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 /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을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박인환 시인 / 행복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茶) 한잔을 마시고 정사(情死)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 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센티멘탈 쟈니
주말 여행 엽서 ---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園丁)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유사(天上有事)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江)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센티멘탈 쟈니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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