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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찬 시인 / 군중 속의 방백(傍白), 또는 황야에 내던져진 언어들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4.

군중 속의 방백(傍白), 또는 황야에 내던져진 언어들

김영찬(시인 ·웹진 『시인광장』 주간)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 모노로그(monologue)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시인은 군중 속에 초라하게 박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군중은 그에게 전혀 무관심, 아무 말도 걸지 않으나 예민한 시인의 자의식은 날카롭고도 영민하게 반응한다. 저들은 왜 저토록 나에게 배타적 타인(他人)들인가?

 

그리하여 시인이 갈 곳은 군중이 떠나고 없는 텅 빈 책상 앞이다. 그는 책상이 커다란 위문공연장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초고를 쓴다. 그런데 정작 자신과의 독백 대신 어느새 그의 언설(言說)은 무심한 다중을 향하고 있다. 군중을 의식하여 내뱉는 중얼거림, 그것은 혼자만의 헛소리이자 관객이라는 독자를 향한 방백(傍白)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시는 타인이 경청해 주기를 은연중에 바라며 내던지는 혼잣말일 뿐. 그러므로 시인의 헛소리 방백은, 불안을 끌어안은 현대인의 자기고백 방식인 셈이다.

 

그것은 self control, 자신을 위한 위무(慰撫)이겠으나 오히려 타인을 의식 타인과의 타협을 염원하는 주술적인 방백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제 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을 받게 된 두 명의 신인들 역시 남다른 방백에 능한 사람들이다. 세공된 서사력(敍事力), 방백 솜씨가 단연 돋보여서 미쁘다. 이들 두 신인들은 홀로 골방에 갇혀서 독백으로 중얼거리는 자폐적 시인이 아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대신 동시대를 함께 사는 그들의 이웃, 우리들과 소통하기 위해 시를 쓰는 신인들이다. 이들의 육성은 젊고 기름지며 윤기가 흐른다.

 

* *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이만영· 이미영의 응모작을 만나게 된 것은 웹진 시인광장에 하나의 행운, 세렌디피티(serendipity) 이자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만영의 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어휘력이 단연 압권이다.

 

-소파와 식빵과 쇼팽

-이층 버스

-망가진 우산이 바닥에 누워서 날 보고 있네

-사과의 감정

-블루라이이트

-프리즘

 

다섯 편의 응모작들. 예의 시 제목만 봐도 이만영의 무대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부박하지 않고 야단스럽지 않으나 윤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손과 입과 귀는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또 다시 안녕을 연습한다//

너는 앉아서 앞을 보고/ 나는 서서 앞을 본다/ 서로 다른 앞이 탄생한다

-당선작 <이층버스> 중에서

 

사과를 움켜쥐면

넌 더 붉어지고 싶었지

---

악몽을 해석하려는 쓸모없는 태도를 버리고

---

망가졌다고 가정을 할까 구겨졌다고 상상을 할까

날씨를 우산살처럼 팽팽하게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흠뻑 젖은 풍경은 자꾸 넘쳐나고

기억은 마지막까지 알고 있던 반대방향으로 뛰어간다

 

악천후에도 어김없이 도착하는 버스

사과는 더 붉게 타오르는데

 

-당선작 <망가진 우산이 바닥에 누워서 날 보고 있네> 중에서

 

위 두 편의 시는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적당한 자기고백과 정제된 낭만, 거기에 리얼리즘을 연결하려는 가벼운 노력까지 엿보인다.

 “나는 쇄빙선을 몰고 남극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거실에서 침실까지 나는,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프리즘> 중에서

 

이렇게 자의식이 강한 신인 당선자 이만영, 그는 당선소감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에 대한 변변한 변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끝내 스러지는 나를 상상하는 일이란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나를 위해” 시를 쓰려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이만영은 어느 날의 황야에 내던져도 살아남을 초의미의 언어(로만 야콥슨)로 시를 쓰게 되리라.

 

* * *

 

당선소감을, 습작시를 퇴고하듯 세련되게 써 보낸 이미영의 소회는 남다르다.

 

<울다 울다가 묻어나오는 코피에는, 끝내 이름 하나 얻지 못할까봐 졸이고,

졸아든 붉은 마음이 끌려나오는 게지.

