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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금숙 시인 / 언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4.

나금숙 시인 / 언니

 

 

  언니

  내 두 손 모아 밝은 빛을 가득 받아 올리오니 받으세요

  사백년 만에 만난 우리지요

  왜 그러셨어요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하늘이나 구름이나 나뭇잎을 사랑하셨다면

  돌을 사랑하고 달빛을 아꼈더라면

  애절한 언니 마음 그들은 알아주었겠지요

  흘러넘치는 사랑과 시를

  몰래 구부리고 앉아 쓰는 야윈 어깨가 눈에 선합니다

  당신이 밟은 *문 앞의 돌들이 모래가 되도록

  그이는 오시지 않았지요

  언니가 불러들인

  갈매기와 기러기로 해서

  강은 넓어졌고 하늘은 길어졌어요*

  그 큰 품을 쏟아놓을 대지를 찾느라

  온 몸에 시를 두르고 바다를 건너셨군요

  이 괴이하고 아름다운 주검,

  작은 몸에 깃들인 시혼을 깊은 동해도 삼키지 못했어요

  언니

  옥봉 언니

  다시 오시면 이 땅 이 하늘을 끝없이 펼쳐드릴테니

  그 사모함 그 기상을 마음껏 쏟으세요

  지끔껏 우리도 뚫어내지 못한

  사람이 만든 철벽 앞에

  몇백년 봄바람으로 부는

  언니

  옥봉 언니

 

*옥봉의 시 구절; 옥봉은 조선 중기 16세기 후반의 여류 시인으로, 서녀로서 사랑하게 된 조원의 첩이 됐으나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시를 쓴 죄로 내쳐져서 떠돌아 다니다 죽음.

 

계간 『창작 21』 2018년 봄호 발표

 

 


 

 

나금숙 시인 / 링크

 

 

  고통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우리를 구원한다지

  정든 낙타를 안락사 시키며 울었다

  화해 구역에 날짐승을 밀어보내며

  푸드덕거림에 귀를 막는다

  네 붉은 볏을 찍혀도 가만히 견뎌야 한다.

  그러니 그 장소에 가면 우선

  구름 담요를 덮어야 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라고

  한 죽음이 한 생을 열어줄 때

  꿈은 눈물성의 수문을 여는 방법을 찾아냈다

  글썽이는 탑이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키 큰 꽃나무에서 고순도 코카인 훈풍이 흩어진다

  지구 건너편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해질녘 가을 들판에서 이삭을 줍다가

  부동항을 찾아 함께 떠난다

  nowhere man*

  nowhere land

 

*비틀즈 노래 가사에서 인용

 

계간 『시와 정신』 2018년 봄호 발표

 

 


 

 

나금숙 시인 / 덮어놓은 책

 

 

  메소드라고 부르지 마

  그냥 순간이 나오는 거야

  누가 몰입이라 그래

  상처에 소금을 일부러 뿌리지 마

  네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문장이 안될 때쯤,

  공명정대한 사랑같은 건 없는 거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뚫어줄 주인도 없는데

  나는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메소드라고 부르지 마

  소금물을 끓이는 메콩강 유역에서

  평생을 노를 젓다 가더라도

  그냥 너한테 그렇게 남을 거야

  이게 미친 연기라구?

  아니

  그냥 순간을 사는 거라고 해

  이맛전이 서늘하도록 임박한 그 무엇,

  이별이라는 미립자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죽음 말이야

  긴 그림자와 침묵와 협박은 그렇게 순간 정지하지

  네가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무 빗장을 걸어 잠그지만

  내가 잠든 새 연기처럼 스며들어와 흙바닥이건 어디건

  겉옷을 벗어 깔고 자리를 잡는다

  잠깐 장미를 들어올리는 손이 있다.

  한 손에 무엇을 감췄는지 모르고

  시선이 따라갈 때

  뜨거운 단검이 심장을 겨눈다

 

계간 『시와 정신』 2018년 봄호 발표

 

 


 

나금숙 시인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나무 아래로』(새로운사람들, 2003)과 『레일라 바래다주기』(시산맥사, 2010)와 『레일라 바래다주기』(시산맥사, 2010)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