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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우기 시인 / 이교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0.

심우기 시인 / 이교도

 

 

  모든 기도는 신에게로 가는 계단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기를

  기도 중의 눈물은 마음에 찬 슬픔을 흘려보내는 것

  위대한 이교도는 우상이라 부르는 커다란 돌과 오래된 나무를

  유일의 해와 달, 짐승과 바람을 찬미한다

  우상이 사라져도 우상의 그늘은 가슴에 남는다

  어둠을 견디는 힘이며 추위 속의 영감이 믿음이다

  산과 산이 만나 협곡을 이루고 강과 강이 만나 운무를 만든다

  안개의 베일을 벗기면 돌이 부르짖는 소리와 땅이 울부짖는 소리있다

  귀와 눈이 열려 광인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초목

  어둠은 어둠 속에 있되

  빛을 버리지 않으므로 불꽃의 집이다

  어둠은 신성한 영(靈)이다

  신성의 먼 기원은 안갯속을 지나는 것이며

  오랜 기다림이며 오래된 미래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담아 침묵으로 묵힐 때

  세상엔 사단의 길이 성사된다 저마다의 신으로 가득하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2월호 발표

 

 


 

 

심우기 시인 / 사막여우

 

 

  사막의 시작은 어디이고 어디가 사막의 끝인가

 

  커다란 귀로 삼킨 사막의 열기가 밤으로 차가운 사막을 덥힌다

 

  별보다 더 많은 모래가 바람의 문양으로 흘러

  묻힌 모든 것이 모래로 변하여 숨을 쉬는 열사

 

  숨은 전갈과 도마뱀을 물고 하루에도 수 번씩

  폐허로 잠긴 성벽을 세웠다 무너뜨리는 반복이 교차한다

 

  허상의 국경에서 압수 수색당하는 카라반 대열의 꼬리

  굶주린 사막여우가 따라붙는다

 

  바람의 냄새로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건너는 붉은빛 여우의 귀는 밝다

 

  사막이 되지 못한 죽은 낙타의 등 뼈에서 한 포대의 모래가 쏟아진다

 

  파도파도 퍼지지 않는 구덩이에 새끼들을 낳고 기르는 일과

  척박의 바람이란 또 하나의 신기루를 쌓는 일

 

  울어도 들을 자 없는 사막에서 울부짖음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일이다

 

  침묵이 바람처럼 파고든다

  몸 안의 말들이 모래처럼 슬어간다

 

  허기진 여우의 검은 눈빛이 더욱 빛나고

  지도와 경계가 의미를 잃어 모래 알갱이에 파묻힌다

 

  작은 모래 한 알이 거대한 사하라를 옮긴다

 

시집 『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문학의전당, 2013) 중에서

 

 


 

 

심우기 시인 / 말뚝

 

 

  어린 흑염소에겐 힘은 말뚝이다

  뿔이 나고 털이 억세져도

  말뚝의 끈을 넘지 못한다

  강한 뒷다리와 넓은 어깨로도

  뽑지 못하는 말뚝은 신

  늘 지는 싸움인 줄 알지만

  고집은 염소고집

  돌아와 빙글빙글 돌다

  제 목을 감아 옴짝달싹 못하게 될지라도

  갈 데까지 가고 본다

  밧줄의 길이만큼이 세상인 염소에게

  말뚝은 세상의 중심이다

  권력이다

  그래도 염소는 뱅글뱅글 돈다

 

시집 『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문학의전당, 2013) 중에서

 

 


 

 

심우기 시인 / 신발 안의 아기 새

 

 

  새끼 새가 버려진 신발 안에 들어 있다

  둥지처럼 몸을 싣고 가는

  무엇을 품을까 섬 안의 섬처럼

  둥둥 떠도는 새

  부러진 나뭇가지 물고

  속을 채워봐도

  빈 구멍 숭숭한

  신발이 새를 물고 간다

  신을 신고 날아가나 다 잡힌듯한 새

  검은 알을 품은 새

  속도 모르고

  껍질을 깨고 여린 털의 빨간 속살을 가진 새

  신발 안에 어미 새는 없고

  빠진 깃털과 보풀만 쌓여 있다

  어느 작은 별

  불빛 비치는 누군가의 처마 끝에 앉아

  이 밤 쉬시고 계시는가

  종일 울어 둘러봐도

  보이지 않네

 

월간 『시문학』 2018년 3월호 발표

 

 


 

 

심우기 시인 / 운구

 

 

  땡볕 속 개미들이

  죽은 말매미의 울음을 지고 간다

  장의행렬처럼

  한 줄로 줄서서 간다

 

  검은 상복을 입고

  허기진 허리로 슬픔을 입에 물고

  뙤약볕 길을 간다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기울어진 산 그림자가 지워질 때까지,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가을호 발표

 

 


 

 

심우기 시인 / 결빙

 

 

  맑았던 물이 얼어 물속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의 눈물도 단단한 결정으로 굳어버릴 때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서로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단단해진 뼈만 쓰다듬는다

  쿨렁거리는 피와 살이

  눈물을 만든다

  집 나간 사람 집 지키는 사람 혼자 노는 아이

  

  서로의 길 가고 있을 때

  결국 혼자라고

  말끝 하나에도 자갈을 물리는

  

  실금의 그것은 무엇?

  

  달그락거리는 자물쇠

  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

  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

 

 


 

 

심우기 시인 / 종소리

 

 

  그느드 르므브 스으 하고

  어느 산사의 종소리 ㅡ로만 퍼져 나가면

  멀리 각과 변으로 서 있던 산들이

  느슨한 180도 한 선분으로 눕는 밤

  그 선 위의 모든 것을 까만 물감으로

  북북 칠하며 산 하나를 넘고

  또 산 하나를 넘는

  지치키 티피히이 하고

  어느 도심 속 종소리 l로만 쨍그랑거리면

  벽을 넘고 집 하나를 타고 넘어 이제는

  커다란 빌딩도 훌쩍 넘어

  널찍한 광장까지 이르러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깡충깡충 건너가는

  몸이 걸친 옷 조각

  실 오르라기 한 올 한 올 풀어져

  소리를 타고 ‘ㅡ'와 ’l'로 부서져

  뼈와 피로 도로를 넘고 길을 건너

  이명으로 울리는 종소리

  조그만 가슴 속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그지느치드키 으 이

  뎅 뎅 응하고 쨍그랑 댕그랑거리며

  텅 빈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어느새 꽉 채우고

  여운으로 터져나오는 … l l l

 

 


 

 

심우기 시인 / 괄호

 

 

  꽃술 속의 괄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괄호

  계곡과 산을 잇는 괄호

  건너갈 수 없는 강폭을 메우는 괄호

  코와 가슴 사이의 괄호

  하늘의 푸른 선 하나를 끌어 와 벌린

  대지와 하늘 사이의 환한 괄호

   괄호 안엔 돼지가 산다

  도시 비둘기가 구구대며 둥지를 튼다

  나비가 날개에서 꽃가루를 괄호 안에 털어내고

  배 밑창이 간지러운 꿀벌들이 괄호와 괄호 사이를 날고

  딱딱한 돌덩이 암흑이 미세물질 잔뜩 묻힌 괄호

  괄호 안에서 내가 방긋 웃고

  괄호 속에서 꽃들이 튀어나온다

 

월간 《시문학》 2011년 9월호 신인우수작품상 당선시

 

 


 

심우기 시인

2011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검은 꽃을 보는 열세가지 방법』이 있음. 가천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