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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석호 시인 / 봄을 거역하는 노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4.

한석호 시인 / 봄을 거역하는 노래

 

 

  1.

 

  어느 시간이 이토록 눈부실까.

 

  나는 그리움의 모자를 하늘로 벗어 던진

  한 무더기의 꽃들을 가슴에 안았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뛰쳐나오려는

  모든 것들의 안부를 봉쇄하고,

  누군가를 꽝꽝 묻어버리고

  무심하게도 그 위에 제 발자국을 찍는

  강철신발을 보았다.

 

  2

 

  전갈 꼬리처럼 갈라진 거기, 그쯤, 무엇이 느껴지나요?

 

  강물은 오늘도 푸른 소문을 낳는 대지 위에

  제 족적 남기고 있는데

  대지를 억누르는 바위 밑은 너무 고요해서

  나 이 밤을 반죽할 거예요

 

  거기, 그것 좀 치워 봐요!

 

  봄이 오면 잊힐 거라던 그 허드레 소리들

  땅 속에 넣고 밟아 버릴 거예요.

  태어날 어린 땅의 파란 활착을 위해

  지금, 나 당신을

  아득히 지울 거예요.

 

  3.

 

  내가 쏘아올린 금촉 화살의 하늘

 

  저 환한 그늘 속엔

  세상의 눈 맑은 아이들이 등불 하나씩 밝혀들고

  나이테 깊은 곳을 비추고 있지요.

  저 그늘 속 어둠은

  내 허무가 그린 나이테.

  얼음장 밑을 흐르는 숨소리를 데리고

  아직 바람의 물기가 남아있는 풀밭으로 나아가

  녹슨 화살을 줍지요.

  그런 나는

  당신 맘속에만 존재하는 외딴방

  그 외딴 방엔,

  빛의 무덤인 허연 스크린이 있고

  허무의 깊이를 재는 자벌레 한 마리가

  꼭지점 없는 컴퍼스를 들고 스크린 위를 서성이겠죠.

  당신

  평생 내 주위를 맴돌며

  마음이 한없이 우묵해지는 시간들과

  회화誨化하며, 실뿌리까지

  하얗게 변한 서릿발 뿌리며 내게 묻겠지요

  그 녹슨 입술이 내 심중의 이슬이라는

  그것 아느냐고,  

 

2007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시

 

 


 

 

한석호 시인 / 발화법(發花法)

 

 

  어둠 속에서도 발화(發話)하는 생각들은 빛나는 눈을 가졌다.

  나무의 수컷들은 눈을 감고도

  어둠의 산란관에 방사하는 법을 터득한다.

  마음의 외벽 바깥쪽으로

  물소리들이 울타리를 만들어 흘러가고

  강물 아래로는 배가 불룩한 물고기들이 산란을 위해

  바닥의 돌을 쓸어 모으고 있다.

  그대가 내 사랑을 꽃으로 형상화할 때

  나는 밤의 속살에 코를 박고

  그대의 마음이 만든 붉은 주렴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리라.

  요람 밖 외등처럼 귀를 열고 그대를 기다리리라.

  구름이 푸른색 잎사귀를 흔들며

  붉고 아린 기억들이 담겨진 상자의 봉인을 뜯는다.

  노란 울음들이 터지는 시간의 방에서

  거짓말들이 참말처럼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온갖 불꽃들이 첫울음을 받아주는 산파를 기억하며

  가시들이 받쳐 든 현(絃) 위에서 걸음마를 시작한다.

  연(緣)의 얼레가 풀어 둔 가무룩한 기억저편을 따라가며 성장한다.

  별들이 밤의 허공을 여민다.

  가시 돋친 나무들의 거웃이 감고 올라간 담장 위로

  연기 묻은 해가 얼굴을 내민다.

  뜨겁고 아린 문장들이 그해의 가장 은밀한 농담처럼

  냉기 찬 햇살 위로 봉긋이 발화하고 있다.

 

계간 『시인시각』 2009년 봄호 발표

 

 


 

 

한석호 시인 / 이슬의 지문

 

 

이슬에 젖은 바람의 결을 만지고 있으면

시간의 발자국 소리 쪽으로 동그랗게 귀 모으는

나의 옛집이 문을 여는 것만 같다.

담장이 붉은 그 집 정원에 앉아 있으면

낡은 기억을 벗어던지는

문패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어둠 속에서도 읽히고

제상문(蹄狀紋)의 촉각 끝에서 피어나는

맨드라미 채송화 분꽃들

한창 역사 중이다.

가끔은 해독되지 않는 기억들 저편에서

저 사춘기 적 보리밭과

첫사랑 데리고 떠나간 간이역이 궁륭(穹窿)처럼 일어나

나를 출발점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럴 때 나는 원고지를 꺼내어

그대에게 길고 긴 안부를 물으리라.

밀려오는 거대한 적막과

그 적막 사이를 노 저어 다니는 시간의 사자(使者)와

채울수록 더 비어만 가는 텅 빔과

풀수록 더 꼬여만 가는 생의 어지럼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먹구름의 너머에 대해서.

이슬의 지문을 조회하면 누군가가

내 기억의 언저리에서 동그랗게 손 모으고 있다.

순장한 나의 아틀란티스 엿보려

저 투명하고 둥근 신의 렌즈로 날 길어 올리고 있다.

