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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희구 시인 / 소주 한 병이 공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3.

임희구 시인 / 소주 한 병이 공짜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 전당, 2011) 중에서

 

 


 

 

임희구 시인 / 1964

 

 

그 해 겨울은 암담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쳤다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쌩쌩한 바람들이

날마다 귓전을 울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패질을 하면서

다시는 건너오지 못 할 먼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암세포처럼

독한 약풀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싹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야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이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나를 지우고 지우며 품었다

그 혹독한 겨울이 물러가고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고 저물어 아픈 것들이 아득아득해지면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 전당, 2011) 중에서

 

 


 

임희구 시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방송대 국문과 졸업. 《생각과 느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걸레와 찬밥』(시평사, 2004)와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 전당, 2011) 등이 있음. 2003년 제1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