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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새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5.

천상병 시인 /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 가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시인 / 새2

 

 

그러노라고

뭐라고 하루를 지껄이다가,

잠잔다 -

 

바다의 침묵(沈默), 나는 잠잔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 편지를 받듯이

꿈을  꾼다

바로 그날 하루에 말한 모든 말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와

서로 안으며, 사랑했던 것이나 아니었얼까?

그 꿈속에서......

 

하루의 언어를 위해, 나는 노래한다.

나의 노래여, 나의 노래여,

슬픔에 대신하여, 나의 노래는 밤에

잠잔다.

 

 


 

 

천상병 시인 / 새벽

 

 

새벽에 깨는 나

어슴프레는 오늘의 희망!

기다리다가 다섯시에 산으로 간다.

 

여기는 상계1동

산에 가면 계곡이 있고,

나는 물속에 잠긴다.

 

물은 아침엔 차다.

그래도 마다 않고

온몸을 적신다.

 

새벽은 차고 으스스 하지만

동쪽에서의 훤한 하늘빛

오늘은 시작되다.

 

 


 

 

천상병 시인 /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석 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이

평균 60여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천상병 시인 / 소야(小夜)

 

 

소야(小冶)는 괜히 고요스레 충일(充溢)하고,

과감하게도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소식(消息)이 없고 보매,

마치 조그만 섭리(攝理)가 어슴프레하다.

기차(汽車)소리 가득히 요란하고

저 기차(汽車)는 언제 서울에서 떠났든가?

  

 


 

 

천상병 시인 / 송(頌)브라암스

 

 

오늘 나는 오후 3시 명동 천주교성당 대문앞 골목길, 고전음악 다방 '크로이체'서 브라암스 교향곡 제4번을 들으며, 눈물겹게 앉아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도 근사하고 훌륭한 음악이 있을 성싶지 않습니다. 내 가슴의 눈물겨움은, 다만 소리내어 울지 않게끔 해야겠다는 결의의 상징일 겁니다.

고전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한 것은, 미국군정하의 중학교 4학년때 무렵이었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고교2학년때입니다. 그 당시 나는 구마산시장의 일본어 책방에서 공짜로 책을 수 없이, 구체적으로는, 퇴교때 매일같이 들러서 약 한시간 가까이 읽었으며, 그러다가 책방 주인이 날 부르더니 '읽고 싶은 책은 집에 가져가서 읽게. 그리고 다 읽었으면 다시 그 자리로 꽂아 놓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2개월동안 책방이 나의 무료 독서실이었던 사이에, 무심코 나는 고전음악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방옆은 다방으로서 쉴새없이 고전음악을 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상병 시인 / 아기비

 

 

부실부실 아기비 내린다.

술 한잔 마시는데, 우산 들고 가니

아기비라서 날이 좀 밝다.

 

비는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맞았겠지.

공(公)도 없고 사(私)도 없는 비라서

자연(自然)의 섭리의 이 고마움이여!

 

하늘의 천도(天桃)따라 오시는 비를

기쁨으로 모셔야 되리라.

지상(地上)에 물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것을.

 

 


 

 

천상병 시인 / 아내(1)

 

 

아내는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

 

돈 못 버는

남편 대신에

돈을 버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좋은 아내인데

돈을 버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하다.

 

 


 

 

천상병 시인 / 아주 조금

 

 

나는 술을 즐기지만

아주 조금으로 만족한다.

한자리 앉아서 막걸리 한잔.

 

취해서 주정부리 모른다.

한잔만의 기분(氣分)으로

두 세시간 간다.

 

아침 여섯시,

해장을 하는데

이 통쾌감(痛快感)! 구름타다.

 

 


 

 

천상병 시인 / 어린애들

 

 

정오께 집 대문 밖을 나서니

여섯, 일곱쯤 되는 어린이들이

활기차게 뛰놀고 있다.

 

앞으로 저놈들이 어른이 돼서

이 나라 주인인 될 걸 생각하니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본다.

 

총명하게 생긴 놈들이

아기자기하게 잘도 놀고 있다.

그들의 영리한 눈에 축복이 있길 빈다.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