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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운진 시인 / 강변북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8.

이운진 시인 / 강변북로

 

 

교통정체의 날은 왜 슬픔에 잘 어울리는지

막힌 도로 위

차 안에 갇혀

패배의 날들을 생각한다.

 

붉은 금을 긋고

1킬로미터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게

어떤 표정을 보여주어야 하나.

 

모두에게 숨겨온

속마음과 가장 가까운 말을 한다면

나는 또 무엇을 잃게 되나.

 

단 한 번도

예측한 방향에서 오는 법이 없는 삶을 생각하며

 

어제도 오늘도

벼랑 같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따뜻한 손이라 믿었던 것에 상처 받은 채

하지 못한 말은 하지 않은 채

강물 냄새에 숨을 씻으며 어둠을 가른다.

 

꽃이 피는 기척에도 놀라는

나만큼 외로운 사람들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

서로의 그림자를 붙잡고 따라가는 불빛 속에서

 

나는 너무 슬퍼질까 두려워 혼자 웃는다.

웃어서 다시, 가만히 슬퍼져도

 

격월간 『시사사』 2018년 7~8월호 발표

 

 


 

 

이운진 시인 / 재스민 나무의 데스마스크를 보며

 

 

나무가 살았어야 하는 방식으로 살지 못한 채

물기가 다 마른 재스민 나무가

엷은 그림자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숨을 닫으며 스스로 어두워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건 햇살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일일까.

수백 겹의 눈빛과 천 겹의 슬픔에 둘러싸였던 기억을 걷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완벽한 하루를 보낸 뒤의 피로 같은 걸까.

 

나무는 아무 인사도 없이 시간의 바깥으로 돌아가려는데

나는 묻고 싶어졌다.

 

일생동안

평온은 너무 지겹고 햇살은 권태로워서

폭우와 영하의 밤을 바라기도 했는지

발톱을 박은 새들에게 몸을 파 먹히는 나무를 부러워했는지.

 

만약 다음 생에 또 온다면

그땐 벼랑에서 바람을 걱정하며

슬픔에 탈진하는 날들을 살아보고 싶은지.

 

의미보다는 운명을 지닌

나무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싶었다.

 

기도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아도 되는

영혼이 몸을 다 놓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며

 

때로는 누군가의 순종으로 내 아픔이 덧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격월간 『시사사』 2018년 7~8월호 발표

 

 


 

이운진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199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등과 , 에세이집 『고흐씨, 시 읽어 줄까요』, 청소년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