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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윤수 시인 / 성녀(聖女)
그녀를 너무 학대하였다. 오늘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네 탕이나 뛰게 했다.
무거운 자 가벼운 자 가리지 않고 마지막으로 받아들일 때 그녀는 삐걱삐걱 끽끽 지친 숨소리를 냈다.
좀 쉬었다 돌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나쁜 포주 같다.
그녀는 세상의 때 묻고 얼룩진 것들을 받아들여 온 몸으로 돌리고 빤다.
프로가 그렇듯 그녀는 품에 들어온 것들의 물기를 다 뺀 다음에야 문 밖으로 내보내준다.
널브러진 옷들이 기진맥진 출옥처럼 끌려나온다.
그녀가 이룩한 그 청결한 영혼의 빨래를 입고 우리는 날마다 또 무슨 죄를 짓는가. 세탁기, 그녀는 성녀다.
계간 『시와 문화』 2018년 가을호 발표
사윤수 시인 / 화엄장
지리산 화엄사에 독수라는 부처가 살고 있었다는데
어느 날 법당의 촛불이 다 타고 공양주도 잠든 밤 부처가 마을로 간 까닭은 불심 깊은 보살이 부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라는데
- 독수공방은
부처의 방이 비었다는 뜻입니까 부처가 나의 방에 없다는 뜻입니까
빈 적도 없고 없는 적도 없어라 구름은 밤하늘에도 쉬지 않고 흐르나니 그날 밤 보살과 부처가 이루어 소신공양 보시하며 머문 곳이 화엄사 아래 화엄장이라는데
꽃들은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별들이 은하수에서 뱃놀이하는 화엄화엄 화엄의 장, 그 장엄한 전설이 아직 화개장터에 남아있다는데
부처의자식은열살이될때까지색동옷을입혀키우면 무병장수한다는설도있다는데,있다하는데
계간 『시와 문화』 2018년 가을호 발표
사윤수 시인 / 경부선
나 어릴 때 아버지는 삼랑진 철도 보선소에서 근무했고 바람 난 아버지를 찾아 엄마와 삼랑진에 간 적 있고 삼랑진 기찻길 옆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 물을 대던 높고 큰 물탱크가 있고
어느 봄 밤 밀양 강변에서 k와 연 날리기를 한 적이 있고, 오월 상동역에서 만나 올갱이국을 사 먹고 해발 사백 미터 솔방마을 그 가파른 마을길 오르며 내가 갑자기 눈이 쏟아져 오늘 못 돌아가면 좋겠다고 하자 k가 그럼 살림을 차려야겠네요, 하고
조성기 단편소설 「통도사 가는 길」에 물금역이 나오고 물금(勿禁), 금하는 것이 없는 세계로 가려면 케이티엑스가 아닌 무궁화를 타야하고
경부선 하행 낙동강 따라 산등성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겹쳐 강물은 산 그림자 붙들어 매고 산 그림자는 강물에 젖고 건널 수 없이 아득하고
가을엔 무궁화호 기관실 맨 앞자리 얻어 타고 시월을 헤치고 노을을 넘어 길 없는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지는* 그 먼 역까지 달려가고 마구 마구 달려가고
* 은하철도 999
계간 『시와 반시』 2018년 가을호 발표
사윤수 시인 / 갯강활
늙은 과부가 총각과 나눈 밤이 거기 있네. 갯강활에 꽃이 피어
바닷가 소금 바람 앞의 갯강활들 여러해살이 풀이라지만 이건 풀이 아니라 통째 나무야 활엽수야 다섯 자가 넘는 키에 억세고 굵은 관절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잎조차 나는 쳐다볼 정이 없더마는 대궁에 꽃은 어떻게 슬었을까. 길쭉길쭉 목을 빼고 날마다 젊은 포구 바라보더니
가난하고 늙은 과부에게 붉거나 노란 꽃은 먼 얘기라고 꽃이 아닌 듯 꽃인 듯 좁쌀보다 작은 그저 밋밋한 연두거나 흰색이지만 작은 겹우산모양꽃차례 그 꽃송이들 마냥 당당해요 돛대를 떼 왔나 기고만장해라 섬마을 유월은 갯강활의 전성기라네.
한 철 꽃 피우고 애정영화까지 찍었으니 이제 남겨진들 무슨 후회가 있겠어 질 때는 흉가처럼 시들어 주검의 잎사귀 너덜너덜 매달린 이건 풀이 아니라 짐승의 최후 같아 꺾어보면 그 줄기 속이 검은 바다처럼 텅 비어있던 갯강활의 후기를
계간 『시애』 2018년 가을호 발표
사윤수 시인 / 겸제 정선 고흐를 만나다*
한 소솜 소나기 번지는 수묵 건너 마을 가듯 건너가시니 라 크로의 가을 추수 눈부시고 저 멀리 마차도 가물가물 지나간다네.
노인이 물어물어 아를에 도착했네. 둥근 달 숨바꼭질하며 따라오는 이국, 거기 푸른 대문 푸른 방에 붕대로 귀를 싸맨 영혼 하나 노인을 기다리고 있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리 압셍트** 없이도 가슴 깊이 뜨거운
둘은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둘 만의 언어로 자분자분 담소하네. 타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 뒤로 달은 흘러가고 둘은 서로 눈을 끔벅끔벅 고개를 끄덕끄덕 백 년의 밤 깊어 가는데
어느새 먼동이 트는가. 노인이 나귀의 고삐를 돌리네. 오는 길에 농부에게 상처 입은 그 영혼을 당부하며 다시 양천 폭설 건너오시네.
내내 허리춤에 반짝이는 아주까리등불 연못에 그림자를 적시며 가시네. 명주숙고사 만 필 내려쌓이는 흰 눈 속에 멀어 멀어져 가시네.
*이이남 작품 **고흐가 즐겨 마시던 술
『대구문학』 2018년 11~12월호 발표
사윤수 시인 / 수평선이라는 직업
수평선도 나름 바쁜 직업이다 수평선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것들을 담당한다 날마다 해를 길어 올리고 달마다 달을 빚어 띄우는 일 그거 아무나 못한다 수평선이 없다면 해는 어디로 떠오르며 달은 어느 배腹를 빌려 둥글어지겠나
수평선이 아무 일 안 하는 거 같아도 그 자리 고요히 지키고 있는 것이 수평선의 주소다 내게도 그런 수평선 하나 있다면 본적은 필요 없으리
너의 타는 마음을 수평선에 널어 말릴 때 수평선은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너에게 기여한다
고깃배들 불빛이 밤바다에 찬란하게 맺혔다 이 배 저 배 배 다른 새끼들까지 젖을 물리며 수평선은 순한 물의 짐승으로 누워있다 만선이 될 때까지 새벽이 올 때까지
낯선 섬마을에서 나도 저 수평선의 무릎을 당겨 베고 잠들곤 한다
계간 『동구동락』 201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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