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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시인 / 무지개회
무지개를 본다 가을 물왕저수지 물 속 무지개 무지개의 눈동자 무지개의 아가미 무지개 비늘
하늘에서 물 속으로 물에서 뭍으로 찬란한 옆줄 튕기며 기어코 미늘에 걸리는 무지개
푸들거리는 무지개 벗겨지고 저며진다 사라진 무지개 뒤 무지개 한 점 입 속에서 뭉개진다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예루살렘귀뚜라미
사막의 예루살렘귀뚜라미 그의 울음 소리를 지구 반대편 깊은 어둠 속에서 듣는다 귀를 나팔관처럼 열어 놓았으나 실은 들리지 않는다 내 귀는 가슴에서 너무 멀리, 그마저 한 개씩 떨어져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 많은 우여곡절의 골짜기 건너 지도에 없는 길 예루살렘과 나 사이 지도리가 없다 사람의 몸 속에 이렇게 메마른 광야가 있다니 해독되지 않는 고문서 같은 밤 두 무릎 사이 얼굴 묻은 채 예루살렘 예루살렘 예루살렘귀뚜라미 그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태곳적부터의 모래울음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실내낚시터의 가죽잉어
검은 물 속에서 굶주린 가죽잉어 한 마리 떡밥을 물고 튀어오른다 등지느러미에 꼬리표가 꽂혀 있으니 소소한 경품 하나쯤 챙기리라
힘겨루기의 승자가 잉어일 리는 없다 방부제와 화학약품 가득 뿌려진 좁은 수조 안에서 용문 협곡의 꿈일랑 꾸어 보지도 못한 가죽잉어 두 가닥 수염의 미뢰가 무슨 소용이랴 허락된 먹이는 줄 끝에 달린 떡밥뿐
이곳의 규칙은 낚고 풀고 또 낚고 훌치기에 온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레기 종량제붕투에 담길 때까지
그래도 명색이 잉어다 비늘 없는 몸뚱이로 물 밖에서나마 크게 용틀임하다 바닥에 저를 패대기치는 가죽잉어
아가미로 붉은 피 흘리는 녀석이 다시 수조에 던져진다 피 냄새에 그의 등지느러미로 몰려드는 허기진 동료들의 주둥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 구분이 안 되는 탁한 어두움 속이다
계간 『문학에스프리』 2017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물도서관
로니 혼*은 아이슬란드에 물도서관을 세웠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스물 네 개 유리기둥에 빙하 녹은 물이 담겨 있다
저 물이 나는 왠지 너인 것만 같다 빙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얼음화석이 된 네가 녹아버린 물
도서관 낭하를 빙하의 속도로 걸어 얼음의 책, 첫 장을 연다
투명한 기둥 안에서 빙하는 조용히 숨쉬고 있다 잠들어 있다, 유일하게 녹지 않은 네 아름다운 눈동자를 건질 수도 있을까
일찍이 나는 ‘지상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자’로 너를 지목한 적 있었지 언젠가 너라는 빙하를 녹여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나의 탄생화는 실레네 스테노필라 삼만 년 만에 피는 꽃이다
아이슬란드 유빙이 되어 거대한 빙벽을 바라보는 느낌 크레바스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내리는 느낌 머리 위에 만년설이 얹히는 이 느낌은 뭘까
얼음살, 얼음피, 얼음심장 네 피는 저렇듯 푸르스름할 것 같다 머리 속에 가득 찬 뜨거운 글자들이 녹아 내린다 네게로 다 건너가지 못한 글자들
빙하의 푸른 숨 속에 뜨거운 블루 라군의 한숨이 섞여 있다 빙하와 화산이 공존하는 아이슬란드 네 속에도 숨쉬고 있었을 휴화산
한 몸뚱이 안의 얼음과 불 감당하지 못한 채 다시 네 앞에 서다니 이목구비 없는 너를 알아채고야 말다니 내 안의 넌 이미 죽었는데 자꾸 잊는다, 그 엄연한 사실을
빙하 속에도 미로가 있다 아이젠 차고 얼음 골목길 더듬어 걷듯 스물 네 개 유리기둥을 돌아 나오는 동안 팔이 다 녹아 내려 도서관 문을 열 수가 없다
*미국의 현대미술가
계간 『시인시대』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공갈젖꼭지
말 배우기 전 입에 문 거짓말
울음도 옹알이도 단번에 막아버리는
젖무덤은 보이지 않고 돌올한 젖꼭지만
살보다 더 살가운 살보다 더 찰진
빨아도 빨아도 배고픈
물고 빨다 지쳐 잠에 떨어지는
공갈의 위안과 공갈의 평화와 공갈의 유예와 공갈의 포만
공갈빵도 공갈너구리도 공갈협박도 있지만
어르고 달래는 데야 주먹보다 가깝고 법보다 확실한 공갈젖꼭지
그러나 곧 솟아날 이 연분홍 잇몸으로도 질근질근 씹어대
결국은 찢어질 거짓 엄마
알고 속고 모르고 속는
