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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승환 시인 / 노마드 사랑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0.

임승환 시인 / 노마드 사랑법

 

 

여름 꽃의 입술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설움이 먼저 스며온다

 

물방울무늬의 눈물이 있기는 한 건가

그 무늬를 하나하나 떼어 놓다보면

사랑도 단색의 슬픈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동에서 시작하고 너는 서에서 시작하는

그렇게 선을 그어 오다보면

희미한 점 하나에서 만난다

그 점에 마음 눌러 박는 것을 보면

사랑은 이해가 필요 없는 암기과목

 

때로 사랑한다는 말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모르핀에 생을 의존하는 환자의 우울이나

소리 없는 울음 같은 것

 

금방 살육한 동물의 거친 숨소리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머물 수 없는 사랑이다

 

시집 『노마드 사랑법』(시산맥, 2015) 중에서

 

 


 

 

임승환 시인 / 내가 자정일 때 당신은 정오

 

 

  우리 집은 늘 열두시 십 분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좋지

  내가 점심을 먹을 때 아침을 기억하는 당신이 있어

  이미 살아버린 열두 시간을 다시 살지

 

  칠월의 햇빛보다 하루를 먼저 마감하고

  몸을 침대에 누이는 날

  뻐꾸기는 나무시계 속에서 울고

  나는 정오의 그늘에서 열 발자국을 걷지

  굼실굼실 점심을 준비하는 당신으로 인해

  나도 잠속에서 느리게 마당에 물을 뿌리고 꽃을 피워내지

 

  기록하지 않아도 한 바퀴씩 시작이 늦은 나는

  뜨겁게 살기보다

  나팔꽃처럼 천천히 피는 발자국으로 걷지

  그 발자국을 세고 가는 이는 없지

 

  한여름에 겨울 이불을 널고

  시침을 열두 시간 전으로 옮겨 놓는,

  서서히 당신의 시침에 겹쳐지는 나는 누구일까

 

시집 『노마드 사랑법』(시산맥, 2015) 중에서

 

 


 

임승환 시인

세종대학교  졸업 및 同 대학교 대학원 졸업. 2008년 계간 《문학 ․ 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첨성대』, 『노마드 사랑법』과 가곡집『사랑의 노래』가 있음.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