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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만추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4.

천상병 시인 / 만추

- 주일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들어 가지고,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 양 한 마리 돌아오다.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천상병 시인 / 매일마다 매일

 

 

나는 매일 밤마다

내일! 내일하고 마음먹습니다.

내일 안찾는 오늘이 없고

오늘없이 내일이 있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70년대때는

80년도에 희망을 걸어왔었는데

81년인 금년엔

90년대의 복지국가를 꿀 겁니까?

 

우리 민족의 선진국발전을

모름지기 희구하여 갈망하는데

나는 구세주(救世主)님과 하느님의 축복(祝福)이

배달민족 온 마음에 비추시기를......

 

- 제5부. 내 영혼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때 중(中)

 

 


 

 

천상병 시인 / 맥주

 

 

나는 지금 육십둘인데

맥주를 하루에 두병만 마신다.

 

아침을 먹고

오전 5시에 한병 마시고

오후 5시에 또 한병 마신다.

 

이렇게 마시니

맥주가 맥주가 아니라

음료수나 다름이 없다.

 

그래도 마실때는 썩 마음이 좋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 제2부. 젊을을 다오! 중(中)

 

 


 

 

천상병 시인 / 먼 산(山)

 

 

나는 의정부시에 사는데

먼 산이 잘 바라보이고

뭔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고

나를 자꾸 부르는 것 같다.

 

게으른뱅이인 나는

찾아가지는 안 했지만

언젠가 한번은

놀러 갈까 한다.

 

먼 산은 아주 옛날처럼 보이고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들 같기도 하고

황성옛터 같다.

 

 


 

 

천상병 시인 / 무궁화

 

 

나의 처가집은

우리집 가까이 있는데

무궁화가

해마다 곱게 핍니다.

 

무궁화는 우리들 나라꽃입니다.

그 나라꽃을

해마다 바로 옆에서 즐길 수 있다니

그저 고맙고도 고마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섯 송이나 사랑할 수 있다니

장모님과 처남에게

따뜻한 정을 더구나 느끼게 됩니다.

나라꽃이여 나라꽃이여 영원하여라.

 

 


 

 

천상병 시인 / 무위(無爲)

 

 

하루종일 바빠도

일전한푼 안 생기고

배만 고프고 허리만 쑤신다.

 

이제 전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할 일이 없고 움직을 수도 없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이니 무아지경(無我之境)이네.

 

도라니 어런 것인가 싶으다.

선경(仙境)이라니 늙은 놈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최고다.

 

 


 

 

천상병 시인 / 바다생선

 

 

바다 생선은 각종각류이지만

무엇보다 바닷물이 선결 조건이다.

하기야 우리를 비롯한 인간도 수분이 꽉 차 있다.

 

플랑크톤이 제일 작은 생선을 것이다.

힘이 약하고 작은 것은

유력하고 덩치가 큰 놈이 처먹게 마련.

 

인류의 플랑크톤은

어떻게 잔존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불가사의한 사실이다.

 

맛도 괜찮고 양분소도 많다.

칼로리는 오징어가 많다는데

알다가도 모를 만한 일이다.

 

나는 생선을 매우 입에 알맞다고

밥때마다 먹고 즐기지만,

선조의 시초라고 생각하면 언짢다.

 

 


 

 

천상병 시인 / 방한화(防寒靴)

 

 

81년 11월 19일에

난데없는 대설(大雪)이 내렸습니다.

18센티미터나 쌓였습니다.

 

이날은

내가 서울시내로 안나가는 날이라서

의정부시의 변두리

나의 방에서 지냈는데

그래도 집밖의 변소에는 가야했고

곡차(막걸리)사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같이 마시자고

처남집에도 갔더랬습니다.

 

18센티미터의 눈은

유감없이 보행(步行)에 곤란했을 텐데

그런데도

나는 태연했습니다.

내게는 방한화가 있어서

아무리 눈속을 걸어도

눈이 신발안에

안들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상병 시인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 시인 / 산소의 어버이께

 

 

두분 아버지 어머니 영혼은,

하느님께 인사드렸는지요?

죽은 내친구 인사 받으셨는지요?

 

생각컨대

어버이님은 아무런 죄 없으시고

착실하고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보다 10년 더 넘게

오래 사셨다 가셨는데

하늘나라서 행복한 초혼(初婚) 영원히 비슷하겠군요.

 

그저 둘째아들 염려이실테고

요놈이 게으름뱅이 노릇 그만하고

천국(天國) 가까이나 와 주었으면 하시겠지요!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