월간 『시인동네』 2017년 1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고마리 폐쇄화
마닐라 톤도 쓰레기 마을에서도 별 같은 아이들은 자꾸 태어난다
태어나자 마자 무덤인 탄생이 있다 밤에서 밤으로 피어나는 폐쇄화
녹슨 못에 찔려 피를 흘려도 폐수의 검은 강을 헤엄치는 아이들
살아서도 죽은 듯, 죽어서도 산 듯,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 아닌 꽃이 피고
달리는 트럭 위에 올라타 쇳조각을 빼내, 다시 길 위로 뛰어 내리는 어린 목숨이 있다
날아가지도 터지지도 못하는 멍울, 망울
이틀 동안 모은 페트병을 팔아 빵 한 조각을 쥐는 때 절은 손바닥
땅 속의 박각시나방 애벌레처럼 견디는 캄캄한 날들
어린 가장이 되어 쓰레기산에 파묻혀 오물처럼 살아도 댄서가, 엔지니어가, 트럭운전수가 꿈인 톤도의 벌거벗은 별들이 있다
이것 밖에는 길이 없어, 정말 이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처음으로 화대를 받아 든 어린 창녀이듯 문득, 어둠 속에 홍등을 내거는 다만, 다문꽃
계간 『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자작나무, 골고다
일몰을 일출로 바꾼 자를 아느냐
수직 하나만으로 십자가를 이루는 기이한 기하학을 아느냐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자 언제나 찬 새벽인 자
한 치의 기울기도 허용치 않는 백악기의 등뼈 곁에서 기우뚱한 척추를 꼿꼿이 해본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청중이 없는 노래 시작도 끝도 없는 노래 뼛속으로 스미는 바람의 그레고리오 성가
말을 잃고 시간이 사라지는 하늘내린터, 그 언덕에 서서
눈 감고, 귀 막고 본다, 듣는다 가슴 속의 골고다, 골고다
제 몸의 기름으로 서녘 하늘 태우는 자작
죄는 뼈 아닌 살의 소관이어서 기어코 살점 벗어버린 채 백골의 그가 기다린다
월간 『춤』 2017년 2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늙은 手巾
여전히 당신의 체취가 남아 있습니다
물과 불의 시간 견뎌왔지만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평생 당신을 훔쳐왔습니다 얼굴의 등고선, 손금의 미로, 겨드랑이와 음부, 굽은 새끼발가락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끝내 훔칠 수 없던 심장과 쓸개가 있습니다
싱싱했던 무늬와 색이 무엇이었든 남은 빛은 멍빛
당신의 얼굴에서 발로 발에서 바닥으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
발뒤꿈치 갈라진 늙은 아내처럼 엎드려 여전히 쓰다듬고 어루만집니다
바다의 푸른 기억을 잃어버린 갯솜동물 같은 巾 巾의 手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시집의 운구
느닷없는 소나기 피해 들어간 지하 헌책방 낯 익은 저자의 얇은 시집을 발견한다 첫 장을 펼치니 ‘000선생님께’ 라는 정성스런 저자 서명 000선생님 또한 익히 아는 시인
뒤따라온 소나기에 등줄기 맞은 듯 써늘하다
지방에서 묵묵히 고집스레 시를 써오는 그녀의 단아한 얼굴을 떠올린다 ‘모든 시는 혈서에요’라던 말을 생각한다
단돈 1500원 직행버스비도 안 되는 혈서의 값 불과 102쪽의 한 없이 가볍고 한 없이 무거운 혈서의 무게
서둘러 가방 속에 넣고 기운 어깨로 뺨 때리는 소나기 속을 휘청휘청 간다 빗속의 운구이듯
계간 『다층』 2016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염낭거미
파 먹히는 중이다 건들지 마라 죽음의 제의다 내 배로 낳은 새끼들의 고요한 식사시간 엿보지 마라 은밀한 식사다 서서히 진행되는 충만한 죽음 나를 가두기 위해 그물을 짰다, 나는 투명한 피와 한 없는 기다림의 힘줄로 나에 대한 살의로 나는 언제나 신선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어미를 물어뜯을 강인한 턱과 이빨 독을 먹고 독을 낳는 가계 드디어 때가 왔다 내 죽음엔 소리가 없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하루
벗는다 집에 돌아와 벗는다 옷걸이 위 늘어진 블라우스 속 형상 기억 브래지어 속 늘어진 젖가슴 탄력 잃은 고탄력 살색 스타킹 속 부은 두 다리 벗는다 하루 하루치의 길 하루치의 가축 벗겨지지 않는 가면 위 찢어진 웃음 웃음 속 울음 견고한 피부였던 벽 벽인 문 소리 없는 비명 습관처럼 내일의 죽음에 한쪽 팔을 꿰고 나,는,벗,는,다 오늘 하루의 죽음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붉은 메아리
그녀는 어디로 갔나? 노래는 어디로 사라졌나? 만월의 밤, 그녀의 모닥불은 어디서 타고 있나?
