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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린 시인 / 냇물
내가 쉬지 않고 그대를 향해 흐르는 것은 검푸른 이끼가 바위를 앞세워 발목을 붙들지 않으려 함이니 흐린 날이든 바람이 요란하거나 산천지 온몸을 적신 날도 내 안의 하늘을 흘리지 않고 마음 넓혀 가는 바다 되려 함이니 살점을 뜯어 먹히고서야 비로서 돋아나는 물새의 날개와 어느 지친 여름날 야트막한 물가를 만나 다슬기의 푸른 점액으로 번진 싱싱한 웃음이 그대 가슴에 남게 되는 일이니
내가 쉬지 않고 그대를 향해 흐르는 것은 마음 열 수 있는 데까지 열어 가는 유일한 살결을 닮은 물이니 한 장 한 장 무거운 옷 다 벗고 환하게 드러난 맨 살의 영혼을 가지려 함이니 씻기고 덜어내도 모자라는 허울들 그대에게 다 들켜버려 더는 흐를 수 없는 일 있을까 남은 흔적도 함께 흘러가는 물이 되려 함이니 오래 오래 그대 내 발치 끝을 부여잡은 아침마다 물빛 넘치는 그대 눈을 씻어 더 고운 물빛 되돌려 주려 함이니
시집 『달팽이집』(오감도, 2014) 중에서
전서린 시인 / 행(行)
휘어진 옷걸이가 행을 이룬 가게
1행은 등을 밀고 밀어 제자리를 끼워 맞춘 불편한 외투 2행은 더위를 기억해라 반팔 티가 걸리고 3행은 채운 속 일수록 안은 실하다 단추를 잠근 바지들 4행은 시선을 받지 못해 보푸라기 일어서는 티셔츠 5행은 밤그늘을 속살로 밝혀 줄 어깨 끈만 매달린 속옷 늙은개를 데리고 오는 여자 단골은 속옷을 리폼하는 게 취미 잠을 견뎌 실핏줄이 드러난 눈으로 가게로 들어선다 가쁜 숨을 내뱉는 개는 주인을 따라 몇 개의 언덕을 넘어온 걸까 햇살을 보면 눈 뜬 잠이 들킬까 봐, 문 밖을 나서면 얼굴을 가린다는데 손님들은 한번도 그녀의 말을 귀 담아 두지 않았다 다만 머리 가까이 원을 몇 개 그려줄 뿐
6행이 비어있는 가게 한켠에는 단골이었던 그녀와 늙은개가 장맛비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더듬더듬 걸려있다 가끔씩 알 수 없는 흔적들이 5행을 툭 치고 지나가는지 구석은 먼지를 부둥킨 옷들이 해를 피해 웅크린다 행간 사이 먼지가 빠르게 흘러내리는 가게 행을 다 비우고 새로운 거래처를 물색하라는 손님이 부표로 다녀간 적 있다 절박하지 않은 마음의 열은 거래처가 달라져도 끼워맞춘 듯 어색한 계절이 모로 기울어진다 돌아오지 말아야 할 행(行)에게 가장 뒤로 앉은 7행이 털린 저녁 빈 옷걸이 하나 에누리 없는 여백으로 섞인 마수가 지워진 하루의 문을 닫는다
시집 『달팽이집』(오감도, 201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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