 

시집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 중에서

 

 


 

 

한석호 시인 / 빙설미나리아재비

 

 

  마음의 독(毒)을 치유하기 위해

  호흡기 떼는 법을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마뜩지 않은 일.

  삼 년에 한 번 꽃피는 빙설미나리아재비의

  속내 깊이 잠적한 그대여,

  치골(齒骨)의 통증 곁으로 다가선 추위가 환하다.

  뿌리는 마음의 중심에 두고

  밖으로 밖으로만 달아나 꽃대를 세우는 는개,

  나는 갈라진 암벽의 틈새에서

  꽁꽁 얼어 있는 시간과 대면하는

  빙설미나리아재비의 눈이 되고 싶었다.

  아린 흉부를 감싸 안고

  목련 꽃그늘에 누워 심폐소생술을 받는 그대를 상상한다.

  따스함 같은 낯선 서사를 받아들이면

  그대는 나를 놓고 나는 그대를 버려야 한다.

  차디찬 눈발의 행간에서

  노란 혀를 내밀어 슬픔을 말랑말랑하게 무두질하는

  너를 읽는다.

  두 손을 모으고

  뒤란이 궁금한 어느 저녁으로 발을 옮기는

  검은 얼음숭어리들.

  뻔히 보이는 길을 두고

  꽃들이 서로에게서 서로를 지우고 있다.

  그렇다, 환한 박명(薄明)이로구나.

  저처럼 온전한 적멸(寂滅)이라니, 나는 언제야

  제 몸속의 독으로 독을 치유하는 지극에 이르게 될 것인가.

 

시집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 중에서

 

 


 

 

한석호 시인 / 나마가시 혹은 카스테라

 

 

  동그랗게 말린 앙꼬를 싸고도는 빵의 육질처럼

  평생 내 허물 보듬어 안으신 당신.

  나마가시가 카스테라라는 사실 알게 될 때까지

  당신 참 많이도 서러워하셨지요.

  함부로 뛰쳐나가려 할 때마다

  온몸으로 울타리 쳐 반듯한 하나의 무늬가 되도록

  푸르름이고 등불이 되셨던

  당신.

  지혜란 소나무 밑둥치에 쌓여 익는 솔갈비처럼

  오래 발효시켜 얻는 향기라고 솔방울 툭 떨쳐 가르치시던

  당신,

  몰래 한 겹씩 벗겨 먹었던 나마가시처럼

  당신을 야금야금 벗겨 먹고 살아온 나를 이젠 벗겨서

  묘비명 아래 묻고 싶습니다.

  높이 세울 줄만 알았던 등고선

  흰 눈의 보폭 아래로 납작 엎드리게 하고

  지나온 길 다시 다지겠습니다.

  당신, 정지한 내 맘속 깊이

  그 환한 정신의 손길 좀 넣어 주시겠어요?

  얼음을 깨고 손을 씻던 그 말씀으로

  내 문장에 단단하고 근엄한 시간 좀 심어 주시겠어요

 

간 『다시올』 2012년 가을호 발표

 

 


 

 

한석호 시인 / 번제

 

 

  1

 

  과거는 돌아보지 말자고 앞으로 앞으로만 날아가는

  새의 각오는 줄 끊어진 방패연이다

  덜컹거리는 철길을 횡단하며 종일 시간을 짜깁기하는 바람은

  풍경이 수결한 그늘의 요사채(寮舍寨)다

 

  2

 

  탄부의 곡괭이 소리는 천년을 깨우는 선인의 진언이다

  밤하늘의 소금 자루를 내해(內海)로 전송하는

  너는 나에게 허방에서 천공까지 파야 하는 남루라고 정의한다

  광부들은 처마 끝에 곰삭은 꿈을 매달고

  고이 잠든 떡잎들은 아비가 써 내려간 곡괭이의 기록을 읽는다

 

  3

 

  선택이란 정해진 갱도를 파 내려가야 하는 실뿌리들의 ‘한 낱’이 아니다

  너무 쉽게 세상 밖을 선택하는 이들이 떠받드는

  백색의 공포는 겉과 안이 다른 결정이라고 동의한다

  세기의 제의(祭儀) 앞에서 시간은 엄숙한 경향으로 진화하고

  설원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눈표범의 포효는 맑고 높고 아득하다

 

  4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사랑과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사상과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행운이 상상해 온 누각에 불을 놓는다

  기다림 같은 헛된 기적들은 불타고

  결빙된 언어는 해체의 몸을 변주하며 스스로 저문다고 기록한다

 

  5

 

  오늘 의지하는 이 폐허는 파랑주의보의 반쪽이었다는 걸

  추락하는 불빛들의 고백을 통해 읽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은 다시 써야 하는 유목의 다른

  목초지 어느 곳으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간 흔적이었고

  눈송이들이 발을 더듬어 거두는

  이 저녁은 누군가와 시선을 나눠야 하는 의례라고 읽는다

 

  6

 

  상림 숲 늙은 신갈나무 등걸에 앉아

  두꺼운 우기(雨期)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의 웃음을 해독한다

  세기의 각오 앞에 서 있는 구름들이

  내세의 서쪽 혹은 부력의 지향점 쪽으로 묵도하고 있다   

 

 

번제: 안식일 또는 매달 초하루와 무교절, 속죄제에 짐승을 통째 로 구워 제물로 바치던 제사. 서로 번갈아 가며 드는 차례나 순번.

 

월간 『문학사상』 2012년 3월호 발표

 

 


 

한석호 시인

1958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