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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환 시인 / 노마드 사랑법
여름 꽃의 입술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설움이 먼저 스며온다
물방울무늬의 눈물이 있기는 한 건가 그 무늬를 하나하나 떼어 놓다보면 사랑도 단색의 슬픈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동에서 시작하고 너는 서에서 시작하는 그렇게 선을 그어 오다보면 희미한 점 하나에서 만난다 그 점에 마음 눌러 박는 것을 보면 사랑은 이해가 필요 없는 암기과목
때로 사랑한다는 말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모르핀에 생을 의존하는 환자의 우울이나 소리 없는 울음 같은 것
금방 살육한 동물의 거친 숨소리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머물 수 없는 사랑이다
시집 『노마드 사랑법』(시산맥, 2015) 중에서
임승환 시인 / 내가 자정일 때 당신은 정오
우리 집은 늘 열두시 십 분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좋지 내가 점심을 먹을 때 아침을 기억하는 당신이 있어 이미 살아버린 열두 시간을 다시 살지
칠월의 햇빛보다 하루를 먼저 마감하고 몸을 침대에 누이는 날 뻐꾸기는 나무시계 속에서 울고 나는 정오의 그늘에서 열 발자국을 걷지 굼실굼실 점심을 준비하는 당신으로 인해 나도 잠속에서 느리게 마당에 물을 뿌리고 꽃을 피워내지
기록하지 않아도 한 바퀴씩 시작이 늦은 나는 뜨겁게 살기보다 나팔꽃처럼 천천히 피는 발자국으로 걷지 그 발자국을 세고 가는 이는 없지
한여름에 겨울 이불을 널고 시침을 열두 시간 전으로 옮겨 놓는, 서서히 당신의 시침에 겹쳐지는 나는 누구일까
시집 『노마드 사랑법』(시산맥,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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