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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무지개회 외 16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4.

강기원 시인 / 무지개회

 

 

  무지개를 본다

  가을 물왕저수지

  물 속 무지개

  무지개의 눈동자

  무지개의 아가미

  무지개 비늘

 

  하늘에서 물 속으로

  물에서 뭍으로

  찬란한 옆줄 튕기며

  기어코

  미늘에 걸리는 무지개

 

  푸들거리는 무지개

  벗겨지고 저며진다

  사라진 무지개 뒤

  무지개 한 점

  입 속에서 뭉개진다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예루살렘귀뚜라미

 

 

  사막의 예루살렘귀뚜라미

  그의 울음 소리를 지구 반대편 깊은 어둠 속에서

  듣는다

  귀를 나팔관처럼 열어 놓았으나 실은

  들리지 않는다

  내 귀는 가슴에서 너무 멀리, 그마저 한 개씩 떨어져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 많은 우여곡절의 골짜기 건너

  지도에 없는 길

  예루살렘과 나 사이

  지도리가 없다

  사람의 몸 속에 이렇게 메마른 광야가 있다니

  해독되지 않는 고문서 같은 밤

  두 무릎 사이 얼굴 묻은 채

  예루살렘 예루살렘 예루살렘귀뚜라미

  그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태곳적부터의 모래울음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계간 『시와 경계』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실내낚시터의 가죽잉어

 

 

  검은 물 속에서

  굶주린 가죽잉어 한 마리

  떡밥을 물고 튀어오른다

  등지느러미에 꼬리표가 꽂혀 있으니

  소소한 경품 하나쯤 챙기리라

 

  힘겨루기의 승자가 잉어일 리는 없다

  방부제와 화학약품 가득 뿌려진 좁은 수조 안에서

  용문 협곡의 꿈일랑 꾸어 보지도 못한 가죽잉어

  두 가닥 수염의 미뢰가 무슨 소용이랴

  허락된 먹이는 줄 끝에 달린 떡밥뿐

 

  이곳의 규칙은

  낚고 풀고 또 낚고

  훌치기에 온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레기 종량제붕투에 담길 때까지

 

  그래도 명색이 잉어다

  비늘 없는 몸뚱이로

  물 밖에서나마 크게 용틀임하다

  바닥에 저를 패대기치는 가죽잉어

 

  아가미로 붉은 피 흘리는 녀석이

  다시 수조에 던져진다

  피 냄새에 그의 등지느러미로 몰려드는

  허기진 동료들의 주둥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

  구분이 안 되는

  탁한 어두움 속이다

 

계간 『문학에스프리』 2017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물도서관

 

 

  로니 혼*은 아이슬란드에 물도서관을 세웠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스물 네 개 유리기둥에

  빙하 녹은 물이 담겨 있다

 

  저 물이 나는 왠지 너인 것만 같다

  빙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얼음화석이 된 네가 녹아버린 물

 

  도서관 낭하를 빙하의 속도로 걸어

  얼음의 책, 첫 장을 연다

 

  투명한 기둥 안에서 빙하는 조용히 숨쉬고 있다

  잠들어 있다, 유일하게 녹지 않은

  네 아름다운 눈동자를 건질 수도 있을까

 

  일찍이 나는 ‘지상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자’로

  너를 지목한 적 있었지

  언젠가 너라는 빙하를 녹여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나의 탄생화는 실레네 스테노필라

  삼만 년 만에 피는 꽃이다

 

  아이슬란드 유빙이 되어 거대한 빙벽을 바라보는 느낌

  크레바스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내리는 느낌

  머리 위에 만년설이 얹히는 이 느낌은 뭘까

 

  얼음살, 얼음피, 얼음심장

  네 피는 저렇듯 푸르스름할 것 같다

  머리 속에 가득 찬 뜨거운 글자들이 녹아 내린다

  네게로 다 건너가지 못한 글자들

 

  빙하의 푸른 숨 속에

  뜨거운 블루 라군의 한숨이 섞여 있다

  빙하와 화산이 공존하는 아이슬란드

  네 속에도 숨쉬고 있었을 휴화산

 

