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도이 시인 / 자라나는 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1.

김도이 시인 / 자라나는 벽

 

 

벽은 틈새를 키우고 있다

 

나는 대못으로 상처를 메우려 했지만 애인은 자꾸벌어지며 슬픔만 박았다 습기 진 벽은 웅크린 못을 쿵쿵 뱉어냈고, 벽지는 부풀며 세상 밖으로 조금씩 자라났다

 

가끔씩 벽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둥이 아니라 틈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어떤 공간은 답을 모른 채 마른다는 거였다 산 채로 매장당한 사랑이벽을 허물고 나와 인터뷰하는 낙서. 달라붙은 광고물, 올라가는 담쟁이덩굴, 기웃기웃 외출을 금지당한 미래

 

내가 곪는 것을 들킬 때마다 벽은 귀를 당겨 속삭인다 무너져 내린 것도 다시 세우려 하지 마라 앞으로 나아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자라나는 애인의 벽들이 늘어만갔다

 

월간 『유심』2015년  5월호 발표

 

 


 

 

김도이 시인 / 종이컵 속 11월

 

 

   마시다 만 입술 언저리에

   통증처럼 붉은 말言들이 찍혀있고

   뜨거운 속 비우지 못해

   한 모금씩 호흡이 걸러지는 시간

 

   끝내 구겨버리지 못한 채

   아직은 다 사라진 것은 아닌 11월

   야윈 낙엽을 불러 성글게 가을을 쓸었다

   빈 들판처럼 앉아

   침묵에서 침목으로 환승하는 계절

 

   하다만 이야기를 나란히 컵 속에 남겨 놓고 간 구석진 벤치에

   전생이 같은 동종인 우린 지금 11월을 통화하는 중이다

 

   연리지로 애틋한 너는 알아보지 못했다

   한 몸인 걸 기억하는 나는 속살거리며 돋아나던

   연둣빛 이파리와 무성했던 여름,

   혼인 색으로 물들던 꽃잎들을 얘기했으나 밀쳐지고 쏟아지고 구겨졌다

 

   햇살은 아직

   양지를 문틈만큼 남겨두었는데

   눈이 시작되고

   벤치 저쪽,

   네가 놓여있던 자리, 조금씩 쌓이겠다

 

계간 『문학 에스프리』 2018년 봄호 발표

 

 


 

김도이 시인

201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얼룩의 시차』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