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불행한 신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神)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神)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孤絶)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電柱)처럼 우리는 존재(存在)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 오는 것은 불행한 신(神)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현재(現在)의 시간과 과거(過去)의 시간 거의 모두가 미래(未來)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T.S. 엘리어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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