  한 몸뚱이 안의 얼음과 불 감당하지 못한 채

  다시 네 앞에 서다니

  이목구비 없는 너를 알아채고야 말다니

  내 안의 넌 이미 죽었는데 자꾸 잊는다, 그 엄연한 사실을

 

  빙하 속에도 미로가 있다

  아이젠 차고 얼음 골목길 더듬어 걷듯

  스물 네 개 유리기둥을 돌아 나오는 동안

  팔이 다 녹아 내려 도서관 문을 열 수가 없다

 

*미국의 현대미술가

 

계간 『시인시대』 2017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공갈젖꼭지

 

 

  말 배우기 전 입에 문

  거짓말

 

  울음도

  옹알이도 단번에 막아버리는

 

  젖무덤은 보이지 않고

  돌올한 젖꼭지만

 

  살보다 더 살가운

  살보다 더 찰진

 

  빨아도 빨아도

  배고픈

 

  물고 빨다

  지쳐 잠에 떨어지는

 

  공갈의 위안과

  공갈의 평화와

  공갈의 유예와

  공갈의 포만

 

  공갈빵도

  공갈너구리도

  공갈협박도 있지만

 

  어르고 달래는 데야

  주먹보다 가깝고

  법보다 확실한

  공갈젖꼭지

 

  그러나

  곧 솟아날 이

  연분홍 잇몸으로도

  질근질근 씹어대

 

  결국은 찢어질

  거짓 엄마

 

  알고 속고

  모르고 속는

 

월간 『시인동네』 2017년 1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고마리 폐쇄화

 

 

  마닐라 톤도 쓰레기 마을에서도 별 같은 아이들은 자꾸 태어난다

 

          태어나자 마자 무덤인 탄생이 있다

          밤에서 밤으로 피어나는 폐쇄화

 

  녹슨 못에 찔려 피를 흘려도 폐수의 검은 강을 헤엄치는 아이들

 

          살아서도 죽은 듯, 죽어서도 산 듯,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 아닌 꽃이 피고

 

  달리는 트럭 위에 올라타 쇳조각을 빼내, 다시 길 위로 뛰어 내리는 어린 목숨이 있다

 

           날아가지도 터지지도 못하는 멍울, 망울

 

  이틀 동안 모은 페트병을 팔아 빵 한 조각을 쥐는 때 절은 손바닥

 

          땅 속의 박각시나방 애벌레처럼 견디는 캄캄한 날들

 

  어린 가장이 되어 쓰레기산에 파묻혀 오물처럼 살아도

  댄서가, 엔지니어가, 트럭운전수가 꿈인 톤도의 벌거벗은 별들이 있다

 

          이것 밖에는 길이 없어, 정말 이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처음으로 화대를 받아 든 어린 창녀이듯 문득,

          어둠 속에 홍등을 내거는 다만, 다문꽃

 

계간 『문예바다』 2016년 여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자작나무, 골고다

 

 

  일몰을 일출로 바꾼 자를 아느냐

 

  수직 하나만으로 십자가를 이루는

  기이한 기하학을 아느냐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자

  언제나 찬 새벽인 자

 

  한 치의 기울기도 허용치 않는

  백악기의 등뼈 곁에서

  기우뚱한 척추를 꼿꼿이 해본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청중이 없는 노래

  시작도 끝도 없는 노래

  뼛속으로 스미는

  바람의 그레고리오 성가

 

  말을 잃고 시간이 사라지는 하늘내린터, 그 언덕에 서서

 

  눈 감고, 귀 막고

  본다, 듣는다

  가슴 속의 골고다, 골고다

 

  제 몸의 기름으로

  서녘 하늘 태우는 자작

 

  죄는 뼈 아닌 살의 소관이어서 기어코

  살점 벗어버린 채

  백골의 그가 기다린다

 

월간 『춤』 2017년 2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늙은 手巾

 

 

  여전히 당신의 체취가 남아 있습니다

 

