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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선자 시인 /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8.

천선자 시인 /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폐교로 만든 곤충박물관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유리 상자 안에 집을 짓고 있는 왕거미, 교미를 끝내고 수놈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먹이를 먹는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광대노린재를 지나, 여러 나라의 나비와 나방이 전시된 이학년 오반 교실로 들어간다. 지중해 바닷빛의 날개를 가진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 나비 뒤의 나방, 뒷목덜미에 그려진 원숭이의 얼굴,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수에 젖은 눈빛, 축 쳐진 어깨, 낯익은 얼굴은 거울 속 나의 얼굴, 밤마다 깡술로 비굴함을 삼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도시 뒤에 몸을 숨긴 탈을 쓴 원숭이, 달콤한 맛에 맛들이고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원숭이, 눈물이 없는 원숭이, 생의 부패한 조각들을 파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가죽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속에서 내장도 쓸개도 빼주고 사는 원숭이, 아름다운 도시의 원숭이.

 

시집 『도시의 원숭이』(리토피아, 2014) 중에서

 

 


 

 

천선자 시인 / 맹지

 

 

타인의 지번으로 팔과 다리를 묶인 자루형 토지이다. 메아리가 염장된 통조림통을 끌어안고 있는 포대자루이다. 불안만 발효시키고, 있는 무명자루이다. 어둠으로 꾹꾹 밟아 놓은 길이 없는 자루 위에 부드러운 햇살 한 점 물고 온 바람이 실없이 끈 자락을 흔들고 있다. 뽀얀 뺨을 부비며 서성거리는 두려움이 자루 속을 채우면 잘잘하게 접힌 웃음들이 텅 빈 허공을 두드리는 닳아빠진 자루이다. 꿰맨 자리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자루의 곳곳을 타고 기억들이 흘러내린다. 돌돌 말린 슬픔이 별처럼 반짝이는 풀리지 않는 자루이다. 현재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미래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혹시, 한 귀퉁이 터진다면 빌딩 하나 세워질 자루이다.

 

시집 『도시의 원숭이』(리토피아, 2014) 중에서

 

 


 

천선자 시인

2005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 졸업. 2010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도시의 원숭이』(리토피아, 2014)가 있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현재 〈막비시〉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