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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경 시인 / 칸트의 우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비가 내려요 칸트는 우산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었죠 한 번도 비의 시간을 쓴 적이 없었으니까요 햇빛이 늙어가는 시간에 산책을 하면 달이 피어나는 시간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우산을 건네 주었죠 하지만 산정의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우산을 편 적이 없었어요
칸트의 시간 속에는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죠 길에 버려진 상자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 안의 시간과 밖의 시간 사이에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칸트는 종소리를 듣지 못했죠 비는 과거의 발자국만 밟고 다니니까요
칸트는 언제쯤 우산을 펼 수 있을까요
시집 『칸트의 우산』(현대시학, 2015) 중에서
고미경 시인 / 가지꽃
그 때, 나는 아프리카의 주술을 배웠어요 더 이상 학교를 갈 수 없었어요 태양이 관절을 삐거덕거리고 추잡한 욕설을 뱉는 거리를 지나서 나는 가지밭으로 갔어요 바지를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아프리카의 주술을 암송하며, 쑥덕거리는 모든 수식어들의 모가지를 치며 가지밭으로 갔어요 욕설을 뭉개버리기 위해 검은 아프리카를 꿈꿨어요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밭둑에서 혀를 빼고 지켜보는 동네 개들을 돌멩이로 쫓아 버리면 실어증 걸린 가지꽃에선 포르말린 냄새가 파랗게 피어났어요
시집 『칸트의 우산』(현대시학,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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