내 잃어버린 뼈는 어디에 묻혀 있나? 그녀의 입 속에 있나?
삼나무 고갱이 소리는 어느 숲을 울리고 있나? 죽은 이들의 머리칼로 묶은 빗자루는 어디를 쓸고 있나? 강 밑의 강을 헤엄치는 자는 누구인가?
늑대의 불과 젖은 누구를 먹이고 있나? 어느 뼈가 살 오르고 있나?
제왕나비를 머리에 꽂은 소녀는 어디에? 제왕의 갈기는 어디에?
붉은 메아리는 누가 먹어버렸나?
우리의 푸른 눈알은 어느 밤이? 동굴의 체취는 어느 바람이?
내가 찾아 헤매는 흰 늑대는 늑대가 찾아 헤매는 나는 어디에 있나?
어디에?
계간 『시담』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태양나침반
떨고 있느냐, 가리킬 곳 가리키면서, 온몸으로 정직하면서 떨고 있느냐
지평선 위 지구자장은 예측할 수 없는 파장을 일으킨다
까마귀좌 아래의 낯선 어둠, 극지의 막막함
천 번이어도, 만 번이어도 초행인 이 길
몸 속에 방위를 지닌 채 태어난 실피움 나침반풀, 픽시스 나침반은하, 태양새
잊지 말자 나 또한 태양의 딸
새장 속에서도 철새의 이동방향으로 쉼 없이 날개치는 작은 찌르레기처럼
꿋꿋한 향일성의 붉은 떨림, 그 진동에 내 심장 박동 맞추었으니
떨고 있는 한 너와 나의 방위는 태양일뿐이리니
계간 『시담』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여울고양이
날 길들일 생각은 말아요 쓰다듬으려 하지도 말아요 재미 삼아 공중으로 던지면 검은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을 기대란 아예 말아요
물 속의 집
가르릉을 버리니 아가미가 생기더군요 담을 넘지 않으니 부레가 부풀어요 긴 꼬리 감추니 어이없는 지느러미가 돋았죠
발톱마저 버렸지만 눈동자, 당신 담았던 눈동자만은 그럴 수 없어 여전히 눈 속에 달을 품은
나는 고양이물고기 물고기고양이
자갈여울 속 썩어가는 강처럼 사라져가요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기침
느닷없이 기침이 터져 나온다
다 어디로 간 걸까 밥보다, 약보다 더 많이 삼킨 말들 바싹 마른 입으로 씹지도, 뱉지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우물우물 내 검은 우물 속으로 밀어 넣은 말들 다 어디로 간 걸까 엑스레이로도 잡히지 않는 체증의 말들
잠긴 화장실 앞에서 변의를 참느라 쩔쩔매는 꿈들이 이어지는 밤
때때로 삭지 않은 여물처럼 명치를 치받고 올라와 울컥! 네 얼굴 위로 쏟아지려 하다 다시 꿀꺽 삼켜버리는 역류의 말들 쓸개즙에 버무려진 되새김질의 말들
때로 느슨해진 괄약근을 녹슨 문처럼 열고 발작적인 기침으로 쏟아지는 말, 말의 수족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서른 아홉 번째 가을에게
가을에 거울을 본다 기슭에 나를 대어본다 올려 놓는다 되돌아 오는 나를 되돌아 보는 거울 속에서 지워낸다 이제 곧 돌아 설 가을이 함께 있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비익조(比翼鳥)
비 내린다 너나 없이 외발인 비의 종아리들
어느 물 밑을 헤매 다녔기에 비린내 가시질 않는다
너를 보낸다, 보내려 한다
제 가슴털 뽑아 알 품는 비오리처럼 품었던 너를 보낸다, 보내려 한다
눈 먼 여자와 귀 먼 남자의 만남이 아니어서 너와 나의 조차는 늘 백중사리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너는 물었지
섬, 섬처럼 붙박인 채 묵묵부답인 것 내가 썰물일 때 너는 밀물인 것 내가 밀물일 때 너는 썰물인 것
기우뚱거리며 삐걱거리며 먹구름 속으로 가는 반 마리 새
비 내린다 외눈동자, 외다리, 외날개인 채 엄지발가락이 없어 갈 곳 모르는 비익조
내 안에서, 밖에서 푸드덕거린다
계간 『다층』 2016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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