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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순희 시인 / 마중물 상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8.

이순희 시인 / 마중물 상상

 

 

  세상의 물기라곤 다 말라버린 밤

  대지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뻑뻑한 눈은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습니다

  마른 침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진을 짜내고 있습니다

  쩍쩍 갈라지는 혀는 살짝 닿기만 하여도

  살살 녹아날 것 같은 눈(雪)뭉치 맛을,

  타들어가는 목줄기는 왈칵 왈칵 넘어가던

  한여름의 빗소리를 상상합니다

 

  까무룩 지친 잠결에

  잠깐 눈에 물기 고이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지는

  눈에 번진 물기를 그대로 눈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자신이 되삼킨 그 한 방울 마중물로

  가슴 속 깊숙이에 묻어둔 울음줄기를 찾는 중입니다

 

  세상의 물기라곤 다 말라버린 긴긴밤입니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 중에서

 

 


 

 

이순희 시인 / 산 그림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 중에서

 

 


 

이순희 시인

경북 문경에서 출생. 단국대 한문교육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가곡 독집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0)과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가 있음. 현재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상담학과에서 공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