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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유 시인 / 액션페인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8.

김지유 시인 / 액션페인팅

 

 

술 취한 사내가 잠든 새벽, 여자가 벽을 닦는다

 

벽엔 간밤의 핏자국이 묻어 있다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사방으로 크게 번져 황홀하게 잘 마르는 피 여자의 몸에 가시덩굴이 번져가듯 또 다시 거친 문신을 새기던 사내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다 부서진 우산살이 살아 움직이는 손가락들처럼 여자의 등짝을 움켜쥐고 있다 담뱃불에 덴 허벅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다

 

오래전부터 여자의 몸은 봉방蜂房이다 그 구멍마다 꿀처럼 감춰진 교성을 흡혈하듯 즐기는 사내가 취해 돌아오는 밤이면, 여자는 지레 놀라 본능적으로 옷을 벗는다 사내가 휘두른 허리띠가 뱀처럼 더 깊고 집요하게 살과 뼈 속으로 파고든다

 

벽에 물걸레를 대자 굳은 피딱지가 금세 녹아내리며 수채화처럼 번진다 온몸이 매질로 액션페인팅 된 여자가 소리죽여 울며 벽을 연신 닦아 내린다 점점 크게 핏물이 배어가는 벽을 바라보며 여자는 습관처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중얼거린다

 

사내가 뒤척이며 물을 찾는 새벽, 검은 타액으로 범벅된 알몸의 여자가 여전히 붉은 벽을 닦고 있다

 

시집 『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김지유 시인 / 허물

 

 

  섬 하나가 물고 있는 별빛이

  연민이라면 말이지, 바람은

  속을 뒤집은 바다의 몸이

  두드려낸 어둠의 신음 소리일 거야

 

  바위가 제 허물로 숨을 쉴 때

  그 틈으로 졸아드는 바다의 양수 좀 봐

  꿈틀대는 작은 탯줄들에게 말해

  두려워 마, 곧 엄마가 올 시간이야

  달이 뜨기 전에 자궁 속으로 잠길 수 있단다

 

  이곳에선 등 돌린 연인조차 아름답구나

  눈빛을 잃어버린 고기들 쪼르르

  바다 안으로 뛰어드는데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는 꼴 좀 봐

  기다린 건 섬이 아닌 게야

 

시집 『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김지유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6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 2010)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