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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희 시인 / 마중물 상상
세상의 물기라곤 다 말라버린 밤 대지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뻑뻑한 눈은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습니다 마른 침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진을 짜내고 있습니다 쩍쩍 갈라지는 혀는 살짝 닿기만 하여도 살살 녹아날 것 같은 눈(雪)뭉치 맛을, 타들어가는 목줄기는 왈칵 왈칵 넘어가던 한여름의 빗소리를 상상합니다
까무룩 지친 잠결에 잠깐 눈에 물기 고이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지는 눈에 번진 물기를 그대로 눈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자신이 되삼킨 그 한 방울 마중물로 가슴 속 깊숙이에 묻어둔 울음줄기를 찾는 중입니다
세상의 물기라곤 다 말라버린 긴긴밤입니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 중에서
이순희 시인 / 산 그림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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