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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혜경 시인 / 담쟁이덩굴의 독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8.

나혜경 시인 / 담쟁이덩굴의 독법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은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 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은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시집 『담쟁이덩굴의 독법』(고요아침, 2010) 중에서

 

 


 

 

나혜경 시인 / 수덕여관

 

 

  딱 하룻밤, 아름다운 외박을 꿈꾸거든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들어 보라

  절이 여관인 듯 여관이 절인 듯

  여관도 절도 다 내 집인 듯도 하여

  집도 그립지는 않겠네

  숲으로 난 창이 있는 8호실에 누우면

  세속인 듯 승속인 듯

  내가 숲을 찾아 온 게 아니라

  숲이 나를 찾아와 나도 본래

  숲이었음을 깨닫게 해 줄 것만도 같네

  열어놓은 창으로 솔바람이 불어와

  내 몸에 숨은 잎들이 일어서기도 하겠고

  월담하듯 별들이 창을 넘는 밤이 오면

  나도 마음을 넘어

  그 많은 별들과 만리장성을 쌓겠네

  오늘 밤만은 새 사랑으로

  견우별도 직녀별을 그리워하지는 않겠네

  오늘 하룻밤만은 과분하게

  직녀별의 사랑을 빼앗는 음탕한 여자가 되어

  부끄러워도 좋겠네

 

시집 『담쟁이덩굴의 독법』(고요아침, 2010) 중에서

 

 


 

나혜경 시인

김제에서 출생. 1992년 《문예한국》으로 등단. 시집으로 『무궁화, 너는 좋겠다』, 『담쟁이덩굴의 독법』, 『미스김라일락』이 있음. 현재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금요시담〉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