비가 오는구나, 12월의 겨울비가.

물에 쓰는 꿈.

그래, 꾸던 꿈을 나는, 마저 꾸어야겠다.

 

여느 날과 다르게 밥과 국을 따로 뜨고, 튀긴 돈가스에 토마토를 곁들여 먹었습니다. 그동안 시를 쓰는 일은 늘 서서 먹는 밥이었습니다. 이제 가끔은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미영의 당선소감 중에서

 

시인이란 무릇 소외감을 진하게 느끼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어느 날의 삶에서 짓궂은 무상함(vanitas vanitatum)이 가슴을 치고 억누를 때 그것을 억제하고 조절하는 방책으로써 시를 쓰기도 한다.

 

뿔에 피 맺힌 소가 오줌을 뿌리고

서둘러 금줄을 친다  

 

투우장의 모래판,

서로의 멱살을 파고드는 피와 땀의 파문 사이

벌어졌다 조여드는 입 주위로 흙물이 떨어진다  

 

급소를 향한 창살이 어둠의 목덜미를 겨눌 때

아가미 달린 침대에서 아이가 담요를 빨고 있다

고장 난 아가미로 숨을 헐떡이고

한 주먹의 알약으로 하루치의 목숨을 사지만  

 

종양이 머릿속에서 진주알처럼 자라면

아이의 등뼈는 뿔이 되어 사방을 들이받는다

 

-<퀘렌시아를 시청하다> 중 부분

 

삶의 현장이란 창과 칼에 몰린 투우장의 소처럼 도피처 없는 투쟁의 현장임에 다름없다. 투우가 투우사에게 투항하는 대신 다급히 도피처를 구하는 형식, 이른 바 현실이라는 투우장에서 습작시의 이면에 숨고 싶은 시인의 심경이란 (숨 막히는 상황에) 퀘렌시아를 찾는 길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

간지러운 뺨을 긁던 손끝에서

거미줄이 너풀-

형체는 사라지고 감각 없는 무게로

내 얼굴 위에서 집 한 채가 사라졌다

건너편 길가에 앉은 아이의 입속으로

솜사탕 한 줄이 들어갔다

---

짜다만 다섯 자 문갑, 울거미가 비뚤어졌다

---

앙상한 울거미에 뭔가가 매달렸다 사라진다

아까, 그, 거미인가, 거미처럼

내게도

틀이 없다

 

-<울거미>의 부분

 

‘울거미’란 가구나 문짝처럼 틀을 짜서 만든 물건의 가장자리를 이루는 뼈대, 라는 주석을 달아놓은 이 시는 마권에 투기했다가 허탕 친 도편수의 이야기이다.

 

대  목장 김 씨는 옹이진 나무토막을 대팻날로 긁어내고 울거미나 짜는 목수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래서 마권을 샀던 모양. 하지만 행운이란 자신이 그것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 거미집을 친 거미가 빈 거미집을 들여다보는 공허처럼 허전하다는 것이다.

 

목수의 ‘울거미’와 거미의 ‘거미집’, 서로 다른 반의어(antonym)도 서로 비슷한 유사어(synonym)도 아닌 두 단어의 포네틱(phonetic) 관계를 절묘하게 얽어낸 이 시는 우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시이다.

 

연민으로써 리얼리즘을 품되 화자 자신이 감상에 빠지거나 심각해질 이유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미영의 자세는 적당한 절제로 지나치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 있다. 시의 행간에서 춥다고 외롭다고 화자인 시인 자신이 우울해지는 우(愚)를 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영의 리얼리즘은 러시아형식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지금은 서정적 서사에 머물러 있으나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은 어느 날 리얼리즘의 한계라는 장애를 넘어서 황야에 내던져질 황폐한 언어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여성 화자 특유의 일상이 고스란히 육화된 시 <응고의 의미>라든지 <섬망(譫妄)>에서 뛰어난 역량을 읽을 수 있어 반가웠음을 선정 이유로 밝힌다.

 

두 신인들과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게 되어 무엇보다도 기쁘다. 대성을 빈다. (끝)

 

김영찬(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