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시인 / 산 넘어 저쪽
밥을 찾아 내 발로 달려온 곳이므로 즐겁게 살아야 한다 힘들여 밥을 먹는 것도 다 살기 위한 것 아닌가. 어떻게든 이 세상 살아가려면 아무 소리 마라 참고 견뎌야 한다. 날선 칼날이 아랫배를 스윽 긋고 지나간다 뾰쪽한 송곳이 가슴께를 콕콕 찌른다 핏방울이 땅바닥 위로 똑똑 떨어진다. 시원하니, 시원하다 아프니, 아프다 아파도 꿍얼꿍얼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파는 데도, 공짜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닌 데도 칼 쥔 자들은 늘 나를 굽어보고 싶어 한다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 밥줄을 쥐고 있으면서 굽어보고 내려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수만 년 동안 밥을 두고 서로를 잡도리해온 것이 인간 아닌가 온갖 우월감으로 어깨를 흔들어대 온 것이 인간 아닌가. 밥을 찾아 기꺼이 달려왔으므로 슬퍼해서는 안 된다 슬픔을 알기에 인간은 비로소 인간 아닌가. 수많은 생명들이 아직도 물건에 지나지 않거늘 그냥 인간인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삶을 얻어 삶을 사는 곳은 다 고향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고향이 아니랴 객지에 살더라도 서러워 말아야 한다 어디에서 산들 서럽지 않으랴.
밥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삶이거늘 무엇을 서러워하랴 무엇을 아파하랴 평화와 행복은 언제나 산 넘어 저쪽 먼 곳에 있거늘…….
계간 『포에트리 슬램』 2017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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