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넋
넋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 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발동일 것이니, 내 몸은 바로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널찍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 / 노도(怒濤).1
바다의 물결은 파폭(波幅)이 매우 세다. 그 거리도 긴 것 같고 스케일이 세계적이요 우주적이다.
수심(水深)은 몇킬로미터나 될까? 요량할 수도 없다. 생선(生鮮)들도 모른다.
노도(怒濤)는 풍속으로 일어나지만은 여러 가지 생명체의 시원체(始原體)인데 그래도 그런 흔적도 없고 아예 숨긴다.
- 제5부. 내 영혼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때 중(中)
천상병 시인 / 눈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 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패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눈이다
천상병 시인 / 다음
멀잖아 북악(北岳)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다음' 이 절대(絶對)한 불가항력(不可抗力)을 나는 내 것이라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여 나의 희망은 노도(怒濤)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오는 날의 서울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천상병 시인 / 동그라미
동그라미는 여자고 사각은 남자다. 동그라미와 사각형을 두 개 그리니까 꼭 그렇게만 보여진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꾸밈새 없는 엄마의 눈과 젖 손바닥과 얼굴이 다 둥글다.
울뚝불뚝하고 매서운 아버지의 눈과 입, 손목과 발힘이 네 개나 된다.
천상병 시인 / 동창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천상병 시인 / 들국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시인 / 등불
저 조그마한 불길 속에 누가 타 오른다 아프다고 한다. 뜨겁다고 한다. 탄다고 한다. 허리가 다리가 뼈가 가죽이 재가 된다.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어디서 만난 사람이다. 아, 나의 얼굴 코도 입도 속의 살도 肺가, 돌 모두가 재가 되어진다.
천상병 시인 / 마음 마을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 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음 하늘에는 사시상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良心)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 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천상병 시인 / 막걸리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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