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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서 시인 / 혁명의 그림자
다시 장미라는 외침이 들렸다. 사방에서 술렁임이 일었고 어느새 가시들이 무성했고
걷는 일이 남아있었다. 넝쿨 같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는 이, 모르는 이, 걷고 있는 사람 누구도 이 길로 가면 정말 장미인 거냐고는 서로 묻지 않았다.
벽보판이 된 허공에는 별의별 전단지와 스티커가 꽂혀있었다. 공기 중에 자꾸 섞여드는 낯선 얼룩들이 낯설지도 않아서
무슨 출입구인가 했으나 꿈덩굴에 갇히는 건 더없이 위험한 일.
흉터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거야, 기억이 기억의 표면에 노랗게 빛을 발라주러 따라왔다.
냄새를 따라가니 꽃밭이었다. 숲은 열려있으나 꽃은 피기 전이어서 장미는 닫혀있었다.
장미는 시들면서 향기의 폭력을 쓰는 꽃,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의 민낯은 봉오리처럼 핏물 밴 붕대 속에 숨어있는지 어떤지.
계간 『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발표
류인서 시인 / 혹서
동네 마트에서는 기우제 지내듯 연일 비의 음악을 틀고 있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이 빗방울은 지난 세기의 빗방울, 거리는 빛의 제국이다. 머리 위로 뜨거운 그림자를 쏟으며 공중 기차가 간다.
선크림 허옇게 뜬 내 얼굴을 분장극의 입구라 하자. 가면을 뚫고 나온 땀줄기가 목을 핥는다.
노랫말을 찢고 나왔나, 침대보다 더 커다란 발을 가진 남자 둘 바닥뿐인 아이스크림 통을 젓다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바깥을 향해 핑 핑 헛총질을 한다 빈손으로 뛴다.
오늘도 화약 냄새 요란한 협곡, 퇴로 없는 정지화면 안의 탈주극, 떨어진 커다란 통꽃들이 열대의 나방처럼 기괴하다.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발표
류인서 시인 / 냄새는 유령처럼 떠돈다
쓰레기더미에서 지독한 추억의 냄새가 난다. 냄새를 쫒아 킁 킁 개가 짖는다.
공갈뼈다귀라도 물고 놀지 그러니, 개가 지나간 쓰레기더미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꽃다발을 쪼고 있다 헤집고 있다. 버린 기억에 풀씨 같은 게 있었나, 쓰레기를 물어다 구애한다는 오렌지빛의 밝은 새*가 떠올랐지만 나는 장미라는 기분의 흔한 안부에서 붉은빛을 지워버린다. 저것은 한 때의 소화되지 않는 고통, 누군가 건너뛴 그을음 묻은 날짜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리
부푼 공기에서 생기를 얻는 냄새의 이목구비들 안경알에 묻은 꽃잎을 햇빛찌꺼기로 읽은 하루였으나
*바우어새
계간 『시와 세계』 2017년 봄호 발표
류인서 시인 / 2차 장마
꿈에 우산을 쓰고 걸었다. 맑은 낮이었다.
우산살 끝에 더위가 던지고 간 날짜가 매달려 대롱거렸다.
축객령이 머무는 땅인가 소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길 가운데 덩그러니 우체통이 있는 이상하나 낯익은 곳, 부치지 않은 여행지의 그림엽서와 마음에 붙이는 파스라는 말이 스쳐갔다.
너를 버리러 너라는 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소나기가 있었고 물을 찾아 동굴 속으로 뿌리를 내미는 나무처럼 나는 목이 말랐다.
꿈밖에 쪼그려 앉은 배고픈 소년들이 길 끝에 있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모아 커다란 거미를 굽고 있었다. 거미의 익은 관절부에서 희미하게 휘파람 소리가 빠져나왔다.
문득 나는 오래 비워둔 나의 생활이 그리워졌다.
월간 『현대시』 2017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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