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 시인 / 북극 여우
몸 안에 박혀있던 햇살들이 서릿발로 반짝이는 극지의 밤 북극 여우는 혼자 얼음 위를 걸어간다 얼마나 더 어둡고 추워야 검은 피로 피어난 몸 밖의 푸른 오로라에 닿는가
총 맞은 짐승들이 흘리고 간 핏자국을 따라 백색의 병정들이 뒤를 따른다 유형의 벌판을 채찍으로 휘두르는 천둥 번개를 삼키며 얼음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 죽음을 견딘 빙벽에서 화살촉 같은 맹독의 꽃이 말갛게 눈을 뜬다 누군가의 남자이고 누군가의 심장이었던
죄 없이 죽은 목숨들이 칼처럼 날아다니고 길게 우는 여우의 밤이 날카로워진다 몸 안에 몸을 밀어 넣고 얼어붙은 빛이 타올라 백야의 중심에 닿을 때까지 순백의 죽음으로 얼어터진 맨발이 될 때까지
살아서 꽃에 도달하지 못한 노래들 혹한의 입 안에서 혀가 떨어져 나가고 이빨들이 고드름처럼 부서져 내린다
눈보라와 함께 달려가는 여우가 한 번씩 울 때마다 주검에서 깨어난 북극의 정수리에 꽃이 핀다 그림자도 목소리도 없는 다만 붉은 혈흔 같은
계간 『시인동네』 2015년 봄호 발표
홍일표 시인 / 번제
돌아보지 마라 잘 가라 나는 오래 전에 처형되었다 아비도 어미도 내 발목까지도 바람 속에 묻었다 어둠 속으로 혼자 걸어가는 한 마리 들개다 돌아보지 마라 죽은 물고기 안에 네 심장을 넣어 뛰게 하라 도처에 폭발하지 않는 바위다 재앙이다 돼지피를 문기둥에 발라라 떼 지어 몰려오는 저것은 무엇이냐 바다를 찢으며 퍼덕이던 파도가 멀리 날아가 피가 부족한 구름에 불을 붙인다
폭설이다 몇 개의 산맥을 넘어 날아온 이곳은 발바닥처럼 어두운 새벽이다 열두 시간 전에 숨 쉰 공기와 얼굴들은 설화로 피어 다시 눈앞에 있다 조문한 고인은 아직 살아서 나에게 말을 걸고 웃는다 시간은 흘러가는 살이어서 나는 여기 있으면서 부재하고, 죽음은 숟가락처럼 익숙하여 그들은 사람 밖에서 사는 그림자다 돌아보지 마라
피의 제사이다 염소가 끌려가 목이 잘리고 박수치며 웃는 사이 죽음은 누군가 쓰다버린 구두칼, 지팡이, 녹슨 반지다 아무렇게나 버려둔 빵조각이다 멈추지 않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한낮의 태양이다 영안실에서 나와 혼자 걷는다 열두 시간 전에 악수를 하고 헤어진 거리를 지나 시간이 놓아버린 달을 안는다 이미 차갑게 식은 누군가 부르다 만 봄이다 다행히 하늘이 보이지 않아 지상의 등뼈가 꼿꼿해진다 돌아보지 마라
계간 『포엠포엠』 2015년 여름호 발표
홍일표 시인 / 즐거운 독백
불타는 동쪽 하늘에 내 모가지를 걸어두겠다
박수 치며 날아 오너라 까마귀 까마귀 떼
가짜였던 눈동자 가짜였던 팔다리 다 흩어지는 동안
생은 푸른 잎사귀로 돋아나 한때 내 안을 설레었으나 간 곳 없는 휘파람 소리 네가 가고 내가 가고 먼지 자욱한 들판으로 말 달리던 그 때 그 발자국들
죽지 않고 살아나 한밤중 나를 밟고 달리고 있다 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어서 북소리 둥둥 하늘을 걸어다니다 동쪽 바다에 펼쳐지는 붉은 부적 누군가 나를 둘둘 말아 바다 속으로 밀어넣는다
조개껍데기로 해저를 앓는 척하지 마라
불에 탄 머리를 들고 장승처럼 오래 서 있겠다 총을 맞아도 칼에 찔려도 나는 살아 여기 있으니 조용히 숨 쉬며 온종일 당신을 견디고 있으니 지긋지긋한 세계 밖으로 대가리 하나 척, 걸쳐 놓은 거다
밤을 빠져나온 붉은 핏덩이 부디 모른다 하지 마라 몸 안에 천 개의 천둥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계간 『포에트리 슬램』 2017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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