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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경용 시인 / 빈센트를 위한 만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0.

한경용 시인 / 빈센트를 위한 만찬

 

 

  지네를 자른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지하실의 복도는 마디가 있다.

  후미진 달이 갇힌 창문이 내 안으로 길쭉하게,

  깨진 유리창 속의 기억이 소름 끼친다.

  지네를 자르듯 잘라 버려야지

  긴 손가락으로 질끈질끈 자르듯 묶으니

  살아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며 목도리에 묻힌다.

  죽어가지 않을 것 같다.

  뒤돌아본 내 지하실 복도

  지네는 마디로 산다.

  나는 죽지 않는 마디가 무섭고 열 개의 손가락이 무섭고

  그보다 더 어울려 그려져 잊힌 목도리가 무섭다.

  나의 닫힌 유리창을 열어보곤 언제나 목을 조른다.

  목이 긴 해바라기를 바라보다 쏟아진 핏자국의 양귀비

  아이리스에 젖어,

  데이지 꽃잎으로 몰아쉬던

  언덕마다 노을이 채색된다.

  수도원의 첨탑 위로 달 조각이 걸리면

  까마귀 나는 밀밭풍은 또다시 이글거리는가.

  젖은 불빛 아래 카페에서

  압생트*로 칵테일한 눈동자의 자화상을 그린다.

  내 노오란 집이 떠가는

  강물은 마디가 없다.

 

* 고흐가 그린 에메랄드 빛깔의 술,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마셨다 한다.

 

시집 『빈센트를 위한 만찬』(한국문연, 2014) 중에서

 

 


 

 

한경용 시인 / 달랑

 

 

장모님은 눈이 크시다. 금방 울어 버리신다. 그 눈에 아이샤도우를, 곱게 옷을 입고 악어 핸드백 들고 당당하게 개업한 사위의 여행사에 나들이 오신다. 봉봉 쌕쌕 두 박스를 들고, 장인 어르신과 같이 후배와 같이 쓰는 신설동 골목의 보증금도 없는 사무실, 달랑 책상 두 개 전화 두 대, 장인은 중국 여행에 대해서만 열심히 물어보신다. 여기저기 사무실을 보다가 전화통을 보다가, 장모님의 큰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다. 얼른 감춘다. 달랑 맨 몸뚱어리로 결혼한 사위의 자존심을 위하여 얼른 웃어야 한다. 눈물이 보이지 않기 위하여 큰 눈을 껌뻑껌뻑 거르신다. 그래, 눈물은 안으로 들여 넣어야지 눈물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여 넣는 것, 골프투어 상담을 마치고 “전화는 그래도 좀 옵니다.”라고 말하니 장모님은 젖은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중으로 얼굴을 돌리신다. 네 살배기 아들과 갓 돌이 지난 딸을 둔 저 불안한 외줄을 탄 사위 놈, 기죽일라. 벽에는 달랑 거울 하나, 폼페이유적 사진의 관광 캘린더가 뜨거운 나의 여름을 태우며 위태위태 걸려 있었다. 그 캘린더 를 구경하는 척, 거울을 보는 척, 눈 화장을 고치는 척, “사무실이 참 아담하네. 하고 너스레 떠신다.

 

검은 눈물은 하늘에도 있다. 베수비어스 산정에서의 화산 폭발로 석고가 된 엎드려 절규하는 임산부, 몇 백 년째 쪼그려 기도만 하는 남자 폼페이는 그날 이후 잿더미에 갇혀 검은 비만 내렸다.

 

여행사 책상 위에 있는 계간 문예지를 보시더니

 

아이라인이 뭉개진 눈 속으로 검은 눈이 반짝인다. “내 딸 세끼 밥만 먹여주고 시를 쓰든 말든 해주어.”내게로 흐르기 전에 커피에 타서 그렁그렁 마신다.

 

시집 『빈센트를 위한 만찬』(한국문연, 2014) 중에서

 

 


 

한경용 시인

2009년 시집 『잠시 앉은 오후』로 등단. 2010년 《시에》, 2014년 《현대시》로 작품 활동. 2014년 시집 『빈센트를 위한 만찬』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