잊을 수 없도록 얼굴에 손발에 등판에 불의 낙인을 찍어주마
편리와 실리를 구분 못하는 근시안적 식탐이 눈을 가리고 최후의 만찬을 차리고 있다
* 열기가 뜨거운 공기의 돔에 갇혀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달궈지는 현상
계간 『문에연구』 2018년 가을호 발표
송은숙 시인 / 담쟁이 라(蘿)
청라 언덕의 라가 비단이 아니고 담쟁이라니 푸른 비단 언덕이 아닌 푸른 담쟁이 언덕이라니 이은상의 사우(思友) 기념비를 보고 한 깨달음 얻은 날 무성한 여름철 같던 담쟁이 모두 어디 갔나요 건물들 철거되면서 사라졌다오 아, 그 마지막 잎새 바람도 어쩌지 못하던 잎새를 포크레인 삽날이 물어뜯었다오 한 세대가, 어떤 기억이 어질고 둥근 무지개 같은 것이 흔적도 없이 폭삭 무너져 내렸다오 저 붉은 벽돌 지붕 위 들창만 남기고 삽날의 끝 끝끝내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만 남기고 생각하며 모퉁이 돌아서는데 그 붉은 벽돌집 한 면 가득 담쟁이가, 아직 청청한 것이 잎잎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계간 『동서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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