  물과 불의 시간 견뎌왔지만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평생 당신을 훔쳐왔습니다

  얼굴의 등고선, 손금의 미로, 겨드랑이와 음부, 굽은 새끼발가락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끝내 훔칠 수 없던 심장과 쓸개가 있습니다

 

  싱싱했던 무늬와 색이 무엇이었든

  남은 빛은 멍빛

 

  당신의 얼굴에서 발로

  발에서 바닥으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

 

  발뒤꿈치 갈라진 늙은 아내처럼 엎드려

  여전히 쓰다듬고 어루만집니다

 

  바다의 푸른 기억을 잃어버린 갯솜동물 같은 巾

  巾의 手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시집의 운구

 

 

  느닷없는 소나기 피해 들어간

  지하 헌책방

  낯 익은 저자의 얇은 시집을 발견한다

  첫 장을 펼치니

  ‘000선생님께’ 라는 정성스런 저자 서명

  000선생님 또한 익히 아는 시인

 

  뒤따라온 소나기에 등줄기 맞은 듯 써늘하다

 

  지방에서 묵묵히

  고집스레 시를 써오는

  그녀의 단아한 얼굴을 떠올린다

  ‘모든 시는 혈서에요’라던 말을

  생각한다

 

  단돈 1500원

  직행버스비도 안 되는

  혈서의 값

  불과 102쪽의

  한 없이 가볍고 한 없이 무거운

  혈서의 무게

 

  서둘러 가방 속에 넣고

  기운 어깨로

  뺨 때리는 소나기 속을

  휘청휘청 간다

  빗속의 운구이듯

 

계간 『다층』 2016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염낭거미

 

 

  파 먹히는 중이다

  건들지 마라

  죽음의 제의다

  내 배로 낳은 새끼들의

  고요한 식사시간

  엿보지 마라

  은밀한 식사다

  서서히 진행되는 충만한

  죽음

  나를 가두기 위해

  그물을 짰다, 나는

  투명한 피와

  한 없는 기다림의 힘줄로  

  나에 대한 살의로

  나는 언제나 신선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어미를 물어뜯을

  강인한 턱과 이빨

  독을 먹고

  독을 낳는

  가계

  드디어 때가 왔다

  내 죽음엔

  소리가 없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하루

 

 

  벗는다

  집에 돌아와

  벗는다

  옷걸이 위

  늘어진

  블라우스

  속

  형상 기억

  브래지어

  속

  늘어진

  젖가슴

  탄력 잃은

  고탄력

  살색

  스타킹

  속

  부은

  두 다리

  벗는다

  하루

  하루치의 길

  하루치의 가축

  벗겨지지 않는 가면

  위

  찢어진 웃음

  웃음 속 울음

  견고한 피부였던

  벽

  벽인 문

  소리 없는 비명

  습관처럼 내일의 죽음에

  한쪽 팔을 꿰고

  나,는,벗,는,다

  오늘 하루의

  죽음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붉은 메아리

 

 

    그녀는 어디로 갔나?

    노래는 어디로 사라졌나?

    만월의 밤, 그녀의 모닥불은 어디서 타고 있나?

 

    내 잃어버린 뼈는 어디에 묻혀 있나?

    그녀의 입 속에 있나?

 

    삼나무 고갱이 소리는 어느 숲을 울리고 있나?

    죽은 이들의 머리칼로 묶은 빗자루는 어디를 쓸고 있나?

    강 밑의 강을 헤엄치는 자는 누구인가?

 

    늑대의 불과 젖은 누구를 먹이고 있나?

    어느 뼈가 살 오르고 있나?

 

    제왕나비를 머리에 꽂은 소녀는 어디에?

    제왕의 갈기는 어디에?

 

    붉은 메아리는 누가 먹어버렸나?

 

    우리의 푸른 눈알은 어느 밤이?

    동굴의 체취는 어느 바람이?

 

    내가 찾아 헤매는 흰 늑대는

    늑대가 찾아 헤매는 나는 어디에 있나?

 

    어디에?

