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운진 시인 /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타로 카드 한 장을 뒤집었을 때 무표정한 점술사는 내게 슬픔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와 같다고 영원히 나의 바위를 향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계절이 동쪽에서 왔다가 서쪽으로 가고 새들이 남쪽과 북쪽으로 집을 옮겨 다녀도 바위는 나의 운명보다 강할 거라고,
그때 나는 별조차 아무런 이유 없이 떨어지는 곳 내가 불시착한 이생에서 슬픔의 대문자로 이름을 썼다
슬픔은 마음에서만큼이나 가슴에서 몸에서 만큼이나 삶에서 나를 베는 연장이 되어
구르는 바위와 나 사이 무엇을 세워도 슬픔을 이기는 튼튼한 벽이 되지 않았다
웃고 그리워하고 싶은 보잘 것 없는 저녁과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던 하루를 내게서 영원히 가져간 건 누구인지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바위에게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게 하는 건 무엇인지
눈물 하나하나가 바위처럼 굴러 떨어지는 밤
신의 유머 같은 내 운명의 타로 카드에 나는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몇 번이고 덧칠을 했다
시집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이운진 시인 / 모과 두 알
겨울을 위해 책장 위에 올려 둔 모과 두 알이 썩고 있다 하나는 살이 부풀어 오르며 진물이 흐르고 하나는 속을 말리며 쪼그라든다
하나는 우는 여자 같고 하나는 참는 여자 같다
짐짓 모른 척 해주려고 모과를 책장의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놓고 어둠의 요람에서 자랐을 것들을 생각한다
씨앗과 달큼한 과즙, 풀과 별들의 냄새 같은 것이 다시 모과의 시간 바깥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바람도 매일의 상처였던 날들을 잊고 있을까
그 사이 우는 여자는 어제보다 더 무너져 울고 있고 참는 여자는 어제보다 더 가벼워져 있다
하나는 슬프게 행복을 애원하는 것 같고 하나는 슬픈 눈으로 행복을 말하는 것 같아서
모과 곁에서 모과를 조금 떼어놓는다
눈물보다 어리석은 여자가 내겐 더 옳았으므로 정말 잊어진 것은 끝내 잊어져야 하므로
나는 참고 있는 모과 쪽으로 자꾸 햇살을 모아준다
시집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상권 시인 / 시인론 외 1편 (0) | 2019.06.23 |
|---|---|
| 고미경 시인 / 칸트의 우산 외 1편 (0) | 2019.06.23 |
| 정숙자 시인 / 캐릭터 대 캐릭터 (0) | 2019.06.23 |
| 장유정 시인 / 떠도는 지붕 (0) | 2019.06.23 |
| 서형국 시인 / 틈 (0) | 2019.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