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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옥 시인 / 소리 없는 펀치
문수봉 가파른 절벽을 오르다 간절한 바람 한 줄기 卍에 걸린다
-기와불사 만원이 적힌 가판대 앞으로 다가간다
지갑을 열고 만원 한 장을 꺼내 불사함에 넣는다 페인팅 펜을 들고 마음을 모아 기왓장에 집 주소를 쓰고 ,식구들 이름을 적고 -업장소멸, 건강, 가족화목, 사업번창 ,소원성취-를 꼭꼭 눌러 쓰고도 남은 여백 앞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그때 대웅전 쪽에서 보살 한 분이 다가온다 오만 원 권을 불사함에 넣고도, 기왓장에 단 한글자도 쓰지 않는다
그 분이 유유히 절 마당을 걸어 나간다.
계간 『창작 21』 2017년 여름호 발표
김찬옥 시인 / 뒷면의 힘
화장을 하다가 문득 500원짜리 동전 한 닢이 잔금으로 얽힌 손안에서 노는 것을 본다 앞면은 학이고 뒷면은 숫자이다 학이 비상하면 숫자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숫자가 위로 떠오르면 학의 날개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손바닥 안에 놓인 작은 지구 안에서 앞과 뒤가 돌고, 위와 아래가 돌고, 幸과 不도 돌고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경계도 따라 돌고 돈다 등과 등을 맞대야만 일체가 되는 운명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가 서로를 받쳐준다 내게 늘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화장대 거울도 뒷면이 없다면, 유리이고 ,창이고, 벽이다 소리 없이 받쳐주는 저 뒷면의 힘으로 나는 나와 서로 마주 할 수가 있다 거울 속의 나를 꺼낼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기에 오늘이 바깥으로 떠오른다 나는 누군가의 진정한 뒷면인 적 있었나, 상대가 어두워질 때 나의 앞면은 밝아질 수 있었다
계간 『시담』 2016년 가을호 발표
김찬옥 시인 / 봄이 오면 사이프러스 숲길을 걷자
딸아, 그 사이 엄마도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거니? 사이프러스 숲과도 같은 너의 왕관이 하루아침에 왜 민둥산이 되어버린 거니?
지금은 초록이 만발한 초여름이야 그 아름답던 숲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여자라는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거니?
초록의 영원과도 같은 결 고운 잎새들이 왜 뭉텅뭉텅 쓰레기 통 속으로 들어가는 건지 혹시 넌 아니?
아가 춥지 않니? 너의 머리 위에 펼쳐진 민둥산만 바라보면 내 몸엔 한기가 도는구나 고사목 한그루 버틸 수 없도록 숲을 전멸시켜버린 악성 바이러스
딸아, 애쓰지 마라, 어긋난 미소 속에 더는 슬픔을 가두지 마라 눈물이란 흐를 줄 알아야 새로운 길도 찾는 법이란다
생각나니? 어렸을 때 하던 숨바꼭질 너는 식탁 밑에 꼭꼭 숨어도 엄마의 손가락 사이에 너를 감추며 놀았던 일,
한밤에도 베개 닢 속에 눈물을 꼭꼭 숨기지만 술래가 된 내 손가락 사이에 너의 눈물이 맺혀있다는 거,
절망도 다 때가 있단다 지금은 우리가 가던 길이 잠시 주저앉았을 뿐,
민둥산에도 봄은 꼭 올 테고 그땐 우리 봄, 봄, 봄 나팔을 불며 노을이 피어나는 파묵칼레*의 숲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여자라서 쓸 수 있는, 여자이기에 꼭 써야만 하는 사이프러스 숲과도 같은 왕관을 다시 쓰고,
* 터키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목화의 성)는 그리스 로마식 온천시설이다 평원 위로 솟은 절벽의 샘에서 나오는 칼슘을 함유한 물로 인해 광물의 숲, 석화폭포, 계단형태의 분지들로 구성되었다. 노을이 질 때의 풍경은 터키를 또 다시 꿈꾸게 했다
계간 『시담』 2018년 봄호 발표
김찬옥 시인 / 복사꽃이 피면 영등포경찰서를 가야한다
어둡던 밤이 활짝 피어난다
술이 내 몸에서 익어가고 내가 복사꽃으로 다시 피어나면 그 꽃향기를 품고 무조건 영등포경찰서를 가야 한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복사꽃은 더 진하게 피어 말라버린 유두에도 화사한 꽃물이 벙근다
술에 익은 꽃잎이 한 잎 한 잎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새침하게 화장을 고치고 벌어진 꽃잎을 곧추 세운다
특히 인사동이나 충무로의 밤은 꽃들의 배경이 되어주기 마련이지만 거리가 텅 비기 전에 택시를 탄다
누구를 향한 특급 배려인가 시청을 지나, 신촌을 지나, 서강대교를 지나 자정을 넘기기 전에 여의나루양을 건너려한다
선 선 선을 지키면 행복해진다는 영등포 경찰서로...
강을 무사히 건너게 해 주는 건 복사꽃 고을을 물들인 서른즈음이 되기도 하고, 내 하나의 사람이기도 하고, 숨어우는 바람 소리이기도 하다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휘청거리는 꽃대를 바로세우며 영등포경찰서 맞은편에서 내린다
계간 『시와 시학』 2017년 봄호 발표
김찬옥 시인 / 밤기차를 타고 밥이 간다
잠시 어머니 얼굴이나 보겠다고 부안에 내려갔다 노모의 어긋난 틀니 안에서 썰컹대는 밥,
올라오는 길에 전주 딸집에 들렸다 어린새끼들 등살에, 어미가 차려준 밥상도 편안하게 받아먹을 수 없었다
앉아서 밥상을 기다리는 부자의 허기진 눈빛에 그만, 밥이 레일을 벗어난 바퀴처럼 밤기차를 무겁게 끌고 간다
기다려라 식솔들아, 오늘을 넘기기 전에 밥이 간다
어머니 입 안에서 오물거리던 밥이 오목가슴에 체증으로 걸려있고
딸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밥이 기차 안에서 눈물로 잘 발효되었다
물은 위로 역류할 수 없기에 복 중에 부모를 섬기는 일이 가장 크다 하는데 나의 눈물은 복과는 무관한지 이 밤도 낮은 곳으로 자꾸 쓸려 내려간다
밥아, 나를 지탱해주는 밥아 끝도 없는 이 밥의 전성기는 언제나 시들까
계간 『시와 시학』 2017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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