 

계간 『시담』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태양나침반

 

 

  떨고 있느냐, 가리킬 곳 가리키면서, 온몸으로 정직하면서 떨고 있느냐

 

  지평선 위 지구자장은 예측할 수 없는 파장을 일으킨다

 

  까마귀좌 아래의 낯선 어둠, 극지의 막막함

 

  천 번이어도, 만 번이어도 초행인 이 길

 

   몸 속에 방위를 지닌 채 태어난 실피움 나침반풀, 픽시스 나침반은하, 태양새

 

  잊지 말자 나 또한 태양의 딸

 

  새장 속에서도 철새의 이동방향으로 쉼 없이 날개치는 작은 찌르레기처럼

 

  꿋꿋한 향일성의 붉은 떨림, 그 진동에 내 심장 박동 맞추었으니

 

  떨고 있는 한 너와 나의 방위는 태양일뿐이리니

 

계간 『시담』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여울고양이

 

 

  날 길들일 생각은 말아요

  쓰다듬으려 하지도 말아요

  재미 삼아 공중으로 던지면

  검은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을 기대란

  아예 말아요

 

  물 속의 집

 

  가르릉을 버리니

  아가미가 생기더군요

  담을 넘지 않으니

  부레가 부풀어요

  긴 꼬리 감추니

  어이없는 지느러미가 돋았죠

 

  발톱마저 버렸지만

  눈동자, 당신 담았던 눈동자만은

  그럴 수 없어

  여전히 눈 속에 달을 품은

 

  나는

  고양이물고기

  물고기고양이

 

  자갈여울 속

  썩어가는 강처럼

  사라져가요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기침

 

 

  느닷없이 기침이 터져 나온다

 

  다 어디로 간 걸까

  밥보다, 약보다

  더 많이 삼킨 말들

  바싹 마른 입으로

  씹지도, 뱉지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우물우물

  내 검은 우물 속으로

  밀어 넣은 말들

  다 어디로 간 걸까

  엑스레이로도

  잡히지 않는

  체증의 말들

 

  잠긴 화장실 앞에서

  변의를 참느라 쩔쩔매는

  꿈들이 이어지는 밤

 

  때때로

  삭지 않은 여물처럼

  명치를 치받고 올라와

  울컥!

  네 얼굴 위로

  쏟아지려 하다

  다시

  꿀꺽

  삼켜버리는

  역류의 말들

  쓸개즙에 버무려진

  되새김질의 말들

 

  때로 느슨해진 괄약근을

  녹슨 문처럼 열고

  발작적인 기침으로 쏟아지는

  말, 말의 수족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서른 아홉 번째 가을에게

 

 

  가을에

  거울을

  본다

  기슭에

  나를

  대어본다

  올려 놓는다

  되돌아 오는

  나를

  되돌아 보는

  거울 속에서

  지워낸다

  이제

  곧

  돌아 설

  가을이

  함께

  있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비익조(比翼鳥)

 

 

  비 내린다

  너나 없이 외발인 비의 종아리들

 

  어느 물 밑을 헤매 다녔기에

  비린내 가시질 않는다

 

  너를 보낸다, 보내려 한다

 

  제 가슴털 뽑아 알 품는 비오리처럼 품었던 너를

  보낸다, 보내려 한다

 

  눈 먼 여자와 귀 먼 남자의 만남이 아니어서

  너와 나의 조차는 늘 백중사리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너는 물었지

 

  섬, 섬처럼 붙박인 채 묵묵부답인 것

  내가 썰물일 때 너는 밀물인 것

  내가 밀물일 때 너는 썰물인 것

 

  기우뚱거리며 삐걱거리며 먹구름 속으로 가는

  반 마리 새

 

  비 내린다

  외눈동자, 외다리, 외날개인 채

  엄지발가락이 없어 갈 곳 모르는

  비익조

 

  내 안에서, 밖에서 푸드덕거린다

 

계간 『다층』 2016년 겨울호 발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 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 2006),『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 『지중해의 피』(민음사, 2015)가 있음.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