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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방민호 시인 / 어젯밤 꿈에 저는 창부가 되어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3.

방민호 시인 / 어젯밤 꿈에 저는 창부가 되어

 

 

  어젯밤 꿈에 저는 창부가 되어

  얼굴 예쁜 사내의 품에 안기어

  저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지요

 

  당신은 멀리서 저를 따라오시고

  저는 일부러 대문을 열어두고

  당신이 제 집에 발을 들이신 것은

  비가 얼마나 더 오신 후던가요  

 

  저는 장지문을 살며시 열고

  생글생글 웃음을 지어보이며

  제 방에 그 사내가 머물러 있는듯이

  이곳은 당신이 오실 곳 아니라고

 

  여름비는 앞뜰의 꽃창포를 적시고

  당신은 그린 듯이 마당에 서 계시고

  저는 꿈에서도 꿈 아닌 것처럼

  당신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시간은 어느덧 저녁으로 이울고  

  슬픔은 이내처럼 마당에 내려앉고

  당신이 말없이 저를 건너 보실 때  

  저는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그만 다른 일 찾으시라고

  저도 차마 당신을 잊겠노라고

  당신은 눈빛으로 저를 나무라시고

  어둠 속으로 홍등은 밝아오고

 

계간 『문학·선』 2010년 봄호 발표

 

 


 

방민호 시인

1965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4년 제1회 《창작과 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 활동 시작.  2000년 《현대시》를 통해 시단 등단. 저서로는 비평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와 『문명의 감각』 등이 있음.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